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그당

 

Whig Party
1. 영국에 존재했던 정당
2. 미국에 존재했던 정당
2.1. 선거 결과
2.1.1. 대통령 선거 결과
2.2. 휘그당 출신 정치인
2.2.1. 대통령
2.2.2. 부통령
2.2.3. 기타


1. 영국에 존재했던 정당


1678년부터 1868년까지 존재했던 당으로 탄생 계기는 제임스 2세의 왕위 계승에 반대했던 자들이 모인 것을 시초로 본다.
이름은 토리당 측이 이들을 두고 "Whiggamore"[1]라고 부른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명예 혁명 때는 토리당과 협력 했지만 그 후로는 보수적인 귀족 성향의 토지 지주들이 지지층인 토리당에 맞서 신흥 인텔리와 자본가들의 편에 서서 활동하게 된다. 19세기 중반 들어 자유당에 편입된다.
여담으로 근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토리당이 아닌 휘그당 소속이었다.[2]

2. 미국에 존재했던 정당



<color=#fff> '''Whig Party'''
[image]
<colbgcolor=#e0ab76><colcolor=#fff> '''한글 명칭'''
휘그당
'''주요 인물'''
윌리엄 해리슨
재커리 테일러
존 타일러
밀러드 필모어
헨리 클레이
'''창당'''
1833년
'''해체'''
1856년
'''전신'''
민주공화당, 연방당국민공화당
처음에는 국민공화당이라는 이름이었으며 휘그당이란 이름을 쓴 것은 1833년부터이다. 이름의 유래는 당연히 상술한 영국의 휘그당이고 공통점이 있다면 대통령(왕)의 권한을 제한하려 든 것 정도.
앤드루 잭슨에 비판적인 정치 세력들끼리 연합한 정당으로, 민주공화당 내 반잭슨파가 주류에 이미 몰락한 연방당과 기타 세력들이 흡수된 형태로 구성된 일종의 빅텐트 정당이었다. 다만 이렇게 여러 정치세력들이 뭉친 정당이다 보니 관직을 둘러싼 권력 투쟁이나 이념 논쟁이 심한 편이었다.[3]
이는 휘그당 출신 윌리엄 해리슨 대통령과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이 당선된지 얼마 안 돼 사망했기 때문도 있었다. 그나마 존 타일러(민주당 출신)와 밀러드 필모어가 승계를 하긴 했지만 본래 리더가 아니다 보니 이래저래 뒤숭숭한 내각을 꾸릴 수 밖에 없었다. 여담으로 경선을 포함해 죽을 때까지 5번이나 대선에 출마, 경선과 본선에서 모두 낙선 경력이 있는 타협의 명수 헨리 클레이도 이 당 출신.
하여튼 앤드루 잭슨 반대파들이 뭉친 정당이었지만 현실은 안습하게도 민주당에 밀리는 형국이 지속되었고,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당시 핵심 갈등 상황으로 떠오르던 노예제 문제에 대해 지도부가 제대로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가 결국 상대방 프랭클린 피어스에게 큰 표차로 패하자, 당에 미련을 버린 당 내 노예제 반대파들이 이탈하여 지금의 공화당을 결성하게 된다. 그래도 1856년 선거까지는 어떻게든 남았지만 여기서도 패하자 결국 남부 휘그당원들은 주로 주권 민주당으로, 북부 휘그당원들은 공화당으로, 나머지는 Know Nothing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2.1. 선거 결과



2.1.1. 대통령 선거 결과


연도
결과
후보자
득표수(득표율)
선거인단
대통령
부통령
1836년
낙선
윌리엄 해리슨
프란시스 그렌저
550,816표(36.6%)
73/294명
휴 로슨 화이트
존 타일러
146,109표(9.7%)
26/294명
다니엘 웹스터
프란시스 그랜저
41,201표(2.7%)
14/294명
윌리 퍼슨 맨검
존 타일러
0표(0%)
11/294명
1840년
'''당선'''
'''윌리엄 해리슨'''
존 타일러
1,275,390표(52.9%)
234/294명
1844년
낙선
헨리 클레이
테오도르 프레링훼이센
1,300,004표(48.1%)
105/275명
1848년
'''당선'''
'''재커리 테일러'''
밀러드 필모어
1,361,393표(47.3%)
163/290명
1852년
낙선
윈필드 스콧
윌리엄 A. 그레이엄
1,386,942표(43.9%)
42/296명
1856년
낙선
밀러드 필모어
앤드류 잭슨 도넬슨
873,053표(21.5%)
8/296명

2.2. 휘그당 출신 정치인



2.2.1. 대통령



2.2.2. 부통령


볼드체는 '''대통령'''이 된 인물.

2.2.3. 기타



[1] 대충 스코틀랜드 말로 모반자, 도둑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청교도장로회라는 은유다.[2] 지금에 와선 최초의 근대적 보수주의자라는 타이틀도 붙어있지만, 당시에는 진보에 더 가까웠고 본인도 진보주의자를 자처했다.[3] 일례로 잭슨이 물러난 1836년 대선에서는 한 당에서 대통령 후보가 3명이나 나오는 상황이 초래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