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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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영조의 서3녀. 영조의 총애 를 받은 딸이며, 사도세자의 동복누나가 된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727년(영조 3) 당시 종2품 숙의였던 영빈 이씨가 낳았다. 비록 아들은 아니지만, 화평옹주가 태어날 당시에는 효장세자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영조에게는 근심이 없었다.
1731년(영조 7) 옹주가 5세의 나이로 천연두를 앓자 영조는 모든 추국과 형신을 정지했다. 당대에 천연두는 '마마' 또는 '손님'이라고 불렀는데, 천연두에 걸린 환자가 있을 때는 부정탈 만한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는 금기가 있었기 때문이다.[4] 다행히 무사히 완치되어 그해 7월 20일 화평옹주로 책봉된다.
2.2. 혼인
1738년(영조 14) 2월 17일 초간택, 2월 25일 재간택, 2월 30일 삼간택을 진행하였다.
이 중에서 참의 박사정의 아들 박명원이 부마로 간택되었다.[6] 초간택과 재간택 명단에서 박명원의 이름이 계속 첫번째로 언급된다.[7]
영조는 화평옹주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현궁을 딸의 신혼집으로 주기 위해 고쳤다. 다만, 신하들이 이현궁은 어의궁보다 크다고 하고, 또 옹주도 이현궁은 과분하다며 받지 않겠다고 해서 다른 궁을 내려주긴 한다. 그 외에도 옹주의 집을 수리하기 위해서 경복궁 터에 있는 나무를 베어다가 목재로 쓰게 하는 등, 혼인할 때도 예물이 화려하고 풍성했다.
오죽하면 효종과 안빈 이씨의 딸 숙녕옹주의 남편 금평위 박필성이 왕녀들의 주혼(主婚)[8] 을 맡았는데, "숙녕옹주가 혼인할 때보다 화순옹주가 혼인할 때 예물이 열 배는 풍성했고, 화평옹주가 혼인할 때는 화순옹주보다 더 풍성했다."고 말했다.[9]
2.3. 아버지의 편애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는 자식들을 비정상적으로 편애하는 아버지였다. 화평옹주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것처럼 끔찍하게 사랑했지만,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는 미워한 것이다.
화평옹주를 보러 갈 때에는 사도세자에게 뭐라도 물어서 대답을 들은 뒤에 귀를 씻고 양치질을 하고, 그 물을 화협옹주의 집 방향으로 버렸다. 마치 부정을 씻어내는 의식처럼 기이한 행위다. 화평옹주에게 보여주는 사랑과 천차만별인데 혜경궁 홍씨는 화평옹주를 가리켜 '''"부왕의 자애를 특별히 입으시니"'''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하지 않고, 동생들과 사랑을 나누려고 애썼다.
화평옹주가 홀로 부왕의 자애를 받는 일이 숨은 아픔이 되어 부왕께 "마옵소서" 여쭈나 아무리 해도 영조께서 듣지 않으시니 할 수 없었느니라.
《한중록》[10]
2.4. 죽음
화평옹주는 첫 딸을 낳다가 난산으로 사망하는데, 당연히 장례를 치를 때도 국상에 버금갔다. 옹주의 무덤을 조성하는 데에 수개월이 걸려서 공역에 동원된 백성들이 농사를 못 짓고 폐기할 정도였다. 영조는 "딸의 경우에는 화평 옹주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는데, 이제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깊은 슬픔을 나타냈다.[11] 밤새도록 빈소에서 통곡할 정도여서 신하들이 건강을 생각하라며 말렸지만 소용 없었다.
무엇보다 화평옹주의 이른 죽음은 사도세자에게는 불행이었다. 옹주는 어질고 온화한 성품으로, 사도세자는 물론이고 다른 동생들과의 사이도 좋았는데 화평옹주가 죽고 없자 왕실에는 화평옹주의 역할을 대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혜경궁 홍씨의 말처럼 만약 옹주가 오래 살았다면 부자 관계가 양극단으로 치닫지 않도록 조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장 화완옹주는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고 들어서 화평옹주와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화평옹주 계실 제는 동생 역성을 들어 일에 따라 부왕께 말씀을 올려 맺힌 것을 푼 일이 많았는데, 그 옹주 돌아가신 후에는 위에서 과한 행동을 하시거나 자애가 부족하셔도 "참으시어 그리 마소서" 할 이 없으니, 점점 영조의 자애는 부족하고 경모궁께서는 두렵기가 날로 심하시니 자식 된 도리를 점점 못 차리시니라. 화평옹주 계셨으면 부자간에 자애와 효도를 갖추게 하였을 것이니, 착하신 옹주 일찍 돌아가신 것이 어찌 국운(國運)과 관계치 않으리오. 지금 생각하여도 애석하도다.
《한중록》[12]
3. 여담
- 의소세손이 태어난 달이 화평옹주의 탈상[13] 이었는데 영조는 자신의 첫 손자를 반기지 않았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에게 "네가 어느 사이 자식을 두었구나, 아들을 낳았으니 기특하다" 같은 말이라도 할 법한데 하지 않았고, 영빈 이씨가 혜경궁 홍씨의 산후조리를 돕자 죽은 딸은 잊고 손자 태어난 것만 좋아한다고 일갈하기도 했다.[14]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의소세손을 예뻐하기 시작했는데, 영조가 의소세손의 어깨에 있는 점을 보고 화평옹주도 여기에 점이 있었다며 이 아이는 화평옹주의 환생이라고 믿었단다.
- 1743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사찰 불암사 목조석가여래좌상[15] 개금불사에 남편 박명원과 함께 대시주자로 동참한 기록이 있다. 이 불암사는 후일 의소세손의 원당이 된다. 이걸 보면 화평옹주와 의소세손이 인연은 인연인 듯.
[1] 계생동에 있었다. [2] 본관은 반남, 자는 회보(晦甫), 호는 만보정(晩葆亭), 사후에 받은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3] 본래 금성위 박명원의 맏형 박흥원의 3남인데 양자로 입적되었다. [4] 영조실록 29권, 영조 7년 1월 12일 병자 1번째기사. # [5] 승정원일기, 영조 14년 2월 25일. # [6] 박명원은 연암 박지원의 재종형으로, 1780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박지원을 데리고 갔고 이때 박지원이 쓴 작품이 열하일기다. [7] 보통 이런 경우 처음부터 눈에 들어 점찍어놓았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 혜경궁 홍씨가 세자빈으로 간택될 때도 명단에서 제일 첫번째로 언급된다. [8] 원래 신부의 아버지가 혼인에 관한 일을 주관한다. 하지만 왕은 나랏일을 해야하므로 딸의 혼인을 챙길 수 없었고, 부마 집안과 신분 차이 때문에 서로 부담스럽다. 그래서 공주나 옹주가 혼인할 때는 왕을 대신해 종친 중 한 사람이 혼인을 주관하는 게 관습이었다. [9]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 8월 2일 갑신 1번째기사. # [10] 혜경궁 홍씨, 정병설 편역, 『한중록』, 문학동네, 2010. [11]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 7월 1일 계미 2번째기사. # [12] 혜경궁 홍씨, 정병설 편역, 『한중록』, 문학동네, 2010. [13] 삼년상이 모두 끝나 상복을 벗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14] 사도세자가 효장세자 사후 7년만에 어렵게 얻은 고명 아들이고, 갈수록 왕실에 남계 후손이 귀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영조의 이런 행동은 납득하기 힘들 정도지만 아예 사도세자의 서출로 태어난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에 대하면 나은 태도다. [15] 2018년 12월 19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