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원황후 왕씨

 





孝元皇后 王氏
본초 3(기원전 71)년 ~ 왕망 시건국 5(13)년
1. 개요
2. 황후로의 길
3. 고난의 황후
4. 영욕의 모의천하
5. 나라 잃은 국모


1. 개요


전한 원제의 황후이자 성제의 어머니이다. 이름은 왕정군(王政君)으로 효선황후 왕씨의 조카이자 후에 한나라를 찬탈하여 신을 건국한 왕망의 고모이기도 하다.

2. 황후로의 길


위군(魏郡) 원성현(元城縣) 사람으로, 조상은 제나라 전씨의 후손인데 전한 건국 이후 나라를 상실한 이들을 제나라 사람들이 "왕가(王家)"라 지칭한 데서 성을 따왔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왕금(王禁)인데 자가 치군(稚君)으로 젊은 시절에 장안(長安)에서 법률을 배워 정위사(廷尉史:정위의 부관 또는 차관)을 지냈다.
원래 황태자였던 원제에게는 총애했던 양제(良娣: 황태자의 후궁) 사마씨(司馬氏)가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제가 죽는 것은 다른 첩들이 저를 죽이고자 저주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원제는 이를 매우 슬퍼하고, 또한 그녀의 유언을 옳다고 여겼다. 하여 화로 인해 병이 나고 다른 첩들을 가까이 하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는데, 선제는 이를 걱정하며 원제를 위해 여인을 뽑도록 하였는데 왕정군도 후보자 중 한 사람이었다. 원제가 문안에 들자 어머니인 황후가 왕정군 등 다섯 여인을 보였지만 시큰둥했는데, 어머니 때문에 한 사람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왕정군은 원제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었고, 또한 홀로 눈에 띄는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기에 원제의 눈에 드는 것으로 주변 사람이 판단하였다. 이에 왕정군이 원제를 모시게 되었는데, 곧 임신하였다. 이미 황태자의 후궁이 십수 명이었지만 여러 해가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는데, 감로(甘露) 3년에 왕정군이 성제를 낳으니 선제는 매우 기뻐하며 세적황손(世適皇孫)으로 삼아 대단히 아끼고는, 몸소 이름을 오(驁), 자를 태손(太孫)이라 하여 항상 자기 곁에 두었다.
이후 선제 사후 원제가 즉위하자 첩여(婕妤)가 되었다가 3일 뒤에 황후로 책봉되었다.

3. 고난의 황후


그녀는 모이자귀(母以子貴:어머니는 자식의 지위로 인해 함께 고귀하게 된다는 뜻. 춘추대의에 따른 것이다.)에 따라 성제가 황태자가 되니 그 어머니의 자격으로서 황후가 되었기에, 원제의 총애를 받지는 못했던 듯 하다. 다만 한나라 황실의 법도 및 전통에 따라 황후의 일족을 높은 관작에 봉하여 예우하였다.
당시 총애를 받았던 이는 소의 부씨였는데, 그녀의 아들 정도공왕(定陶共王)은 재주가 많아 원제의 사랑을 받아서 항상 그 옆자리에 앉고 연(輦)도 탈 정도였다. 그래서 원제는 항상 태자였던 성제를 폐위하고 정도공왕을 그 자리에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에 효원황후와 성제는 두려워하며 원제의 신임을 받았던 시중(侍中) 사단(史丹)에게 크게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다. 또한 효원황후의 성정이 조심스럽고, 선제가 성제를 세적황손이라 아꼈었기에 폐위할 수 없었다.

4. 영욕의 모의천하


원제가 사망하고 성제가 즉위하자, 그녀는 황태후가 되었다. 그녀의 형제인 왕봉(王鳳)은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 영상서사(領尙書事)[1]가 되고 5천 호의 봉지가 더해졌다. 다른 형제들도 관직과 봉작을 받아서, 왕씨 일족의 번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왕망 또한 이때를 전후하여 왕봉의 추천을 받아 등장하였다.
그러나 성제는 20여 년을 통치하였지만 소생의 황자가 없었고, 이에 태자시절 성제의 지위를 위협했었던 정도공왕의 아들을 영립하게 되니 바로 애제다. 애제는 즉위 초기에는 외척으로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왕씨 일족과 그 중심인 왕 태후를 의식하였으나 이내 할머니인 부씨와 어머니인 정씨(丁氏)를 불러들이고 그 일족들을 새로운 외척으로서 조정에 포진시키기에 이른다. 또한 왕씨 일족도 대부분 제거되어 낙향하였는데, 왕망은 천하의 신망을 얻었기에 오래지않아 다시 보정으로서 복직하게 되었다.
부씨는 원제의 정후(正后)로서 애제 즉위 이후 태황태후가 된 왕 태후를 무시하며 그 권위를 질투하였기에 손자인 애제를 움직여 자신은 제태태후(帝太太后), 정씨는 제태후(帝太后)라는 칭호를 올리도록 하였다. 하여 당시 장안 궁중에는 2명의 태황태후, 2명의 황태후가 있는 셈이 되는 이상한 정국이 나타나게 되었다. 궁중 연회에서 왕 태후와 부씨가 자리로 인해 다툼이 벌어지고 왕망이 이를 중재하면서 제태태후가 정실이 아니라 일개 첩이었다고 애둘러 모욕한 일화는 이때의 일이다.
약 6년 가량 재위한 애제가 황자를 남기지 않은 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왕 태후는 당장 옥새부터 챙기고 일족 중에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왕망을 불러 나이 9살의 평제를 옹립하였다. 평제의 나이가 어렸기에 왕 태후는 섭정에 나섰고, 왕망은 이를 바탕으로 더욱 위세를 강화하게 되었다. 또한 부씨와 정씨 일족을 숙청하고, 그 존호를 삭탈시켰다. 이때 부태후와 정태후는 이미 수년 전에 사망했는데, 그야말로 장수한 덕에 모욕을 갚을 수 있었던 셈이다.

5. 나라 잃은 국모


왕망은 점차 자신이 권력을 쥐게 된 배경인 왕 태후마저도 무시하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딸을 평제의 황후로 들여보내어 국구로서의 지위도 점하였다. 이후 평제가 장성하자 독살하였고, 젖먹이었던 유자영을 옹립하고 스스로는 가황제, 섭황제라 칭하였다가 끝내 선양을 가장한 찬탈을 감행하여 신나라를 건국하였다. 이때 왕 태후가 전국옥새를 감추고 있었는데 이를 끝내 내어주게 될 상황이 되자 매우 꾸짖으며 집어던져서 전국옥새의 모퉁이가 깨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후 왕망에 의해 신실문모태황태후(新室文母太皇太后)란 존호를 받았으나 왕망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왕망이 칭제 이후에 왕태후의 남편인 원제의 묘를 없애고 궁전으로 바꾸고 왕 태후를 불러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를 알고 왕망에게 대노하였다. 하여 왕망이 한나라의 제도를 고쳤지만, 자신의 궁정에서는 이를 일체 고치지 못하게 하는 등 저항하였다.
그녀는 왕망의 시건국 5년에 8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 한무제 사후 곽광을 이러한 직임에 임명하여 차기 황제를 보정하도록 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후한 말기까지도 이러한 외척 우대는 성행하여 외척보정의 단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