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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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4. 대중매체


1. 개요


(1419 ~ 1434)
15세기 초반 보헤미아(現 체코)에서 종교 개혁가 얀 후스를 추종하는 후스파와 교황의 권위를 추종하는 국가들 간에 벌어진 전쟁.

2. 배경


15세기 보헤미아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는 당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였다. 그래서 후스는 1411년 대립 교황이었던 요한 23세에게 파문당했고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로부터 공의회에 참석할 것을 요청받았다. 공의회에 참석하면 교회의 재판을 받게 될 것을 알고 있던 후스는 처음에 가지 않으려 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보호를 약속하겠다 하여 콘스탄츠로 갔다. 하지만 콘스탄츠 공의회는 후스가 지기스문트로부터 받은 안전통행증을 무시하고 그를 화형대에 세웠다. 그가 화형당하고 난 뒤 그의 사상을 따르는 보헤미아의 체코인들은 그가 순교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했다.
후스의 사상을 따르는 자들을 후스파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체코인들의 대다수를 이루었다. 후스파들은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한다는 결의문을 써 가톨릭 교회에 저항했다. 후스파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추종하는 지기스문트와 지기스문트의 형제이자 보헤미아 국왕인 바츨라프로부터 심하게 탄압받아 감옥에 갇히거나 추방당했지만 후스파들의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후스파들은 이내 가톨릭교의 교리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강경파(훗날 타보르파)와 가톨릭교의 일부 교리를 수용하는 온건파(양형파)로 나뉘었다.

3. 전개


후스 강경파들은 감옥에 갇힌 동료 후스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고, 1419년 7월 30일 얀 지슈카 장군을 지롯한 강경파들이 프라하를 점령하여 시의원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1차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이 발생했다.[1] 이로 인해 후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보헤미아 국왕인 바츨라프는 이 일로 충격을 받아 숨졌다. 그리고 바츨라프의 뒤를 이어 형제인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의 왕위에 올랐다. 얀 지슈카는 얀 후스를 죽게 만들고 후스파들을 탄압한 지기스문트에 반발하면서 타보르에 성채를 세우고 급진파들을 모아 타보르파를 양성했다. 그리고 후스파 민병들을 훈련시켜 전투에 대비하였다. 1419년 12월 네크미르 요새에서 후스파와 보헤미아 군대의 첫 전투가 벌어졌다. 비록 후스파 군대는 소규모 군대였지만 얀 지슈카의 지휘 아래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얀 자슈카는 전투 마차를 도입했는데, 이는 다음 전투인 수도몌르 전투에서의 얀 지슈카의 전술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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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년 수도몌르(Sudoměř)에서 보헤미아 군대와 후스파의 2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얀 지슈카는 정사각형이나 원 모양의 카트들을 만들도록 하고 카트들을 쇠사슬로 연결하여 진영을 구축했다. 후스파 병사들은 이 카트에 숨어서 핸드캐논석궁으로 후스파 진영으로 돌격하는 보헤미아 기사들을 쐈다. 이 전술을 바겐부르크 전술이라 부르는데, 이 전술은 큰 효과를 거두어 보헤미아 기사들은 후스파 진영을 파괴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그렇게 보헤미아 군대는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철수하여, 후스파는 보헤미아 군대를 상대로 또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후스파를 향해 십자군을 선포했다. 교황을 추종하는 지기스문트는 유럽 각지에서 군대를 모아 독일 제후들과 함께 프라하를 포위했다. 포위당한 후스파들은 그들의 요구를 담은 프라하 4개 조항을 제시했다. 이 조항들은 그들의 교리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는데, 그들의 교리를 인정하는 것은 가톨릭 교회 입장에서는 이단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지기스문트는 이 조항들을 거부하고 프라하를 공격했지만, 지기스문트의 가톨릭 연합군은 비트코프 언덕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 뒤 가톨릭 연합군은 1427년까지 3차례 더 침공하지만 모두 보기 좋게 실패하자, 제후들은 후스파의 계속된 승리로 후스파들의 사상이 전파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제후들은 바젤 의회에서 평화협정을 주최했다. 하지만 후스파는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도 참석해야 한다며 협정을 거부했다. 협정이 결렬되자 로마 가톨릭 교회는 1431년 5차 침공을 감행했다. 후스파는 5차 침공 또한 물리쳤고, 1433년 바젤에서 회의가 또 한 번 열렸다. 이번에는 후스파도 참석했지만 회의가 끊이질 않자 후스파 내에서 평화협정을 두고 타보르파와 양형파가 대립하여 내전이 벌어졌다. 1424년에 이미 얀 지슈카라는 명장을 잃은 타보르파는 1434년 5월 30일 리파니 전투에서 가톨릭 군대와 연합한 양형파에게 대패했고 1437년 잔존 병력들이 항복하여 타보르파는 궤멸되었다.
양형파는 1436년 가톨릭 교회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양형파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보헤미아 왕에게 순종하는 대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모두 받는 후스파의 관습을 용인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였다. 이들 후스파들은 현재도 체코에서 소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4. 대중매체


후스 전쟁을 다룬 오니시 코이치의 만화 소녀전쟁이 있다.
[1] 이 사건이 '1차'인 이유는, 이후 30년 전쟁의 배경이 되는 2차 투척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천주교 관리와 국왕 비서들이 내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