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 히로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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嵯峨浩(さが ひろ, 1914년 ~ 1987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아이신기오로 푸이의 동생 아이신기오로 푸제(愛新覺羅溥傑, 애신각라 부걸, 1907년 ~ 1994년)의 아내. 일본인이다. '''중국의 '이방자 여사'라고도 할 수 있다.'''
2. 생애
일본 황실과 연결되어 있었던[1] 후작 가문인 사가 가문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가 사네토(嵯峨實勝), 어머니는 하마구치 히사코(浜口尙子). 본래의 성은 후지와라노아소미(藤邍朝臣)로 시조에서 44세손이다.[2]
일본 황족과 화족의 딸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 가쿠슈인[3] 에 다녔다. 이때 함께 여자 가쿠슈인에 다닌 동기들 중에는 메이지 덴노의 외손녀인 다케다노미야 아야코(竹田宮禮子) 여왕과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와코(北白川宮佐和子)[4] 여왕, 그리고 덕혜옹주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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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관동군의 중매로 인하여, 당시 만주국의 황제이자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의 동생인 푸제[5] 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정략 결혼이었지만 둘의 금슬은 괜찮은 편이었고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진다.
남편을 따라 만주국의 수도인 신징(현재 창춘)으로 건너가 1938년 장녀 아이신기오로 후이성(愛新覚羅慧生, 혜생, 일본명 에이세이)를 낳았고, 일본으로 잠시 귀국해 1940년 코세이(嫮生)[6] 을 낳았다. 이후 다시 만주로 건너갔다가 푸제가 안전상의 문제로 일본 육군 대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고, 푸제가 다시 만주로 돌아가게 되자 초등학교에 진학할 나이의 장녀 후이성만 일본 친정에 맡겨두고 차녀 코세이만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 만주로 향한다.
일본이 패망하고 소련군이 만주로 진격하자 푸이와 푸제 등 만주국 각료들은 비행기 편으로 만주를 탈출하고, 그들이 일본에 도착하면 푸이의 황후인 완룽과 사가 히로 등 가족들은 조선을 거쳐 육로로 일본으로 귀환하기로 한다. 그러나 푸이와 푸제는 비행장에서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하바롭스크로 압송되었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사가 히로는 황후인 완룽, 차녀 코세이 등과 함께 당시 머물던 곳인 다리쯔를 탈출한다. 하지만 대율자구에서 임강현성으로 이동하다가 팔로군에게 체포되었다. 팔로군은 완룽과 사가 히로를 시 공안군 2층에 격리시킨 후 영하 30도가 넘는 추위 속에서 계속 엄중히 심문하여 사가 히로는 식구들을 모두 죽이고 자살할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1946년 통화 사건에 휘말려 여러 황족과 수행원들이 살해당하는 등 엄청난 고초를 겪게 된다. 1946년 4월 창춘으로 이감된 후 후덕복 호텔에 수감되어 있다가 다시 지린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아편 금단 현상으로 미쳐버린 완룽이 발작하자 그녀를 필사적으로 돌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6월에 연길로 이감되었을때 완룽은 죽어버렸고 팔로군은 사가 히로가 관동군을 따라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며 사치도 부리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하얼빈에서 석방했다. 이후 사가 히로와 저우언라이가 만났을 때, 이 일에 대해 저우언라이는 수뇌부에서 만주국 황족들을 보호하라고 지시하긴 했으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일선 장병들이 일본인들과 구분하지 못해서 그런 학대가 발생했다고 해명했다.
석방된 이후 랴오닝성의 후루다오(葫蘆島)에서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송선을 기다리던 도중 국민당군에게 또다시 체포되어 진저우,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에서 공안의 감시를 받으며 머물게 된다. 상하이에서 구 일본군 출신의 타나카 테츠오 대위가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어 이를 오카무라 야스지에게 알렸고 오카무라 야스지가 국민 정부 지도부에게 사가 히로의 귀국을 탄원함에 따라 석방, 1947년에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이후 아버지가 운영하던 초등학교의 선생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고, 재혼하지 않은 채 두 딸을 보살피며 살았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은 미수교 상태였기 때문에 16년 동안 사가 히로는 남편인 푸제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7] 그러던 중 장녀 후이성이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게 해 줄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고, 이에 감명받은 저우언라이는 사가 히로를 중국에 특별 초청하였다. 사가 히로와 차녀 코세이는 중국으로 건너가 16년만에 푸제를 만나게 된다.[8]
이후 사가 히로와 푸제는 베이징에 정착하여,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옛 순친왕부의 저택에서 조용히 살았다. 문화대혁명 때 곤욕을 겪기도 했으나 저우언라이는 경호원들을 파견하여 그들을 보호해 주었고, 그들은 이후에도 별 탈 없이 조용히 살았다. 문화대혁명 후 중국이 개혁, 개방 노선을 택하고 일본과 국교 또한 정상화 되면서 두 부부는 딸 코세이[9] 와 손자들을 보러 일본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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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푸제, 사가 히로, 차녀 코세이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사가 히로는 1987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그녀가 죽었을 때 조용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성격의 푸제는 그녀의 시신 옆에서 목놓아 울었다고 전해진다.[10]
3.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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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 히로의 일대기를 다룬 일본 드라마가 <유전의 왕비, 최후의 황제(流転の王妃·最後の皇弟)>인데, 총합 4시간의 단편 드라마이지만 호화 캐스팅에 해외 로케이션으로 촬영된 의외의 수작이다. 물론 드라마의 내용은 미화가 많으니 적당히 걸러서 보도록 하자. 참고로 사가 히로의 역은 '토키와 타카코'가, 푸제 역은 '타케노우치 유타카'가 맡았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중국 배우 정숙염(程淑艳)이 분했다. 만주국 건국 기념식 행사 장면에서 잠깐 나오는데 다소 음침한 인상으로는 나온다. 유일한 대사는 "처음 뵙겠습니다."라는 일본어 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완룽이 행사장에서 장식용 꽃을 먹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기묘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데 해당 장면이 바로 위의 사진. 푸이는 대놓고 일본인이란 이유로 제수씨는 물론이고 남동생 푸제까지 일본 놈들의 하수인이 됐다고 괄시한다.
[1] 사가 히로의 할머니(즉, 아버지 사가 사네토의 어머니)의 고종 사촌이 메이지 덴노였다.[2] 사가 사네토에서 아버지 쪽을 자꾸 눌러서 부계를 검색해보면 알 수 있다.[3] 오늘날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여자 고등과, 여자 대학의 전신.[4] 황태자비가 될 뻔했다가 평민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난 기타시라카와 하츠코의 고모[5] 1924년에 1904년생의 타타라 탕스샤(他他拉唐石霞)라는 만주 공주와 결혼했었으나 아이가 없었고, 그가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자연스레 사이가 멀어졌다.[6] 現 국적이 일본이므로 일본식으로 표기. 일본인과 결혼했으므로 풀 네임은 후쿠나가 코세이(福永嫮生)가 된다. 중국식으로는 후성(husheng, 호생).[7] 당시 푸제는 형인 푸이와 함께 전범으로 취급받아 소련에서 중국으로 신병이 인도되었고, 무순 전범 관리소에 수용되어 있었고, 형인 푸이가 특별 사면 되었을 때에도 수감되어 있었다.[8] 그러나 정작 편지를 썼던 장녀 후이성은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국문과의 동급생 오오쿠보 타케미치(大久保武道)와 아마기 산(天城山)에서 오오쿠보의 권총으로 동반 자살하여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후이성은 당시 오오쿠보와 결혼을 약속하고 사귀는 사이었는데, 어머니 사가 히로는 일본인과 후이성이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남자의 집안에서도 후이성을 반대하였다. 이에 낙담하여 자살했다고 전해지는데,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사가 히로는 후에 차녀인 코세이가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은 말리지 않고 허락한다. 한편, 사가(嵯峨) 가문에서는 오오쿠보의 스토킹에 의한 납치 동반 자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9] 사가 히로는 베이징에 정착하였으나, 딸 코세이는 일본으로 돌아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살았다. 그리고 일본인과 결혼하여 일본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10] 참고로 푸제는 1994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