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영국)

 


Liberal Party
1. 영국에 존재했던 정당
1.1. 상세
1.2. 이후
2. 영국의 군소 정당


1. 영국에 존재했던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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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에 창당되어 1988년까지 존재했었던 영국정당.[1] 당 이름에서도 보이듯 자유주의를 표방했고 당대 보수당과 대립하는 구도였다. 참고로 본래 있던 자유당은 1988년 사회민주당과 합쳐 사회자유민주당(현 자유민주당)이 됐으나, 당시 합당에 반발한 소수 자유당원들이 이탈하여 2번째 항목의 자유당이라는 동명 정당을 다시 만들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다만 군소정당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거의 없다보니 보통은 자유민주당이 자유당을 계승했다고 본다.

1.1. 상세


휘그당이 1859년 당명을 바꿔 자유당으로 재창당한 이래,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보수당과 함께 영국을 이끌던 대표적인 양대 정당이었으나, 1924년 총선을 기점으로 노동당에 지지층을 대거 내주고 군소정당으로 추락하고 만다. 이후 64년 동안 만년 제3정당으로 존속했다. 다만 이때 군소정당이란 이미지는 소선거구제 탓도 큰데, 실제 합당 전 각종 선거에서 자유당의 득표율은 10% 후반대를 유지했다. 그러나 소선거구제 때문에 의석이 매우 적었다. 물론 득표율은 상당했기에 언론에서도 노동당, 보수당 다음가는 관심은 받는 편이었다.
17세기 후반 토리당에 대립되었던 젠트리 파벌인 휘그당이 토대다.[2] 다만 좀 더 정확히 따지면 휘그+급진파(Radicals)+필파(Peelites)[3] 연합으로 당이 형성된 약간 복잡한 생성 과정을 지니고 있다. 물론 핵심은 휘그당에서 온게 맞으나, 이런 여러 계파는 훗날 계파 갈등으로 이어져 자유당 몰락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하여튼 자유당이란 말은 1840년대에 사용되었고 직접적인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1859년부터다.
윌리엄 글래드스턴 총리를 비롯해 19세기 중후반 총리도 여럿 배출하며 영국을 수놓은 정당이었지만 20세기 들어선 세력이 많이 약해진다. 일각에선 보수당이 디즈레일리 등이 주장한 선거권 확대에 발맞추어[4] 대중 정당으로서 면모를 갖추어 간 반면 자유당은 그러하지 못하였다는 주장도 하는데, 이건 글래드스턴이 직접 광장으로 나가 시민들을 동원한 사례도 있다는 점과 1906년 선거의 유례 없는 압승을 생각하면 사실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복잡한 생성 원인으로 생긴 번잡한 당의 구조와 파벌 갈등이 주된 원인이었던 것으로 지적된다.
자유당의 내부 갈등은 1880년대 중반부터 불거졌다. 온건한 대외정책과 아일랜드의 자치, 스코틀랜드웨일스의 종교 자유로 대변되는 '작은 영국'을 주장한 글래드스턴에게 기존의 휘그파와 영연방 확장과 제국주의에 적극적이었던 체임벌린 등의 신흥자본파가 함께 반발한 것이다. 이들은 '자유통일당(Liberal Unionist Party)'을 조직하고 보수당과 연합해 글래드스턴에게 엿을 먹인다. (덤으로 아일랜드 의회주의자들은 영국 내에서는 보수당에게 표를 던져서 연정 없이는 자유당이 집권할 수 없는 교묘한 전략으로 의석을 깎아먹었다.) 이걸 어떻게 헨리 캠벨배너먼이 탕평책으로 봉합에 성공했지만, 한번 갈라졌던 경험은 이미 당내를 누더기로 만들었다.
자유당 최후의 영광인 1906년 총선은 무려 397석 대 156석으로 보수당 17년 정권을 종결시켰다. 하지만 캠벨배너먼이 1908년 사망하면서 자유당의 분열은 표면화 된다. 자유당에서는 글래드스턴의 평화주의 노선과 국가의 적극적인 분배 정책 개입을 주장하는 사회자유주의자("뉴 리버럴리스트")들의 목소리가 높았고,[5][6] 이것이 노령연금법안(1908년), "인민예산"이란 말마저 들은 막대한 예산확보(1909년)같은 강력한 분배 정책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예산안은 상원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당하고 만다.[7]#[8]
이런 잡음 속에서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수상(재임 : 1908~1916)은 378석의 우위를 버리고 정면 돌파에 나섰다. 1910년 1월의 재신임 선거에서 자유당은 274:272로 간발의 차로 제1당이 되었고, 12월의 재선거에서도 272:271(!)로 더욱 간신히 이겼다. 심지어 12월 선거에서는 단순 득표율에서는 뒤졌는데, 물론 이땐 노동당이 서서히 치고 올라와 자유당 표를 갉아먹은 탓도 커서, 자유당은 70여석의 아일랜드 의회당(Irish Parliamentary), 40여석의 노동당과의 연정을 통해 정권을 유지했다. 애스퀴스 수상 개인은 8년간 장기 재임했으며, 영국의 사회복지를 완수하는 동시에 해군을 증강한 명수상으로 꼽히지만, 신흥 중산층의 이탈로 자유당이 단독 집권하는 것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허버트 애스퀴스.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에는 전통적인 휘그 지지자(비국교도 중산층)들도 다 나가버리고, 당내에는 자유방임주의자와 사회자유주의자간의 투쟁이 계속 벌어졌다. 정권의 한 축이었던 아일랜드 의회당의 자치 및 독립 요구는 오히려 1916년의 "부활절 봉기"를 초래했고, 결국 이로 인해 의회당이 몰락하고 강경파인 신페인당이 득세했다. 그야말로 내우외환.
결국 로이드 조지의 "궁정 쿠데타"[9] 이후의 분당 크리가 결정타가 되어 1918년 3당이 되었다. 이로서 보수당은 별로 한 일이 없는데 자유당 욕만 하다(...) 제1당을 거저 차지하게 되었고, 자유당의 자매정당 기믹이던 노동당 역시 반사이익으로 제1야당이 되고 만다. 당의 분열 속에서 로이드 조지는 보수당과 연정으로 집권을 하기는 했다만 결국엔 1922년 사임했고 이후 자유당에선 총리가 나오지 못했다. 이런 난맥상에 자유당 지지층이 등을 돌렸는지 1923년 총선에서는 아예 양대 자유당을 합해도 노동당에게 밀렸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자유당은 1924년 재통합되었으나 옛날의 영광을 회복하기엔 때 늦은 뒤였다. 이후 기존 자유당 지지자들 가운데서 사회자유주의에 가까운 축은 노동당,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축은 보수당으로 흩어졌으며[10] 당의 전성기를 책임진 애스퀴스 수상과 로이드 조지는 분당 정국에서도 각 정파의 대표를 역임했으나, 통합 뒤 오히려 전체 의석의 20%는커녕 그 반토막 이하로 쇠락한 자유당의 모습을 지켜봐야했다.
이렇게 20세기 초 마지막 전성기를 보내고 말년 야당으로 지내다 이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자유당이지만, 20세기만 하더라도 자유당 내각은 집권하는 동안 제1차 세계 대전을 마치고, 상원의 하원 비토권을 에드워드 7세와 함께 없애버렸으며,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등 나름 굵직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로이드 조지의 업적.

1.2.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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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당–자유당 연대 로고
1920년대 이후에도 정당 자체는 꾸준히 연명하다가[11] 1981년 노동당에서 떨어져 나온 사회민주당(SDP)과 선거 연대·정책 연대를 맺었고(SDP–Liberal Alliance), 1988년에는 아예 합병하여 사회자유민주당(Social and Liberal Democrats)이 됐다. 그리고 1989년에 사회자유민주당이 당명을 바꿔 현재의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s)이 되었다.
한편, 영국 정치에서 자유당(또는 그 후신 자민당)과 노동당(또는 창당 이전 노동 운동 계열)의 연합이 성립될 경우 이걸 '''Lib-Lab pact'''라고 부르는데, 19세기부터 현재까지도 수시로 도는 떡밥이다. 아무래도 지지층이 제법 겹치는데다 보수당만 좋은 일 시켜주는 꼴이니 이런 연합설이 도는 모양.[clearfix]

2. 영국의 군소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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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구 자유당과 구 사회민주당의 합당에 반발한 일부 자유당원들이 당을 이탈한 뒤, 1989년에 새로 창당한 정당. 현재도 존속되고 있다. 당연히 1과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자유당의 정통성자유민주당(영국)이 아닌 자신들에게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물론 세 자체가 작다보니 대중들의 관심은 아오안 수준. 덕분인지 현 자유당의 첫 번째 대표가 구 자유당의 전직 하원의원이었던 마이클 메도크로프트(Michael Meadowcroft, 당 대표 재임: 1989~2002)였는데, 결국 그도 2007년 자유당을 탈당해 자민당에 뒤늦게 합류하였다.
현재 의석은 영국 전역에서 지방의회 극소수만 확보하고 있고, 영국 국회나 유럽의회 의석은 전무하다.
자유민주당과 달리 유럽회의주의 정당으로 브렉시트에 찬성한다. 공교롭게도 역시 구 자유당과 구 사민당의 합당에 반대해서 떨어져나간 사민당의 후계 정당[12]인 군소정당 사회민주당 역시 여기서는 같은 입장이다.

[1] 다만 전신인 휘그당까지 올라가면 그 역사가 훨씬 길어지긴 한다.[2] 참고로 당시 토리와 휘그는 정치적 논점 차이도 있었지만, 토리는 국교도+가톨릭, 휘그는 장로파 식으로 종교적 논점의 차이도 있었다.[3] 보수당 소속이었던 로버트 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자유무역을 지지하던 정파였다. 필파는 결국 보수당 내 다른 계파와 갈등을 빚다가 탈당해 자유당으로 합쳐진다.[4] 의외로 당시 보수당은 선거권 확대에 그리 부정적이지 않았다. 물론 자유당도 마찬가지였으나, 역설적이게도 진보 정책을 내세우던 자유당이 내부 계파 문제인지 뭔지 정작 여성참정권 운동은 반대해 당대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에게는 한동안 주적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대외관에선 평화주의, 온건 노선을 보였는데, 이것도 어쩌다보니 포함외교의 주인공인 파머스턴 경이 자유당에서 배출한 수상이 되었다.(...)[5] 영어권에서는 20세기 초반 이후로 별도의 설명 없이 liberal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뉴리버럴, 즉 사회적(진보적) 자유주의를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시장에 맡겨 놓는 자유방임이라면 뉴리버럴은 거기에 반대해 국가의 분배 개입을 지지하니 같은 자유주의라도 입장이 상당히 다르다. 참고로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유래한 현대의 시장 자유주의 계열들은 오늘날 대개 libertarian(자유지상주의, 자유의지주의 등으로 번역)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굳이 liberal이라는 말을 쓸 경우 앞에 다른 수식하는 다른 단어를 덧붙여야 오해를 피할 수 있다.[6] new liberalism이나 neoliberalism이나 모두 '신자유주의'로 번역 가능하나 양자의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국가의 적극적인 분배 개입을 지지하지만 후자는 고전적 자유주의, 시장 자유주의를 계승해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는 입장을 취한다. 한국어에서 '신자유주의'는 보통 neoliberalism을 가리킨다. 참고로 new는 기존에 있던 것에 '''대항'''하여 등장한 대안을, neo는 기존에 있던 것을 '''계승'''하여 개량한 것이라고 뉘앙스라고 이해하면 된다. 즉 new liberalism은 기존에 있었던 고전적/시장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자유주의고, neoliberalism의 neo는 고전적/시장 자유주의를 계승하여 등장한 최신 버전의 (시장) 자유주의인 셈. 이런 특성 때문에 new liberalism은 그 특성상 진보주의, 좌파 이념과 연합할 여지가 크고, neoliberalism은 보수주의, 우파 이념과 연합할 여지가 크다.[7] 사실 이런 밀어붙이기 통과는 1870년의 보수당의 로버드 필이 먼저 시작한 것이었지만...[8] 해당 기사에서는 'new liberalism'을 신자유주의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이 문서의 앞 주석에서 설명했듯이 정반대의 사상인 neoliberalism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어서 회피하는 게 좋다.[9] 1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명재상이었지만, 전쟁 이후 보수당과 손을 잡아 연립 내각을 꾸렸다.[10] 비율상으론 노동당에 간 비율이 높았다.[11]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네임밸류가 있었기 때문에 1930년대 이후에도 항상 선거 득표율 10%는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비례대표제가 제로인 지역선거구제라 망했어요. 대표적으로 1974년 2월 노동당:보수당 301:297로 2차대전 이래로 최초의 과반다수당이 없는 헝(hung)의회가 이루어지면서 캐스팅보더가 될 기회를 잡았지만 10월 이루어진 재신임 선거에서 319:277이 되면서 처참하게 버려졌다.(...) 당시 두번 모두 20%에 육박하는 득표를 얻으며 의석이 2배나 증가했지만, 그럼에도 확보한 의석은 10여석에 불과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12] 합당 반대파가 결성한 사민당은 인기 상실로 인하여 자진 해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해산 반대파들이 현재의 사민당을 재창당하여 계보가 복잡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