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 8월 10일 봉기
Prise des Tuileries
1. 개요
프랑스 혁명의 중요 분기점이 된 사건. 이 사건으로 프랑스 혁명은 영국의 명예 혁명과 같은 입헌군주혁명의 길에서 공화혁명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2. 상세
1792년 4월 프랑스 혁명의 전파를 우려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프랑스로 침공하면서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했다. 라파예트 등이 지휘하는 국민군은 괴멸 직전의 상황에까지 몰렸고, 입법의회는 국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의용군을 모집했다. 그러나 자코뱅주의자 등의 왕정폐지론자들과 과격 혁명가들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시민봉기를 일으키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파리 시민들 사이에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를 점령하면 혁명의 성과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위기감이 돌았고,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외국군에 정보를 누설하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아 파리의 민심은 점점 흉흉해지고 있었다. 특히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이 다름아닌 오스트리아라서 시민들이 그렇게 의심하는건 당연했고, 그러잖아도 봉기 1년전인 1791년 국왕 일가의 탈출사건(바렌느 배신사건)탓에 국왕과 시민 사이의 불신의 골은 깊어질수밖에 없었다.
1792년 8월 9일, 파리의 과격 혁명가들이 파리 시청을 급습해 장악하고 코뮌 결성을 선언했다. 이어 그들은 파리 전 지구의 시민들에게 전면봉기를 촉구하면서 다음날 8월 10일 봉기가 시작되었다. 수만의 파리시민들은 루이 16세 일가가 머무르고 있는 튈르리궁으로 쳐들어가는 한편, 파리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국민군 사령관 망다를 살해하는등 혼란한 상황이 이어졌다.
루이 16세의 직속 근위대조차 모두 도주했지만, 스위스 용병 786명은 끝까지 남아 튈르리 궁을 지켰다. 루이 16세가 "그대들은 이미 임무를 다했으니 이제 가도 좋다"라고 명했고, 혁명군도 처음엔 어디까지나 외국인 용병인 스위스 용병에게 원한이 없어서 용병대원들이 단순히 도주하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모두 전멸하고 만다(이것을 기리기 위해 "빈사의 사자상"이 만들어졌다). 이들과 전투 중에 혁명군도 200~400여명 이상 전사자를 내다 보니 이후 용병들의 시신은 매우 심한 사체훼손을 당했다고 한다. 여성들이 그들 '''시체에서 성기를 잘라서 흔들어댔다'''는 기록도 있을 만큼 스위스 용병들은 죽은 후 매우 수치스러운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이 사건을 본 나폴레옹은 민중운동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고 혁명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된 계기라고 한다. 루이 16세가 그자리에서 스위스 용병들을 지휘했다면 오히려 역으로 폭도들을 몰아냈을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결국 루이 16세 일가는 튈르리 궁을 탈출해 의회에 신변보호를 요청하지만, 국왕일가가 의회에 있다는 사실을 안 시민들은 의회로 몰려가 국왕일가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의회는 결국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루이 16세 일가를 시민들에게 넘겨주고 만다. 결국 왕권은 정지되었고 시민들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탕플탑에 유폐시킴으로서 봉기가 마무리 되었다.
1792년 8월 10일 봉기는 프랑스 혁명이 과격화되는 중대 분수령으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 이후,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던 입법의회는 붕괴되고 왕정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주장하던 자코뱅주의자들이 집권하는 국민공회 시대를 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