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정변
1. 개요
1924년 10월 23일, 2차 직봉전쟁 중 직예군벌에 충성하던 펑위샹이 우페이푸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봉천군벌의 장쭤린과 결탁하여 일으킨 쿠데타를 말한다. 간체자로 北京政变으로 표기하며 북경사변, 수도정변이라고도 한다.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쪽에서는 수도혁명이라는 표현을 쓴다.
2. 배경
1922년 1차 직봉전쟁에서 장쭤린의 봉천군벌과 쑨원의 중국 국민당의 도전을 물리친 직예군벌은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 이들은 수령인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추대하기 위해 안복국회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1917년 장훈복벽으로 해산된 구국회를 복구하여 대총통 쉬스창을 퇴출하고 리위안훙을 총통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1년 만에 리위안훙을 압박하여 쫓아내고 1923년 10월에 회선 사건이라 불리는 뇌물선거로 차오쿤을 중화민국 6대 대총통으로 옹립했다.
한편 1922년 5월 14일, 직예군벌 휘하의 펑위샹은 봉천군벌과 연합하여 직예군벌에 맞섰다가 쫓겨난 자오티를 대신하여 하남독군에 취임했다. 하지만 펑위샹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우페이푸는 펑위샹에게 혼란한 안휘성을 진정시킨다는 구실로 10월에 안휘독군으로 옮기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기존 안휘독군 장문생의 반발을 샀다. 이 때문에 펑위샹은 하남독군과 안휘독군 자리를 모두 잃고 차오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지만 혼란한 베이징의 치안을 안정시키는 데는 펑위샹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차오쿤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베이징의 육군검열사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접에 불만을 품은 펑위샹은 장쭤린, 돤치루이와 밀모하며 우페이푸에게 반기를 들 생각을 하게 되었다.
3. 전개
3.1. 펑위샹과 장쭤린의 내통
1922년 10월 31일, 펑위샹은 육군 검열사로 발령받아 남원에 주둔했다. 우페이푸는 매월 120만원의 군비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펑위샹은 병사들에게 정치교육을 행하며 엄히 조련하여 강한 기율을 가진 부대로 만들며 기회를 도모했다. 그러던 중 1923년 봄, 봉군 사령부 참모처 부흥패가 장쭤린의 밀명을 받고 베이징을 방문했다. 부흥패는 펑위샹의 참모장인 유기의 육군대학 동창으로 평소부터 유기와 자주 왕래하던 사이였는데 유기를 만나는 척 하며 유기에게 펑위샹과의 만남을 주선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유기는 펑위샹을 찾아가며 유기에게 만약 자신에게 전화가 온다면 즉각 남원의 검열사 관저로 오고 그렇지 않다면 봉천으로 달아나라고 한 다음에 펑위샹을 찾아가 부흥패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렸다. 펑위샹이 부흥패를 만나겠다고 하자 유기가 부흥패에게 전화를 걸었고 부흥패가 즉시 남원으로 가서 펑위샹을 문안했다. 펑위샹은 베이징엔 이목이 많으니 일단 봉천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이어 펑위샹과 접촉한 것은 베이징의 순승왕부 관저를 관리하던 장쭤린의 부관 마병남이었다. 마병남은 펑위샹의 교제처장 장수성의 친구였는데 또한 과거 펑위샹이 20진 보병 중대장 시절에 마병남은 연대 서기관을 지내 펑위샹과도 안면이 있었고 둘다 기독교도라 종교적으로도 친밀했다. 마병남은 장수성과 긴밀히 접촉하며 펑위샹이 봉천군벌과 연계하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했고 이후 직예군벌이 장쭤린의 순승왕부 관저를 몰수하면서 봉천으로 돌아가게 됐는데, 봉천으로 돌아가 장쭤린에게 펑위샹이 장쭤린과 함께 하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장쭤린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마병남을 다시 베이징에 보내 마침 결혼식을 올리던 펑위샹의 하객으로 위장하게 했다. 남의 의심을 사지 않게 위해 베이징 공익연합회 총간사 유석렴과 동행한 마병남은 전 베이징 기독교청년회 간사 자격으로 장쉐량을 대표하여 결혼식에 참여했다.
예식 이후 장수성과 마병남이 펑위샹을 만나 장쭤린의 합작 의사를 타진했고 그 말을 들은 펑위샹은 껄껄 웃으며 "큰 일 하느라 당신의 책임이 많겠구먼."이라고 했다. 이렇게 펑위샹과 장쭤린의 합작이 성사되면서 장쭤린은 펑위샹에게 일본돈 200만 엔과 여러 군수품을 제공하는 등 비밀리에 펑위샹을 원조했다.
3.2. 2차 직봉전쟁의 발발
1924년 9월 3일, 안휘군벌인 절강독군 루융샹과 직예군벌 사이에서 강절전쟁이 일어나자 봉천의 장쭤린은 루융샹과의 동맹관계를 이유로 관내진출을 행했다. 이에 대총통 차오쿤은 9월 10일 우페이푸를 베이징으로 불러들이고 9월 17일 장쭤린 토벌령을 내리고 우페이푸를 토역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본격적으로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우페이푸는 육군검열사 펑위샹을 3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적봉으로 나와 고북구, 승덕을 경유해 동몽골 지역으로 돌아 봉천군벌의 배후를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만약 승리한다면 펑위샹에게 흑룡강성을 주겠다고 구슬렀다. 이에 펑위샹은 유기를 통해 대외적으로는 중앙의 명령에 복종하여 출병하겠다고 선포하여 우페이푸를 안심시켰지만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인 장소증을 통해 마병남에게 실은 병력 이동을 하지 않을 것이니 장쭤린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전했다. 장소증은 신해혁명 시절에 20진의 통제로 펑위샹과 친분이 깊었다. 그런 장소증을 통해 마병남은 양위팅, 장쭤린 등에게 펑위샹의 계획을 전했고 이에 장쭤린과 양위팅은 장소증, 펑위샹, 근운붕에게 편지를 주어 만약 평화가 이루어진다면 산해관을 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풍군과 봉군이 접전한다면 허공에만 사격하여 서로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며 풍군이 홍포 완장을, 봉군이 흑포 완장을 차서 서로 식별하기로 하였다.
1924년 9월 13일 조양사 전투를 시작으로 열하, 산해관 전역에서 봉천군대가 잇달아 승리하였다. 우페이푸가 직접 산해관으로 나아가 독전했지만 현대화와 장교 육성을 통해 강력해진 봉천군벌을 이기기는 쉽지 않았다. 우페이푸가 공군과 해군을 동원하여 봉천군의 배후를 기습하기 위한 계획을 짜는 동안 후방에서는 펑위샹이 그간의 원한을 설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펑위샹은 2로군 1사단장 호경익과 15혼성 여단장 손악과 모의하였다.손악은 안직전쟁, 1차 직봉전쟁에서 군단 교육단단장, 직예 의용군 사령관 등을 역임하며 군공을 쌓았지만 15혼성 여단장과 대명 진수사 자리만 얻어 우페이푸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1924년 9월, 손악은 펑위샹이 건립한 소충사 낙성식에 참여하여 직예군벌에 반기를 들 '초정밀의'라는 비밀논의를 하였다. 여기에 펑위샹, 손악의 친구인 호경익은 심복 악유준을 보내 여기에 끼어들었다. 북방의 전황이 직예군벌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펑위샹은 차오쿤에게 왕회경의 13사단이 전방으로 출동하여 베이징의 방위가 비었으니 손악의 15혼성여단을 불러들여 베이징을 사수하자고 건의했고 차오쿤은 동의하여 연합경기경비부사령관에 임명했다. 손악은 베이징에 입성하여 펑위샹에게 이렇게 말했다.
9월 17일 3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펑위샹은 18일 장지강 여단을 선두로 열하를 향해 출병, 이어 쑹저위안, 유욱분, 이명분 등을 잇달아 보내고 마지막으로 녹종린을 보내 24일까지 부대를 모두 출격시켰고 1개 중대를 베이징 성내 전단사에 주둔시키고 심보고 장홍우를 베이징 위수 사령 겸 병참총감으로 삼아 후방을 지키게 하고 하남에서 신병 1만명을 모집하게 하여 3개 여단을 보충하여 손량성, 장유새, 장홍우 여단에 나누어 배치하고 훈련이 덜 끝났다는 구실로 출병시키진 않았다."특별히 저를 베이징으로 오게 한 것은 성문을 열어 두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3.3. 펑위샹의 회군
준비를 마친 펑위샹은 9월 24일 회유를 향해 출발했지만 일부러 각 부대로 하여금 느리게 진군하게 했다. 회유에 도착해 3군 사령부를 설치한 펑위샹은 28일에야 밀운에 도착, 장홍우를 밀운으로 불러 회군에 대해 논의했고 10월 1일 고북구에 도착했다. 이는 정상적인 행군속도보다 2배 이상 느린 속도였다. 펑위샹은 잠시 진군을 멈추어 도로를 수리하고 방비를 갖추는 한편 녹종린에게 베이징을 향해 행군 연습을 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호경익이 2로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우페이푸는 호경익에게 왕희경 부대를 지원하라고 지시했지만 호경익도 출정을 지연하였고 그 사이 펑위샹은 돤치루이, 장쭤린과 연락하며 역습의 시기를 도모했다. 우페이푸는 펑위샹을 감시하기 위해 부총사령관 왕승빈을 보냈지만 우페이푸와 친밀하지 않던 왕승빈은 도리어 펑위샹과 한패가 되었다.
10월 11일 펑위샹과 참모장 유기, 웅빈은 고북구에서 란평으로 이동하여 돤치루이의 대리인 가덕요와 회담했다. 봉천군 리징린 역시 장쭤린에게 무전으로 지시를 받고 펑위샹 부대를 공격하지 않았다. 장쭤린은 펑위샹과의 연계를 위해 산해관을 강타했고 우페이푸가 산해관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장홍우가 알려오자 펑위샹은 때가 되었음을 알고 10월 19일 장지강, 녹종린, 이명중, 유욱분, 유기, 등옥산 등을 소집하여 회군을 선언했고 이에 장령들이 모두 지지했다. 펑위샹은 녹종린에게 즉시 밀운에서 베이징으로 회군하고 손량성, 장유새에게 녹종린을 지원하게 했다. 또한 북원에서 장홍우와 합류해 베이징에 입성해 베이징 경비를 맡게 했다. 또한 이명중에겐 고북구에서 장신점으로 이동해 경한선, 경봉선의 교통을 끊고 희봉구의 호경익에게는 남으로 돌아 란주와 군량성을 점령하여 직군을 끊어 우페이푸의 회군을 막게 했고 손악에게는 차오쿤의 경호부대와 우페이푸의 잔여 부대를 감시하게 했다. 이어 승덕의 장지강, 쑹저위안에게도 기일에 맞춰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10월 22일 펑위샹 휘하 22사단이 북원에 도착하였고 녹종린, 장홍우, 손량성, 장유새가 여단장 회의를 열어 저녁 8시 베이징을 향해 회군을 시작했다. 0시에 녹종린이 베이징 안정문에 도착했고 손악의 수비병들이 문을 열었다. 10월 23일 새벽 1시, 기차역, 신문사, 전화국 등 모든 교통, 통신 기관들이 펑위샹의 병사들에게 점령당했다. 펑위샹의 군사들은 각 길목들을 점거하여 자동차를 배치하여 통행을 금지하였다. 이때 차오쿤의 동생 조예와 측근 이언청 등이 모두 총살당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등 베이징의 긴장은 높아져 갔다.
3.4. 베이징 함락
10월 23일, 민폐금지, 애민, 결사보국 등의 완장을 두른 펑위샹의 병력이 총통부를 포위하고 각 대문과 여러 교통요지에 배치되었다. 베이징에 잔류했던 총통 경호대와 조사걸 여단은 모두 무장해제되었고 펑위샹은 호경익, 손악과 연명으로 평화를 요구하는 전문을 발표했다. 10월 24일, 펑위샹은 설독필을 차오쿤에게 보내 정전령을 내리고 우페이푸의 모든 직위를 박탈할 것을 요구했다. 도리가 없던 차오쿤은 펑위샹의 요구를 수용하였고 우페이푸를 청해성 독판으로 좌천시켰다.
10월 25일 펑위샹은 중화민국국민군회의를 개최하여 휘하의 부대를 국민군으로 개칭하고 자신이 국민군 총사령관 겸 제1군 군단장으로 추대되었으며 호경익을 부사령관 겸 제2군 군단장, 손악을 부사령관 겸 제3군 군단장에 임명했다. 또한 휘하의 쑹저위안을 사단장에 임명하고 녹종린, 한푸쥐, 유여명, 석경정, 스여우싼, 풍치안, 쑨롄중을 여단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쑨원을 북으로 초청하였다.
같은날 펑위샹은 북원회의를 개최, 원로회의를 열어 임시 내각을 조직할 것을 결의했다. 펑위샹의 요구에 따라 옌후이칭 내각이 사퇴하고 황부가 국무총리 겸 교통총장에 임명되면서 황부 내각이 들어섰다. 왕정팅이 외교 겸 재정총장, 왕영강이 내무총장, 이서성이 육군총장, 두시구이가 해군총장, 장요증이 사법총장, 왕내빈이 농상총장, 이배기가 교육총장에 임명되어 연립내각이 조성되었는데 두시구이와 왕내빈은 부임하지 않았다.
11월 2일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차오쿤이 하야하고 국무총리 황부가 총통을 대행하면서 직예군벌의 시대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우페이푸는 진황도에서 펑위샹 토벌을 선언하고 차오쿤의 정전령이 가짜라고 주장했지만 펑위샹과 장쭤린의 협공에 전멸당하고 도주길에 올라야 했다. 이후 11월 8일 장쭤린이 베이징에 입성하자 펑위샹은 11월 9일 돤치루이의 초청을 받아 톈진으로 갔고 11월 10일 장쭤린도 톈진으로 이동, 오후에 돤치루이의 자택을 찾아 돤치루이를 베이징으로 초청하였고 11월 15일 돤치루이를 중화민국 임시총집정에 추대하였다. 11월 22일 돤치루이는 베이징에 입성하여 11월 23일 황부의 섭정내각을 해산하고 24일 임시집정에 취임했다. 잔류한 남방의 직예군벌들도 더 이상 차오쿤과 우페이푸에게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돤치루이 지지 통전을 보냈다.
3.5. 핍궁사건
이후 펑위샹은 1924년 11월 4일의 내각회의에서 선통제를 비롯한 청황실에 대한 예우를 폐지하기로 결정, 11월 5일 부하 녹종린을 보내 자금성을 점령하고 청실을 축출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문서 참조.
4.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중국 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자금성의 황혼, 레지널드 존스턴, 돌베개.
- 마지막 황제의 비사, 아이신기오로 푸제, 지영사.
- 民國初 地域(小)軍閥의 운명 : 河南 趙倜·馮玉祥政權(1914~1922年)을 중심으로, 손승회, 중국근현대사연구 19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中國의 軍閥政治 硏究(1916-1928), 최관장, 중국연구 20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5. 관련문서
- 부원지쟁
- 장훈복벽
- 1차 호법운동
- 호법전쟁
- 외몽골 출병
- 하남독군 교체 파동
- 안직전쟁
- 1차 직봉전쟁
- 담조전쟁
- 회선 사건
- 강절전쟁
- 2차 직봉전쟁
- 제노전쟁
- 선후회의
- 손봉전쟁
- 반봉사건
- 직봉풍전쟁
- 국민당의 1차 북벌
- 국민당의 2차 북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