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미르 전투
1. 개요
후스파(派) 중에서도 얀 지슈카가 지휘하는 과격파 농민병들이 그들을 토벌하러 온 귀족 기사와 기마병들을 격파하며 후스 전쟁의 서막을 알린 전투.
2. 배경
141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가 주관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얀 후스가 처형당하자 이미 후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많은 보헤미아인들은 분노했다. 1419년 보헤미아 왕 벤체슬라스 4세가 죽자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 왕도 겸하게 되었으나 보헤미아인들은 그것을 반기지 않았다. 당시 후스 파는 온건파인 우트라크파(Utraquist, 양형영성체주의자)와 과격파(대표적으로 타보르파)로 갈라져 있는 상태였는데 농민들 위주로 구성된 과격파는 높으신 분들에 의한 중재안을 거부하고 프라하를 떠나 서부 플젠[1] 근교의 네크미르 요새쪽으로 집결하였다. 이들의 불온한 움직임에 귀족 판관인 보후슬라프가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러 접근했다.
3. 전투
첫 전투이고 소규모인 탓인지 기록은 빈약하다. 불과 300명 뿐인 후스파 군대는 약 7대 가량으로 추산되는 전투 마차#s-1.2에 의존하여 주로 기병 전력으로 이루어진 왕당파 군대의 돌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쳤고, 결국 왕당파군은 포기하고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전 병력을 둘러싸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수의 전투 마차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새로운 전술의 가능성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4. 결과
어느 쪽도 상대를 제압하기에는 부족한 상태였고, 전쟁은 장기화하게 된다. 하지만 갈 길이 바쁜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 왕으로 인정받고 통치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1420년 3월 후스파를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을 선포하였다. 곧이어 수도몌르 전투와 프라하 비트코프 언덕의 전투가 벌어진다.
여담으로 진압하러 왔던 보후슬라프는 얀 지슈카에게 몇 번 패배를 당한 뒤 훗날 전향해서 같은 편으로 싸우게 되었다 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