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송)

 


'''남송 제10대 황제'''
'''高宗 憲皇帝 | 고종 헌황제'''

'''묘호'''
'''고종(高宗)'''
'''시호'''
수명중흥전공지덕성신무문소인헌효황제
(受命中興全功至德聖神武文昭仁憲孝皇帝)
'''연호'''
건염(建炎, 1127년 5월 ~ 1130년)
소흥(紹興, 1131년 ~ 1162년)
'''출생'''
1107년 6월 12일
'''사망'''
1187년 11월 9일 (80세)
'''국적'''
북송(北宋) → 남송(南宋)
'''재위'''
'''남송의 황제 (1차) '''
1127년 6월 12일 ~ 1129년 3월 23일 (1년 9개월)
'''남송의 황제 (2차) '''
1129년 4월 20일 ~ 1162년 7월 4일 (33년 3개월)
'''남송의 태상황 '''
1162년 7월 4일 ~ 1187년 11월 9일 (25년 4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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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趙)
''''''
구(構)
''''''
덕기(德基)
'''부모'''
부황 휘종, 모후 현인황후
황후 ||[[헌절황후 형씨|{{{#000,#fff 헌절황후 형씨(憲節皇后 邢氏)
]]
헌성자열황후 오씨(憲聖慈烈皇后 吳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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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황제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송나라 재건
2.2. 황제 시절과 가족 송환, 양위 후의 삶
2.3. 고려와의 관계
3. 평가
4. 대중매체에서
5.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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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나라의 제10대[1] 황제이자, 남송의 초대 황제.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수명중흥전공지덕성신무문소인헌효황제(受命中興全功至德聖神武文昭仁憲孝皇帝). 휘는 구(構), 자는 덕기(德基).

2. 생애



2.1. 황제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송나라 재건


송휘종의 아홉번째 아들이자 송흠종의 이복 동생으로 휘종과 현인황후 위씨(顯仁皇后 韋氏) 사이에서 첫째아들로 태어났다. 휘는 구(構)이며 광평왕(廣平王)에 책봉되었다가 이후 강왕에 책봉되어 즉위 전까지는 강왕이라고 불렸다. 고종이 강왕이던 시절, 아버지 휘종이 금나라와 강화 협상을 할 때 인질로 그를 보냈다. 그런데 '''워낙 담대하고 떳떳해서''' 금나라가 이 사람을 궁중에서 곱게 자란 황자라고 믿지 않고 다른 황족을 보내달라고 하는 바람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정강의 변이 터지고 북송의 수도 개봉이 함락되자 인질의 쓴맛을 알고 있던 강왕 조구는 급히 장강 이남으로 도망쳤다. 이후 송을 이어야 한다는 주변의 당부에 제주에서 즉위했다. 1128년 항주(항저우)를 수도로 정하고 임안부로 고친 뒤 연호를 건염(建炎)으로 하였다. 이때 철종의 황후였던 원우황후 맹씨가 보낸 “어서 빨리 즉위하여 나라와 종묘사직을 구하라”는 조서를 하늘에 읽어 이를 고한 뒤 무너진 송나라(남송)를 재건했다.

2.2. 황제 시절과 가족 송환, 양위 후의 삶


고종의 양자인 효종이 뒤를 이었지만 원래는 고종에게 1남 5녀의 자녀가 있었다.
고종도 아버지 휘종만큼은 아니지만 후비가 많았다. 정비였던 현절황후 형씨가 아이를 임신한 채 정강의 변으로 금나라로 끌려갈 때 말에서 떨어져 유산하고 말았다. 형씨는 금나라 세의원에 있다가 귀환했지만 이후 아이를 갖지 못했다.[2]
자칭 유복공주라는 사람이 자신이 금나라에서 탈출한 고종의 누이라고 사칭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퍼져있는데 이것은 정사가 아니라 야사이다. 송사 환관 풍익전에 유복공주를 사칭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그냥 민담이다.
현비 반씨가 낳은 외아들 원의태자 조부#s-2가 있었다. 1130년, 묘부와 유언정 등이 고종을 협박하여 강제로 퇴위시키고 어린 조부를 황제로 옹립한 사건이 벌어졌다. 재상 장준이 이들을 제거하고 고종을 복위시켰다. 조부는 위국공으로 강등되었고, 불과 3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이후 고종은 아이를 갖지 못했다. 왕위에 있는 동안 다시다난했기 때문에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다. 양주 행궁에서 후궁들과 즐기다가 금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장강을 건너 도망친 적도 있다. 금나라의 정예군이 장강을 넘어와 항주를 함락시키자 단신으로 남중국해로 도망쳐서 망망대해를 떠돈 일도 있었다.
조부를 잃은 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등 갖은 노력에도 자녀를 얻지 못한 고종은 종실 중에서 양자를 들여서 황태자로 삼아야 했다. 송태종의 자손은 유독 귀했다. 태종의 아들이 요절한 경우도 많았고, 정강의 변으로 태종의 후손이 금나라로 많이 끌려갔다.[3] 태종의 후손들이 귀했던 상황에서 금나라를 다녀왔던 신하들이 금태종의 모습이 생전 태조 조광윤과 닮았다고 말했다. 나라에서는 죽은 태조가 동생 태종에게 빼앗긴 제위를 되찾으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종은 이를 하늘의 뜻으로 생각하고 태종의 형 송태조의 자손에게 황위를 돌려주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태조의 후손 중 2명을 선별하여 자신과 헌성자열황후 오씨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때 태조의 차남 조덕방의 6세손 조백종(趙伯琮)을 조신으로 개명시키고 양자로 삼았고, 조백구(趙伯玖)도 양자로 삼고 조거로 개명시켰는데 이중 조신이 그나마 남송의 중흥을 이끈 효종이다.
고종은 정통성 문제로 친아버지 휘종과 이복형 흠종은 물론 다른 황실 가족의 송환에 소극적이었다. 심지어 친어머니 위씨도 처음에는 송환을 그닥 반가워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정강의 변 이후 생각보다 빨리 고종이 즉위하고 임안을 수도로 삼아 새로 조정을 꾸리고 송나라가 재건되면서, 금나라는 포로로 이용 가치가 떨어진 휘종과 흠종을 조용히 송환하려고 했었는데 고종은 이 제안도 거절했다.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닌게, 엄격한 적장자 상속제와 예율을 적용하는 유교국가 송나라에서 상황인 아버지 휘종과 적장자[4]인 이복형 흠종은 고종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휘종이야 자기가 때려쳤으니 그렇다 쳐도 적장자로 태어나서 황태자로 있다가 제위를 적법하게 이어받은 흠종은 별다른 결격 사유가 없어서 복귀하면 흠종이 원하지 않아도 황위를 돌려줘야 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 위기 상황에서 포로로 끌려가는 아버지와 형을 내팽겨치고 함부로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을 문책당하고 재수없다면 끔살당할 수도 있다는 점 등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훗날, 명나라 시절 정통제토목의 변으로 잡혀갔을 때 경태제가 등극해 위기를 수습했지만, 송환된 정통제가 경태제의 와병을 틈타 다시 황위를 가져가고 경태제는 폐위당한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더군다나 정통제는 황위에 복귀한 뒤 경태제 옹립에 공이 큰 우겸[5]을 죽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송 고종을 옹립한 신하들 역시 휘종과 흠종의 귀환을 두려워 했을 것이다.
송나라가 금나라와 강화한 뒤 휘종의 시신만 귀환하였다. 고종의 정통성에 걸림돌이 되는 형 흠종과 적모 현숙황후 정씨는 죽어서도 고국 땅에 돌아오지 못했다. 고종의 친모 위씨는 이때 송나라로 귀환했고 임안의 궁궐에서 20여년 동안 호화롭게 살았다.
위씨는 휘종의 후비로 금나라 오국성에 있을 때 휘종의 다른 후비였던 귀비 교씨와 의자매였다. 송환이 결정되자 교씨는 위씨를 축하해 주었다. 교씨는 울면서 자기는 돌아가진 못해도 위씨에게 이곳에서의 생활과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말했다. 위씨는 잊지 않겠다고 말했고 다음날 아침에 금나라 군대의 호위를 받아 송나라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이 때 흠종 역시 서모 위씨에게 송나라로 돌아가면 동생 고종에게 자신은 ‘황제 자리 따윈 필요없고 그냥 평범하게 살겠으니 제발 고향 땅에 돌아가게만 해달라’고 울면서 말했다. 위씨는 흠종에게 그러겠다고 말하고 마침내 귀향길에 올랐다. 당시는 한여름이라 무척 더웠는데 짜증이 난 금나라 군사들이 그냥 다 때려치우고 돌아가려고 했다. 위씨는 이대로 돌아가면 다시는 탈출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여 송나라에 도착하면 은상을 베풀겠다 약속하고 사자를 보내 장준에게 재물을 빌려달라 요청했다.
그러나 장준은 함부로 나라의 재산을 쓸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 위씨는 간신히 송나라로 돌아와서 약속한 은상을 겨우 베풀 수 있었다. 그리고 마중 나온 고종에게 이 사실을 고자질했다. 분노한 고종은 장준을 죽이려고 했지만 좌우의 만류로 포기했다.
위씨는 돌아와서 연일 호화 잔치를 열었는데 차츰 고달프고 힘들었던 금나라에서의 연금 생활과 교씨, 흠종 같은 문젠 잊어버렸다. 처음에는 흠종 송환을 몇 번 얘기했지만, 나중에는 그냥 덮었다. 흠종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오국성에서 생을 마감했다. 관에 실려 돌아온 휘종은 영우릉에 안장되었다. 위씨는 아들 고종과 호화 잔치를 열면서 남편 휘종이 어쩌다가 나라를 잃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죽은 후에도 호화로운 장례로 영우릉에 합장되었다.
고종은 1162년에 양위했으며 1187년에 죽을 때까지 25년 동안 상황으로 지내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다. 죽은 후에는 영사릉에 안장되었는데 다른 남송의 황릉들처럼 남송이 망하고 1285년 양련진가가 도굴했다. 당연히 이때 황제와 후비들의 유해는 황야에 버려졌는데 휘종과 위씨가 합장된 영우릉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이건 원에서도 문제가 되었고, 양련진가는 결국 처형당했다.
자칭 유복공주라는 사람이 자신이 금나라에서 탈출한 고종의 누이라고 사칭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퍼져있는데 이것은 정사가 아니라 야사이다. 송사 환관 풍익전에 유복공주를 사칭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그냥 민담이다.

2.3. 고려와의 관계


1127년 정강의 변으로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이후 고종이 송나라를 재건하여 남송 시대에 접어든 이듬해(1128), 남송 조정에서 절동로 마보군도총관 양응성이 고종에게 “제가 고려로 가서 우호를 돈독히 하고 금나라로 잡혀간 전 황제와 상황을 구할 기회를 도모하겠습니다.”라고 청하니, 고종이 양응성을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6월 양응성이 고려 국왕 인종에게 어록을 올려 “여진(금나라)으로 가는 길을 빌려주십시오”라고 했고, 인종이 이에 답장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송사》에 더 자세히 나와 있는데 남송의 양응성이 인종을 알현하여 여진(금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고 설득하자 인종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조(송나라)는 본시 산동에 길이 있는데 어찌 등주를 경유하여 여진으로 가지 아니하는가? <송사>

인종이 “그냥 송나라 등주를 경유해서 가면 되잖아?” 하고 거절하자 양응성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귀국(고려)의 길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송사>

당연히 고려 조정과 인종은 이런 대답에 어이없다고 생각했는데, 《송사》에서도 인종이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이후 인종은 문하시랑 전일을 양응성에게 보냈는데 여기에서도 양응성을 만난 전일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고려가 송나라 일에 끼여들 수 없고, 고려가 해줄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양응성이 “여진은 수전에 익숙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니, 전일은 “여진은 항상 바닷길로 왕래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여진은 옛날 신하로서 본국[6]

을 섬겼지만 지금은 우리가 도리어 신하로서 여진을 섬기고 있으니[7] 그 강함과 약함을 알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 <송사>

이후에도 인종은 며칠 후 다시 중서시랑 최홍재와 지추밀원 김부식 등까지 보내서 고려의 입장을 재확인다.

이성[8]

께서 현재 연운에 계신 이상, 대조(송)에서 국토를 여진에게 모조리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성을 맞아 올 수 있다고 할 수가 없을 겁니다. 어찌해서 병사를 훈련시켜 여진과 싸우지 않습니까? <송사>

위 말처럼 고려는 양응천에게 “지금 잡혀간 두 황제는 송나라가 나라 전체를 여진(금나라)에게 들어서 바쳐도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고, 끼여들 이유도 없다. 그러니까 너희 나라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금나라를 공격해라.”라고 돌직구를 날렸다. 이후 양응성은 별 소득도 얻지 못하고 2달여간 고려에 머물다가 인종에게 표문을 받아 남송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양응성이 10월 귀국해서 보고하며 고려 측 입장을 전하자, 고종은 ‘고려가 은혜를 저버렸다.’면서 크게 화를 내었다. 이에 우복야였던 황잠선은 고종에게 ‘우리가 큰 함선에 정예병 수만 명을 태우고 가서 고려 수도를 공격하면 두려워할 겁니다.’라고 고려 침공을 건의하기도 했다.[9] 허나 이 발언이 나온 뒤,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상서우승 주승비가 ‘바다를 건너가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된다.’고 말하며 자존심 상한 고종의 화를 풀어주어 고종이 화를 가라앉혔다.
이후 고려는 11월 남송에 사신을 보내 이를 사과했다. 이후 조공품을 보내거나 고려로 도망갔던 송나라 사람들을 되돌려보내는 등 노력을 했음에도 전처럼 사이가 좋아지진 못했다. 1163년 이후로는 양국 모두 사신을 보내지 않았고 사실상 단교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도 할 말은 있었다. 과거 고려가 거란과의 3차례 걸친 전쟁에서 송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송이 3차례 모두 거절한 과거가 있는 만큼, 고려 또한 송을 신뢰하지 못했고 먼저 신의를 깬 쪽은 송이었다.

3. 평가


예술가, 서화가, 서예가로서는 독보적이고 창의적이었던 휘종의 아들답게 고종은 서화 감상에 능하였으며 특히 서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이런 성향 외에도 아버지 휘종이 간신 채경을 총애했듯 진회를 총애해 악비를 처형하는 등 진회의 20여 년 공포 정치를 방관해버렸다.
송고종을 옹호하자면 악비한세충 같은 군벌은 황제의 만류에도 군벌들끼리 치고 받는 싸움이 자주 있었고, 개인 사병을 갖고 있어 황제 입장에선 위협 요소였다. 이들의 군권을 회수할 필요성이 있었다. 또 남송 지역에 발생하던 반란 세력도 진압해야 하는 상황에서 북벌을 주장하는 악비의 뜻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10]
휘종에 비해 다행인 것은 금나라의 대대적인 공습을 채석기 전투 등에서 막아냈고, 금에 칭신하며 조공을 바치는 등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 체면을 구기긴 했지만 금과 화친을 맺어 어찌됐든 남송을 지켜냈다는 점이다. 고종 입장에선 상기된 고려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 금을 처단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겠지만 현실적으로 안 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11]
고종은 채석기 전투 이후 몇 개월 안 가 양자 송효종에게 양위하고 본인은 25년 동안 상황(上皇)으로서 유유자적했다. 이때 사치스로운 생활로 인한 비판도 있지만, 그래도 고종의 뒤를 이은 효종이 남송 시절 재위했던 역대 황제 중에선 가장 뛰어난 명군이라 남송은 내실을 정비할 수 있었다.[12] 후계자 잘 둔 덕분에 다른 고종 시호를 받은 쪽보다는 사정이 나았다는 말도 있다.[13]
조선선조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초기에는 악비에게 집을 하사하고 정충이라는 시호를 내리며 아꼈고, 선조 역시 이순신을 대신들의 반대에도 7계급이나 파격 승진을 시키며 아꼈지만 고종은 악비가, 선조는 이순신이 공을 세우자 질투하는 쪼잔한 모습을 보인거 역시 비슷하다. 게다가 선조, 고종 모두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좋은 평가를 받았고 장수들이 군벌화 될까봐 걱정했던 것도 비슷하다.
송고종을 선조보다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송고종이 악비 뿐만 아니라 악비의 측근 가족까지 보복을 가했다는 것을 주 요인으로 들고 있다. 그에 비해 선조는 일선의 장수들과 의병장들은 경계했지만 최소한 목숨은 거두지 않고[14] 철저히 죄를 따져 처벌했다. 그리고 군벌로 변질될 수 있는 의병들을 중앙군의 편제에 넣으며 유연하게 통제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죽을 때까지 전후복구를 위해 힘썼다.
반대로 고종이 비록 정치적으로 악비를 숙청하면서 군벌 숙청의 희생양으로 삼았지만, 정강의 변 이후 대륙의 군벌세력들은 조선의 장군들과는 차원이 다른 권력을 쥐고 있었으며, 실제로 군벌 세력들은 항저우까지 포위하기도 하는 등 금나라보다 더욱 큰 위협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내부 안정을 중시한 고종이 왕실에 칼을 들이민 군벌들에 대한 경계심이 선조보다 컸으면 컸지 작을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둘이 겪은 상황과 배경 자체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배제한 채 겉으로만 드러나는 행적을 보고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전후 처리에 있어서 고종도 노력을 안한것은 아니다. 금나라군의 양쯔 강 도하를 막기위해 해군력을 강화시켰음은 물론, 내부 안정을 다지는데 주력했음은 변함이 없다. 임진왜란 이후 해군력이 발전하지 못한 조선과 달리 남송의 해군은 남송-몽골 전쟁 초중반까지 동아시아 최강의 해군으로 군림하게 된다.

4. 대중매체에서


수호지의 후속작인 수호후전 후반부에도 등장한다. 금나라의 침입으로 위기를 맞았을 때 섬라국에 있던 양산박 호걸들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뒤에 이준을 섬라국왕으로 봉한 것을 비롯해 생존한 호걸들 모두에게 벼슬을 주었고 송강, 노준의 등 사망한 호걸들에게도 작위를 내렸다. 살아 있기는 했지만 섬라국으로 가지 않고 육화사에 남은 무송에게도 형식적이기는 했지만 벼슬을 내렸다.
총69부작으로 제작된 중국 사극 정충악비에서 등장한다. 고종 조구 역할을 맡은 배우는 딩쯔쥔. 드라마 초기에는 황족으로서의 위엄을 보여 금나라 사신의 기를 죽이고 정강의 변 후에는 북벌을 기치로 황제가 되었으나 송의 국력에 비해 넘사벽인 금나라의 현실과 송나라 군부의 폭주인 묘부의 변으로 일시적으로 폐위되면서 초심을 잃고 사치에 빠진 암군이 되었고 북벌을 주장하는 악비와 크게 갈등하다가 끝내는 진회의 세뇌에 넘어가 악비를 처형하고 만다.
만화 소녀침경(화타위전)에서 백성들에게서 떠도는 소문에 처형당한 악비가 살아있다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며, 진회가 금나라에 화친을 한다면서 바칠 공물에 대해 이야기하자 1년은 고사하고 당장에 준비하기 힘들다고 했다. 또한 금나라 황제 앞에서 신하의 예를 갖추어 금나라가 송나라의 주인임을 공표해야 한다고 하자 치욕적이라면서 악비의 말을 듣고 같이 싸워야 했다고 후회한다. 그리고 진회에게 책임을 물려고 했다가 진회가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자 파직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 순간 송 고종의 몸이 썩고 눈알이 튀어나온다. 송 고종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던 것. 진회가 송 고종에게 허수아비는 그냥 그 자리에 앉아있기만 하면 된다면서 부하들에게 시켜서 금황구침으로 송 고종을 다시 살려놓게 한다.
2016년작 드라마 도깨비의 스토리가 송고종과 악비, 진회의 관계가 모티브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 따르면 고려 왕 왕여의 모티브는 바로 송고종이라는건데 극의 설정상 김신(악비), 왕여(송고종), 박중헌(진회) 간의 인물 관계로 따지면 나름 매칭이 된다. 결론은 악비, 송고종, 진회 이 세명을 토대로 삼고 숭정제가 원숭환을 처형한 사건을 인물들에게 대입하면 나름 맞아 떨어진다.

5. 둘러보기(계보)


'''조송의 역대 황제'''
9대 흠종 현황제 조환

'''10대 고종 헌황제 조구'''

임시 원의태자 조부

임시 원의태자 조부

'''(복위) 10대 고종 헌황제 조구'''

11대 효종 성황제 조신
'''남송의 역대 황제'''
조송 재건

'''1대 고종 헌황제 조구'''

임시 원의태자 조부

임시 원의태자 조부

'''(복위) 1대 고종 헌황제 조구'''

2대 효종 성황제 조신

[1] 북송남송은 같은 왕조이므로 여기서는 10대로 표기한다.[2] 휘종의 아내들을 비롯한 많은 황족 여성이 세의원(洗衣院)으로 보내졌다. 세의원이 금나라의 기방이고, 금나라에서 모욕을 주기 위해 송나라 황족 여성들을 이곳으로 보내 창기(娼妓)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송사나 금사에 기록된 내용이 아니다. 정사가 아닌 야사이다.[3] 대가 끊긴 것이 아니라 황위 계통이 끊긴 것이다. 당장 태종의 후손으로는 남송의 재상이었던 조여우가 있는데 이 사람은 태종의 폐태자 조원좌의 후손이었다.[4] 고종의 모후였던 현인황후는 입궁할 당시 휘종의 궁녀였다. 1107년에 휘종과 현인황후 사이에 고종이 태어날 때 고종은 휘종의 서자였다.[5] 우겸은 위기 수습을 잘해낸데다 청렴하고 나라에 충성하여, 정통제가 죽인 뒤에 후회할 정도로 훌륭한 신하였지만, 정통제에게는 역적일 수밖에 없었다.[6] 고려.[7] 금이 칭신을 요구하자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이자겸 일파가 요구를 수락했다.이자겸 일파가 쫓겨난 후에도 계속 칭신하였다.[8] 휘종, 흠종.[9] 다만 이 말은 당시 남송의 상황을 생각해볼 때 현실성 없는 주장이었다. 심지어 금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던 고려까지 송의 적으로 돌려버리는 그야말로 자충수가 될 수도 있었다. 즉, 남송 멸망 크리를 각오하고 시행해야 하는 무리수였던 것. 따라서 황잠선의 이 발언은 애당초 자신들조차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화는 나니 울분을 토한 표현 정도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10] 당시 중국 강남은 불과 1120년에 방랍의 난이 있었던 지역이고, 이때의 강경 진압으로 3백만 명 내외로 추정되는 희생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은 송 조정에 대한 반감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11] 실제로 송 고종 사후 국력을 회복한 남송은 여러 차레 북벌을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대다수는 처참하게 패했다. 심지어 금나라몽골 제국에게 무너지는 와중에도 북벌했다가 역으로 박살났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12] 효종도 영토수복에 대한 의지가 있어 북벌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당시 금 역시 금 세종이 즉위하며 리즈 시절이었던터라 사실상 실패하고 만다.[13] 물론 고종이라도 청 고종 건륭제처럼 뛰어난 인물도 있긴 했다. 건륭제가 말년으로 갈수록 청나라가 망하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어찌됐든 송 고종보다야 뛰어난 인물이었다.[14] 예외는 이산겸과 김덕령 정도인데, 이산겸은 군사를 모아 놓고 왜군을 토벌하러 움직이지 않아 송유진의 난 전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고 김덕령은 이몽학의 난 가담자 다수로부터 공통적으로 이름이 거론되어 같은 당파인 서인에서조차 극형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