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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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얀 후스 (Jan Hus)
'''국적'''
보헤미아 왕국 [image]
'''출생'''
1369년?
보헤미아 왕국 후시네츠
'''사망'''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 주교령 콘스탄츠
'''직업'''
가톨릭 신부
신학자, 교양학·신학 교수[1], 총장[2]
'''학력'''
프라하 카렐 대학교 박사
1. 개요
2. 주요 활동
3. 후스파
4. 체코민족주의의 발흥과 부활
5. 미디어에서
6. 프라하 광장의 후스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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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로를 사랑하라. 모든 이들 앞에서 진실을 부정하지 마라."(Milujte se, pravdy každému přejte.)[3]

"진실만을 찾아라. 진실만을 들어라. 진실만을 배워라. 진실만을 사랑하라. 진실만을 말하라. 진실만을 지켜라.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실만을 사수하라."(Hledaj pravdy, slyš pravdu, uč sě pravdě, miluj pravdu, prav pravdu, drž pravdu, braň pravdy až do smrti.)

얀 후스는 보헤미아 왕국의 종교 개혁자로, 16세기에 활동한 마르틴 루터보다 100여 년 앞서 활동한 종교개혁의 선구자격인 인물이다.[4] 프라하 카렐 대학교의 신학 교수총장을 역임했던 그는 당대 가톨릭 교회의 문제와 부패를 비판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였다. 얀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 화형당했지만, 그의 사상을 계승한 후스파(Hussites, Husité)는 지금까지도 현존하고 있다.

2. 주요 활동


생애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후시네츠[5]에서 미할(Michal)이라는 이름을 가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분명하나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19세기 중반까지는 오랫동안 1373년 7월 6일로 전승되어왔으나 이는 후스가 화형당한 날과 무리하게 끼워맞추기 위한 시도로서 가능성이 적다. 이후 얀 후스를 재발굴한 프란티셰크 팔라츠키(František Palacký)는 그가 교육을 시작한 연도에 비추어 1369년으로 재추정하였고 오늘날에는 1369~137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독실했다고 전해지며 얀 후스는 화형당하기 적전 조카에 대한 걱정을 언급하였기에 외동이 아니었음은 분명하지만 가족에 대해서 이 이상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1380년부터 프라하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1389년 혹은 그 이후에 카렐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앞서 말한대로 그가 빈농의 아들이었음을 고려하면 우수한 성적이 뒷받침되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경제적으로는 궁핍하였기에 성가대 생활을 하거나 오늘날의 조교 비슷한 직업을 가지면서도 구걸을 하거나 길가에서 자는 등 어렵게 생활해야 했다고 전해진다.
1393년에는 오늘날의 학사에 해당하는 자격을 취득했고 1396년에는 석사, 1398년에는 프라하 카렐 대학교의 교양학[6], 신학교수가 되었다. 이후 1400년에는 사제의 자격을 취득했다.[7] 1402년에는 프라하 카렐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이때부터 프라하에서 공개적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시작한다. 그는 보헤미아어 철자를 개량하고, 찬송가를 보급하며, 체코인의 단결과 독일에 대한 저항을 강조하는 등 종교인으로서의 활동과 더불어 민족주의적 활동도 전개하였다.
종교인으로서 그는 수많은 설교와 강연, 저술 활동을 통해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며, 초대교회의 순수한 열정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청렴하고 순수한 교회, 재물과 부패에 찌들지 않은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가난한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고, 그는 계속해서 농민 계몽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는 면죄부 판매, 성직매매에 저항했고, 성경과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자)의 저서를 체코어로 번역하여 보헤미아인들이 읽을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사치를 부리며 아비뇽 유수 이후로 분열한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신의 가르침이 명시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성만찬에서 평신도포도주를 마실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가톨릭 성쳬성사에서 포도주는 사제만 마실 수 있었는데, 얀 후스는 성경에 근거하여 평신도에게도 포도주를 주었다. 그리고, 이는 현재 체코 개신교의 상징이 성찬용 잔(chalice, 성작)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403년에 얀 후스의 후임으로 독일인 발터 하라서(Walter Harasser)가 선출되어 위클리프파를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이에 얀 후스는 직접적인 대응을 하는 대신 대학 강의 및 베들레헴 예배당[8]에서 계속 설론을 강행하였다. 또한 대주교 즈비네크 자이츠(Zbyněk Zajíc) 또한 그에게 호의적이었기에 그는 한동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1409년을 기준으로 교회통합이 시작되었고 이 때문에 대주교의 지지도 철회되었다. 결국 후스는 대립교황 요한 23세[9]에 의해 파문당하고 이후에는 공개적 강론을 하지 못하였다. 이후 교황청은 분열된 교황청의 통합을 위해 열리는 1414년 10월에 열리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공의회가 자신을 암살하려는 교황청의 함정이라고 판단하여 초기에는 가지 않으려 했으나, 이단 처분을 철회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얀 후스를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자 약속을 믿고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전할 마음이었다.
그러나 교황청이 분열되었던 당시에는 주장이 용납되었을지 몰라도 교회의 통합이 선언되는 시점에서 얀 후스는 방치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인물이었다. 1414년 11월 3일 콘스탄츠에 도착한 얀 후스는 11월 28일에 공개적 강론을 금지한 교회의 처분을 무시하였다는 빌미로 체포되었다.[10] 후스를 체포한 카톨릭 교회는 왜곡되고 조작된 증거들을 이유로 그를 이단자로 간주하고 감금하였다. 감옥은 환경이 매우 나빠 건강을 해쳤는데 그 상황에서 후스는 자신을 변호할만한 자료나 증인조차 모으지 못하며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여 자신을 변호해야했다.[11] 이후 상황이 조금 나아진 장소에서 가톨릭 측은 나름대로 합의점을 찾아보려 했으나 후스는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결국 1415년 7월 6일 얀 후스는 혐의를 인정하고 종신금고형의 처분을 받던가 아니면 이단자로서 성직을 박탈당하고 세속 당국의 처분(=사형)을 당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다. 얀 후스는 자신의 발언이 왜곡되었다는 이유로 혐의가 무고하다고 주장했으나 사교(검찰관)은 이를 기각했다. 결국 후스는 모든 혐의를 거부한다. 그리고 그는 검사들을 위해 기도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의 적을 한 명도 남김 없이 용서해주소서. 당신께서는 위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계시니 나는 중재를 원합니다. 당신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적들은 거짓말로 나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나를 포함한 위증인을 데려왔습니다. 당신의 위대한 자비로 이 사람들을 용서해주소서.

이단자의 판결이 나자 성직 박탈 의식이 행해졌다. 의식이 시작되기 전, 다시 이단적 의견을 철회하겠냐는 질문이 이어지자 얀 후스는 이렇게 답변한다. '이단설로 지적된 내용 중 일부 내용은 전혀 짚히는 바가 없고 다른 연설 또한 비판을 위해 인용한 것이지 내 생각은 아니다.' 이에 성직자들은 후스에게 단 위로 올라가라고 명한 뒤 다시 성작과 성반을 들라고 명했다. 이 시점에서 다시 그릇된 언설을 철회하겠냐는 질문이 이어졌으나 후스는 다시 철회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하늘을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순결한 복음을 전한 저 사람들을 무슨 면목으로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나는 이제 죽기로 작정된 불쌍한 나의 몸 이상으로 저 사람들의 구원을 귀중하게 여긴다.”

이에 사교들은 호통을 치며 성작과 성반을 빼앗은 뒤 사제복을 찢어벗겨냈다. 이후 머리카락을 잘라내야했는데 이 과정에서 가위로 자를 것인지 면도날로 밀 것인지 사소한 논쟁이 생겼다. 이에 후스는 지기스문트에게 '사교들께서 신을 어떻게 모독할지 의견이 맞지 않는 모양'이라며 유머러스한 발언을 남겼다. 결국 면도날을 쓰기로 결정했고 후스의 머리카락을 네 방향으로 밀어버림으로서 성직 박탈 의식이 종료되었다. 의식이 종료된 직후 사교들은 영혼을 악마에게 넘긴다고 발언하자 후스는 가장 성스러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혼을 맡긴다고 받아쳤다.
이후 후스에게 Hic est Heresiarcha(이 사람은 이단의 우두머리다)라고 쓰여진 종이 모자가 씌웠고 그 상태로 '죽이지 말고 오랫동안 감옥에 가둬달라'라는 말을 남기며[12] 지기스문트에게 처분을 넘겼다. 지기스문트는 안전보장을 한 인물을 직접 죽이기를 꺼려한 탓에 최종처분을 측근이자 콘스탄츠의 관할자인 루트비히 백작(Louis III)에게 넘겼다. 루트비히는 콘스탄츠 시장에게 화형에 처형하라고 명령하였다. 그가 죽은 장소는 정확하지 않지만 콘스탄츠 성 서쪽, 성벽과 수로 사이에 있는 곳으로 전해진다. 그곳에서 그는 장작더미 속에서 밧줄로 묶였고 목은 쇠사슬로 묶였다. 묶인 그는 시편 21편과 51편을 낭독했다. 낭독하는 동안 종이 모자가 떨어지자 형리가 그것을 씌우고 후스에게 일어나라고 명했다. 후스는 간신히 일어나면서 말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는 당신의 복음과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인내력을 갖고 즐거이 이 두렵고 수치스럽고 잔학한 죽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집행의 시간이 오자 형리가 죄를 자백하라고 했지만 그는 거부한다.

“무슨 오류를 취소하라고 하는가?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저술하고 전파한 것은 모든 사람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거한다. 나는 거짓 교리를 가르친 적이 없다. 내가 나의 입술로 전파한 것을 이제 나의 피로 증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황제의 연락을 받은 루트비히 백작이 혐의를 인정하면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이 역시 거부한다.

“하나님은 나의 증인이 되신다. 나에 대해 위증한 거짓 증인들이 말한 모든 죄목들을 나는 전파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다. 나의 설교들, 저서들에 나타난 나의 원리는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복음에 대해 거룩한 박사들이 가르치고 해설한 그대로 나는 썼고, 가르쳤으며, 전파했다. 나는 오늘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때 얀 후스는 "오늘 당신들은 한 마리의 거위(Husa)를 태우지만, 당신들이 태우지 못할 백조 한 마리가 나타날 것이다."(Dnes pečete hus, ale přijde labuť, kterou nebudete moci upéci.) 라는 유언을 남긴다.[13]
이에 루트비히 백작은 뒤로 물러서 박수를 쳐 처형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형리가 불을 붙였고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후스를 태우는 화형대에 장작 한 더미를 가져오는 것을 보고 라틴어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전한다.

"오, 거룩한 단순함이여!”(O sancta simplicitas.)

불이 옮겨붙자 후스는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처녀 마리아에게 태어나"라고 부를 즈음 불이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럼에도 후스는 입술을 움직였으나 그 말이 무엇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화형 집행이 종료되자 형리는 이단자의 유해나 유품이 추종자들의 상징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관례적인 조치에 따라 옷도 마저 불태우고 남은 잿더미와 땅까지 긁어 라인 강에 내다버렸다.

3. 후스파



얀 후스에게 가해진 부당한 처사를 본 보헤미아인들은 공포를 느꼈으며, 공포는 곧 분노가 되었다.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던 츠비네크 대주교는 그들을 피해 프라하에서 도망쳐야 했으며 1415년 가을, 체코의 귀족들은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가톨릭에 반기를 든다는 뜻이었다. 후스파 일원들은 후스가 그랬듯이 성만찬에서 평신도에게도 포도주를 주었다. 성경대로 살 것을 다짐한 후스파의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가톨릭의 탄압도 후스파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1419년, 강경 후스파들이 동료 후스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의원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1차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14]이 발생했고, 얼마 후 후스파는 체코의 흐름을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후스파는 단일한 세력이 아니라 얀 후스에 대한 지지를 기반으로 성립된 연합체였기에 가톨릭에 대한 태도를 놓고 온건한 개혁을 추구하는 양형파(utrakvisté)와 과격한 타보르파(táboři)로 분열되었다. 타보르파는 얀 지슈카를 중심으로 활동하여 네차례에 걸친 가톨릭 십자군에 맞서 전설적인 전적을 세웠지만, 그가 죽은 뒤 구심점이 사라져 타보르파[15]는 1434년 리파니 전투에서 양형파-가톨릭 연합군에게 대패했고, 1437년에는 잔존 병력들도 가톨릭 측에 항복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폴란드의 후스파도 1441년 패퇴하면서 타보르파는 소멸하고 만다.
한편 양형파는 1436년 가톨릭 측과 평화 협정을 맺어 교황과 보헤미아 왕에게 순종하며 가톨릭 의식을 받아들이되,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모두 받는 기존 후스파의 방식은 인정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후스파는 이렇게 1620년 경까지 존속되었으나, 30년 전쟁의 백산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후스파에 대해서도 강력한 압박이 가해졌다. 양형영성체를 허용하던 기존의 권한을 폐지당한채 개종하던가 보헤미아를 떠나라는 칙령이 떨어졌다. 이후 후스파는 지하로 숨어 들어갔고, 이 때문에 시골 지역에서는 낮에 가톨릭 미사를 보고, 밤에는 개신교 예배를 보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후일 요제프 2세 때 기독교 종파의 자유를 보장하는 칙령이 반포되고 나서야 후스파는 다시 양지로 나오는 것이 허락되었다.

4. 체코민족주의의 발흥과 부활


이로써 얀 후스라는 이름은 잊혀졌고 보헤미아 왕국 역시 수백년간 누리던 자치를 부정당한채 보헤미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대공의 세습영지로 격하당하고 말았다. 이후 보헤미아 왕국의 재정,정치적 주도권은 독일인이 장악하였고 체코 고유의 문화까지 억압당하였다. 여기에 30년 전쟁으로 인구까지 300만명으로 80만명으로 극감하면서 체코 역사상 전례없는 암흑시기가 도래하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체코인을 역사를 가지지 못한 민족이라고 혹평할 정도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민족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프란티세크 팔라츠키를 필두로 수많은 체코인들이 체코인들이 단순히 신성로마제국의 일부가 아닌 독립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임을 증명하고자 했으며 그들에게 그것을 증명할 가장 산 증인으로 얀 후스가 주목받으면서 후스는 다시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얀 후스는 외부의 억압에 맞서 체코 민족을 수호하고자 한 영웅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직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후스파 교회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았고, '체코 복음주의 형제단'(ČCE)이란 이름의 칼뱅파-루터파 연합 교단으로 이어졌다. 이와 별개로 가톨릭에서 이탈한 체코 민족주의 성향의 성직자들이 '체코슬로바키아 후스파 교회'라는 교단을 만들기도 했다.
20세기 격동과 혼란의 현대사를 거치며 비록 후스파를 믿는 인구는 극소수로 전락했지만, 여전히 대다수 체코인들은 얀 후스를 민족주의 영웅으로 존경하고 있으며, 같은 맥락에서 후스파 교회들도[16] 역사적 상징성을 인정받아 근대 문화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현대 체코 공화국의 표어인 "진실이 승리한다"(Pravda vítězí)도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토마시 마사리크(Tomáš Masaryk)가 후스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유언 중 하나를 따와 만들었다.
2005년 체스카 텔레비전의 가장 위대한 체코인 설문조사에서 7위에 올랐고 2015년 체코 라디오공사의 설문조사에서는 1위에 올랐다.

5. 미디어에서


1403년 보헤미아를 배경으로 한 게임 킹덤 컴: 딜리버런스에서도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게임의 배경이 되는 시골에서는 '프라하에서 활동하는 설교 잘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히로인인 트리사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후스 전쟁를 다룬 소녀전쟁에서도 화형당하기 직전의 후스가 묘사되어 있다. 한 주변의 인물들이 그를 탈출시키고자 시도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고뇌 끝에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나온다.

6. 프라하 광장의 후스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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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구시가 광장에 들어서면 후스의 기념비가 한눈에 보인다.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도 이 기념비 주변이 중요한 장소로 나온다.

[1] 프라하 카렐 대학교 교수[2] 프라하 카렐 대학교 총장[3]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7863[4] 그 이전에도 발도파나 위클리프 등의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모두 가톨릭 교회 자체에 대한 공격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얀 후스는 가톨릭 교회 자체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고 새로운 교회의 필요성을 주창하였다.[5] 거위를 키우는 마을이라는 뜻.[6] 오늘날의 자유전공학부의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하면 쉽다.[7] 다만 이상의 기록은 모두 정확한 증거가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남아있는 자료상으로는 1401년부터의 행적만 남아있다.[8] 일반적인 교회와는 다르게 체코인 평신도가 황제의 허가를 받아 신축한 예배당이었기에 체코어로 강의할 수 있었다.[9] 대립교황이기 때문에 정통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요한 23세와는 다르다[10] 이에 지기스문트는 격분하였다. 그를 옹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통행보호를 약속한 인물에 대한 체포는 황제권에 대한 공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주변에서 이단자와의 약속은 지킬 이유가 없다는 근거로 그를 설득하였다. 후스도 이단 판정을 철회한다는 조건인 강론 금지를 어겼기에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라 생각했는지 더 이상의 노력은 하지 않았다. [11] 다만 전자의 이유는 큰 타격은 아니었다. 당시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라 학술적인 이유로 읽는 책은 암기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었기 때문이었다.[12]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형식적 발언이었으나 후술하듯 후스를 무리하게 사형시키면 후폭풍이 생길 우려가 있기도 했다.[13] 여기에 백 년 뒤 라는 표현이 추가되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예측했다는 말이 떠돌아다니지만 출처가 불명확한것을 볼때 사후예언으로 추측된다.[14] 일반적으로 주로 이야기되는 프라하 투척 사건은 1618년 발생하여 30년 전쟁의 시발점이 된 2차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다.[15] 얀 지슈카의 사망 후 그의 후계자로 프로코프가 있었으나, 그 역시 전투 중 전사하고 말았다.[16] 다만 대다수가 상기한 요제프 2세의 관용 칙령 이후, 혹은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시기에 지어진 교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