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의 변

 

靖康之變
1. 개요
2. 전개
2.1. 발단
2.2. 전개
2.3. 절정
2.4. 결말
3. 휘종흠종의 여생과 최후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


1126년 북송여진족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황제였던 휘종흠종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당시 북송의 연호가 '''정강'''이었기 때문에 정강의 변이라 부른다. 역덕후들에게 영가의 난, 토목의 변과 함께 중국 한족 왕조의 3대 굴욕 사건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2. 전개



2.1. 발단


1115년 여진족완안아골타가 통일국가 금을 건국하고, 당시 국가 막장·멸망 테크를 탔던 거란의 요나라를 말 그대로 개발살내기 시작하자, 북송의 황제 휘종은 요에게 바치던 공물을 금에게 바치면서 협공을 제의했다. 물론 금 입장에서는 손해볼 것이 없는 제안이라 이를 수락했다.
당시 휘종과 송나라 조정은 여진을 이용해 거란을 제압하고, 숙원인 연운 16주를 회복하여 북송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이이제이책을 생각했다. 하지만 송나라는 애초에 문치 위주의 통치방침과[1] 방랍의 난을 진압하면서 너무 많은 군사력을 날려먹었던 까닭에 협공을 제의하며 금의 군사력에 편승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실력적인 면에서도 송군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어 송이 담당한 구역의 전선에서도 전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요군의 역습에 패하여 후퇴하는 한심한 모습만 보여주었다.[2]
이러한 북송의 태도에 열이 뻗친 금에서 사신을 보내 항의를 하며 노발대발하자 송은 연주 6주(송의 연산부)만 송에 넘기고 연주 내의 모든 재물과 금이 공략한 운주 그리고 공물을 더 바치는 조건을 제시하고 금이 받아들여서 일단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렇게 1125년 요는 금과 송의 협공속에 마지막 황제였던 천조제가 금나라 군대에 포로로 사로잡히며 멸망했다.

2.2. 전개


문제는 '''요가 멸망하자 북송이 입을 싹 닦아버렸다'''는 것이었다. 바친다는 공물은 바치지도 않고 아예 망했어요 상태가 된 요의 천조제랑 접촉하여 금의 내분을 조장하는 정치공작을 폈다. 하지만 천조제가 금에게 패하여 포로가 되면서 들통나고 만다. 이때문에 금은 분노하여 군대를 출동시켰으며 북송의 군대를 격파하고 북송의 수도 변경(개봉)을 둘러쌌다. 이때 도교에 심취한 휘종이 곽경이라는 사기꾼 도사에게 낚여 육갑신병을 만들어 막겠다고 했지만 결과는 개박살(...).[3]
상황이 이렇자 원인제공자였던 휘종은 잽싸게 장남 흠종에게 양위하고 '''"아들, 똑똑한 네가 잘 해결하렴"'''이라면서 책임을 회피했다. 얼떨결에 제위를 물려받자 구원군들이 몰려오는 판세 하에서 흠종은 태원부, 하간부, 중산부의 하북 및 하동 영토 할양, 배상금 지불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맺어 일단 금나라는 철수. 흠종은 이러한 사태의 주범들인 간신들(동관, 양사성, 채경, 채유 등)을 유배, 처형한다.

2.3. 절정


그러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흠종은 주전파 대신들에 힘입어 금과의 주전론에 다시 불을 지펴버렸다. 그리고 이는 금을 제대로 빡치게 만들어 '''"이놈들이 또 통수를 쳐!"'''라면서 금이 다시 군대를 보내게 만들었고, 금나라군은 송의 수도인 변경(개봉)을 포위해 1126년 11월 함락시킨다.[4]
함락된 수도 변경에서 금나라군은 송조의 재상 장방창을 '''니가 즉위하지 않는다면 개봉이 피바다가 돼도 상관없단 말이지?'''란 협박으로 괴뢰정권 (위초)의 황제로 즉위시켰다. 그리고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북송의 황족 및 관료 3천명을 포로로 삼고 대량의 서적, 보화, 재물, 보물, 그림 등과 함께 북방으로 끌고 갔다. 이 때 변경에서 붙잡힌 송조의 관료와 황족들은 금나라의 강요로 인해 장방창의 즉위를 지지하는 서명을 하였는데, 딱 한 사람만이 '오직 조씨만이 송나라의 황성이 될 수 있다'라며 끝까지 반대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람이 바로 진회였다.
이로 인해 여기서 송은 일단 멸망하고 수도 변경을 비롯한 화북 지역은 금나라의 점령하에 들어간다.

2.4. 결말


금에 의해 강제로 세워진 장방창의 위초는 괴뢰국가로서 송의 백성들에게 인심을 사지 못했다. 이에 금나라로 끌려가지 않았던 철종의 폐후 소자성헌황후 맹씨를 복권시켰지만[5] 그녀는 친필서한을 써서, 흠종의 동생이자 수도 변경에서 떠나 제주 지방에 있던, 강왕 조구에게 보냈다. 이 서한을 통해 강왕은 선양받아 즉위하면서[6] 고종이 되어, 나라가 완전히 몰락하는 꼴을 겪지 않고 남쪽에서 명맥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강제로 황제가 된 장방창은 이후 남송에 귀순했으나 자살을 명받는다.[7]
그리고 이런 송의 움직임에 격노한 금나라는 여세를 몰아 다시 침공하여 송의 고관인 유예를 또다른 괴뢰국가인 (위제)의 황제로 세우고, 장강을 건너 고종을 추격하여 양주, 남경, 임안[8], 월주[9], 명주[10]를 잇달아 점령하고 일군은 강서성까지 진격하였으며, 도망친 고종을 온주에서 급기야 해상으로 내몰아 전 중국을 정복할 기세였으나, 화북과는 다른 강과 하천이 많은 '''화남의 기후, 지리''' 및 악비, 한세충 등을 주장(主將)으로 한 '''송군의 반격''', 벼락출세한 여진족들이 화북을 점령해 통치하면서 살육과 약탈을 하도 저질러 화북 전체를 초토화시켜 버리는 바람에 일어난 '''한족들의 반란''' 등으로 고전하게 된다. 금은 관중을 점령하고 사천성 입구까지 침입하는 등 금과 송이 장강을 경계로 에워싸고 일진일퇴를 전개하였지만 불리한 금이 개봉 및 황하 이남을 포기하고 다시 하북으로 퇴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진회를 위시한 송의 화평파가 악비 등의 주전파를 배제시키고 금과 강화를 체결함으로써 회하에서부터 대산관까지를 경계로 삼아 유예의 위제를 폐하고 금나라가 정식으로 화북을 통치하게 되어 중원 대륙은 본격적으로 2차 남북조시대의 형세를 이루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역사는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나왔다고 평한다.

3. 휘종흠종의 여생과 최후


금태종은 끌려온 휘종에게 혼덕공(昏德公, 덕을 망친 공작), 흠종에게 중혼후(重昏侯, 덕을 따블로(...) 망친 후작)란 작위를 내려 조롱했다. 공과 후는 작위로 보자면 왕보다도 아래이니, 제왕의 지위도 부정 또는 강등한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였는데 판단 하나 그르쳐서 받는 엄청난 굴욕. 또한 휘종과 흠종을 포함하여 붙잡힌 북송의 포로들은 금의 영토에서도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오국성, 즉 현재의 하얼빈 이란현 근처에 단체로 모여서 귀양살이를 했다.[11] 때문에 거리가 거리다보니 구사일생으로 일부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을 빼면 대부분 금나라 땅에서 생을 마쳤다. 여담으로 탈출한 사람 가운데선 남송의 재상에 오른 진회가 유명하다. 다만 생각만큼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진 않았다는 주장도 있는데 후술된 문장 참조.
한편, 뒷날 고종의 노력으로 고종의 어머니 위씨가 돌아오고 아버지 휘종의 유해 등을 비롯하여 포로로 잡혔던 사람들 대부분은 유해의 일부라도 송환했다. 현재 회령 고령진역 인근 주요 지역에 황제총이 두 곳이나 있는 등 상당수의 무덤이 남아있는데, 모두 오국성에서 생을 마감한 황족들의 무덤들이라는 설이 있다. 특히 이 가운데 황제총 두 곳은 오국성에서 죽은 휘종과 흠종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국성의 위치가 만주 하얼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는 단순히 지역 설화일 가능성이 크다.[12] 금나라의 초창기 수도가 오늘날 하얼빈시 아청구에 위치했던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였기 때문에 금나라 입장에서도 황족급의 중요한 죄수들을 수도와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안치시키기 보다는 수도 가까운 곳에 수감시켜 엄격하게 감시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추측이다. 휘종은 원래 금나라 영토에 묻혔다가 고종에게 유해가 돌아와 남송의 영우릉에 묻혔다. 그러나 채 200년도 안 지나 원나라 때 영우릉이 라마승이자 강남석교총통 양련진가에게 도굴되었으니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 흠종의 무덤은 정확히는 회령은 아니고, 두만강 건너 만주 지역에 있다. 사서에서는 흠종은 오늘날의 허난 성에 매장됐다고 하며 중국 학계는 오국성의 위치를 함경도가 아닌 헤이룽장성 이란현으로 보고 있다.
흠종은 송나라 예법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던 적장자계승원칙으로 정통성 문제가 불거질 염려가 있다는 까닭에 아예 송환조차 못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흠종같이 불행한 사례가 대다수였고, 선택받은 소수만 유해의 일부가 귀향에 성공했다.
사조영웅전에서 구처기곽정양강의 이름을 이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수호전에서는 수호후전에서 나온다.[13]
휘종과 흠종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내용이 적힌 남신기문록(南燼紀聞錄)이라는 책이 위작이자 '''야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책의 내용대로 '''금나라에게 학대를 받았다는 기존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송선화유사에 수록된 이야기 역시 그렇게 신빙성이 높은 편은 아니다. 오히려 두 황제를 따라 금나라로 간 채경의 아들 채조가 기록한 북수행록(北狩行錄)과 신음어(呻吟語) 등 다른 서적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기존에 알려진 내용과 달리 휘종과 흠종은 심각하게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진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복수의 기록에 따르면 그동안 첫번째 학대 가해자로 지목되었던 완안아골타의 차남 완안종망[14]은 오히려 '''휘종에게 연회를 베풀며 대접을 했다.'''[15] 휘종이 금나라에 도착할 때 금나라로부터 비단과 생견을 하사받았으며 금태종의 명령으로 휘종 부자가 견양례등 굴욕적인 의식에 참가하고 폐서인되어 평민 계급으로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의 베이징 근처인 연산부에서 머무를 때 상당히 편하게 머물렀다고 한다. 후에 남송에서 북진 움직임을 보이자 휘종 일가를 후방으로 이동시켰으며 이때부터 휘종 자신이 직접 초가집 지붕을 잇고 농사를 지어야 하는 등 이전보다 힘들고 궁핍하게 산 건 사실이나 역시 학대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지붕 위에 올라가 자신에게 편지를 전해주러 온 하인에게 "도 초가집에 살며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덤덤하게 말하기도 했다. 그나마 이런 빈궁한 생활[16]도 휘종의 딸과 며느리들이 금나라 종실의 처가 되면서 금태종이 휘종에게 '''말년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제공해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해 주겠다는 칙조[17]를 내리며''' 끝나게 된다. 거기에다 휘종은 금나라에 가서도 아들과 딸을 또 낳는다.[18] 다만 저 칙조를 받은 그 해에 휘종의 아들 중 한 명인 조악(趙㮙)이 '''아버지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금태종에게 무고했다가 휘종의 부마와 함께 맞아 죽었다.[19]
다만 휘종 등이 금나라로부터 어느 정도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황제 일가를 제외한 송나라 종실들과 수행원들은 개봉에서 금나라로 이동하면서 많은 수가 풍토병과 추위, 굶주림으로 죽었으며[20] 휘종이 금나라에서 하사받은 옷감들과 자신의 재산을 팔아 이들을 치료받게 하려 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온다.
애당초 그나마 좋은 취급을 받은 경우도 송의 황제였던 휘종과 흠종 한정으로 이때 끌려간 황족들 중 그나마 두 황제는 남송과의 관계를 감안한 금 태조의 지시로 전직 황제 취급은 받아서 그나마 처지가 나았지만 나머지는 그야말로 지옥행 그 자체. 특히 휘종의 딸이나 황후를 제외한 후비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거나 뒤늦게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당 사항이 없었고, 운이 좋아야 황제 금태종, 금희종, 황족, 장군의 첩이 되었다.[21].
휘종의 아내들을 비롯한 많은 황족 여성이 세의원(洗衣院)으로 보내졌다. 세의원이 금나라의 기방이었기에, 금나라에서 모욕을 주기 위해 송나라 황족 여성들을 이곳으로 보내 창기(娼妓)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송사나 금사에 기록된 내용이 아니다. 정사가 아닌 야사이다
자칭 유복공주라는 사람이 자신이 금나라에서 탈출한 고종의 누이라고 사칭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퍼져있는데 이것은 정사가 아니라 야사이다. 송사 환관 풍익전에 유복공주를 사칭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그냥 민담이다.
원래 송태종의 자손들은 귀해서 수가 적었는데 개봉에 머물던 대부분의 황족들이 금나라로 끌려갔고 훗날 남송을 세운 송고종마저 자손 없이 사망하면서[22] 남송은 송 태조의 자손들이 이후 대대로 황제가 되었다.
송나라가 금나라한테 당한 굴욕은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남송의 고종(高宗)인 조구(趙構)는 금나라에 수시로 배상금을 내는 일을 견디다 못해[23] 금나라가 내놓은 절충안을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바로 남송 황실의 여자들을 배상금 대신 금나라에 바치는 일이었다. 구체적인 기준은 제희(帝姬), 왕비(王妃)는 1명당 금 1천정(錠)으로 치고, 종희(宗姬)는 1인당 금 5백정으로 쳤으며, 족희(族姬)는 1인당 금 2백정으로 쳤고, 종부(宗婦)은 1인당 은 오백정, 족부(族婦)는 1인당 은 1백정으로 쳤다. 제희는 황제의 딸 즉 공주이다. 왕베는 황제의 며느리이다. 종희는 군주(郡主), 족희는 현주(縣主)이다.
이렇듯 남송은 송고종의 생모인 위귀비(韋貴妃)를 팔았고, 그녀는 금나라의 개천대왕(蓋天大王) 완안현(完顔賢)과의 사이에 두 사내아이를 낳았다. 송고종의 본부인인 형병의(邢秉懿)도 팔려서 천회9년 금태종(金太宗)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낳았다. 즉, 송고종은 집안의 여인을 모두 팔아버렸다. 모친을 팔고, 처를 팔고, 딸을 팔고, 형수를 팔고 심지어 조카딸도 팔 지경에 이르렀다. 남송황실은 일반백성 집안보다 못하다는 것이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 한 예로 송나라 황실의 여인인 복금제희(福金帝姬, 공주)는 금나라의 황자인 알리불(斡離不)한테 보내졌는데, 알리불을 만난 복금제희가 마치 죽을 것처럼 무서워 벌벌 떨자 알리불은 노비인 이씨에게 명을 내려 복금제희를 술에 취하게 한 후, 그녀를 겁탈했다(...)#
이 일이 왜 굴욕적이냐 하면, 금나라 이전의 요나라에서는 황제인 흥종(興宗)이 송나라 황실에 "우리가 송나라를 공격하지 않을 테니, 그 대가로 송나라 공주를 요나라 황자(흥종 자신의 아들)한테 시집을 보내달라."고 요구를 했는데, 송나라는 끝내 공주를 요나라로 시집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 이후 흠종 역시 금태종의 뒤를 이은 금희종이 태종 때 흠종에게 내린 중혼후라는 모멸적 칭호 대신 천수군공(天水郡公)으로 봉해 주었으며 희종은 흠종에게 녹봉도 줬다.[24] 비단 이런 기록들 뿐 아니라 금사(金史)에는 흠종이 죽자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등 물론 금사의 기록임은 감안하더라도 화살 과녁으로 삼아 화살을 쏜 후 말발굽으로 밟아 죽였다는 등의 후일담은 괴담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황제로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던 사람이 평민으로 강등되어 농사 짓고 살게 된 점 은 휘종이나 흠종 자신에게 있어 매우 고되고 비참한 일이었겠지만 금나라 측에서 의도적으로 학대한 일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로 당시 떠돌던 황제 일가의 비참한 말로는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한족 지식인들의 과장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추세다.[25]

4. 기타


한편 이 일로 공자의 종가도 분열되었다. 곡부의 공묘를 지키던 연성공(공자의 적통에게 내려진 작위) 공단우는 남송 조정을 따라 남하해서 절강성 구주(衢州 취저우)에 새로운 공묘를 세웠다. 곡부에는 공단우의 동생 공단조가 남았는데, 이후 금나라는 공단조를 새 연성공으로 임명하였다. 그래서 공단우의 가문을 남종, 공단조의 가문을 북종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는 이후 원나라쿠빌라이 칸이 남종의 종손인 공수에게 곡부로 돌아가서 가문을 이으라고 명하자 공수가 북종의 종손인 공치에게 연성공 자리를 양보하며 정통성을 정리한다. 이를 공수가 연성공 작위를 양보했다고 해서 '공수양작(孔洙讓爵)'이라고 부른다.

5. 관련 문서


[1] 군대에 대한 중앙정부의 간섭이 지나치게 심해서 장군들이 제대로 된 작전을 펼치기가 힘들었다.[2] 심지어 이때 당시의 요군은 제대로 된 군대도 아니고, 금나라의 침략을 피해 도망쳐 온 거란족 피난민들로 이루어진 수군(瘦軍 빼빼마르고 볼품이 없는 군대라는 뜻)이라는 임시 군대에 불과했다. 문제는 이런 수천 명의 수군한테 무려 10만 명의 송군이 패배하고 쫓겨났으니, 이 당시 송군의 전투력이 얼마나 허약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3] 그리고 이 곽경은 수호지의 후속작 후수호지에 등장해 양산박 산적들에게 죽는다.[4] 물론 송도 가만있지 않고 이강이 지휘하는 군대를 파견해서 막으려했으나 대패하고 말았으며 8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태원성이 함락되면서 송의 방어선은 완전히 붕괴된 상황이었다.[5] 장방창은 그녀를 다시 황태후로 복위시켜 이를 통해 정통성과 적법성을 노렸다.[6] 송고종은 즉위하면서 '장방창은 적법성, 정통성, 명분이 없으며 강왕이 어서 빨리 천자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소자성헌황후 맹씨의 친필서한을 읽고 이를 하늘에 고했다고 한다.[7] 아무리 강요를 받았다지만 감히 제위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큰 죄였다. 그나마 이것만으로 끝났다면 참작의 여지가 약간이나마 있었고, 실제로 고종 역시 장방창이 귀순한 직후엔 벼슬을 강등하고 멀리 귀양을 보내는 정도로 끝내려 했다. 그러나 이후 장방창이 휘종의 후궁인 화국정공부인(華國靖恭夫人) 이씨와 간통으로 의심되는 짓을 하고 궁중에서 멋대로 술을 마시거나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사면령을 내리는 등의 행위를 했음이 밝혀지자 결국 자살을 명한 것. 이씨 역시 장형을 받고 작위를 박탈당하여 군영에서 잡일을 하는 벌을 받았으며 얼마 안가 죽었다.[8] 현 절강성 항주.[9] 현 절강성 소흥.[10] 현 절강성 영파.[11] 함경도 회령이라는 설이 있으나 한국측 사서에서만 주장하는 이야기고 중국 학계에서는 오국성이 하얼빈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12] 증거라는 것이 중국 동전 등이 나왔다는 것인데 이런 유물은 만주에서도 출토되고 있다.[13] 재미있는 것은 전호편에서 전호의 부하인 범권이 병주 옆에 있는 금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자고 말하자. 농민 출신의 변상이 '''우린 반란군이지만 그렇다고 금나라에게 투항해서 힘을 얻는 것은 큰 파멸을 일으킬 겁니다!'''라고 말했다. 정작 농민도 알고 있고 반란군도 이런 짓을 안하는데 이걸 한 북송조정은 답이 없는 인물들이란 것을 알수가 있게 묘사하고 있다.[14] 여진명 '알리불'.[15] 정충악비에서도 다른 여진인들이 포로가 된 송나라 사람들을 학대하고 능욕할 때 알리불만이 동참하지 않고 심란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본다. 그리고 아무리 포로라도 황족들인데 예우는 갖춰야 하는거 아니냐고 말한다.[16] 송나라 사람들이 받았다는 논밭이 45경이라고 하는데 1경이 '''3000평''' 정도 되는것을 보면 빈궁하고 고되기는 했어도 야사에서 말한 것처럼 억지로 썩은 음식을 먹고 지냈을 리가 없다.[17] "예전에 의 여자 여섯 명을 종실의 부인으로 취했으니 너의 말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고, 인척에게는 장사를 시켜 돈을 벌어 말년에 의식이 풍족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해 주겠다. 그대의 딸과 며느리가 궁궐 침소에서 시봉을 든 지 이미 2년이 지났는데 조심하고 경계하여 잘못됨이 없어 은혜를 베풀어 돌보아 주고 있다. 이렇게 정숙한 자세는 본래 그대가 키워 준 것이므로 비단 10단을 내려 천자의 은총을 보여 주겠다." - 신음어(呻吟語) - 다만 금사에 따르면 비단옷을 하사하는 정도였던것 같다.[18] 청나라 때 '만주 8성'으로 불렸던 이르건기오로(伊爾根覺羅)씨는 자신들을 휘종과 흠종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다.[19] 역시 금나라에 의해 해빈왕(海濱王)으로 봉해진 천조제의 노비들이 천조제를 무고했다가 똑같은 꼴을 당했다.[20] 3천 명 중 2천 명이 죽었다고 한다(...).[21] 처녀들은 물론이고 유부녀들도 얄짤없었다. 또 원래 모시던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져 또다시 첩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시 다른 사람의 첩이 되었다.[22] 물론 태종의 후손들 중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남송의 재상을 지냈던 조여우로 태종의 8대손이었다. 하지만 조여우도 이 때문에 고종의 적지 않은 견제를 받다가 결국 실각했으며, 조여우 이후 태종의 자손들 중에서 유명한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23] 왜냐하면 금나라가 하도 많이, 그리고 자주 배상금을 요구하자 그 돈을 내느라 남송의 국고가 거의 텅빌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24] 일부에서는 아예 희종이 흠종을 귀양지인 오국성에서 금나라의 수도인 상경회녕부로 불러와 살게 해줬으며 흠종을 너그럽게 대해 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황상 흠종에 대한 대우가 종혼후 시절보다 좋아진건 맞는듯 하나 중국에서는 천수군공이라는 의미도 좋게 보지 않는다. 대놓고 모멸적인 의미의 종혼후에서 모멸적인 부분을 없앴지만 폐서인된 포로에서 망국의 황족 취급으로 바뀐 정도.[25] 한참 이전 시대이지만 비슷하게 후한헌제 유협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고 조위 정권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촉한에 잘못 퍼졌었다. 이 역시 익주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유비의 황제 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인지 몇 년이 지나도 소문이 정정되지 않았다. 아무리 당시에 정보가 느려도 헌제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산양공으로 격하돼 살고 있었다는 건 결국엔 알 수 있었을텐데도 촉에서는 계속 모른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