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

 



'''송사
宋史
History of Song
'''
'''저자'''
탈탈
'''시기'''
14세기
'''언어'''
중고한어
'''권 수'''
496권
'''분량'''
960년 ~ 1279년 (319년)
송태조 원년 ~ 송소제 2년
1. 개요
2. 편찬 과정
2.1. 정통성 문제
3. 구성
4. 의의와 평가
5. 어정송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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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宋史
중국 24사 중 하나이며 북송남송의 약 320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의 정사이다. 1343년 2월, 중서우승상 탈탈(脫脫)이 도총재관 겸 감수국사를[1], 철목아탑식(鐵木兒塔識), 장기암(張起岩), 구양현(歐陽玄), 여사성(呂思誠). 갈혜사(擖傒斯) 등이 총재관을 맡아서 찬수사업을 시작하였다. 송사의 편찬사업은 신속하게 착수되어 2년 7개월만인 1345년 10월에 '''496권'''이 완성되었다.[2]

2. 편찬 과정


송사는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킨 직후 편찬이 시도되었다. 1279년,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 칸사관들에게 요, 금, 송의 역사를 편찬하도록 지시했다. 이미 쿠빌라이는 1261년, 요사금사의 편수를 지시한 바가 있다. 1271년, 요사, 금사의 편찬자가 증대되어 박차를 가했으나 이러한 와중에 남송이 멸망하자 요사, 금사, 송사를 함께 편찬하도록 명했다.

2.1. 정통성 문제


그런데, 이렇게 시작된 편찬 사업은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인종(仁宗) 연우(延祐) 연간(1314 ∼1320),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영종(英宗) 지치(至治) 연간(1321∼1323) 원 조정은 국령을 반포해 송사 편찬의 의지를 드러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사의 편찬은 많은 딜레마를 내재하고 있어 계속 답보 상태를 이어갔다.
송사 편찬의 골칫거리가 된 것은 의례(義例), 즉 사서의 성격을 어떻게 매듭짓냐는 것이었다. 송나라는 북방 민족의 왕조들과 병존했다. 북송 시기 거란족의 요나라와, 남송 시기 중반까지 여진족의 금나라와 공존했다. 따라서 송나라의 역사를 기술할 때 요, 금과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었다. 이것은 어느 왕조가 정통성이 있었느냐는 문제와 직결되었다. 게다가 이 3개 왕조 모두 편찬 당사자인 원나라의 직접적 전신은 아니었기 때문에, 비슷하게 3개 왕조가 병존했지만 깔끔하게 조위정통론을 채택한 삼국지란 전례와도 경우가 달랐다. 송사와 더불어 요사와 금사의 편찬이 계속 지지부진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당시 원에서는 두 가지의 입장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주자학을 따르는 학자들은 송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나머지 요와 금을 송사에 복속시켜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송 뿐만 아니라 요, 금에게도 정통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송을 본기(本紀)에 기록하고 요와 금은 각각 재기(載記)에 기록해야 한다.

2. 요와 금을 북사(北史)로 편찬하고, 송은 송사(宋史), 남송사(南宋史)로 분찬해야 한다.

그런데, 지정 연간 황실의 분열과 부정부패, 홍건적의 난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자 원 조정은 이전 시기의 전장제도(典章制度)와 치란흥망(治亂興亡)을 살펴서 거울로 삼고자 역사 편찬을 서둘렀던 것이다. 총감독으로 임명된 탈탈은 논쟁을 중단시키고, “삼국 모두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각각의 연호를 사용한다(三國各 與正統, 各繫其年號)”는 원칙을 확정했다. 이런 결론은 옆나라 고려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삼국시대 세 나라 모두 대등하게 본기에 서술한 것과 비슷한 결정이었다.

3. 구성



본기(本紀) 47권, 지(志) 162권, 표(表) 32권, 열전(列傳) 255권으로 합 49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4. 의의와 평가


역대의 정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대의 분량을 보유하고 있다. 당사를 기록한 구당서신당서를 합해도 송사가 71권으로 더 많다. 특히 지(志) 162권은 전체 중에서 3분의 1를 차지할 정도로 방대한데, 송나라의 사회, 문화, 제도, 경제 등 세세하게 살펴볼 수 있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열전(列傳) 225권에는 인물만 약 2천 명이 수록되었으니... [3] 송사는 남송이 멸망할 때 관련자료가 잘 보존되어 빠르게 편찬될 수 있었다. 송사의 근본은 구사(舊史)에서 비롯되었는데 역사가들은 저작인 구사가 있었기에 송사가 지금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송사는 너무나 일찍 편찬되어 많은 문제점과 한계점을 안고 있다. 일단, 실록의 문장을 초록하여 전후 문맥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부분이 허다하다. 또한, 사료의 고증 문제도 심각하다.[4] 전반적으로 중복된 내용이 많으며 문맥이 혼동되어 앞뒤가 맞지 않다. 이러한 면모 때문에 송사는 역대 정사 중에서 최악의 정사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고려사와 송사를 비교해보면 고려의 사신들이 송나라에 가서 행패를 부렸다던가 그 송나라는 고려에게 쩔쩔매고 있었다고 하나 정작 고려사를 들춰 볼 경우에는 이 시기 사신들의 노고를 볼 수 있고 송나라에 예의를 갖추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김부식의 경우는 송나라에서 평판이 매우 좋아 서긍이 고려도경에 수록하기도 했고 그 밖의 사신들도 꽤 예의를 갖추었다. 이는 곧 원나라가 고려와 송나라를 폄하하기 위해 쓴 기록이니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안된다.
하지만 고려 사신에 대한 융숭한 대접과 고려와의 (조)공무역은 점점 송의 국가 재정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이로 인해 요나라의 실제적인 위협이 줄어들자 송의 신료들 사이에선 반고려 입장이 나타나기 시작한것 자체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소동파로 알려진 소식(소동파). 그는 고려를 대놓고 '''맥적'''(貊狄)이라 부르며 다섯가지 이유를 들어 고려와의 관계를 재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고려사의 경우 사신들이 행패를 부린 것을 원간섭기 특히 충혜왕 시절로 보고 있으나 이때에도 사신들이 나름의 예의를 갖추었던 신하들이 제법 있다. 그래서 명나라 때 가유기(柯維騏)의 『송사신편(宋史新編)』 과 왕수(王洙)의 『송사질(宋史質)』 등이 송사의 구조적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편찬되었다.

5. 어정송사전


송사와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송사』의 개편을 착수해서 정조 연간에 『어정송사전(御定宋史筌)』(약칭 송사전)이라는 결실을 맺었다는 점이다. 명청교체 이후 청이 확고하게 중원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에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종국에는 몽골족에 의해 멸망한 송나라의 역사인 『송사』의 개편했다는 점은 당시의 화이관 및 소중화 의식과 정조의 학술적 소양이 맞물린 결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송사전』은 위의 송사신편 등도 참고하여 사실상 『송사』 개편의 최종작이라 평할 만 하다.
즉위 후에 정조는 자신의 초고를 세손 시절의 측근 학자 10여 명에게 주어 개정하게 한 다음, 개정된 원고를 서명응(徐命膺)에게 주어 수정하도록 했다. 그 결과 1780년(정조 4)에 100권 40책의 『송사전』이 편찬됐지만, 정조는 그 내용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를 이덕무(李德懋)에게 주어 다시 개정하도록 했다. 이덕무는 정조와의 긴밀한 협의 속에 수정 작업을 진행했고, 결국 1791년에 최종적으로 150권 61책의 『송사전』을 완성하였다.
편목에 있어서도 일부 수정된 부분이 있어서, 『송사』에서 「열전」에 포함시켰던 후비(后妃)를 「본기」로 편입시킨 점, 「종실세가(宗室世家)」를 별도로 설정한 점, 성리학을 정립한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를 「오현전(五賢傳)」으로 독립시킨 것, 『송사』에 없는 「유민전(遺民傳)」을 새로 설정한 것, 「외국열전(外國烈傳)」을 재구성하여 고려를 가장 앞에 두고 『고려사(高麗史)』를 기준으로 내용을 수정했으며 요(遼)·금(金)·몽고(蒙古)도 여기에 포함시킨 것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송나라의 멸망을 1276년을 잡은 『송사』와 달리 1279년에 애산 전투 이후 멸망한 것으로 규정하고 1276~1279년에 송나라의 잔존세력에 의해 옹립된 황제들을 정통으로 인정하였다. 이 부분에서 조선에서 남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반영한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송사』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었던 ‘번잡과 중복’을 피하기 위해 내용을 축약·서술하고 중복된 부분들은 삭제했으며, 오류 및 누락된 부분들도 수정·보완하였다.

[1] 사업 당시 총감독을 맡은 직함이다.[2] 송사가 이렇게 신속하게 종결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료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남북조시대까지만 해도 편찬제도를 국가에서 시행하지 않았다. 당나라가 건국되어 기거주(起居注), 시정기(時政記), 실록, 회요 등의 제도에 덧붙여 일력(日曆), 국사(國史) 등의 편찬제도가 단계별로 정리되기 시작하더니 송나라 때 사서 편찬제도가 완비되었다.[3] 참고로 송보다 오래 존속했던 고려고려사 열전이 50권에 수록된 인물이 1008명이다. 물론 국토와 인구의 차이나 고려의 잦은 외침으로 인한 기록손실을 감안하면 고려도 꽤 많은 역사 인물 기록을 남겼다고 할 수 있지만...[4] 대표적으로 문제가 되는게 송사 악비전, 한세충전 같은 경우인데 전반적으로 전공을 부풀려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