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양 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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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기도 남양주시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로,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 '''조맹'''(趙孟)이다. 고구마를 처음 들여온 이조판서 조엄이 풍양 조씨였으며, 조선 후기 장동 김씨와 세도를 다툰 조만영 · 조인영 형제는 그의 손자다.
17세기 좌의정을 지낸 평장사공파 조익(趙翼)의 기록에 의하면 한국의 조씨 중 가장 오래되었다.[원문][번역]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백제의 개국공신이라 전하는 직산 조씨 시조는 실존 여부가 불분명할 뿐더러 고증 가능한 기록이 고려 후기에야 등장하고, 같은 고려 초의 함안 조씨 시조는 한반도에서 자생한 조씨가 아니라 중국에서 건너왔기 때문이다.
2. 가문의 역사
바우(岩)라는 사람이 고려 개국의 공이 있어 태조 왕건이 조(趙)라는 성과 맹(孟)이란 이름을 하사했다고 기록돼 있다.
족보에 따르면 조맹은 신라 말 풍양현[1] 에서 태어나, 천마산 기슭 바위동굴에서 난세를 피하고 있었다. 당시 후고구려 군을 이끌고 후백제와 전쟁 중이던 왕건이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쳤다. 영해[2] 지방에서야 한숨돌린 왕건은 군사회의를 열었다. 그러자 풍양현에 숨어 사는 '바우도사'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듣고 직접 찾아가 책사로 삼았다고. 당시 조맹은 70세였다는데, 마침내 고려가 건국되자 태조 왕건에게 왕명으로 성과 이름을 받고 삼한개국공신 3등에 이름을 올린다. 남양주시 천마산에는 신라 말 조맹이 왕건과 만났다고 전해지는 현성암(見聖庵)[3] 이라는 유적이 있고, 조맹이 홀로 마셨다는 우물[獨井] 인근은 '독정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그 이후 선대에 대한 계보는 기록이 없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정리가 된다.[4][5] 풍양 조씨가 유명한 건 역시 조선 후기에 있었던 세도정치 때문. 풍양 조씨는 신 안동 김씨가 모든 것을 장악했던 당시, 효명세자의 장인인 조만영을 중심으로 가세를 일으켰다. 조만영의 동생 조인영은 영의정에 올랐으며 세도 정치의 근간이 되는 외척 자리를 놓고 안동 김씨와 격돌한 풍양 조씨는 효명세자가 요절하자 안동 김씨에게 밀리게 된다. 그러나 이후 헌종(조선), 철종(조선) 등이 하나같이 대를 잇지 못하면서 조 대비가 흥선대원군의 아들 익성군을 효명세자의 양자로 삼아 대통을 잇게 한다. 풍양 조씨는 흥선대원군, 여흥 민씨 등과 손잡고 안동 김씨를 밀어내는 데 마침내 성공한다.[6]
물론 안동 김씨들이 그냥 물러난 것은 아니다. 몇십 년에 걸쳐 집안간 알력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세도가와 그 친척 문중 후손들은 당시 얘기를 어르신들에게 많이 듣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집안의 긍지는 물론 당시의 한에 대해 알게 된다고. 조선시대에만 과거 급제자 181명, 정승 7명, 홍문관 대제학 4명을 배출했다. 2015년 현재 인구는 12만에 달한다.
3. 풍양의 위치
풍양현은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진접읍, 오남읍 일대이다. 풍양이라는 지명은 지금도 풍양출장소[7] , 풍양중학교 등에 남아있다. 백제와 고구려에 속했을 때는 골의노현(骨衣奴縣)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황양현(荒壤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한양군(漢陽郡)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이름을 다시 풍양현으로 고치고 양주에 속하게 하였다. 그후 현종 9년(1018년) 포주[(抱州; 포천(抱川)]로 다시 소속이 바뀌었다. 세종 9년(1427년)에는 다시 양주에 통합되게 되면서 현은 폐지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 당시 명칭인 양주목에서 양주군으로 개편된다. 1980년 4월, 양주군 남부 지역을 분리하여 남양주군을 신설하였다. 1995년, 미금시와 남양주군이 통합하면서 남양주시로 승격했다.
4. 5대파(五大派)
시조 이후의 세계(世系)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까닭에 정확히 몇 세대가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후에 다시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후손들로부터 집안이 이어져 내려온다. 계파는 크게 다섯 파(派)로 나뉜다.
- 전직공계(殿直公系)는 고려 중기 천화사전직(天和寺殿直)을 지낸 조지린(趙之藺)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전직공의 후손은 아래 설명할 3개 파로 나뉘는데, 후손으로서 자신이 무슨 파인지 설명할 때는 전직공파/전직공계라는 말을 쓰지 않고 아래 3개 파중에 하나라고 설명한다.
- 호군공파(護軍公派) : 조지린의 6세손인 조염휘(趙炎暉)[8] 의 장남 조사충(趙思忠)을 중시조로 한다. 상주시에 집성촌이 있다. 후손 1만 4천여 인이 있다.
- 회양공파(淮陽公派) : 조염휘의 삼남 조신(趙愼)[9] 을 중시조로 한다. 부여군을 비롯한 충청남·북도 곳곳과 춘천시를 비롯한 강원도 곳곳, 군산시를 비롯한 전라북도 곳곳에도 집성촌이 있다. 후손 5만 8천여 인이 있다.
- 금주공파(錦州公派) : 조염휘의 사남 조임(趙𥙛[10] )을 중시조로 한다. 포천시와 양주시에 집성촌이 있다. 후손 3천여 인이 있다.
- 조염휘의 차남 조사공(趙思恭)은 1358년 신돈을 처치하려다 발각되어 곤장을 맞고 유배를 떠나던 도중 신돈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사망하였다. 딸만 넷 두어 남계 후손이 없다.
-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는 충렬왕 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조신혁(趙臣赫)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화성시, 해주시, 강원도 곳곳, 동래구, 사하구에 집성촌이 있다. 후손 1만 3천여 인이 있다.[11][12]
-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는 고려 중기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조보(趙寶)를 중시조로 삼고 있다. 강진군과 안악군에 집성촌이 있다. 후손 3천여 인이 있다.[13]
이 중에서 상장군공파는 사연이 특이하다. 이 파는 조보의 증손자 조함(趙瑊) 대까지는 본관을 풍양으로 썼는데, 조함의 첫째아들 조수(趙琇)의 후손들은 강진에 뿌리내리고, 둘째 아들 조천규(趙天圭)의 후손들은 안악에 뿌리내리면서 이들 형제부터 강진을 본관으로 쓰게 된다. 정조 때 강진현감으로 부임한 회양공파 조홍진(趙弘鎭)이 강진의 호적대장을 보고 이 지역에서 세거하는 조씨 일족이 같은 일족임을 안 뒤 이를 예조에 통보하였고, 임금의 명으로 풍양 조씨로 본관(本貫)을 되돌렸다. 여담으로 강진군에서 조씨를 발견하면 열에 아홉은 풍양 조씨(=강진 조씨)이다.
여담으로 풍양 조씨 전직공계, 평장사공파(남원공파), 상장군공파의 족보의 표제가 모두 풍양조씨세보로 똑같은데, 표제 앞에 한자로 적힌 숫자가 있는 게 전직공계이고, 상중하로 적힌 게 평장사공파, 표제 중간에 상장군이 들어가 있으면 상장군파로 구별된다.
순혈도가 상당히 높은 씨족이기도 한데, 높은 인지도에 비해서 의외로 인구가 많지 않고, 거의 대부분 집성촌에 모여서 살아 누가 누군지 다 알았기 때문이다. 족보 제작도 상당히 깐깐하게 이루어져서, 가족관계에 조금이라도 의심가는 인물이 있으면 본보에 등재하지 않고 별보에 등재했다.
5. 항렬
앞서 말했듯이 5대파는 서로 소목(昭穆)를 가릴 수 없다. 전직공과 평장사공과 상장군공 각자의 인물이 시조로부터 가계가 어떻게 내려왔는지는 물론 몇 대 후손인지조차도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파별로 항렬을 따로 쓸 수밖에 없다.
전직공계 : 짝수 세손은 항렬자가 이름의 앞에, 홀수 세손은 항렬자가 이름의 뒤에 쓰인다. 천간을 이용해 항렬을 제정하였다.
평장사공파 : 홀수 세손은 항렬자가 이름의 앞에, 짝수 세손은 항렬자가 이름의 뒤에 쓰인다. 천간+지지에 오행을 결합하여 항렬을 제정하였다.
상장군공파 : 짝수 세손은 항렬자가 이름의 앞에, 홀수 세손은 항렬자가 이름의 뒤에 쓰인다. 천간을 이용해 항렬을 제정하였다.
상장군공파 항렬은 2005년에야 공식적으로 정해졌기에 대부분 이름을 제각각 지었고, 지금도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
6. 조선 왕실의 인척
7. 인물
- 조강현 (康玹, 1985년 ~ ) - 배우
- 조긍연 (兢衍, 1961년 ~ ) - 축구선수
- 조남관 (南寬, 1965년 ~ ) - 검사
- 조남기 (南起, 1927년 ~ ) - 중국 군인
- 조남승 (南升, 1882년 ~ 1933년) - 독립운동가
- 조남조 (南照, 1938년 ~ ) - 국회의원, 언론인
- 조남철 (南哲, 1923년 ~ 2006년) - 바둑기사. 조치훈의 숙부이다.
- 조남풍 (南豊, 1938년 ~ ) - 군인, 박사
- 조대연 (大衍, 1888년 ~ 1962년) - 대한제국 관료, 대한민국 국회의원, 충청북도지사
- 조동기 (東紀, 1971년 ~ ) - 농구선수
- 조동석 (東奭, 1845년 ~ 1896년) - 독립운동가
- 조동윤 (東潤, 1871년 ~ 1923년) - 조선귀족
- 조동익 (東益, 1960년 ~ ) - 싱어송라이터
- 조동진 (東振, 1947년 ~ 2017년) - 싱어송라이터
- 조동호 (東祜, 1892년 ~ 1954년) - 독립운동가
- 조만영 (萬永, 1776년 ~ 1846년) - 세도정치 중심인물
- 조문기 (文紀, 1927년 ~ 2008년) - 독립운동가
- 조병욱 (丙旭, 1998년 ~ ) - 야구선수
- 조병준 (秉準, 1862년 ~ 1931년) - 독립운동가
- 조상기 (相紀, 1975년 ~ ) - 배우
- 조석 (奭, 1983년 ~ ) - 만화가
- 조성돈 (誠惇, 1896년 ~ 1946년) - 독립운동가
- 조순 (淳, 1928년 ~ ) - 서울특별시장
- 조엄 (曮, 1719년 ~ 1777년) - 조선 문신. 고구마를 들여와 한국 최초로 재배한 인물.
- 조영하 (寧夏, 1845년 ~ 1884년) - 조선 문신
- 조완구 (琬九, 1881년 ~ 1954년) - 독립운동가
- 조우리 (友利, 1992년 ~ ) - 배우
- 조우정[14] (1984년 ~ ) - 배우
- 조의연 (義衍, 1966년 ~ ) - 판사
- 조인묵 (仁默, 1956년 ~ ) - 제 36대 양구군수
- 조인성 (寅成, 1981년 ~ ) - 배우
- 조인영 (寅永, 1782년 ~ 1850년) - 영의정
- 조종묵 (鍾默, 1961년 ~ ) - 초대 소방청장
- 조중구 (重九, 1880년 ~ 1942년) - 독립운동가
- 조중구 (重九, 1906년 ~ ?) - 조선귀족
- 조중연 (重衍, 1936년 ~ ) - 국회의원
- 조중연 (重衍, 1946년 ~ ) - 축구선수, 제 51대 대한축구협회장
- 조치훈 (治勳, 1956년 ~ ) - 바둑기사. 조남철의 조카이며 어릴 적 풍연(豊衍)에서 개명하였다.
- 조태연 (台衍, 1895년 ~ 1945년) - 독립운동가
- 조평재 (平載, 1909년 ~ 1969년) - 변호사
- 조현명 (顯命, 1690년 ~ 1752년) - 조선 문신, 영의정
8. 관련 문서
[원문] 趙氏在東方者。惟我豐壤爲最舊。他處之趙皆後出。[번역] 동방에 있는 조씨(趙氏) 중에서는 오직 우리 풍양(豐壤)이 가장 오래되었고 다른 곳의 조씨들은 모두 뒤에 나왔다.[1] 현 남양주 진건읍 송능리[2] 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병곡면, 창수면, 축산면 일대[3] 見은 보통 '견'으로 읽으나 '뵈다/뵙다'의 뜻으로 쓰일 때는 '현'으로 읽는다. 예시로 알현(謁見)이라는 단어가 있다.[4] 고려 중~후기까지의 기록은 전하진 않지만, 고려 말에 이미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이 여럿 있고, 내로라하는 유력 가문들과 사돈을 맺은 기록 또한 있으므로 고려 때도 내내 잘 나간 집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5] 조선왕조실록에도 시조 조맹이 고려의 재상이라 나와있다. 단, 한양 조씨의 시조라 기록되어있는데,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본관이 시조의 거주지 개념이 아니라 지금의 본적과 유사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본관 항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내가 원래 어디 김씨인데 여기에서 대대로 살았으니 여기 김씨로 바꾸겠다'''가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서울에서 대대로 살던 풍양 조씨 일족이 있었고, 실록을 기록하던 사관은 이 일족을 '서울에서 대대로 살았으니 한양 조씨다'라고 인식하고 이 일족의 맨 윗대 조상을 한양 조씨의 시조로 기록한 것이다.[6] 여담으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유홍준은 세도 정치 시기 풍양 조씨를 딱히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책 내용 중에 헌종이 외조부 조만영이 사망한 것 때문에 개혁 의지를 잃었다던지... 실제로 이하전 등 안동 김씨 세도에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여러 종실이 풍양 조씨 세력의 비호를 받았다.[7] 다만 현재의 풍양출장소는 옛 풍양현과는 다르게 진건읍이 속하지 않고 진접읍ㆍ오남읍ㆍ별내면ㆍ퇴계원읍ㆍ별내동이 속한다.[8] 고려사엔 趙炎輝로 기록되어있다.[9] 조선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조신에게서 글을 배웠다 한다.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었던 조만영, 조인영 형제가 조신의 후손이다.[10] 示+任. 유니코드 확장한자이다. 1970년 이후에 발간된 족보에는 袵(衣+任)으로 나와있는데, 당시엔 이 글자를 타자로 입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1] 평장사공파는 초기에 광주 하도 송라촌, 즉 지금의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송라리, 원리 일대에 세거하였는데, 이 때문에 야목리의 옛 이름인 들목의 이름을 따서 들목 조씨라고도 부른다.[12] 과거 명칭은 남원공파였는데, 중시조의 증손자인 남원도호부사를 지낸 조계팽(趙季砰)의 후손이 현달하여 족보도 조계팽의 후손을 중심으로 편찬하고, 조계팽의 두 형에 대한 기록을 잃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남원공파라고 부르는 어르신들이 많다.[13] 안악군의 풍양 조씨는 거의 집계되지 않았다. 집성촌이 북한에 있고, 1.4 후퇴 때 내려온 소수만이 집계되었고, 족보도 이들의 직계 외엔 기록이 거의 없는 등 굉장히 부실한 편이다. 다만 국조방목에 안악에 거주하는 강진 조씨 중 무과에 급제한 이가 많은데, 강진군의 강진 조씨보다 후손이 더 많을 가능성도 있다.[14] 순우리말 이름으로 한자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