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간원

 


'''사간원''' 司諫院
국가
조선
설립
1402년(태종 2년)
폐지
1894년(고종 31년)[1]
소재지
한성부[2]
주요 업무
간쟁·논박을 통한 조정 대신의 여론 형성
관리 감찰 및 탄핵
1. 개요
2. 업무
3. 역사
4. 관련 항목


1. 개요


조선시대 간쟁과 논박을 관장하던 관청이다. 약칭은 '간원(諫院)', 혹 '미원(薇垣)'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지금의 감사원, 방송통신위원회 그리고 언론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사헌부, 홍문관과 함께 언론 삼사로 불린다. 특히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일하는 대관[3], 간관[4]들을 합쳐 '대간'이라고 불렀다.
동시대의 전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사간원과 같이 국왕의 전제를 막기 위한 기구를 설치한 국가[5]는 그렇게 많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이에 따라 간관이라고도 불렸던 사간원의 관리들은 비록 관제상 품제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위시하였으며, 조선 중기로 넘어가면 청요직이라 하여 이조전랑과 함께 고위직으로 승진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자리가 된다.
전제군주정의 절대 권력자인 국왕에게 싫은소리를 하는 것은 당연히 보통 깡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삼사 관리에 대한 보호가 워낙 잘 되어 있어서 왕들이 어지간히 작심하지 않으면 유배보내기도 어려웠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보통 일은 아니었기 때문인지 '''근무 중 음주가 가능한''' 관청이었다고 한다. 술 먹고 그 깡으로 상소 쓰라는 얘기.

2. 업무


  • 간쟁: 왕이 내린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될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한 언론활동. 더나아가 왕의 언행에 대해 전반적으로 의견을 낼 수 있다. 간쟁 활동은 사간원의 주요업무이지만 같은 언론 삼사사헌부도 맡아 하고 있다. 사간원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중에 하나였기에 특권도 있었다 가령 금주령 기간에도 술을 마시는 게 허락된다든가...
  • 논박: 간쟁이 왕에 대한 언론활동이라면, 논박은 일반 신하, 정치에 관한 언론활동이다.
  • 탄핵: 부정부패를 일삼거나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관리에 대한 언론활동으로, 해당 관리가 직위에 있지 못하게 한다. 엄밀히 말하면 사헌부 업무지만, 해당 관리가 물러나지 않거나 왕이 자신들의 의견을 묵살하면 함께 사직서를 제출하여 강경투쟁을 벌인다.
  • 조계와 상참 참여: 조계와 상참은 왕이 중신들과 함께 정치적 보고와 자문을 받는 것을 뜻한다.
  • 입법 논의: 의정부, 육조와 함께 입법 논의에 참여하였다.

3. 역사


조선시대 사간원의 전신은 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낭사(郎舍)[6]이다. 낭사는 982년 고려 성종 때 처음 설치되어 고려 전시대에 유지되었다. 그러던 중 1401년 조선 태종이 문하부를 의정부에 합칠 때 문하부의 낭사를 사간원으로 따로 독립시켰다. 여기서 고려와 조선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고려시대 간관은 그저 문하부라는 큰 부서의 낭사라는 '직책군'이었지만, 조선시대 간관은 사간원이라는 하나의 독립된 기관에서 일했다는 것이다. 이는 언론의 역할과 권한이 커졌다는 증거이며, 조선이 꿈꿨던 군권과 신권의 조화가 반영된 결과이다.
사간원은 한 번 폐지당한 적이 있다. 임금에게 미움을 받아서인데, 사실 임금에게 쓴소리하고 딴지거는 것이 사간원의 일이기 때문에 왕권강화를 목표로 했던 왕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이다. 성종때는 대간의 힘이 유례없이 강했는데, 결국 다음 임금 연산군에 의해 폐지당한다. [7]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사간원은 다시 복구되었고 언론활동을 계속하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라진다.


4. 관련 항목



[1] 연산군 시기 일시적으로 폐지되었다가 부활한 적이 있다. 하술 참조.[2]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22 (사간동)[3] 감찰 담당 관리[4] 간쟁 담당 관리[5] 물론 전근대 한국의 주요 왕조들의 정치 체제 자체는 대부분 중국의 제도에서 모티브를 얻거나 혹은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 한 것이기 때문에 사간원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기구가 중국에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정작 중국은 조선과 동시대였던 명나라 시기를 거치면서 황권이 극대화되기 시작해 홍무제 때 급기야 2인자인 승상 자리조차 없애는 상황에 이른다.[6] 낭사의 다른 이름은 간관이다.[7] 근데, 사실 성종(조선)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시점의 대간들은 현대의 기자 들보다 나을 게 하등 없었던 데다가, 미신까지 끌고 와서는 "왕이 죄를 지어서 이런 요사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거다!"라고 할 정도여서 연산군이 아니었더라도 한 번 손을 봐주는 게 정상인 상태였다. 저걸 오냐오냐 받아준 성종이 성인군자였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