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잠선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黃潛善
(1078년 ~ 1130년)
중국 남송 시대의 간신. 자는 무화(茂和). 송사 간신전에서는 왕백언(汪伯彥)과 한 세트로 언급되는 고종 시기의 간신이다.

2. 생애


황잠선은 소무(邵武) 출신으로 원부 3년(1100년)에 진사로 급제하여, 선화 6년(1124년)에 좌사랑으로 부임하였다. 휘종 시기에 하동과 섬서에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이때 황잠선에게 섬서의 지진 상황을 조사하도록 명령한다. 황잠선은 이때 섬서의 상황에 대해 지진이 일어났다고만 이야기하고 구체적인 실정은 보고하지 않았다. 황잠선은 호부시랑으로 발탁되었는데, 전술한 지진에 대한 부실보고 때문에 박주로 귀양을 갔고, 휘유각 대제·지하남부(知河間府)가 되었다.[1]
휘종의 재위기 후반 북송의 외부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115년 여진족을 통일한 완안아골타금나라를 세웠고, 휘종은 금나라와 연합하여 1125년에 요나라를 박살내버린다. 하지만 휘종은 요나라의 천조제나 패잔병들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박살낼 계획을 세웠고 여기에 금나라가 분노하여 북송을 침공하였다. 휘종은 잽싸게 황태자인 조환에게 양위하였지만 금나라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이때 휘종의 서자이던 강왕 조구가 대원수부를 열었는데, 이때 황잠선을 불러 부원수로 삼았다. 이후 북송의 상황은 수도인 개봉부가 함락당하고, 태상황인 휘종과 황제인 흠종이 금나라로 압송되었으며 장방창이 금나라의 협박에 의해 괴뢰국의 황제로 즉위한 상황이었다. 강왕 조구는 강남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송나라의 명맥을 간신히 이어나갔는데, 바로 남송의 초대 황제이자 조송의 제10대 황제인 고종이 된다. 황잠선은 이때 중서시랑으로 임명되었다.
고종의 우상으로 발탁된 이강(李綱)은 황잠선과 왕백언을 규탄하였지만, 이강은 결국 파면당하고 황잠선은 우복야 겸 중서시랑에 임명되었다. 남송의 어사 장소도 황잠선이 간사하고 새로운 정치를 해칠 우려가 있다며 황잠선을 규탄했다가, 상서랑으로 좌천되어 이윽고 강주로 유배되었다.
고종이 즉위한 다음 해, 금나라가 섬서를 침공하고 경동과 산동에 도적이 일어났는데, 황잠선은 이 사실을 숨겼다. 이미 운주와 복주가 금나라에게 잇달아 함락당하는 위기 상황이었는데 황잠선은 여기에 대해 우려할 일이 아니라는 망언을 하며 승려의 설법을 들으러 간다. 하지만 사주(泗州)에 금나라의 군대가 당도했다는 소식이 도착하면서, 고종이 크게 놀라 결국 남하를 결정한다. 수도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피난을 하는 상황에서 황잠선과 왕백언에 대해 원망했고, 심지어는 같은 황씨 성의 황악(黃鍔)이라는 관리가 황잠선으로 오해받아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고종은 과주를 지나 진강부까지 당도했는데, 금나라가 이미 그 뒤를 쫓는 상황이었다. 중승 장징이 황잠선을 탄핵하였고, 결국 황잠선은 관문전 대학사, 지강녕부로 강등되고 귀양 조치를 당한다. 이후에도 규탄 여론이 빗발치는 가운데, 황잠선은 결국 1130년 매주(梅州)에서 사망하였다.

3. 여담


정강의 변으로 송나라가 혼란한 가운데 황잠선은 큰 함선에 정예병 수만 명을 태우고 가서 고려의 수도를 공격하자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남송의 상황을 생각해볼 때 현실성이 매우 떨어지는 주장이었다. 황잠선의 고려 공격 제안은 주승비가 말리면서 무마되었지만, 결국 고려와 남송의 관계는 사이가 좋아지지 못했고 외교 관계가 12세기에 단절되었다.

[1] 이때의 지진은 송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릉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했을 정도로 큰 지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