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각민황후
1. 개요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황후이자 '''청나라, 그리고 중국의 마지막 황후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효정경황후를 마지막 황후로 쳐주기도 한다. 그 이유는 효각민황후가 황후가 된 것은 청나라가 멸망하여 소조정만 남겨진 상태의 시기기 때문이다. 이름은 완용(婉容).[1]
2. 생애
효각민황후는 1906년 11월 13일에 내무부 대신 곽포라 영원의 집에서 태어났다. 완용의 어머니는 황족인 애신각라씨이며 종친인 다라정군왕 부후(多羅定郡王 溥煦)의 손녀다. 하지만 어머니가 완용을 낳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사망하면서 곽포라 영원은 또다시 정권왕의 손녀인 항향(恒香)에게 새 장가를 들게 되었다. 완용의 어머니는 넷째 딸이고, 항향은 둘째 딸이었다. 새어머니가 원래는 이모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완용과 항향과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
게다가 곽포라 영원은 당대의 사람들 중에서는 깨어있는 사람인지라 딸에 대한 교육에 소홀히하지 않았는데 특히 중국에서 태어난 미국인 교사인 이자벨 잉그램(Isabel Ingram)을 초청하여 영어를 배우고, 여러 가지 신식학문들을 익혔으며 이 때문에 영어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2.1. 이미 망해버린 나라의 황후가 되다
1922년에 만 16세가 된 완용은 만주족이[2] 라서 선통제의 황후가 될 아가씨를 뽑는 수녀선발에 나가게 된다. 그러다가 단강황귀비 타타랍씨(端康皇贵妃 他他拉氏)[3] 가 강렬하게 완용이 선통제의 황후가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여 완용이 황후가 되었다. 당시 완용과 더불어서 황후가 될 후보 1순위였던 아가씨가 바로 악이덕특 문수(鄂爾德特 文綉)였는데 그녀도 완용처럼 집안이 좋았지만 단강황귀비의 의견에 따라 완용이 황후가 되었으며 문수는 숙비(淑妃)에 봉해졌다.[4]
하지만 10년 전인 1912년에 청나라는 신해혁명으로 인해 패망하였고, 중국은 군주제가 폐지된 상황. 자금성에 있는 청나라 소조정은 중화민국으로부터 옛 왕조의 권위만을 인정받고 있고, 황제 또한 외국 군주의 예우를 받을 뿐이었다. 그러니 선통제와 완용의 혼례는 옛 시절 황제의 대혼례로 행해졌다. 그리고 완용은 중화민국 정부에서 특별히 준비해놓은 봉황이 그려진 마차를 통해 동화문에서 자금성으로 들어갔으며 1922년 11월 30일에 완용은 청나라 마지막 황후가 되었다.
2.2. 자금성에서의 생활
완용과 부의의 결혼은 불행으로 판명되었다. 처음에 자금성에서의 생활은 그녀를 위한 일상적인 의식과 예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종종 그녀의 가정교사 이자벨 잉그램과 함께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했다. 푸이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려고 들르거나 장난을 치거나 완용에게 전화를 걸어 자주 공부를 방해하곤 했다. 이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완용은 헌신적인 학생으로 남아 그녀의 진행으로 가정교사를 놀라게 했다. 완용은 친구들과 가족들의 방문도 수시로 받았다. 그녀는 사진찍기, 추리소설읽기, 피아노치기, 영어쓰기를 즐겼다.
일부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부의와 완룽은 결혼 생활을 그만두지 못했고 자식도 없이 지냈다. 완용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하이퍼포커스(Hyperfocus)와 강박장애(OCD)로 나타난다. 이는 이사벨 잉그램이 가장 두드러지게 증명하는데, 그녀는 완용이 공부와 오르간 연주와 같은 일에 몇 시간 동안 집중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녀는 아편과 담배를 피우며 스스로를 구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부의의 허락을 받아 아편을 피우기 시작했고, 점차 아편에 중독되었다. 1923년 12월, 그녀는 기근 구호 노력에 600개의 은화를 기부했고 전 세계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2.3. 톈진으로 가다
1924년 북경정변으로 인해 청나라 황실 우대조건이 파기되자 부부는 자금성에서 추방당하고 각국의 보호도 거부당한다. 부부는 순친왕부로 옮겼지만 이미 순친왕부는 대가족이 살고있어 시끄러운 상태라 부의와 완용은 둘이서 조용히 살게 해주겠다는 일본의 꾀임에 넘어간다. 톈진의 일본조계 장원으로, 1929년에는 다시 정원(静園)으로 이주한다. 국공내전의 영향은 톈진에 크게 미치지 않았고, 자금성을 벗어나 인습에 구애받지 않고 일본의 간섭이 깊어질 때까지 부부는 현대식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문수가 장원을 탈출해 이혼하면서 부의와 완용의 부부 사이는 악화된다. 부의는 문수에 대한 애정은 없었으나 완용이 문수를 쫓아낸 결과, 이혼으로 황제의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부의는 자금성에 살 때부터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완용의 소원이기도 했던 해외탈출의 꿈을 접고 복벽에 집착하게 된다. 그런 남편에 대한 울적한 기분을 풀려던 완용은 아편에 손을 내밀어 결국 중독 증세를 보이게 된다.
2.4. 사망
완룽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선통제의 회고록에는 1945년에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 헤어졌으며 그때 완룽은 이미 마약 중독으로 병약해진 상태라[5] 1946년에 길림성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완룽과 함께 있던 사가 히로 등 다른 사람들은 죄다 선통제와 다른 주장을 하였고, 완룽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게 되었다.
[1] 만주어로는 완룽이라고 한다.[2] 엄밀히 말하자면 다우르족 출신이다.[3] 광서제의 후궁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효정경황후를 대신하여 자금성을 관리하고 있었다. 진비의 언니이기도 하다.[4] 원래 수녀선발에서 탈락하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수 있지만 문수는 선통제의 마음에 들었는지 바로 비로 간택되었다.[5] 사가 히로의 회고록에 의하면 완룽이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며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에 뒹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