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장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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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세자. 묘호는 '진종(眞宗)', 시호는 '''소황제(昭皇帝)'''. 세자로서 받은 시호는 효장세자(孝章世子)이다. 휘는 행(緈), 자는 성경(聖敬). 영조의 장남이며, 사도세자의 이복형, 정조의 양(큰)아버지. 만 9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했지만 뜻하지 않게 정조가 그의 양자가 되면서 추존왕으로, 뒤에 정조의 계통상 4대손이 되는 순종에 의해서 황제로 추존되었다. 서자이기는 했지만, 숙종이 생전에 본 유일한 친손자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영조의 서장자
조선 영조의 서장자로, 생모는 후궁 정빈 이씨다. 동복 형제로는 화억옹주와 화순옹주가 있다. 1719년에 태어났는데, 당시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상중이었기 때문인지 숙종실록과 경종실록에는 기록 자체가 없다.
2.2. 왕세자 책봉
영조가 즉위한 1724년에는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고, 그 다음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727년 조문명의 딸과 가례(혼인)를 올렸다.[2]
2.3. 안타까운 죽음
하지만 1728년, 영조가 35살이던 해에 갑자기 병에 걸려 10세의 어린 나이에 단명했다. 영조는 친히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효장세자는 '효를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14세의 나이에 청상 과부가 된 현빈 조씨(顯嬪趙氏)는 이후 죽을 때까지 영조의 병수발을 들면서 홀로 살아야 했는데 며느리를 불쌍히 여긴 영조가 현빈 조씨에게는 잘 대해주었다고 한다. (1752년 병을 얻어 그녀 역시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야사에 독살설이 있고 이 설에 따르면 배후로서 경종비 선의왕후가 거론되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영조 6년 3월 9일 2번째 기사) 세자와 옹주를 매흉(埋凶)[3] 한 궁인들을 친국한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독살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4] 일부 현대 역사 입문서(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는 독살을 사실로 보고 있지만, 큰 옥사로 발전하지 않고 관련자들의 처형으로 끝난 것으로 미루어[5] 의심스러운 정황에서 그쳤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배후가 정말 선의왕후라면 영조가 옥사를 크게 열고 싶어도 열수가 없다. 대비이자 형수인 선의왕후를 대놓고 처벌하려다가는 폐모살제 때문에 폐위된 광해군처럼 소론과 남인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일단은 관련자들의 처형으로 덮어두고, 손발이 잘린 선의왕후에게는 나중에 조용히 손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선의왕후 항목에도 나왔듯이 선의왕후의 죽음 또한 석연치 않은 정황이 많다.
영조는 효장세자 사후 7년 뒤에야 겨우 아들을 봤는데, 이 어렵게 본 아들이 그 유명한 사도세자이다. 여기까지였으면 어린 나이에 죽은 그다지 존재감 없는 왕자였겠으나...
3. 사후
3.1. 정조의 양부가 되다
이복동생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으면서 사태가 급변하게 된다. 영조는 세손인 정조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6] 이었지만, 명색이 죄인인 사도세자[7] 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래 전에 죽은 효장세자를 끌고 와서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만든 뒤에 후계자로 삼았다.
정조는 졸지에 당시 자기 나이보다도 일찍 죽은 이복 백부의 아들이 되어버린 것.[8] 정조가 역적의 아들이라 하여 노론의 공격을 당할 것을 우려한 영조가 취한 조치이기도 하다.[9] 이 때문에 정조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친아버지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지 못했지만 효장세자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국왕으로 추존하였다.
3.2. 추존
죽은 지 10년도 더 돼 갑자기 효장세자는 '승통세자(承統世子)'라는 칭호를 얻었다. 게다가 영조는 죽기 전에 정조에게 효장세자를 추존하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정작 정조의 친부인 사도세자의 무덤은 잡초가 무성하도록 방치한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어쨌건 이 때문에 정조가 즉위하면서 왕으로 추증하고 묘호는 '''진종(眞宗)'''이라 했다. 현빈 조씨도 남편이 추존되자 효순왕후 조씨(孝順王后)가 된다. 게다가 순종 때는 황제로 추존되어 진종 소황제(眞宗 昭皇帝)가 되어버린다. 무덤도 정조가 새로 왕릉의 격식으로 만들었고 비명(碑銘)까지 정조가 직접 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큰아버지 겸 양아버지에게 감정 이입이 될 리도 없었고 영조의 유언만 아니었으면 저렇게도 안 했을 것이다. 실제로 새로이 만든 왕릉도 직접 보면 왕릉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3.3. 능묘
효장세자의 능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 있는 파주삼릉(공순영릉)'[10] 의 하나인 영릉(永陵)[11] 이다. 부인 현빈 조씨도 1751년 승하한 후 어렸을 때 죽은 남편 옆에 묻혔다.
능의 형태는 나란히 묻힌 쌍릉. 이 능의 비석은 3개인데 효장세자 부부는 세자, 세자빈에서 정조 때 왕, 왕비로 추존되었고 이후 대한제국 때인 1908년에 다시 황제와 황후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추존할 때마다 비를 새로 세웠기 때문이다. 다만 정조가 좀 꾸미기는 했는데 처음부터 왕자 묘의 형태로 조성되어서 왕릉에 있는 무인석이나 난간석이 없다. 그래서 상술된 대로 여기 가보면 왕릉이라기에는 초라하고 허전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래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는 엄연히 들어가는 능이다.
여담으로 효장세자가 영조가 죽을 때까지 생존했다면 자그마치 만 57세였을 것이란 계산이 나오게 된다.[12] 참고로 할아버지 숙종도 당시 기준으로 장수했다고 하나 만 58세[13] 에 죽었다. 고려에서 가장 많은 나이에 즉위한 강종보다 2년 덜 살았다(강종은 사망시 나이가 만 61세). 살았어도 이래저래 아버지 재위 기간 중에 죽었을 가능성도 높고 설령 즉위했어도 길지 못했을 것이라는 슬픈 계산이 된다.[14] 더구나 청년, 장년을 넘어서 환갑을 앞둔 기간까지 줄곧 세자로 지내야 하는 만큼 가뜩이나 깐깐한 성격인 영조에게서 받을 스트레스가 사도세자 이상 갔을 정도로 여겨진다. 정조는 그나마 영조의 손자인 만큼 영조가 고령의 나이일때 후계자의 지위에 있었기에 영조의 성격이 많이 누그러진 상태이고 보통 아들에 비해 손자에게는 부드럽게 대하는 특성상 무난히 세손 시절을 보냈지만 영조와의 나이차가 적어 영조의 성깔에 집중 노출되는 효장세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4. 대중매체
SBS 드라마 대박에 등장하였다. 이 드라마의 주된 배경이 이인좌의 난인데, 공교롭게도 효장세자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던 그해에 죽었다. 담당 배우는 다시, 첫사랑에서 차도윤(김승수 분)의 아들 가온 역을 맡은 아역배우 최승훈.
[1]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2] 조선의 왕족 혼인 사례로는 제법 이른 사례. 만 10세에 혼인한 세종보다 2년 빨랐다.[3] 특정인이 사망하거나 질병에 걸리도록 저주하는 의미로 흉한 물건을 만들어 일정한 곳에 파묻는 것.[4] "세자가 점점 장성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아니하여 또 다시 흉악한 짓을 하였고, 강보(襁褓)에 있는 아이인 4왕녀(영조와 영빈 이씨의 일찍 죽은 딸)에게도 또한 모두 독약을 썼다."[5] 사실 저주 자체만으로도 이미 죽을 죄이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저주 행위는 살인에 버금가는 중죄로 다스렸고 왕실에 대한 저주는 반역죄로 다스려 해당 당사자는 이유불문하고 거열형에 처해지고 일족까지 연좌로 처벌할 정도였다.[6] 영조의 친손자들은 다 사도세자의 아들들이었다. 당시 영조의 나이상 아들이든 딸이든 아이가 더 태어날 가능성은 낮았으니, 손자에게 물려주지 않을 거면 먼 친척 중에서 후계자를 찾아야 했다.[7] 영조 본인은 사도세자가 죽자마자 복권시키고 시호도 내렸지만, 사망 당시엔 엄연히 폐서인까지 된 죄인이었다.[8] 다만 정조와 효장세자의 나이 차이는 생각보다 작은 33세(효장세자가 생존했다면 사도세자와 효장세자의 나이 차이는 16세). 사도세자가 겨우 만 17살에 정조를 낳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 즉 정조와 사도세자는 17살 차이. 물론 사춘기가 오면 결혼하던 당시(보통 만 15세에 혼인)로서는 첫째와 아버지 나이 차이가 그 정도면 일반이었겠지만. [9] 다만 실제 상황을 본다면, 노론이 사도세자&정조 부자와 거리가 멀었다기보다는, 어쨌거나 왕위를 계승하는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서 한 행위라고 보는게 맞을 듯하다. 노론 강경파인 벽파도 사도세자의 추숭을 인정하면 반대파인 소론이나 남인에게 꼬투리를 잡혀 몰락하게 되니까 반대하는 것이었지, 정치적 견해로 따지자면 사도세자와 적대 관계는 아니었고, 전신이 되는 노론 대다수도 사도세자의 비행을 덮거나 옹호했다. 노론 음모론과 달리 영조가 사도세자를 제거했던 진짜 이유는 사도세자가 제왕학에 관심이 없는 것을 넘어서 아예 사람을 죽이는 정신병자가 되어 도저히 신하와 백성들을 통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물론 이 정신병은 사도세자를 노골적으로 박대한 영조의 교육도 원인이었지만) 반대로 손자인 정조는 학문을 좋아하고 문무까지 겸비하여 훌륭한 후계자로서 영조를 크게 만족시켰다. 결국 영조는 정신병자인 아들보다 자신의 기준에 딱 맞는 훌륭한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계획을 세운 것. 실제로 영조는 세손인 정조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여 철저히 보호해 무사히 왕위를 계승하게 해주었다.[10] 나머지인 '공릉'과 '순릉'은 각각 한명회의 딸인 예종비 장순왕후와 성종비 공혜왕후의 능이다.[11] 세종대왕의 영(英)릉과 효종의 영(寧)릉과는 다르다.[12] 건국자인 이성계의 나이가 즉위했을 때는 만 57세이므로 효장세자가 생존했다면 이성계와 같은 57세지만, 8개월 빨리 태어난 관계로 효장세자가 좀 더 고령의 즉위 임금으로 기록되는 셈이다.[13] 정확히는 58년 9개월.[14] 물론 영조는 사도세자가 5살이 되었을 때 벌인 선위 파동 때도 효장세자의 나이를 들먹이곤 했다. 살아 있었다면 20살이니 일찌감치 양위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