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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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북송의 인물이자, 금나라의 괴뢰국인 장초(張楚)의 유일한 황제였다.
2. 생애
장방창은 영정군(永靜軍) 동광현(東光縣) 출신이며, 진사로 급제하여 관직이 대사성에 이르렀다가 훈도에 문제가 생겨 제거숭복궁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장방창은 상서우승, 좌승, 중서시랑을 역임했고, 흠종 재위기에 소재를 지냈다.
1125년 북송과 금나라의 협공으로 요나라가 멸망한 직후, 당시 황제였던 휘종은 금나라와의 약속을 어겼고, 여기에 분노한 금나라가 북송을 침공했다. 금나라가 수도를 포위한 상황에서, 장방창은 휘종의 아들인 강왕 조구와 함께 금나라에 인질로 간다. 때마침 요평중이 금나라의 군영을 야습한 사건이 일어나자 완안종망[1] 이 장방창을 꾸짖었는데, 장방창은 여기에 대해 조정의 뜻이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이후 인질은 다른 황자로 대체되어, 조구는 풀려났고 금나라는 철군했다.
하지만 북송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휘종 이후 즉위한 흠종은 금나라와의 강화조약을 파토냈고, 여기에 분노한 금나라가 북송의 군대를 괴멸시키고 개봉을 함락시켰다. 금나라는 휘종과 흠종을 포로로 잡은 후에 입맛에 맞는 괴뢰정권을 세우려고 했다. 금나라는 조씨(趙) 성이 아닌 송나라의 대신을 괴뢰국의 황제로 세우라고 협박했는데, 이때 송제유(宋齊愈)라는 이가 장방창을 거론하였다. 대다수의 북송 신하들이 황성은 오로지 조씨(趙) 성이어야 한다며 격렬하게 반대했는데, 여기에는 진회도 포함되어 있었다.[2] 결국 금나라의 협박 끝에 장방창은 금나라의 괴뢰국인 초나라의 황제로 옹립되었다.
장방창은 황제로 옹립된 이후 자신을 짐(朕)이라고 하지 않고 여(予)라고 칭했으며, 조서를 수서(手書)라고 칭했으며 신하들에게 자신을 폐하로 부르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장방창은 금나라의 군대가 회군한 뒤에 송나라의 정통성 제고를 위해 2번이나 황후에서 쫓겨났던 철종의 첫번째 황후인 원우황후 맹씨를 복권하며 맹황후에게 수렴청정을 요청한다. 맹황후는 강왕 조구에게 제위에 올라 송나라를 계승하라는 편지를 보냈고 여기에 강왕 조구가 강남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간신히 조송의 명맥을 유지해나간다. 이가 바로 남송의 초대 황제이자 조송의 제10대 황제 고종이 되었으며, 장방창은 송 조정으로 복귀했다. 맹황후는 결국 2번이나 황후에서 쫓겨났지만 송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황제로 즉위한 조구는 장방창의 모든 죄를 면제해주었고, 동안군왕으로 책봉했으며 태보로 승진시켰다. 하지만 장방창의 좋은 날은 거기까지였다.
장방창이 남송 조정으로 복귀한 이후, 재상인 이강(李綱)은 장방창의 참월행위를 참고 넘길 수 없다며 장방창에 대한 처벌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고종은 장방창을 살려줬는데 이때는 장방창의 관직을 소화군 절도부사로 강등시키고 담주(潭州)로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그쳤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고종은 장방창을 사사시켰다. 물론 처음에 고종은 전술하였듯 장방창이 귀순한 직후 그의 벼슬을 강등시키고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지만, 장방창이 황제만 할 수 있는 사면을 단행했고 무엇보다 휘종의 후궁이었던 화국정공부인 이씨와 간통으로 의심되는 짓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자 그를 사사시킨 것이었다.
한편 장방창이 죽은 이후, 금나라는 남송을 다시 침공했고 장방창을 대신할 새로운 괴뢰황제로 유예(劉豫)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