황윤길
黃允吉
1536년(중종 31) ~ 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길재(吉哉), 호는 우송당(友松堂). 영의정부사를 지낸 황희의 5대손이다.
1536년 종5품 영평현령을 지낸 황징(黃懲)과 청주 한씨 한경서(韓慶瑞)의 장녀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58년(명종 13) 식년시 진사시에 3등 51위로 급제하고#, 1561년(명종 16) 식년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1563년 정6품 사간원정언(正言)을 거쳐 1567년 정5품 사헌부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583년 정3품 황주목사(牧使)를 지내고, 이어 종2품 병조참판을 지냈다.
부사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과 함께 수행원 등 200여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로 가서 일본의 관백(關伯) 도요토미(豊臣秀吉) 등을 만나보고 이듬해 봄에 환국하여, 국정을 자세히 보고하였다.서인에 속한 그가 일본의 내침을 예측하고 대비책을 강구하였으나, 동인에 속한 김성일이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것없고 군사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엇갈린 주장을 하여 일본방비책에 통일을 가져오지 못하였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이 당시 그의 말을 좇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한편, 그는 일본에서 돌아올 때 대마도에서 조총(鳥銃) 두 자루를 얻어가지고 돌아와 바쳤지만, 조정에서 그것을 실용화할 계획을 하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1590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 일본에 파견되어 당시 관백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하였고 이듬해 봄 귀국하여 장차 일본이 반드시 침략할 것이므로 대비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동인이었던 통신부사(通信副使) 김성일이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것없고 준비된 군사가 없었다고 엇갈린 주장을 했고, 당시 조정에는 동인의 입김이 강했던지라 서인이었던 황윤길의 의견은 그대로 묵살당했다. 1592년에 그의 예견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황윤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크게 후회하며 그에게 정2품 병조판서를 제수했으나 곧 별세하였다.#
참고로 황윤길은 일본에서 돌아올 때 대마도에서 조총 두 자루를 얻어가지고 돌아와 바쳤지만, 조정에서 그것을 실용화할 계획을 하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통신사로 파견되었을 당시 소 요시토시가 대마도의 절에서 김성일과 황윤길을 기다리게 했는데, 오랫동안 오지 않아 김성일이 버럭 화를 내자 "듣는 사람도 없는데 그리 소리치면 나만 귀 아프지 않는가."라며 말렸으며,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답서를 쓰지 않아 김성일이 또 화를 내자 "더 이상 말싸움을 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으니 그냥 돌아가자." 라며 김성일을 달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언쟁을 막았다. 이는 성격이 온화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통신정사로서 통신사와 일본 측의 마찰을 막으려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536년(중종 31) ~ 1592년(선조 25)
1. 소개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길재(吉哉), 호는 우송당(友松堂). 영의정부사를 지낸 황희의 5대손이다.
2. 생애
1536년 종5품 영평현령을 지낸 황징(黃懲)과 청주 한씨 한경서(韓慶瑞)의 장녀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58년(명종 13) 식년시 진사시에 3등 51위로 급제하고#, 1561년(명종 16) 식년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1563년 정6품 사간원정언(正言)을 거쳐 1567년 정5품 사헌부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583년 정3품 황주목사(牧使)를 지내고, 이어 종2품 병조참판을 지냈다.
부사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과 함께 수행원 등 200여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로 가서 일본의 관백(關伯) 도요토미(豊臣秀吉) 등을 만나보고 이듬해 봄에 환국하여, 국정을 자세히 보고하였다.서인에 속한 그가 일본의 내침을 예측하고 대비책을 강구하였으나, 동인에 속한 김성일이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것없고 군사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엇갈린 주장을 하여 일본방비책에 통일을 가져오지 못하였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이 당시 그의 말을 좇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한편, 그는 일본에서 돌아올 때 대마도에서 조총(鳥銃) 두 자루를 얻어가지고 돌아와 바쳤지만, 조정에서 그것을 실용화할 계획을 하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1590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 일본에 파견되어 당시 관백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하였고 이듬해 봄 귀국하여 장차 일본이 반드시 침략할 것이므로 대비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동인이었던 통신부사(通信副使) 김성일이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것없고 준비된 군사가 없었다고 엇갈린 주장을 했고, 당시 조정에는 동인의 입김이 강했던지라 서인이었던 황윤길의 의견은 그대로 묵살당했다. 1592년에 그의 예견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황윤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크게 후회하며 그에게 정2품 병조판서를 제수했으나 곧 별세하였다.#
참고로 황윤길은 일본에서 돌아올 때 대마도에서 조총 두 자루를 얻어가지고 돌아와 바쳤지만, 조정에서 그것을 실용화할 계획을 하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3. 그 외
통신사로 파견되었을 당시 소 요시토시가 대마도의 절에서 김성일과 황윤길을 기다리게 했는데, 오랫동안 오지 않아 김성일이 버럭 화를 내자 "듣는 사람도 없는데 그리 소리치면 나만 귀 아프지 않는가."라며 말렸으며,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답서를 쓰지 않아 김성일이 또 화를 내자 "더 이상 말싸움을 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으니 그냥 돌아가자." 라며 김성일을 달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언쟁을 막았다. 이는 성격이 온화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통신정사로서 통신사와 일본 측의 마찰을 막으려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