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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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언론인,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며 사단법인 '권영길과 나아지는 살림살이'의 이사장. 1세대 진보정치의 상징적인 인물이며 군사정권 이후 소멸했던 대한민국의 진보정당의 부활과 정착을 이끌었다.'''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제16대 대통령 선거(2002) 권영길 후보
2. 생애
1941년,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아버지 권우현(權禹鉉)과 어머니 하영애(河永愛) 사이에 1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8.15 광복 후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입석리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 권우현은 빨치산으로 6.25 전쟁 때 토벌 과정에서 사살되었으며, 이후 홀어머니와 두 여동생과 함께 부산광역시로 이주해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하였다. 경남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잠사학과[7] 를 졸업하였다.
이후 대한일보, 서울신문 기자로 재직하였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 서울신문 파리 특파원으로 주재하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1988년 '서울신문 노동조합'을 결성해 '''초대''' 노조위원장을 맡으면서 노동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다.[8] 이후 같은 해에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초대''' 위원장, 1990년 5월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9] '''초대''' 위원장, 1995년 11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10] '''초대''' 위원장을 맡으면서 노동운동의 최일선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1996년 12월 24일 새벽에 신한국당이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기습적으로 날치기#s-2 처리하자, 이에 항의하는 역사적인 총파업 투쟁을 이끌면서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이후 진보 정당의 뒷받침이 없는 노동 운동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직접 진보 정당 건설에 뛰어들었다. 1997년 9월 7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을 앞두고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이 결집한 임시대책기구 국민승리21의 '''초대''' 대표 겸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9월 29일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적인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 선거에선 득표율 1.2% 고작 30만 6천 표 득표에 그치며 목표했던 100만표 이상의 득표에 실패했다. 당시 기사
대선 참패로 진보 진영과 노동 운동 상당수가 진보 정당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여주는 중에도[11] , 국민승리21 대표로 진보정당 건설운동을 계속 이어가면서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고 '''초대''' 당대표를 맡았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경상남도 창원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이주영 후보[12] 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에도 계속 민주노동당 대표로 활동하면서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때 여론조사에서 3%이상을 넘으면서 중앙선관위 결정에 의거해서[13] 최초로 대선후보 TV토론회에 참여하여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오랜 기간의 꾸준한 활동과 대선TV토론 참여로 민주노동과 권영길에 대한 지지도가 급상승하여 선거운동기간 도중 한때는 지지율 10%에 육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투표 전날 정몽준의 일방적인 단일화 철회 선언으로 상당수 지지표가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지지로 넘어가면서[14] , 최종적으로는 득표율 3.9% 약96만표를 득표하였다.[15] 그러나 이것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 조봉암 후보가 216만표를 득표한 이후 진보정당이 거둔 최고의 성과였다. 이때부터 민주노동당과 권영길은 국회의원 한명 없는 원외정당이면서도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인식된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역시 창원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 한나라당 이주영 후보에게 설욕하였다.
2005년 11월 민주노동당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기사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2012년 9월 11일 천영세와 함께 통합진보당을 탈당했다. 기사
이후 2012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의 공민배와 단일화를 하여 야권단일 후보로 경상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 홍준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2013년에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현재는 무상의료, 무상교육 운동을 하고있다.
은퇴 이후에도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의당 선대위 고문으로 역임하는 등 정의당의 평당원으로서는 계속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회찬 당시 경남 창원성산 후보 사무소 개소식 때 참여했던 모습이 이전의 익숙했던 모습과 달리 한동안 희귀병 투병생활로 머리가 다 세었으며 얼굴이 붓고 야윈 모습으로 역변했기에 #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공포를 느끼고 안타까움을 자아냈었다. 그래도 개표방송 땐 어느 정도 병세가 완화되었는지 이전의 모습을 그럭저럭 되찾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
2016년 7월에는 김종인 전 더민주 비대위원장과 비밀회견을 하여 기본소득과 관련하여 의논을 나누었으며, 기사.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규탄 집회에도 개인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정의당 선대위 고문단으로 참여하였고 옛 지역구인 창원[16] 에서 심상정 후보 지지연설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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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민주노총 지도위원 및 '양심수 석방 추진위원회'에 추진위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다. 기사
2018년 7월 당시 독일에 장기체류하던 중 노회찬 의원의 사망으로 일시 귀국했다.
이후 2019년에 2019년 재보궐선거에서 정의당 여영국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창원을 방문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국회의원 당선을 도와준 손석형 후보를 버렸다며 민중당에서 비난을 하기도 했다. 기사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의당의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을 맡으며 지지선언, 지지유세를 하는 등의 활동을 보였다. 기사 기사 기사
3. 기타
- 2003년 MBC의 코미디하우스 '3자 토론' 코너에서 김학도가 자신을 패러디했는데, 이를 계기로 직접 만나기도 하고 아예 권영길 본인이 직접 3자 토론에 출연해 김학도를 지지하는 역할로 나오기도 했다. 2008년 김학도의 결혼식 때도 직접 참석해 축하해주기도...
- 축구에 관심이 많은 정치인으로, 프랑스의 축구팀 파리 생제르맹 FC의 팬이다. 서울신문 파리 특파원으로 있었을 때 종종 경기를 봤다고 한다. 그리고 경남 FC의 경기도 자주 관람을 했다고 한다.
- 2007년 대선 후보 당시 조선일보에서 진행한 문답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로 원더걸스를 꼽았다. 사실 이 때는 비단 권영길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후보들이 원더걸스를 꼽았다.
- 비슷한 시기에 정치에 입문해 비슷한 시기에 은퇴한 이회창과 출마한 대선 선수가 같다. 성향은 정반대지만. 심지어는 15, 16, 17대 대선으로 출마한 대선까지 정확히 똑같다.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둘러보기
[1] 인근의 강누리, 사월리와 함께 안동 권씨(安東 權氏) 복야공파(僕射公派) 상이계(鋿二系) 집성촌으로, 권경석, 박계동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2] #[3] 한기호(韓琦灝)의 딸이다.[4] 동덕여자대학교 경영학과 교수.[5]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한화그룹 취직.[6] 언론인.[7] 누에치기(양잠업)와 비단실을 연구하는 학과였다. 현재는 바이오시스템소재학부 바이오소재공학. 여담으로, 가수 겸 배우 김창완이 그의 대학 직속 후배이다.[8] 노조를 만들긴 했는데, 누가 위원장을 맡을 것인가로 노조원들끼리 갑론을박을 벌이다가 결론이 나지 않자, 당시 마흔 일곱살로 노조원 중에서 최연장자였던 권영길을 위원장으로 추대했다.[9] 약칭 업종회의. 언론·금융·교사·병원·공공기관 등 사무직/전문연구직 노조들의 연합체. 14개 연맹 586개 노동조합, 200,197명 조합원으로 출발하였다.[10] 생산직 노조 연합체였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과 사무직 노조연합체였던 '업종회의' 그리고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맹(약칭 현총련) 3개 조직의 대통합으로 출범하였다. 만장일치로 권영길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3개 조직 출신을 골고루 안배해서 초대 지도부를 구성하였다.[11] 심지어 당시 전국금속노동조합 사무처장으로 민주노총의 숨은 실세라는 이야기를 듣던 심상정도 진보정당에 대해서 냉소적인 자세였다. 대다수 노동운동가들은 현장에서 싸워야한다는 입장으로, 심지어 지금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탄압당하고 있는데, 당신네들은 무슨 금뱃지 타령이냐면서 비아냥대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한다. 진보정당의 필요성에 대해서 공감하는 사람들도 한국사회에선 오랜 기간 형성된 냉전반공의식 때문에 실현불가능이라고 보는 진보인사들도 상당했다. 이런 사람들은 그나마 가까운 민주당 계열에 대한 '비판적지지' 노선을 고수했다.[12]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의 해양수산부 장관 맞다[13] 당시 국회에 의석이 없던 민주노동당은 TV토론회 참여를 위해서 법원에 소송까지 제기한 끝에 여론조사에서 3%가 넘는 후보는 TV토론회에 참여가능하다는 결정을 이끌어냈다.[14] 언론과 여론조사 전문가들에 따라서 최소 50만에서 최대 100만표 이상으로 추정한다.[15] 이는 15년 뒤에서야 정의당 심상정 후보에 의해 깨진다.[16] 현재 해당 지역구(창원 성산)는 같은 당 소속인 노회찬 의원이 당선되어 활동하였다.[17] 신당 창당을 위한 자발적 정당 해산[18] 진보정당 첫 지역구 당선, 같은 선거 울산 북구 지역구에서 당선된 같은 당 조승수가 있는데 2005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19] 전임자 김두관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사퇴[20] 범야권 단일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