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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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청나라 치하 몽골 마지막 대칸. 만주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이며 중국 최후의 이민족 황제이기도 하다.[6] 불과 3살에 즉위했다가 3년 만에 퇴위했다. 평민으로서 살다가, 일본 제국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황제로 옹립되어 지내다가 종전 이후 전범으로서 옥살이를 하게 된다.
만주족이 세운 왕조인 청나라의 황제였지만, 그가 할 줄 아는 만주어는 '일어서'라는 의미의 '일리' 밖에 없었다. 사실 이건 19세기 중반부터 청조가 본격적으로 기울기 시작하며 만주족 대신 한인들이 득세하고 만한병용, 만한합벽의 원칙마저 서태후가 폐지한 후엔 관료 사회에서도 만주인 대신 한어를 쓰는 한인들이 주류가 되면서 점차 심해지는 현상이었으나, 유아기에 신해혁명을 맞이한 푸이는 만주어를 조금이나마 배울 기회마저 얻지 못했고, 만주어를 배울 기회는 평생 다시 오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멸망한 국가의 마지막 황제는 다음 왕조가 묘호 등을 결정하지 않을 경우, 폐제로 인정되어 공식적으로는 황제 취급을 하지 않는다. 신해혁명으로 공화제를 기반으로 한 중화민국이 세워졌고, 당시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선통제의 묘호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사실 자금성에 선통제를 살려둔 이유 자체가 '''청나라의 황제를 상징적 황제로 둔다'''는 명분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 푸이는 명분이야 어떻든 만주사변 이후 괴뢰국 만주국이 세워지자, 일본에 협력했으므로, 묘호 같은 걸 줄 이유가 없다. 거의 모든 경우 푸이, 잘 불러 줘 봐야 선통제나 말제로 일컬어진다.
묘호는 두 가지가 있는데, 1967년에 대만에 있던 종친들로부터 헌종(憲宗)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2004년에는 공종(恭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시호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묘호와 시호 모두 인정하지 않고 손제(遜帝)[7] 라는 칭호로 부르거나 그냥 푸이라는 이름 그대로 부른다.
한호(만주식 군주 칭호)는 거훙거 요소 한.
휘는 아이신기오로 푸이(愛新覺羅 溥儀, 애신각라 부의). 만주어 발음으로도 푸이고 중국어 발음으로도 푸이이다.[8][9] 헨리(Henry)라는 영어 이름도 있는데, 푸이의 개인 교사였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이 헨리 8세의 이름에서 따서 붙여준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서양인들과 대화할 때만 잠깐 사용되었을 뿐이며, 중국에서는 잘 쓰이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청나라 때는 황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본명이 불릴 일이 거의 없었고, 제위를 잃고 평민이 된 후에는 그냥 푸이 선생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은 잘 쓰이지 않았다.
푸이의 이복동생 푸런(溥任, 1918년 8월 17일 ~ 2015년 4월 10일)은 이름을 한족식 이름인 진유즈(金友之, 김우지)로 바꿨다. 즉, 이름을 바꾸면서 성도 진(金) 씨로 함께 바꾼 건데, 현재도 많은 만주족들은 진씨 성을 사용한다.[10]
연호는 만주식으로 거훙거 요소, 중국식으로 선통(宣統). 만주국의 연호는 강덕(康德).
일생동안 신해혁명, 군벌들의 전쟁, 국민혁명,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까지 중국 근현대사의 굴곡이란 굴곡은 모두 다 겪으면서 살아남고 황제만 2번을 한, 20세기 중국에서도 손꼽히게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인물이다.
2. 생애
2.1. 즉위와 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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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순친왕과 선통제(사진 오른쪽에 서 있는 어린이)
청나라의 11대 황제였던 광서제의 이복 동생인 순친왕(醇親王, 1883년 ~ 1951년) 아이신기오로 짜이펑(愛新覺羅 載豊)과 구왈기야 여우란(瓜爾佳 幼蘭)의 아들로 태어났다.
큰아버지 광서제가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죽자 서태후에 의해 '''3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랐다. 아버지 순친왕이 아닌 어린 푸이가 즉위한 이유는, 당시 계승법상 황제는 하나의 항렬에 1명만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 순친왕은 형인 광서제와 같은 항렬이라서 황제가 될 수 없었다. 당장 전대의 광서제부터가 본래는 동치제의 사촌동생이라서 황제가 될 수는 없었으나 서태후가 억지로 옹립한 형태였다.
하지만 정작 서태후는 광서제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 급사했기 때문에 섭정은 아버지인 순친왕과 광서제의 황후인 효정경황후 예허나라씨(孝定景皇后 葉赫那拉氏)가 선통제가 집권하면서 융유황태후(隆裕皇太后)가 되어 공동으로 맡았다. 여담으로 어린 나이인 그가 긴 즉위식을 지루해하며 칭얼거리자 그를 품에 안고 있던 순친왕이 "곧 끝납니다, 곧 끝나요!"라고 달랬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청나라가 곧 망한다"는 말과 발음이 비슷했는데 그 말대로 그의 제위는 오래가지 못하고,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1912년 2월 12일 위안스카이가 푸이의 퇴위를 재촉하며 제시한 조건에 태후인 융유황후가 서명을 하는 것으로 폐위되고 만다. 민심의 혼란을 우려한 것인지 한동안은 협약 내용에 있던 대로 황제의 예우는 그대로 유지되었기에, 푸이는 궁전인 자금성 안에서 청나라 소조정의 황제로서 지내게 된다.
2.2. 복벽과 추방
이후 위안스카이는 1914년 11월 23일 복벽 정치 징치령을 통해 복벽파를 탄압하다가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선포함으로 자기 자신이 황제에 자리에 오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호국전쟁이 일어나면서 1916년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급사했다. 이후 남방에는 탕지야오, 루룽팅 등의 군벌들이 할거하고 북방에서는 직계와 환계가 위안스카이의 빈자리를 놓고 물어뜯고 싸우면서 푸이의 운명은 뒤흔들리기 시작한다. 1916년부터 국무총리 돤치루이와 대총통 리위안훙 사이의 부원지쟁이 격화되자 장강순열사 장쉰, 전 국무총리 쉬스창 등은 선통제를 복위시킬 것을 주장했는데 1917년 5월, 돤치루이 탄핵으로 내전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인 급박한 상황이 되자 장쉰이 정치를 중재한다는 목적으로 베이징으로 상경, 국회와 약법을 해산한 다음에 장훈복벽을 단행하여 1917년 7월 1일 선통제를 복위시켰으나 국무총리 겸 토역군 총사령관 돤치루이의 반격으로 얼마되지 않아 일수로 단 12일 만인 7월 12일에 도로 퇴위했다.
1924년 9월,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자 직예군벌 소속이었던 3로군 총사령관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켜 국민군 1군 사령관에 취임, 베이징을 점령하고 핍궁사건을 일으켜 <수정청실우대조례>를 체결하고 청황제의 존호를 폐지하여 푸이와 청황실을 자금성에서 내쫓아버렸다. 이 결정으로 중국은 돤치루이, 장쭤린 류의 푸이 복위파와 폐위 찬성파가 격렬한 대립을 벌였다. 어쨌거나 베이징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도 딱히 푸이를 도로 자금성에 데려오진 않았다. 푸이는 순왕부로 돌아가 기거하다가 1925년 2월 25일 텐진의 일본 공사관으로 이주했다.
1928년 6월 8일, 국민당의 2차 북벌로 국민혁명군이 베이징을 점령했다. 이어 1928년 7월 3일부터 7월 11일까지 장쭝창의 부하 출신인 군벌 쑨뎬잉은 국민혁명군에게 투항한 직후 베이징 동쪽에 위치한 동릉을 대대적으로 도굴했다. 이 사건으로 푸이는 격노했고 일본과 손잡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후 1931년 11월까지 톈진의 조계지에 거주하였으며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한 이후 일본에서 푸이를 옹립하여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장제스는 1931년 11월 2일 톈진에 거주하던 푸이에게 과거 북양 정부와 청나라 황실이 맺었던 협약을 다시 이행하겠다고 제안했다. 다시 자금성에 살게 해주고 품위 유지 비용을 대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난징 국민정부에 대한 불신이 깊었던 푸이는 이를 거절하고는 11월 8일 톈진사변으로 계엄령이 선포된 틈을 타서 일본군 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의 도움으로 11월 10일, 천진사변을 틈타 톈진을 떠나 일본에 합류했다.
베이징 시민들은 폭죽을 쏘며 푸이의 추방을 기뻐했다고 하는데, 청실 복고론자였던 레지날드 존스턴은 중국 내부에서 군주정의 인기가 드높았다는 기록을 많이 남겼다. 당시 중국 남방과 북방의 분위기도 다르고 시각도 워낙 치열하게 대립해서 상충되는 기록이 남아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남방의 공화주의자들은 푸이를 처형해야 한다는 둥 과격한 주장을 펼쳤고, 레지널드 존스턴은 만주국 건설조차 동방의 여명 운운하며 찬양할 정도로 좀 과도하게 군주정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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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진 망명 시절의 푸이와 완룽 부처.
2.3. 일본의 꼭두각시
만주국 선포 과정에서 장징후이 등은 짱스이를 만주국의 수령으로 내세워 공화국을 세우자고 주장했고 황족인 아이신기오로 시치아는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 반면에 산동성의 쿵더청을 데려와서 황제로 옹립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결국 선통제의 덕성을 시험하기 위해 먼저 집정에 취임시키자고 결정됨에 따라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집정(執政, 최고 통치자)이 되었다가 1934년부터 군주가 되었다. 물론 철저한 일본 제국의 꼭두각시였다.
한 예로 선통제 개인은 전통적인 청나라 황실 출신답게 불교 신자였음에도 일본의 강압으로 신토가 만주국의 공식 국교가 되었다. 다른 예로 도쿄에 가서 쇼와 덴노를 만났을 때는 날씨가 맑은 것도 천황 덕분이라는 식의 찬양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의전상으로는 여하간 만주국은 일본의 가장 친한 우방으로서 의전 역시 일본 천황 다음이었다. 일부 묘사처럼 일제에게 아주 핍박을 당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하간 푸이는 꼭두각시였고, 그 역시 그런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실제로 푸이는 전범 재판 당시 증인으로 출석하여 이 사실을 그대로 밝힌 바 있다.
2.4. 소련의 포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국에 군대를 진주시켰고, 그에 따라 만주국도 사실상 붕괴되었다. 푸이는 피난길에 오르면서 통화시 부근에서 간단한 회의를 소집해서 만주국을 해산했다.[12] 하지만 이것도 푸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만주국의 잔존 내각에서 장제스와 협상하기 위해서 걸리적거리는 만주국 따위는 빨리 없애 버리기 위해 시급히 결정한 일로 푸이는 붓으로 죽죽 그은 임시 조서를 읽으면서 그야말로 얼렁뚱땅 퇴위해야 했다. 장징후이 등이 소련군과 협상할 수 있으리라 여겨 신경으로 갔다가 줄줄이 체포되는 동안 푸이는 일본으로 피란가라는 통보를 받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좁아서 복귀인조차도 쫓겨나는 지경이었고 자기는 어떻게 해야 하냐는 복귀인에게 푸이는 기차를 타고 일본에 가라고 헛소리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 공항이 소련군에게 점거당하면서 1945년 8월 17일에는 소련군에게 붙잡혀서 전범 대우를 받았다.
소련군에 체포되었을 당시만 해도 푸이는 공포에 떨었지만, 소련은 한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타국의 군주포로[13] 에 대해 특별 대우를 해주었다. 그가 수감된 모르카프카 수용소의 소장은 그를 위해서 작은 파티를 열어주고, 그에게 어떤 요구 사항이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이후의 생활도 푸이와 그의 일행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소련 측은 그들을 요양자처럼 대했다. 음식도 매일 4끼[14] 를 배급했다. 음식뿐만 아니라 거처에 있어서도 푸이는 라디오가 있는 독방을 받았고, 소련 측은 그가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 피아노도 거처에 가져다 주었다. 다른 수감자들이 노동을 할 때 그는 산책을 하거나 간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중엔 수용소 밖을 나가 등산을 하거나, 강가나 숲으로 산책을 했다. 오히려 이 시기 움직이는 범위는 허수아비 황제 노릇을 할 때 보다 넓었으며, 하고 싶은 일도 자유롭게 했다. 푸이는 하루 종일 불경을 읽거나 좌선수행을 하고, 점도 치면서 놀았다. 그리고 함께 수감된 시종들에게 황제로서 문안 인사를 받았다. 이때 몸에 좋은 광천수를 대접받아 건강도 상당히 좋아졌으며, 같이 끌려온 장징후이나 시치아 등 만주국 내각 포로들은 푸이가 소련에 영향력이 있는 줄로만 알고 푸이에게 아부하면서 자신들을 중국에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스탈린에게 부탁해달라고 푸이에게 간청했다. 푸이는 자신도 포로 신세에 불과하다면서도 마지못해서 스탈린에게 편지를 썼지만 자신이 소련에 살고 싶다고 보낸 편지와 마찬가지로 묵살당했다.
이후 하바로프스크의 수용소로 보내져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고, 여기서 푸이 일행은 2층 건물을 따로 받아 사용했는데 1층은 시종들이, 2층은 푸이가 머물렀다고 한다. 현재 수용소는 철거되고 휴양지로 바뀌었다. 일행도 청소와 식품 수령 등의 노동에 참가했지만, 푸이는 여기서도 일은 하지 않았다. 다만 수용소장이 정원에 농사를 짓도록 허용해 시종들이 풋고추와 토마토, 가지, 강낭콩 등을 심어 길렀는데 이들 채소들이 쑥쑥 자라는 게 신기했던 푸이가 직접 물을 주고 관리했다고 한다. 이후에 45특수전범수용소로 이송 되었는데, 이곳에서도 우대 조치는 계속 되었다. 이러한 소련의 호의에 대해 푸이는 몹시 의외로 여기고 고마워했다. 나중에는 중국으로 송환 되는 것을 걱정해서[15] 소련군 관계자에게 자기 소지품으로 갖고 있던 금품이나 시계 등을 뇌물로 주고 중국 송환을 막아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고, 러시아어를 아는 동생 푸제를 시켜 스탈린에게 4차레나 감사와 함께 소련에 머물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국민정부가 집권하던 시절에 스탈린은 푸이의 편지를 프라우다에 게재하는 등 그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냈으나 국공내전이 시작된 1947년부터는 푸이의 편지를 무시했으며, 1950년에 온 마지막 편지는 분명한 거절의 의사를 표명하고 푸이를 마오쩌둥이 집권한 중국으로 돌려보낸다.
2.5. 중화인민공화국의 식물원 정원사
이렇게 지내다 1946년 도쿄 전범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 만주국 황제 때의 일을 증언한 뒤 1950년 중국으로 끌려갔다. 처음 중국에 송환되자 푸이와 그의 일행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었다. 바로 처형당할 거라 예상했지만, 중국 정부는 체제 선전을 위해 거물급들은 어떻게든 회유와 전향으로 포섭하려 했다. 비단 선통제뿐만 아니라 거물급인 데므치그돈로브, 장징후이와 같은 만주국과 몽강국의 거물 정치인들, 정동국, 두율명 등 국공내전 중 포로로 잡힌 국민혁명군의 고급 장령들은 이런 반동들까지도 사회주의 일꾼으로 성공적으로 개조하는 데 성공했다고 과시하기 위해 살려두어 전범수용소에 가두고 사회주의 재교육을 실시하였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한때나마 중국 공산당 지도부 전원을 신민으로 거느렸었던 푸이는 더할나위 없는 선전감이었던 것.
중국에서 수감되는 동안 위해는 없었지만, 소련에서 누리던 특혜는 없었고, 영화 마지막 황제에 나온 것처럼 모든 일을 시종들의 도움 없이 자신이 해야 했다. 이때 푸이는 수감자들 사이에서 생활력이 없다고 맨날 까이기도 했다.[16] 1956년 복귀인이라 불리던 이옥금과 공식적으로 이혼하였고 푸순 전범 교도소에서 10년 동안 지내다 마오쩌둥의 특별 사면령으로 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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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찍은 사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시민이 되어 중국과학원 식물연구소 베이징 식물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좀 과장해서 정원사로 일했다고 널리 알려졌다.
중국 정부의 소개로 항저우 출신 간호사인 리수셴(李淑贤)과 1962년 4월 30일 결혼했다.[17][18] 1964년 전국 정치협상회의 문사 자료 연구 위원회로 전출되어 자료 전문 위원을 역임하였고, 인민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위원'이 되었다. 한국으로 치면 국회도서관 서기관 및 국회의원을 역임한 셈이니 고위급 인사로 대접받았다는것을 알수있다. 물론 이는 새로이 중국의 지배 세력이 된 중국 공산당이 구 세력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신체제의 안정성과 대범함을 과시하고,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한 측면도 크다. 어쨌든 인생 후반기를 새 아내랑 함께 다정하고 평온하게 지냈으니, 가히 한 헌제나 후주 공제와 버금가는 말년이다.
2.6. 문화대혁명과 사망
하지만 푸이의 건강이 악화되었을때는 한창 문화대혁명이 닥쳤을 때라 매우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다. 그가 교도소에 갇혀있을 때 그를 반동이라고 하면서 계속 핍박하던 교도소장이 나중에 풀려난 푸이 앞에서 홍위병한테 끌려가서 '''반동분자, 수정주의자라고 쳐맞고 있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비참한 꼴이 된 소장을 동정한 푸이가 홍위병들에게 착한 사람이라며 풀어주라고 말하지만 홍위병들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에서 교도소장은 푸이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새 삶을 찾기를 바라며, 푸이를 무조건적으로 몰아붙이는 다른 교원들로부터 그를 보호해주고 있다.[19] 교도소장은 작중 좋은 인물이며, 푸이가 홍위병으로부터 그를 변호하는 것은 '동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보인다. 일례로 푸이는 홍위병들에게 "그는 좋은 스승(teacher)"이라고 항변하다가 밀쳐 넘어진다. 또한 홍위병들이 교도소장을 고발하는 죄목은 제국주의자, 반동 분자, 배신자인데 이는 바로 푸이가 과거 고발당한 죄목이다. 영화 속에서 언급되지는 않지만, 해당 죄목은 교도소장의 이러한 성향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20] 그런가 하면 어느 날 푸이의 집에 웬 여자들이 들이닥쳐서 "우리는 네놈이 만주국 허수아비 황제 시절에 궁녀였는데, 그때 너에게 강간당했다!!" 하면서 보상하라고 날뛰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홍위병 표식을 하고 있는 이도 있었는데, 그걸 본 '''진짜''' 홍위병이 오더니만 욕을 퍼부으면서 끌고가더니 그가 보는 앞에서 패 죽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가짜 홍위병도 판쳤기에 이렇게 길거리에서 대놓고 죽이는 일도 허다했다. 물론 진짜 홍위병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어차피 홍위병이라는 게 정부에서 정식 인가받은 조직도 아니고 그냥 붉은기 들고 붉은 완장 찬 무리 혹은 개인들이 스스로 칭하고 다니던 거라 진짜, 가짜 따지는 것에 의미는 없었다. 나중에 다른 여자들이 찾아와 궁녀였다고 발악하며 돈을 요구해 돈을 받아가기도 했는데, 다른 여자들이 몰려와서 우리도 돈을 내놓으라느니 난리를 부렸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분위기속에서 푸이는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제대로 치료도 못 받을 뻔하다가[21] 저우언라이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치료시기를 놓쳤던지 혼수상태에 빠진 뒤 제대로 된 유언도 못 남기고 신장암과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61살이었다. 그나마 병상에 있었을 때는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치료를 받을 수 있어 나름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죽은 후에는 베이징의 인민 납골당, 베이징 팔보산 혁명공묘(北京 八宝山 革命公墓)등을 전전하다가 1995년 1월 26일 사후 28년 만에 청 왕조의 두 능구 중 허베이성 이셴(易縣)의 청서릉(清西陵)[22] 으로 이장됐다.
3. 개인사
궁정 시절에는 자금성의 부패한 내무부에 대해서 개혁을 시도했을 정도로 궁정 내 부조리를 개선하려고 애썼다고는 하지만 톈진 시절에는 씀씀이가 매우 헤프고 사치스러운 한량이었다고 한다. 하긴 청나라 황제에 올랐을 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고, 만주국에선 일본의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사치 외에는 따로 할 것도 없었지만, 어쩌면 그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자유였을지도 모른다. 베트남 제국 마지막 황제이던 보대제와 여러 모로 비슷하다.
평생 5번 결혼하고 첩까지 포함해 6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후손은 없었다. 특히 황후인 효각민황후 고불로씨(孝恪愍皇后 郭布羅氏)와는 사이가 안 좋았다. 효각민황후 고불로씨는 푸이와 마찬가지로 간단하게 이름인 '완룽'으로 부른다. 풀네임은 고불로 완룽(郭布羅 婉容). 영어 이름은 엘리자베스(Elizabeth).
1935년 완룽이 사생아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푸이는, 완룽이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화로에 던져 '''죽여버렸다.''' 황후는 그 아이를 자신의 오빠가 키우는 줄 알고 양육비를 건네기도 하였다 한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그와 다르게 아이는 완룽이 푸이의 운전사와 사통해 아이가 생긴 것이고, 그 사실을 일본군도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영화에선 완룽이 "당신을 위해서 했어요. 아이의 아버지는 만주족이에요!"라고 하자 푸이는 일을 덮기 위해 "황후가 수태를 했소. 만주국의 후사가 생겼소."라고 둘러댔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만주영화협회 이사장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네. 여기에 아이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라며 운전사의 이름을 보여준다. 그리고 푸이는 하얗게 질려서 완룽의 손을 뿌리치고 식당을 나가버리고 아마카스는 일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며 온 아시아는 일본의 영토다!라고 의기양양해한다. 그 결과로 황실의 명예를 위해 운전사는 총으로 즉결처분.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의사가 주사로 죽이는 걸로 묘사된다. 실제로 푸이가 아이를 화로에 던져 죽인 사실은, 초판 자서전에는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기록되지 않았다. 완룽은 1946년 아편에 빠져 병사할 때까지도 자신의 아이가 살아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완룽의 아이가 죽은 이유는 푸이의 질투 뿐 아니라, 아이가 일본에 정략적으로 이용당할까봐 죽여버렸다고 보기도 한다. 황후와의 부부 관계 또한 원만하지 못했는데, 황후의 정신병 등이 원인이었다. 아이를 두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제수가 되는 사가 히로는 푸이가 게이였기 때문이었다고 추측했는데, 1962년 재혼한 부인 리수셴(李淑賢)은 게이설을 부정하고 발기부전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푸이를 (현대) 중국 최초의 공식 이혼남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니다. 현대중국 최초로 정식 절차를 받고 이혼한 유명인은 시인 쉬즈모(徐志摩: 무협소설의 대가였던 김용의 사촌형으로 김용 소설에서 사촌오빠들이 찌질하게 나오는 모티브를 제공했고 실제로 쉬즈모의 필명을 바탕으로 한 변태악역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다. 1922년 아내 장여우이와 이혼한 일로 당시 중국을 시끌벅적하게 했고, 이후로 여성 편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중국에 서양시를 보급했으나, 193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완룽은 거란족의 후예라는 설도 있는 몽골계의 소수 민족인 다우르(達斡爾, Daur)족 출신이다. 만주국 붕괴 이후 공산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며 공산군의 학대를 받았다. 1946년 통화 사건으로 공산군과 국부군의 전투에 휘말려 크게 부상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아편 금단현상으로 매일 고통을 호소하며 울부짖었으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는커녕 공산군의 구경거리가 되었고[23] 설상가상으로 마차에 묶인 채로 조리돌림을 당하는 등 학대당하다가 1946년 6월 20일 연길의 감옥에서 사망했다. 이후 사가 히로와 저우언라이가 만났을 때 이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저우언라이는 당시 공산군 수뇌부에서 만주국 황족들을 보호하라고 지시하긴 했으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일선 장병들이 일본인들과 구분하지 못해서 그런 학대가 발생했다고 해명했다.
또, 2번째 부인 숙비 어르더트씨(淑妃 額爾德特氏)가 유명하다. 숙비 어르더트씨는 몽골족 출신으로 풀네임은 어르더트 원슈(額爾德特 文繡). 완룽과 마찬가지로 간단하게 원슈라고 부른다. 원슈는 중간에 푸이와 이혼하고 떠났다.
1살 터울의 바로 아랫 동생인 아이신기오로 푸제(愛新覺羅 溥傑; 우리식 발음으로는 부걸)는 일본 귀족인 사가 히로와 결혼하여 2녀를 두었다. <유전의 왕비, 최후의 황제>에서는 사가 히로와의 결혼으로 인해 푸이와 푸제가 처음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화해하고 사가 히로 또한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실제로 푸이는 일본 여자와 결혼한 동생을 평생 일본 스파이로 의심하여 경계했다고 한다.
이복 동생인 아이신기오로 푸런(愛新覺羅 溥任)은 성을 진(金)씨로 바꾸고 이름을 '유즈(友之)' 로 바꾸었으며, 현재 아이신기오로 가문의 수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푸런의 아들 진위장(金毓嶂)은 자신의 다음 대부터는 성을 다시 아이신기오로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푸런은 만주국 황실의 전임 왕위 요구자로 2015년 4월 10일 사망하였다. 만주국 황실과는 별개로 청나라 황실 수장은 다른 인물이 맡으며 현재 청나라 황실 수장은 아이신줴러 헝전(爱新觉罗 恒镇)이다. 그는 선통제의 양자 아이신줴러 유얀(毓喦)의 장남이다. 다만 현재 왕위 요구자/아시아 항목에서는 합의에 따라 청나라와 만주국의 왕위 요구자가 삭제된 상태다. 사실 선통제의 전임자인 광서제부터가 직계가 단절되어 즉위한 방계 출신 황제였으므로, 정통성 측면에서 청나라 황실의 계보는 사실상 단절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박정희와도 인연이 있는데, 1942년 박정희가 만주국 소재 육군 군관 학교를 졸업할 때 우등상과 함께 금으로 된 시계를 하사한 사람이 푸이였다고 한다.
청나라 마지막 환관인 순샤오팅[24] 은 푸이가 매일 환관,하인들을 때리고 폭언을 했다고 언급한다.
여담으로, 죽기 직전에 치킨라멘을 먹고 싶어 했다고 사가 히로가 회고전에서 말하였다. 트리비아의 샘에서는 이걸 다루고, 제작진이 직접 선통제 무덤에 가서 치킨 라멘을 조리해서 바쳤다.
4. 대중매체에서
4.1. 영상물
영화 <마지막 황제(L'ultimo imperatore, 1987년)>는 그의 자서전 <나의 전반생(我的前半生)>에 저술된 내용을 영화화한 것이다. 영문판 제목은 <황제에서 시민으로(From Emperor to Citizen)>. 이 자서전은 중국 공산당 밑에서 교화 생활을 하던 중에 썼던 <나의 죄악의 전반생>이라는 후덜덜한 제목의 자아비판서를 바탕으로 쓴 글이라고. 영화는 배경이 중국이고 대부분의 등장 인물이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배우가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연기하는(…) 희한한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한 9개상을 석권했고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여기서 푸이 역을 열연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은 존 론은 나중에 괴작 영화들에만 주연(...)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다크 히어로 영화인 "섀도우"에서 칭기즈 칸의 마지막 후예인 쉬안 칸 역을, 러시아워 2에서 최종 보스로 나온다. 사실 이건 아시안 배우에게 악역, 조연만 시키는 헐리우드의 차별과 한계 탓이 컸다. <M. 버터플라이>에선 여장남자로 나와 제레미 아이언스와 연기하는 등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했지만 별 빛을 보지 못하고 이후로는 중국 쪽으로 아예 노선을 돌려 중국 사극 드라마에 주로 출연했다. 중국에서도 '마지막 황제' 이미지가 강한 탓에 주로 왕으로 나온다.
<마지막 황제>가 유행할 때, <말대 황제>라는 사극을 KBS가 수입을 하여서 방영을 하였는데[25] , 이 중국 드라마는 전반적으로 선통제를 찌질한 양반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본 다음에 이 드라마를 본 시청자분들은 꽤 충격을 받았는데, 어른이 된 푸이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강희제국>에서 열연한 '''진도명'''이다. 이 드라마 후반부에 영국인으로 분장해서 한국전쟁을 참회하는 연극 장면이 거의 그대로 나왔다. 진도명은 강희제, 장제스(!?), 진시황[26] , 월왕 구천, 한고제 등의 '''상당히 카리스마 있는 성군''' 연기를 주로 하는데 이 작품에서 <강산풍우정>의 천계제와 함께 찌질한 암군 역으로 활약한 작품이고 둘 다 '''잘 어울린다'''. 성군과 암군을 모두 소화할 정도로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
말대황제는 2015년 리메이크되어 국내에서도 CHING을 통해 소개되었다. 전작보다는 푸이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수감생활 파트부터 불필요한 중국 공산당 찬양이 나온다. 마지막 부분에서 푸이는 자신의 평생을 회고하며 '나를 진정으로 받아준건 공산당 뿐이었다'는 선전영화스러운 멘트를 날린다.
4.2. 게임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전략 게임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 만주국의 국가원수로 등장한다. Hearts of Iron IV는 Waking the Tiger DLC를 출시하며 만주국에도 다양한 선택지가 생겼는데 만주국에서 독립 전쟁을 벌여 청나라로 독립하고 중화제국을 선포할 수 있는 선택지가 추가되었다.[27] 동북아시아를 죄다 갈아엎은 호4 모드인 8년 항전에서는 국가원수가 장징후이로 교체되고 푸이는 유럽의 입헌군주국들처럼 안정도를 부여하는 국가정신으로 바뀌었다.
하츠 오브 아이언의 모드인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독일 제국의 도움으로 청조가 복위되어 자금성의 옥좌에 앉아있다. 그러나 청나라의 황제라는 것은 이름뿐이고 만주는 장쭤린의 통치하에 일본에 종속되어있고 서부와 남부 및 산동에선 반(半)독립 군벌이 할거하며, 청나라 조정의 실권은 우페이푸가 잡고 있다.[28]
Victoria에서는 게임을 종료하고 점수 화면으로 나올 때 중국은 선통제의 장훈복벽 때 찍은 사진을 그린 초상화가 나온다.
4.3. 만화
북두의 권의 저자 하라 테츠오가 쓴 창천의 권에서도 등장. 여기선 나이가 먹은 모습으로 등장했으며 시도때도 없이 암살의 공포에 반쯤 정신이 나간 찌질이로 등장한다. 상하이에서 범죄조직을 박살낸 '염왕'이라는 자를 찾아 자신의 보디가드로 삼기 위해 그 염왕이 잠시 몸을 담은 청방이란 조직에 소속됐었던 어느 노인을 독 검시관으로 삼고 이를 이용해 염왕을 찾아내려 했으나 정작 그 밀명을 받은 부하들은 염왕 목에 걸린 상금에 눈이 멀어 검시관을 죽이려 들었다가 끔살당했고 이로 인해 염왕의 진노를 사게 된다(...) 이후 자신을 찾아와 두들겨 패는 찾아온 염왕에게 그깟 하찮은 독 검시관을 위해 자길 죽이려드냐고 찌질거리지만 '황제든 독 검시관이든 난 단지 의리를 위해 움직인다. 그게 친구야.'라는 염왕의 말에 자신도 그런 친구를 갖고 싶었다며 울음을 터트린다. 이후 갑자기 작화가 업그레이드 되어(...) 자신은 이제 중원의 허수아비 황제지만 자신도 남자인만큼 죽을거라면 싸우다가 죽고 싶다며 보검을 들고 덤벼들었다가 한큐에 비공을 찔려 쓰러지고 그대로 죽나 싶었지만 의외로 목숨을 건지고 이후로는 별 등장이 없다.
지팡구에서는 역사대로 만주국의 황제로 등장하는데 번역자가 푸이가 누군지 몰랐는지 일본식으로 읽어 후기라는 괴이한 이름으로 번역했다. 심약하고 나약해보이는 인상인데 암살당한다.
4.4. 기타
일본의 동인 음악가인 BITPLANE[29] 의 다른 뮤지션 명의 중 하나가 선통제의 만주어 이름 한자가차를 딴 愛新覚羅溥儀(애신각라부의)였다. 딱히 연관성은 없어보인다.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 49화에서 함풍제가 하는 말이 있는데 들어보면 묘한 감정을 느낄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애신각라 일족에 침략자의 꼭두각시 황제를 자처할 그런 머저리는 절대 없다!"'''
- 함풍제,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 49화 중.
5. 둘러보기(계보)
[1] 비공식 묘호. 중국 정부는 묘호를 만들지 않고 손제(遜帝)라고만 부르고, 대개는 그냥 부의라고 이름으로 표기한다. 1967년에 대만에 있던 종친들로부터 헌종(憲宗)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2004년에 구 청나라 황실에서 공종(恭宗)이란 묘호를 올렸지만 모두 비공식적인 묘호라 거의 쓰지 않는다.[2] 1967년에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양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襄皇帝)였던 것을 2004년에 고쳤다. 즉, 딱 한 글자(도울 양襄 ->근심할 민愍)가 바뀌었는데, 시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3] 차하르 몽골어 기준[4] 할하 몽골어 기준[5] 168cm는 학자들의 연구결과고 174cm는 구글 프로필 키인데 사진을 보면 160cm대 후반에서 170cm대 중반으로 보인다.[6] 중국 최후의 한족 황제는 중화제국의 위안스카이다.[7] 참고로 이 遜이라는 한자는 겸손하다, 사양하다, 양위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못하다, 뒤지다, 뒤떨어지다, 달아나다 등의 부정적인 의미도 같이 담고 있는 한자이기도 하다.[8] 표준중국어의 모태가 된 북경어는 만주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9] 봉투에 쓰는 '부의'의 한자는 '賻儀'이다. 부수 하나 차이이다.[10] 이는 만주족의 전신인 금나라(金)를 상징하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나타내고자 함이다.[11] 위의 사진은 1917년 장쉰의 복벽 사건 때 찍은 사진이며, 게임 Victoria에서 게임을 종료하면 나오는 국가별 점수 및 지도자의 초상화가 나오는 화면에서 중국계 국가 지도자는 이 사진을 그린 그림이 나온다.[12] 흔히 이곳이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 곳이라는 말도 하는데, 그와는 다른 곳이다. 후금이 세워질 때 수도인 허투알라는 랴오닝 성이고 통화시는 지린 성으로 서로 다르다. 여기가 누르하치의 조상인 건주위 여진족의 땅에 속할 뿐.[13] 알려진 대로 소련은 러시아 혁명으로 황제를 비롯해 로마노프 왕조의 직계 일족들을 총살시켰기 때문이다. 반면 과거 공산권이었던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같은 여타 동구권 국가들의 경우 2차 대전 이후에 왕정을 없애고 공산정권을 성립시키는 과정에서 구 왕가 일족들에 대해 처형 대신 국외추방, 입국금지 정도에 그치는 등 러시아 혁명 직후의 소련보다는 비교적 온건한 방식으로 처분이 이루어졌다.[14] 아침은 빵과 과자, 커피, 차 등을, 점심은 요리 2개와 탕 1개, 오후 3, 4시 경에는 오차로 간단한 간식을 주고, 저녁은 서양식으로 와인이나 사이다 등이 나왔다.[15] 국민당이 이기든, 공산당이 이기든 일제 부역자인 자신은 처단될 것이라고 생각했다.[16] 평생 모든 일상 생활과 뒷바라지를 시종들이 다 해 주며 살았는데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하니 생활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17] 이때 푸이의 나이는 56세이고 리수셴은(1924년생) 38세로 나이차가 18년이나 되었다. 결혼한지 5년 후 푸이가 사망하기까지 그들은 꽤 다정하고 평범한 결혼생활을 유지했다고 한다. 리수셴은 1997년 7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18] 리수셴은 푸이가 사망한 후 병원을 퇴직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지만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재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나중에 그녀는 푸이의 자서전에 대한 법적인 로열티와 푸이와 자신의 결혼생활을 담은 자서전의 인세로 경제적으로 윤택해졌다고 한다. 그녀는 푸이의 묘를 바바오산 혁명공묘에서 청서릉으로 옮기는 것을 주장해 그것을 이루기도 했다.[19] 근데 이 사람들도 그냥 광신적인 공산주의자라 그런 것은 아니고, 만주국 시절 가족들이 일본군의 손에 학살당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 푸이 앞에서 감정조절을 못했다는 뒷사정이 드러난다.[20] 실제 푸이를 교화한 조선족 김원은 이 시절 숙청되었다가 1971년부터 1989년까지 북경대 교수를 지내다 1990년에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는 푸이에 대해 "순박한 사람이고 인간적으로 동정하지만, 그가 저지른 역사적인 죄과는 용서할 수 없다"고 밝혔다.[21] 고위급 인사였기 때문에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신분이 문제였다. 푸이가 홍위병들이 싫어하는 청나라와 만주국의 황제였기 때문에, 홍위병들에게 공격받을까 두려워 병원들이 입원을 거부한다. 이 때문에 저우언라이는 푸이를 홍위병들의 폭력이 심하지 않은 베이징의 병원에 입원시켰다.[22] 화룽황가묘역(華龍皇家陵園)의 푸이묘. 별칭은 헌릉(獻陵).[23] 이때 유일하게 그녀를 돌봤던 사람이 사가 히로다.[24] 환관이 되기 위해 거세를 했는데 깨어나보니 청나라가 망했다고 한다. 죽을 때 까지 푸이를 보좌했다.[25] 마지막 황제를 의식해서 국내 방영시 <마지막 황제 부의>란 제목을 붙였다.[26]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과 중국 최후의 황제인 선통제를 모두 맡아봤으니 중국에서 약 2000년 동안 이어진 황제 중심 중앙 집권 체제의 알파와 오메가를 담당한 셈이다. [27] 중화제국 선포 시 선통제로 이름이 바뀌고 옷도 양복에서 중국 황제의 옷으로 바뀐다.[28] 호4버전 카라는 양쯔강에 흐르는 피 패치 이전까지 중국 남부는 독일제국 산하인 동아시아 회사가 장악했으나 설정이 바뀌었다.[29] 예전에 주로 process 2.3.1이라는 명의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