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선황후 왕씨

 





전한 선제의 세 번째 황후로, 효원황후 왕씨의 고모이기도 하다. 흔히 왕망의 찬탈을 이야기하면서 효원황후를 바탕으로 왕씨 일족이 권력을 장악하였다고 말하나, 그 단초가 된 계기는 효선황후에게서 찾는 편이 타당할 듯 하다.
선조는 고조 때에 공이 있어 관내후(關內侯)로 대대로 봉해졌고, 원래 본관이 패(沛)였으나 장릉(長陵)으로 이주하게 되었다.[1] 황후의 부친인 왕봉광(王奉光)은 소싯적 투계(鬬雞)를 좋아했는데, 이를 통해 즉위 전 민간에 있었던 선제와 교분을 나누게 되었다.
황후가 10대였을 무렵 나이가 차서 시집보내고자 하였는데, 혼처를 정하여 시집보내려 할때마다 상대방이 사망하여 결혼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선제가 즉위하자 후궁으로 불러들였고 금새 첩여(倢伃)가 되었다. 곽광 사후 그 일족을 몰아내면서 그의 손녀로 공애황후 허씨를 이어 황후가 되었던 효선황후 곽씨를 폐위하고 후궁 중에서 새로운 황후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쟁쟁한 다른 후궁들을 물리치고 황후의 자리에 올라 어머니인 공애황후를 잃고 지위가 위태로웠던 원제를 양육하게 되었다.
이후 원제가 즉위하자 황태후가 되었고, 손자뻘인 성제가 즉위하자 태황태후가 되었다. 그러자 그녀의 조카이자 성제의 어머니인 효원황후도 황태후가 되었는데 두 사람이 성이 같아서 호칭에 혼동이 있자, 효선황후를 공성태후(邛成太后)라 불렀다.[2]
황후 - 황태후로서 49년을 재위였고, 영시(永始) 원년에 70대의 나이로 사망하니 두릉(杜陵)에 합장되었고, 동원(東園)이라 칭하였다.

[1] 이는 전한이 수도를 위시한 경기권을 부양하고 지방의 강성한 세력을 가까이 두어 제압하려는 강간약지책의 일환으로 이해된다.[2] 황후가 된 이후 아버지 왕봉광이 공성후(邛成侯)로 봉해져 일족에게 작위를 전한데서 유래한 칭호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