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망

 


'''신 초대 황제'''
'''假皇帝'''
'''가황제'''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출생'''
기원전 45년
전한(前漢) 위군(魏郡) 원성현(元城縣)
'''사망'''
기원후 23년
현한(玄漢) 장안(長安) (향년 68세)
'''연호'''
시건국(始建國, 9~13)
천봉(天鳳, 14~19)
지황(地皇, 20~23)
'''재위'''
'''섭정'''
6년 ~ 9년 1월 8일[G] (2년)
'''신의 황제'''
9년 1월 8일[G] ~ 23년 10월 4일[1]
(14년 8개월 26일 / 5,38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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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王)
''''''
망(莽)
''''''
거군(巨君)
'''가족'''
부친 왕만, 모친 거씨
고모 효원황후 왕씨, 딸 효평황후 왕씨
'''황후'''
미상
}}}
1. 개요
2. 생애
2.1. 한나라 시절
2.1.1. 집안 내력 및 초기
2.1.2. 유한의 기둥
2.1.3. 태평성대
2.2. 신나라 건국과 폭정
2.3. 이민족 하대 정책
2.3.1. 흉노
2.3.2. 고구려
2.3.4. 결과
2.4. 반란과 비참한 최후
3. 평가
4. 기타
5. 같이보기
6.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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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한(前漢)의 말기 권신, (新)의 유일한 황제. 망탁조의[2] 중의 한 사람이다. 는 거군(巨君).
근대까지 중국에서의 왕망에 대한 평가는 말그대로 '''최악의 폭군'''이었다. 현대에 이르러선 왕망을 단순히 쇼맨십에 능한 폭군으로만 낙인찍는게 아닌, 그의 세제정책과 개혁에 대해 평가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었던 인물, 잘해봤자 '실패한 개혁가' 수준에서 벗어나진 않는다. 본인의 실정으로 스스로의 시체가 분해된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권을 장악하며 황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新)을 세웠다. 하지만 폭정과 실정을 반복한 탓에 여러 반란이 일어나 망했다. 그러니까 왕망은 궁예처럼 자신이 세운 나라의 초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것. 혈통 및 명분론적으로 전한을 계승한 후한이 건국되면서 왕망은 얄짤없이 역적으로 규정되었다. 삼국시대 이전을 기준으로 나라를 말아먹거나 찬탈한 역적들로 평가받는 망탁조의의 필두로 현대 이전까지 전형적인 위선자 원톱으로 통했다.[3] 어쨌든 창업 군주로 인정받는 조조, 사마의와 달리 현재까지도 복권되지 못했다.
중국 왕조의 변천사를 논할 때 신나라는 취급하지 않는다. 유교적 정통성을 중시한 중국의 전근대 역사가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을 정도로, 왕망의 신나라를 적법한 왕조로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신나라는 존속 기간이 15년, 1대에 그친 단명 왕조였기 때문에 부정하기도 쉬웠다. 함께 역적의 대명사인 조조의 위나라와 사마씨의 진나라는 정통성 계보에 포함되는 것과 대비된다. 조위는 46년 동안 왕조가 존속되었고 서진은 51년 동안 존속했다.[4]

2. 생애



2.1. 한나라 시절



2.1.1. 집안 내력 및 초기


산동 지역인 위군(魏郡) 원성현(元城縣) 사람이다. 원제의 치세였던 초원 4년(기원전 45년)에 태어났다. 그는 제나라 마지막 왕 전건(田建)의 손자로 제북왕이었던 전안(田安)의 후예였다. 제나라 사람들이 전안의 집안을 왕가(王家)라고 불러서 아예 왕씨(王氏)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5]
아버지 왕만(王曼)은 일찍 죽었는데 왕망은 그의 차남이었다. 왕망의 숙부들은 모두 후작의 지위에 있었지만 왕망은 외롭고 가난했다. 왕망의 고모 효원황후 왕씨는 왕망과 그의 어머니를 동궁에 데려와 살게 했는데 왕망은 절개를 굽혀 공손하고 검박하며 부지런히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또 어머니와 과부 형수를 섬기는데 공손하고 주도면밀하였으며 밖으로는 뛰어난 인물들과 사귀고 안으로는 여러 숙부들을 섬기면서 예의를 지켰다. 백부이자 대장군이었던 왕봉이 병석에 있을 때 왕망은 병문안을 정성스럽게 했는데 달포 동안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고 스스로 직접 약을 달이고 맛을 볼 정도였다.
왕망의 지극정성에 감동한 왕봉은 죽기 전에 누이 효원황후와 조카 성제에게 왕망을 돌봐줄 것을 부탁하였다. 덕분에 왕망은 황문랑(黃門郞), 사성교위(射聲校尉)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명사들과 그의 숙부 성도후 왕상, 효원황후 등은 모두 왕망의 행각을 성제에게 고했고 성제도 결국 왕망이 어질다고 인정했다. 영시 원년(기원전 16년), 신도후, 기도위, 광록대부, 시중으로 승진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망은 오히려 더욱 검소하게 살고 의복과 물건을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명사들을 문하에 끌여들여 많은 권문세가들과 사귀었다.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서 높은 벼슬아치들이 앞다투어 그를 추천하였다.

2.1.2. 유한의 기둥


수화 원년(기원전 8년), 왕망의 숙부 곡양후 왕근은 대사마였는데 병환으로 여러차례 사직을 청원했다. 효원황후의 언니의 아들인 시중 순우장이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무엇보다 재능이 있어서 마땅히 왕근의 뒤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왕망은 이를 시기하여 오히려 순우장이 성제의 황후였던 허씨[6]의 언니와 간통했고 허씨를 희롱하였으며 궁중 물품 천여 만을 횡령했다고 무고하여 결국 순우장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성제는 왕망을 오히려 충직하다고 칭찬하고 왕근 역시 추천하였므로 왕망이 대사마에 올랐다. 이때부터 왕망은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왕망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자기를 단속하고 부지런히 했으며 그의 처도 검소하여 공경과 열후의 부인들은 그녀가 손님을 맞이했을 때 하녀로 잘못 알 정도였다.
하지만 건평 2년(기원전 5년), 왕망은 부 태후에게 존호를 올리는 걸 반대한 탓으로[7] 귀양을 갔는데 조정의 많은 관리들은 억울하다고 동정했고 왕망 자신은 두문불출했다. 차남 왕획이 노비를 함부로 죽이자 아들에게 자살하라고 요구했는데 이에 귀양 3년 동안 왕망의 죄를 씻어달라는 요구와 상소가 엄청나게 올라왔다. 결국 원수 원년(기원전 2년), 애제는 왕망을 수도로 불러들여 태황태후 왕씨를 시중들게 했다. 이 해 부태후가 죽고 이듬해에는 애제마저 죽었다. 결국 평제가 즉위하자 태황태후는 조서를 내려 대사마에 마땅한 자를 추천하게 했는데 결국 왕망이 다시 선출되었다.

2.1.3. 태평성대


이에 왕망은 대사마, 상서가 되었고 원시 원년(기원후 1년)에는 안한공에 올랐는데 세 번 사양한 후에야 이를 수락했다. 왕망은 태황태후가 늙어 정사를 귀찮게 여기자 대신들에게 '태후께서 춘추가 높으시니 작은 일까지 걱정하시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보오'라고 하니 태황태후도 스스로 왕망과 네 명의 대신들이 정사를 의논하라고 지시했다. 왕망은 평제의 외가인 위씨 일가가 권력을 얻을 것을 걱정하여 그들을 수도로 오지 못하게 했다가 나중에 위씨 일가를 멸족시켰는데 오직 평제의 어머니만이 목숨을 건졌다. 또 자신의 장녀(효평황후 왕씨)를 평제에게 시집보내어 스스로 국구(황제의 장인)가 되어 더욱 권력을 튼튼히 다졌다.
원시 2년(기원후 2년)에 전국에 한재가 들자 왕망은 돈 백만 냥과 땅 30경을 빈민들에게 주어 민심을 얻었다. 원시 4년(기원후 4)에는 8천 명, 이듬해에는 무려 48만여 명이 그에게 상을 내려야 한다고 청원을 올렸다. 왕망은 앞에서는 이를 다 사절했지만 뒤에서는 오히려 사람을 시켜 자기의 공덕을 칭송하고 태평성대를 가장하게 하여 '지금은 관청에 송사가 없고 고을에 도적이 없고 들에 빈민들이 없으며 길가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가져가지 않는 태평성대'라고 조작했다.

2.2. 신나라 건국과 폭정


그런데 이 해에 평제가 자신의 외가가 박살난 것을 알게 되어 불만을 가지자 이를 눈치챈 왕망은 12월에 평제를 독살하고 당시 겨우 2살이었던 선제의 현손 유영을 황태자로 책봉하여 유자영이라고 부르고 자기가 섭정하면서 섭황제를 칭했다. 이때부터 전한은 사실상 멸망한 상태였다. 왕망은 결국 선양의 형식으로 황제에 즉위하여 초시 원년(8년) 11월에 한을 멸하고 신나라를 세우면서 수도 장안을 상안으로 고쳤다. 그는 일명 '가짜 선양'의 시조가 되었다. 이러한 선양 방식은 무려 천 년 가까이 지속되다가 북송 대에 이민족 왕조들에 의해 사라졌다.
하지만 이때부터 그는 대인군자 코스프레를 집어치우고[8] 마각을 드러내어 폭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왕망은 전국의 토지를 왕전으로 고쳐 조정 소유로 귀속시키고 사사로운 매매를 금지했다. 관직 제도는 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오등작을 실시했고 화폐 제도를 개혁하여 장안, 낙양, 한단, 임치, , 성도 등의 전국 6대 도시에 오균사시와 전부관을 설치하여 오균육관을 실시했다. 오균육관에서는 외상을 주는 것과 돈을 빌려주는 것을 시행하고 물가를 관리하게 했으며 술, 소금, 쇠붙이 등의 세금을 매기게 했다. 그러나 제도가 복잡하여 기존 제도보다 훨씬 못했고, 물가가 폭등해 오히려 사회 혼란을 야기했다.

2.3. 이민족 하대 정책



2.3.1. 흉노


또 선제 이래로 흉노와 서역 여러 나라들과 평화롭게 지낸 것을 무시하고 전쟁을 감행했는데, 이때 왕망이 워낙 여기저기 적을 만들어 놓아 주변 민족들은 모두 왕망의 적이 되었다. 시건국 원년(9년)에 사신을 흉노로 보내 한나라의 책봉 인장을 '흉노선우새'에서 '신흉노선우장'으로 낮추게 하고 오환이 흉노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도록 했다. 이에 흉노는 대노하여 이듬해 삭방으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12월, 왕망은 30만의 병력을 이끌고 흉노를 4년 동안 공격했으나 결국 국력을 거의 다 소모하고 얻은 것도 없게 되었다. 또 이 해에 구정의 왕을 후작으로 낮추었는데 구정왕이 이를 무시하자 왕망은 회견을 빌미로 구정왕을 암살했고, 이때를 틈타 20만의 군사를 보내 구정을 공격하여 일단은 평정했다. 하지만 군사들이 전염병에 태반이 죽고 오히려 서남 지역의 이민족들도 왕망에게 저항했다.

2.3.2. 고구려


시건국 2년(10년), 왕망은 고구려의 군사들을 징발해 흉노를 치려했지만, 고구려가 거부하자 엄우를 시켜 그 수장인 구려후(句驪侯) 추(騶)[9]를 죽였다. 또한 고구려의 이름을 멋대로 고쳐 "하(下)구려"(...)라 칭했으며, 그 우두머리 또한 고구려왕에서 하구려후(후작)로 낮추었다. 그러자 고구려인들은 이에 반발하여 변방을 약탈함이 더욱 심해졌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내용을 다소 다르게 전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의 왕은 유리왕이었으며 그때 죽은 사람은 고구려의 왕이 아닌 고구려의 장수인 연비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왕망의 과격한 대외 정책은 중국에 인접한 여러 이민족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들은 왕망에게 복종하기는커녕 등을 돌렸다. 고구려의 사례는 당시 왕망이 실시한 이민족 정책이 사실상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10][11]

2.3.3. 토하라인


또 서역의 토하라인 도시 국가들도 건드려서 서역왕을 후작으로 낮추고 그들을 모욕했다. 이에 언기가 가장 먼저 배신하고 시건국 5년(13년)에 서역 도호 단흠을 죽이고 흉노에 투항했다. 이듬해 왕망은 서역 여러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여 언기를 습격하고 구자를 보호하게 했지만 오히려 대패하고 그들과의 관계도 단절되었다.

2.3.4. 결과


결국 왕망의 이러한 정책들은 국내와 국외 모두 적을 만들고 결국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는 병맛스러운 짓이었다. 또 왕망은 신선귀신을 믿어 엄청난 돈을 들여 궁중에 팔풍대를 짓고 구묘를 지어 수만에 달하는 군사와 죄수들이 죽어 나가고 국고가 소모되었다. 이처럼 왕망은 정치가나 사상가가 아니라 권모술수를 쓰며 명예욕에만 사로잡힌 소인배였다. 초시 원년(8년)에 재동 사람 애장을 시켜 천서를 위조하게 하여 '왕망은 천자가 틀림없노라'라고 조작하게 하고 주변 나라에 몰래 뇌물을 주어 귀한 조공을 받는 척을 했다. 왕망은 고조 사당에 가서 '황천상제와 고조 폐하의 위명을 이어받겠습니다'라는 깃발을 걸게 하고 유자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나는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황천의 위명을 어길 수 없다'라며 황제가 되었다.
어쨌든 왕망은 대범한 풍도가 없어서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는 등용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죽였다. 충신들은 죄를 날조하여 죽였는데 자기의 가족과 친척을 가리지 않았다. 명성을 얻기 위해 차남 왕획을 자살하게 한 것 외에도 자기의 숙부 홍양후 왕립과 장남 왕우 등이 황제가 되는 것의 부당함을 건의하자 그들을 모두 죽였다. 또 섭황제 시절이었던 원시 7년(7년)에 동군태수 적의가 군대를 이끌고 봉기하자 적의의 아버지를 포함한 그의 선조들의 무덤을 파헤쳐서 관들을 불태우고 삼족을 멸했으며 어린 아이들도 오독을 먹여 죽이고 모두 한 무덤에 묻었다. 적의도 곧 체포되어 주살되었으며 천봉 3년(16년), 적의의 동지였던 왕손경이 체포되자 태의를 시켜 그를 해부하여 오장의 길이와 무게를 재게 하고 가는 대나무를 혈맥을 따라 넣어 그 시작과 끝을 측정하여 '이것으로 병의 치료법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12] 중국 역사서에 실린 최초의 인체해부다. 지황 2년(21년), 자다가 꿈 속에서 고조의 꾸지람을 받자 무사를 파견하여 고조의 사당에 들어가서 사당을 부수게 하는 졸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4. 반란과 비참한 최후


결국 참다못한 각지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눈썹에 붉은 물감을 들인 도적들의 집단인 적미군을 비롯하여 황족 유현의 지도하에 유수(광무제) 형제, 그 외에 공손술, 연잠, 왕랑 등 군벌들도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왕망은 겉으로 태연한 척 하면서 머리와 수염에 물감을 들였는데 너무 걱정을 하느라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셌기 때문이었다. 또 근심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면 병서를 읽다가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치인 말린 전복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왕망의 군대는 곤양대전에서 유현의 군대에게 대패를 당했다. 유수 등에 의해 추대된 황족 유현은 남양에서 황제에 올라 경시제라고 칭했다. 경시제는 왕광에게 낙양 공략을, 신도건, 이송, 우광, 등엽, 왕헌 등에게 장안 공략을 맡겼다. 왕광은 쉽게 낙양을 떨어뜨렸고 장안도 위급하였다. 경시제 유현이 낙양과 무관을 함락시키자, 대사마 최발이 울음으로써 하늘에 구원을 청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왕망은 문무대신들과 남교에 가서 절을 하고 아침저녁으로 통곡했다. 또한 백성들 중에서 잘 우는 3천여 명을 뽑아 통곡하며 기도하게 했는데 잘 우는 자들에게는 낭중이나 낭관 자리를 주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임명된 자들이 5천여 명이나 되었다. 경시 원년(23년)에 결국 유현의 군대가 장안의 선평문을 부수고 진입했고 신하들과 근위병들도 모두 왕망을 배신했다. 이에 왕망은 백만 명의 군대도 무릎을 꿇게 만든다는 마력을 가진 북두칠성 모양의 두병을 들고 저항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고 다만 점대에서 무려 사흘이나 버텼지만…
결국 상인 출신 두오(杜吳)가 왕망을 살해한 다음 교위 공빈취(公賓就)가 왕망의 목을 자르고 그 옆에 있던 수천 명의 군사들이 왕망을 난도질하여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장군 신도건이 왕망의 머리를 완성으로 보내 효수하게 했을 때도 분노할대로 분노한 백성들은 왕망의 머리를 때리고 칼로 난도질하고 혀를 잘라 베어먹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왕망을 도륙내고 나서도 신도건, 이송이 이끄는 유현 군대를 길라잡이하던 백성들은 궁궐을 약탈하고 마음껏 날뛰었다. 그러나 나중에 들어온 신도건과 이송 장군이 이끄는 군대에게 잡혀 수천여 명이 참수당했다. 궁궐을 약탈하고 황제의 물건을 건드리는 자를 처형하는 법 때문이었다.
효평황후는 아버지 왕망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자 백성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불타는 건물 안에 들어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때가 향년 33세였다.
경시제는 마침내 한나라의 옛 수도 장안에 입성해 조회를 받았다. 경시제는 먼저 입성해 왕망을 살해하고 황제의 거마와 전국옥새, 깃발 등을 마음대로 사용하며 약탈을 저지르고 있던 왕헌을 죽였다. 그러나 백성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백성들은 오히려 왕망의 시대를 그리워했다. 경시제는 나중에 적미군들이 장안으로 들어올 때 잡혀서 유폐된 뒤 그들에 의해 시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유현의 군사들은 장안에 입성해서 왕망의 조상과 처자들의 무덤을 파헤져 관들을 모두 불태우고 왕망 일족들을 멸족시켰다. 왕망이 건축했던 건물들이 모두 불에 타면서 장안은 폐허가 되었다.

3. 평가


환관의 대명사인 십상시와 함께 한나라의 멸망과 삼국시대, 위진남북조시대에 빠트린 진정한 원흉이라 볼 수 있으며,[13] 동시에 외척의 폐해를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다.
통치 기간에 유의미한 업적도 없이 폭정을 저질렀으며 본인 1대를 끝으로 허무하게 멸망하고 후한으로 한나라로의 복고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근대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평가가 아주 좋지 않았다. 중국과 한국에서 반역자의 대명사로 꼽혔으며, 왕망이 했던 행위는 흑역사이자 금기로 규정되었다. 또한 한을 멸망시킨 '''망탁조의(莽卓操懿)'''의 필두로 역적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중국 역사상 유교를 본격적으로 정치이념으로 도입하여 체계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왕망의 역사적 의의는 작지 않다. 전한은 유교를 최초로 정치 이념으로 도입했다는 평을 받고 있으나, 그 실상을 알고 보면 시작부터 유교사상과는 거리가 있었다.[14] 문제와 경제 치세에는 도교와 임협사상, 무제 치세에는 법가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무제의 법가 사상은 만만찮은 폐해를 낳았고, 반작용으로 유교의 풍조가 점점 강해지더니 왕망의 시대에 정점을 찍었다. 왕망의 정치는 주나라의 것을 본받았던 초기 유교 사상을 재현하려는 것이었다. 유교 이론이 춘추시대 이후 몰락한 이유도 시대적으로 맞지 않아서였는데 700년 뒤에 그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니 성공할 턱이 없었다. 왕망은 터무니없는 이상과 동떨어진 현실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 사유 재산제가 정착한 사회에 공동 소유와 공동 경작을 하는 정전제를 도입해 각계각층의 반발을 샀다.
  • 경전을 일일이 따라하느라 관직 체계가 쓸데없이 복잡해졌다.
  • 관료들에게 무조건 봉사를 강요해 녹봉을 주지 않았다. 관료의 부정부패착취가 심해졌다.
  • 타국 지도자를 함부로 후(侯)로 낮추었는데,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중화사상으로 외국을 무시해서 괜히 적의 침략을 불러오기도 했다.[15]
그리고 모든 것을 주나라의 모범으로 돌린다는 정치적 신념에 의해, 주나라 시절에는 예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두 글자 이름을 금지했다. 이는 공양전에서 이름을 두 글자로 쓰는 것을 비판한 공양학의 주장을 전격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춘추 본문에서 중손하기(仲孫何忌)를 중손기(仲孫己)로 표기한 것에 공양전에서 너무 심오한 뜻을 부여한 뻘짓으로, 좌전에서는 이 부분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보지 않아서 해설(전)을 달지 않았다.[16] 신나라 이후 후한위진남북조 시절에 외자 이름이 주류가 된 것을 신나라에서 이유를 찾기도 하나, 이는 단순한 관행이었지 신나라의 개혁 때문은 아니었다. 오늘날 두 글자 이름이 대세인 것도 별 이유가 없는 단순한 관행인 것과 같다.[17] 왕망이 시행한 정책은 죄다 엎어져서 반대로 돌아갔는데, 이것만 왕망이 망한 뒤에도 이어졌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삼국지집해의 편저자 노필(盧弼)은 후한 시대 이름이 전부 외자라는 설은 깊이 살피지 않은 잘못된 이야기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실례로 삼국시대에 살았던 왕원희나 만세(萬歲)[18]곽유지가 있다.
즉, 왕망은 비현실적으로 극단적인 복고주의자, 이상주의자, 형식주의자, 국수주의자였다. 결국 본인이 정치력 만렙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너무 이론만 보고 펴다가 망한 케이스. 실패한 정치 철학을 가지고 정치를 하면 실패한다는걸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수 있겠다.

4. 기타


한서 왕망전에는 교위 한위가 왕망에게 한 말의 식량도 쓰지 않고 배고프면 오랑캐의 고기를 먹고, 목이 마르면 그 피를 마시며 싸우겠다고 말하자, 왕망은 한위를 장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19]
삼국지연의에서도 역적의 대명사로 언급되는데 관도대전에서 조조와 원소가 서로를 비난할 때 원소가 조조에게 “네 죄는 왕망과 동탁보다 더 크다.”라고 말하고, 사마사가 이풍 일파를 떠볼 때도 “나를 왕망과 동탁에게 견주었을 테지?”라고 비웃는다.
망탁조의 중 '''유일하게 게임에 등장하지 못했다.'''[20] 삼국지 시리즈에서 고대무장 등장이라면 가능성이 있긴 하겠지만, 오히려 신나라 소속 인물이 없고 인지도도 저조해서 가능성은 매우 낮다. 삼국지 10, 삼국지 13 등에서 황제로 즉위할 때 국호 중에 신나라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그가 남긴 흔적의 전부. 굳이 보자면 게임보단 삼국지 바탕의 소설이나 만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에서 가볍게 언급하는 정도 또는 삼국지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에 나오는 정도이다.
신 왕조의 비중이 워낙 적다 보니 역사 교육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중등교사 임용시험에서 왕망의 시대착오적 개혁 정치를 소재로 한 서술형 문제가 나오는 정도이고, 중등 교육과정 동양사 파트에서는 - - 춘추전국시대 - - '''''' - 위진남북조 순서로 고등학생에게 중국사를 가르친다.[21] 그나마 수능특강/완성의 경우 신나라의 존재를 언급하고 지나간다. 'AD 8-23. 급진적 개혁으로 호족과 백성들의 반발을 삼' 정도로.
서유기에 그의 이름이 언급된다. 왕망이 천하를 찬탈할 무렵이 손오공석가모니에게 벌을 받아 오행산에 갇혔던 때라고 한다. 서진 때 무고(武庫)에 화재가 발생해 보물들이 소실되었을 때 왕망의 머리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비슷한 예로 육조시대 양나라에서 후경의 난을 일으킨 후경이 있다. 후경은 황제를 자칭하고 한(漢)나라를 세우는 등 기세등등했으나, 폭정을 하다 막판에 진패선, 왕승변 등에게 반격당하고 부하에게 피살당했다. 후경은 머리가 잘려 소금에 절여지고 소역이 있던 강릉으로 보내졌다. 후경은 난을 일으킬 때 양무제 소연을 유폐해서 아사시켰기에 소연의 아들 원제 소역이 후경의 머리를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제삿상에 올렸다. 제사가 끝난 후 후경의 머리는 썩지 않게 옻칠을 하고 물감으로 색을 입힌 다음 강릉 무기창고에 보관했다. 그 뒤의 후경의 머리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서위의 침입을 받을 때 강릉이 폐허가 되면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의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한국의 역덕후들이 종종 王이라고 표기해 비하하기도 한다. 아예 신나라까지 붙여서 "아이고 신나라 왕망했어요~"라고 익살스럽게 표현하기도.[22]
통일 왕조 중간에 세워졌지만 없는 셈 쳤다는 점에서는 측천무후주나라(무주)도 비슷하다. 무주는 당나라의 허리를 자르고 들어섰다가 망했고 전근대 역사가들이 따로 독립된 왕조로 취급하지 않았다.[23]
일부에선 흉노에서 투항한 김일제의 외가 쪽 친척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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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역대 황제'''
전한 15대 정안공

'''1대 왕망'''

현한 1대 경시제

[G] A B 나무위키의 규정에 따라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한 값이며, 당시의 달력으로는 초시 원년 11월 25일(무진일)이었다.[1] 나무위키의 규정에 따라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한 값이며, 당시의 달력으로는 지황 4년 10월 3일(경술일)이었다.[2] 왕망, 동탁, 조조, 사마의.[3] 사마의도 역사적인 관점으로는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며, 동탁이야 위선자도 아닌 그냥 악당 취급.[4] 또한 동진은 정통성 계보에 포함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어쨌든 서진을 이었기에 사마진은 생각보다 오래간 왕조이다.[5] 중국의 왕씨 중에는 그런 식으로 유래한 경우가 많다.[6] 선제의 황후 공애황후 허씨(허평군)의 조카로 이름은 허과. 성제의 황후였으나 폐위되었다.[7] 성제의 조카 애제가 뒤를 이은 후, 애제의 아버지가 황제로 추존되면서 애제의 할머니 소의 부씨가 태후가 되었다. 그녀는 스스로 존호를 요구하고 친족들을 등용하라고 압박했다.[8] 양제도 비슷하게 겸손한 척했다가 자기 아버지인 문제가 죽자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9] 고구려동명성왕이랑 동일인물 설이 있는 인물이다.[10] 혹자는 기록에 나온 고구려를 고구려현으로, 죽은 구려후 추를 고구려현의 우두머리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근거가 미약하며 실제로 이렇게 보는 학자도 얼마 없다. 왕망은 즉위 이후에 주변 이민족들의 왕을 후(侯)로 격하했는데, 구려후 추 또한 본래는 고구려왕이었으나 왕망의 이런 정책에 의하여 격하된 것이다. 기록에 보이는 구려후 추가 정말로 일개 고구려현의 우두머리였다면 애초에 왕을 칭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애시당초 고구려현이 속한 현도군은 기원전 75년경에 고구려의 원주민들의 거센 저항에 밀려나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기에 고구려현은 그저 이름만 유지했을 뿐이었다.[11]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신뢰하여 고구려후 추가 죽었다는 기록을 잘못으로 보았고, 고구려의 장수인 연비가 대신 죽었다고 묘사했다. '구려후 추'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고구려의 건국자인 추모왕인데,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는 이미 사망했고, 고구려의 왕을 죽였을 정도면 멸망을 시키지 국가명을 비칭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 거기다가 고구려의 군대를 이용해서 흉노를 치겠다는 말 자체로 고구려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는데, 1개 군의 태수가 수장을 죽였을 정도라고 생각하기 힘들다(물론 공손찬과 같은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흉노는 동한 초기보다 많이 약했어도 1개 군 정도의 규모가 상대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특히나 일반적인 고구려와 흉노의 위치를 생각하면 인접국가를 이용한 공격도 아닌 장거리 동원이다.).[12] 翟義黨王孫慶捕得 , 莽使太醫 , 尚方與巧屠共刳剝之, 量度五藏, 以竹筳導其脈, 知所終始, 云可以治病 - 한서 왕망전[13] 아예 차라리 왕망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한나라가 유지되었더라면 중국에 삼국시대나 오호십육국시대같은 혼란기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일부 학자들의 의견까지 나올 정도다.[14] 전한을 창건한 한고제 유방은 진시황이 책을 불태우며 유학을 금하자 '이제 공부 안해도 된다!'고 좋아했으며, 나중에 선비를 욕하고 관을 벗겨 안에다 오줌을 쌀만큼(...) 유학, 유학자들을 싫어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육가의 제안으로 유교를 받아들이는데, 그 배경 중 하나가 '''위아래가 없던''' 전한 초기 궁정의 분위기를 좀 바꾸기 위한 목적이란 이야기가 있다. 궁궐에서 천하통일 공이 누가 더 큰지 말다툼하다 빡친 신하가 칼로 궁궐 기둥을 내려칠 정도였으니...[15] 대표적으로 고구려를 '하구려'라며 경멸적으로 불렀고, 한 군현을 통해 삼한을 감시하거나 간섭하려 하는 등 삼한에서도 왕망을 좋지 않게 봤다.[16] 이러한 차이는 크게보면 당시 경전을 두고 해석하는데에서 나온다. 진의 분서갱유 이후 유학 경전이 다수 소실되면서 각 사람들의 암기한 내용을 가지고서 새롭게 경전을 복구해나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벽등에 숨겨진 경전의 원본들이 발견되면서 비슷하지만, 약간의 차이를 가진 2가지의 경전이 존재하게 되었다. 왕망의 시기는 이 2가지 경전의 내용을 가지고서 어느 것을 기본을 삼을 것인지 대립하던 시기였고, 왕망은 새롭게 발견된 것이 아닌 서한 초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경전을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름을 외자로 하는 등 불필요한 사항들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실패하게 되었고, 이후 동한 시기에는 새롭게 발견된 경전을 기본으로는 유학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17] 고대 중국의 인명에 외자 이름이 대세였던 것은 상고한어가 단음절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중국어에 점점 예외적인 다음절 어휘가 늘어나더니 나중에는 아예 다음절 어휘가 일반화되면서 사람 이름도 두 글자가 대세가 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게다가 두 글자로 작명하면 동명이인이 생길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장점도 있다.[18] 주치의 넷째 아들.[19] 근데 이런식으로 외적에 대한 적대감을 보여주는 건 고대 중국에서 보편적이긴 했다. 후한 시대의 명장인 경공은 흉노에게 포위되어 양식과 물이 떨어지자 항복을 권고하러 온 흉노의 사자를 잡아먹었고, 송나라 영웅으로 추앙받는 악비는 자신의 문학작품인 만강홍에 '오랑캐의 고기를 먹고 흉노의 피를 마신다'는 내용의 문구를 넣기도 했다. 오늘날 보면 살벌하긴 한데, 시대의 차이는 참작하자.[20] 그거야 물론 망탁조의의 다른 3명은 동아시아 최고의 미디어 믹스인 기서의 주요인물이기 때문이다. 삼국지의 배경이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 진(서진)까지인데 왕망은 전한 말에서 후한 초기(또는 한나라 중기)의 인물이기 때문이다.[21] 신나라의 정통성을 인정한다면 은-주-춘추-전국-진-전한-신-후한-위진남북조가 되어야 옳다. 물론 아무도 그렇게 여기지 않는 덕에 중고등학교의 중등교육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며 고등교육을 성실하게 받아도 동양사전공이 아닌 이상은 신나라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별히 역사에 관심이 많거나, 관련 전공을 깊게 이수하지 않는 한 모를 수밖에 없다.[22] 그런데 왕망하다란 말은 뜻은 다르지만 국어사전에 있다.[23] 측천무후의 정치는 오늘날 재평가가 이뤄져 긍정적 측면도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당대에도 황제로서 인정받지는 못하였지만, 3대 고종의 황후로서 대우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