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노동법 날치기

 


1. 개요
2. 내용
2.1. 야당과 노동계의 반발
3. 평가
4. 관련 링크


1. 개요



1996년 12월 26일 새벽,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이 노동법 개정안을 전격적으로 날치기해 통과시킨 사건이다.

2. 내용


1996년 2월, 문민정부는 계속해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로 인해 지지율이 점차 하락하고 있었고, 이에 정부는 회심의 카드로 노동법 개정을 하기로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노동 관계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이라는 정부의 발표로 사람들은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 발표된 이 개정안은 노동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물론 복수노조 금지조항 폐지와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의 철회, 교사와 공무원의 노동 3권 허용법안 등 고쳐진 사항도 있었지만 문제는 사(社)측에서 제안한 사안들을 정부가 검토 없이 수용했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크게 반발한다. 그 중 대표적인 조항으로 변형근로제,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파업기간 중 무노동/무임금 적용, 노조의 정치활동금지, 동일사업장 내 대체근로 및 신규하도급 허용 등의 내용이 들어가게 되었다. 즉 돈은 적게 주고 쉽게 부려먹다가 쉽게 해고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정치활동 금지라는 명목으로 노조 탄압을 쉽게 만든 것은 덤.[1]
당연히 노동계는 반발했고 이에 신한국당은 정부안을 수정하여 12월 17일에 다시 발표했는데 신한국당이 수정한 법안은 복수노조 허용에 3년 유예, 정리해고 사유를 구체화하여 마음만 먹으면 사측에서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게 만드는 등, 정부에서 내놓았던 기존 안(案)보다 더 후퇴하고 있었다. 신한국당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1996년 12월 26일 오전 6시, 버스를 동원하고 영등포에 집결한 여당 의원 154명은 국회 본회의장으로 이동하여 노동법을 날치기 시켰다.[2]

2.1. 야당과 노동계의 반발


민주노총은 당일 모든 사업장에 총파업을, 한국노총은 다음 날 27일 총파업을 선언했으며 야3당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은 즉각 '반독재투쟁공동위원회'를 설립한 후 영수회담 요청과 헌법재판소에 노동법 날치기 무효 헌법소원을 제출한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국회의원의 권한을 침해했지만 가결 선포 행위 자체는 무효가 아니라며 이 헌법소원을 기각했다. 사태가 심각해지기만 하던 와중에 1997년 1월 7일, 김영삼 대통령은 연두(年頭) 기자회견을 하던 도중 이 노동법 얘기가 나오자, "도대체 선진국 어느 나라에 노동쟁의가 있느냐?"라는 망언으로 국민의 공분을 샀다.[3][4] 이 폭탄발언 덕분에 잠잠해질수도 있었던 정국은 폭발하고 만다.[5] 설날도 다 보냈겠다, 민주노총한국노총은 광복 이후 처음으로 전국단위 총파업을 벌였고,[6] 각 도시의 넥타이 부대, 시민, 학생들이 가세하면서 6월 항쟁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PC통신 및 인터넷 등지에서도 민주주의 사망을 규탄하는 '하얀리본' 및 '블랙리본'을 내걸며 투쟁에 동참했다.
40일간 벌어진 가두집회는 연인원 350만명이 참가했을 정도로 엄청나게 번졌고, 1월 21일, 결국 정부는 김대중, 김종필과 함께 영수회담을 가진 후 이 자리에서 노동법 재논의를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3월 10일 여야는 단일안을 만드는데, "노동정치활동금지 규정삭제, 복수노조 허용, 정리해고 시행 2년 유예"가 그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런 재논의는 사실상 무의미한 조삼모사 수준의 합의일 뿐이었으며, 이렇게 개정된 노동법은 결과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와 탄력근로제 등을 야기시켰다.
그리고 1996년 노동법 날치기를 전후하여 실직가장, 명예퇴직, 정리해고, 비정규직이라는 말들과 사례들이 한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3. 평가


단일안으로 투쟁은 종료되었지만 이 총파업으로 인해 생산차질액이 2조 원을 넘겼고, 수출 차질액은 3억 3,500만 달러를 넘겼다, 또한 정국의 변환을 노린 문민정부의 이 노동법 개정안은 정부의 잘못된 처리로 인해서 오히려 문민정부의 지지율은 크게 하락했고,그해 연말에 설상가상으로 일어난 IMF 사태로 문민정부는 국민들의 분노와 원망 속에 간판을 내렸다.당시 유력 주자 중 하나였던 이홍구 신한국당 대표는 이 파동으로 대표자리에서 사퇴하면서 대선 후보 고지를 선점할 좋은 자리를 놓치고 만다. 그리고 IMF 체제 당시 있었던 숱한 정리 해고 역시 이 날치기로 통과된 법안이 기틀을 닦아준 셈이었다는 주장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노동법 날치기 이후로 민주노총, 운동권, 시민단체를 위시한 재야 좌파세력들[7] 은 단지 장외투쟁과 총파업만으로 정국의 방향을 바꾸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권 여당의 정책 하나를 틀기 위해서 총파업까지 감행해야 하는 것은 노조나 시민사회측에서 볼때에도 손실이 너무 컸던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 민주노총의 위원장 권영길은 지금까지 가지고있던 자주노선에서 벗어나 진보정당 건설운동에 투신하게 되었고, 이 방향성이 기존의 민중당청년들과 합쳐져 결실을 이룬게 건설국민승리21 ~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당의 전성기였다. 말 그대로 진보정당을 태동하게 만든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4. 관련 링크


[1] 물론 노조 자체가 직접적 정치활동을 하는 것은 어떤 학설로도 용인하는 바가 아니지만 노동자 처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법률과 정책은 국회와 행정부가 만들기 때문에 노조로서는 개개의 법률, 정책에 대해 정치색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게 된다. 또한 노동조합이라면 미치지 않고서야 보수정당보다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즉 이 조항은 노조의 중립성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을 갖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노조 자체를 (그리고 민주당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높으신 분들이 하는 일에 감히 토달지 말라는 뜻.[2] 이와 함께 1994년 개정 때 사라졌던 불고지죄 및 찬양고무죄 수사조항 부활 등의 독소조항을 넣은 안기부법 개정안도 통과시켰다.[3] 당시 노동인권에 대한 인식을 가늠케하는 참혹할 정도의 무지한 발언이다. 당장 스웨덴의 경우를 보면 이들은 1938년 살트훼바덴 협약이 타결되기까지 40년가량 지속적으로 파업하고 투쟁을 벌였다. 강력한 유럽 산업노조의 권위는 역사속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쟁의로 흘린 피 아래 세워진 것이다.[4] 이미 김영삼은 1995년 청와대 IPI 한국위원회 오찬 때도 한국통신 파업 등을 '국가전복 기도'로 간주해 논란을 산 바 있었다.[5] 선진국들에서조차 사안에 따라 노동쟁의가 활발해질 수 있는 건 너무도 자명한 이치인데 한국의 민주주의를 선도한 지도자조차 노동쟁의가 뭐임? 먹는거임? 수준으로 노동인권의식에 대한 무지를 자랑한 것이니 당시 시민들의 울분은 말할 필요가 없다.[6] 이는 전평이 광복 직후에 벌였던 9월 총파업 이후 최대규모였다.[7] 좌파라고 명시한 이유는, 민주당계 정당과 그 계보가 완전히 다른 진보좌파세력, 특히 PD(정파)온건파 계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시까지 급진 PD들과 NLPDR들은 진보정당 창당에 관심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