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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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5px -11px"휘정현숙효순왕후
(徽貞賢淑孝純王后)
<colbgcolor=#bf1400> '''휘호'''
휘정현숙(徽貞賢淑)
'''시호'''
효순왕후(孝純王后)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출생'''
1715년
'''사망'''
1751년
'''능묘'''
영릉(永陵)
1. 개요
2. 생애
3.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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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아내. 세자가 요절하였으나 이후 정조가 남편 진종의 양아들이 되어 추존되었기 때문에 그녀 역시 사후 왕후로 추존되었다.

2. 생애


1715년 풍양 조씨 조문명의 딸로 태어났다.[1]
1727년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빈으로 간택되었으나, 바로 이듬해 세자가 요절하면서 14살에 과부가 되었다. 1735년 사도세자가 태어나자 영조로부터 현빈(賢嬪)이라는 빈호(嬪號)를 받았다.

이날 임금이 명하여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양관(兩館)·정부(政府)·육조 참판 이상을 불러 빈청(賓廳)에서 회의하게 하였는데, 효빈(孝嬪)·철빈(哲嬪)·소빈(昭嬪)이라는 삼망(三望)을 갖추어 올리니, 의망(擬望)을 더하라고 명하였다. 또 장빈(莊嬪)·단빈(端嬪)·사빈(思嬪)으로써 의망을 더하였으나, 임금이 여러 글자의 음과 뜻이 모두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여 손수 ‘현(賢)’자를 써서 내렸다.

영조가 정쟁에 휘말려 목숨을 위협받을 때 주변의 남자들은 혈육도 못 믿을 지경이어서인지 남자에게는 까다로웠다. 대신 그 와중에 자신에게 호의적이던 사람들이 주로 궁중의 여성들이었던 탓에, 유난히 주변 여성들에 대해서는 관대한 면이 있었다. 실제로 영조의 불같고도 깐깐한 성격을 달래서 가정의 화목을 지키는 데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 며느리였던 현빈 조씨, 딸 화평옹주, 숙종의 계비이자 영조의 법적 어머니인 인원왕후 등이 영조에게 치이는 사도세자를 그나마 감싸주었는데, 이 여성들이 줄줄이 죽은 후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히스테리도 심해졌다. 이 점은 마더 컴플렉스로 여성에 대한 스트레스가 쌓여서 유난히 여성에게 적대적이던 성종과 비교된다.
그러나 현빈 본인도 남편처럼 병을 얻어서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시호는 효순빈(孝純嬪).
영조는 현빈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두 자식[2] 중 한 명이라고 했으며, 현빈의 사망 후에도 생일을 챙겼다. 또 영조는 현빈이 삶아주는 밤을 좋아해서 자주 며느리의 처소에 찾아가 밤을 얻어먹었고, 현빈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에도 '나를 위해 준비한 밤이 아직 소반 위에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사후 남편 효장세자의 묘에 합장되었으며, 영조가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켰으므로 정조 즉위 후 효장세자가 진종(眞宗)으로 추존됨에 따라 함께 효순왕후로 추존되었다. 이후 1908년 대한제국 순종황제에 의해 다시 황후로 추존되면서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로 불리게 되었다.

3. 그 외


이별가:효장세자빈 이야기의 여주인공. 아라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는 점을 반영해 남녀관계에 무지했다가 유진한과의 만남으로 점차 사랑에 눈을 뜬다.

[1] 아버지 조문명과 삼촌 조현명은 왕세제 시절 영조를 보호한 인물로, 완론탕평을 주도한 영조의 측근이다.[2] 다른 한명은 화평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