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민주당(1995년)

 

대한민국의 민주당계·보수정당[1]
민주당

통합민주당

한나라당
개혁신당

새정치국민회의
(개별 합류)


[image][2]
민주당
영문명
Democratic Party
창당일
1995년 12월 21일
해산일
1997년 11월 24일
(신한국당과 합당, 한나라당 창당)
통합 정당
,
,(1995년 12월 21일 신설합당),
정치적 스펙트럼
중도 ~ 중도우파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마포구 토정로 318 (용강동)
의석 수
11석 / 292석 (한나라당 창당 직전)
당 색
녹색 (#009D68)
1. 개요
2. 역사
3. 합당과 소멸
4. 의의
5. 후일담
6. 연혁
7. 역대 총재
8. 역대 선거결과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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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5년 9월 분당 사태 이후 민주당에 잔류한 인사들이 시민단체 계열의 개혁신당과 합당하여 같은 해 12월 21일 창당한 자유보수주의 성향[3]의 정당.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일부 정치인들은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고, 잔류파는 1997년 11월 24일 신한국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하면서 소멸하였다.

2. 역사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경기도지사 후보 공천을 놓고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은 옛 민정계 출신의 이종찬[4][5]을 추천했다. 그러나 공천권을 쥐고 있었던 이기택 대표는 장경우 전 의원[6]을 고집하면서 양측간에 갈등이 생겼다. 결국 당내경선은 장경우가 이겼으나 정작 본 선거에서는 생각보다 큰 표차로 민주자유당 이인제가 당선되었다.[7] 얼마나 갈등이 심했냐 하면 김대중이 다른 지역 유세는 다 가면서도 정작 경기도 유세에는 다소 소극적이었을 정도이다. #
지방선거 결과 광역자치단체는 여5:야10으로[8], 기초단체장, 지방의회 선거에서도 민자당을 제칠 만큼 성적이 좋았으나[9] 김대중과 이기택의 갈등 심화로 인해 민주당(1991년)을 탈당한 김대중동교동계새정치국민회의로 독립하여 나갔다.
[image]
왼쪽 끝에 노무현 전 의원, 가운데에 키 큰 사람이 이기택 총재, 오른쪽에 김원기, 이부영, 강창성 의원.
국민회의에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에 잔류한 인사들은 시민운동 계열을 끌어들여 "통합민주당"을 창당한다.[10] 초기에는 민주화 시대의 명사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의 시민단체개혁신당을 창당하고 합당, 대거 합류하면서 개혁적인 정당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이는 국민회의가 대선 승리를 위해 보수온건화 노선을 탔기 때문이다.)
개별 정치인들의 대중적인 인지도는 높은 편이었으나 3김 중심의 정치적 상황에서 제4당이 살 길은 별로 없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5석(지역구 9석 + 전국구 6석) 확보에 그치면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며 당세가 약해졌다. 서울특별시 지역에서는 강동구 갑의 이부영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낙선했고, 부산광역시에서는 이기택 대표를 포함하여 전원이 낙선했다. 게다가 신한국당이 과반수 확보를 위해 황규선(이천시), 이규택(여주군), 최욱철(강릉시 을) 등의 당선자 빼가기에 나서면서 폭망 확정.
물론 되돌아보면 성과도 없지는 않았다. 당시 경상남도 울산시에서만 5개 지역구 가운데 2개 지역구 당선, 1개 지역구 선전을 하는 성과를 올렸다. [11] 또 경북 안동시 갑에서 첫 도전한 권오을(경상북도의원 출신) 후보가 안동 권씨 문중의 힘으로 깜짝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12] 하지만 이런 승리에도 의석이 30석에서 반토막이 난 것은 변호하기 어려웠다.
서울에서 민주당은 거의 전 지역 3위의 성적을 거두었으며, 선전할 경우 국민회의 후보가 낙선하는 결과만을 낳았다.[13] 다양한 출신성분을 지닌 사람을 대거 공천하였는데, 노무현은 종로구에, 도봉구 을의 유인태, 성북구 갑에 출마한 이철, 노원구 을에는 이문옥 감사관 구속 사건의 주인공인 이문옥이, 강동구 갑의 이부영이 출마했다. 박정희 시절 보안사령관 출신으로 나중에 민주당 시절 전국구 의원을 지냈던 강창성 전 의원은 용산구에 출마했으며, 강남구 갑에 출마한 홍성우 변호사[14] 등도 인기를 끌었다. 양천구 갑에 출마한 경실련의 서경석 목사도 대표적 인물이다. 이회창 前 총리와 장태완 前 수경사령관도 영입 대상이었으나, 장태완과 이회창은 모두 거절했다.[15][16]이렇게 스펙트럼이 다양한 인물들을 15대 총선 때 민주당 약세 지역에 각각 공천하여 의외의 득표율을 올렸다.[17] 당시 보수 강세지역에서 민주당계 정당치고는 매우 선전했던 셈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국민회의와 야권 표가 분열되어 모두 신한국당 후보가 당선된다.(...)[18]
결국 확고한 지지기반을 가진 거대정당에만 유리한 소선거구제에 직격탄을 맞아서 침몰한 것이다. 더구나 이때는 정당명부 비례대표도 없이, 지역구투표를 가지고 전국구를 배분하던 시절. 만일 현재 채택되고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일명 독일식) 혹은 권역별 비례대표제 하다못해 일본식 중대선거구제만 되었어도 민주당은 최소 30석이상을 획득해서 교섭단체 구성은 물론, 대선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국내에서 선거제도가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게 된 계기로 이때부터 언론과 정치학계에서 선거제도 개편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3. 합당과 소멸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순 서울시장을 후보로 추대(=시장 사임)했다. 그러나 지지율의 부진으로 결국 1997년 11월 신한국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의 일부가 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전통 여당과 전통 야당의 결합"으로 선전되었다. 법적으로는 신설합당이기 때문에 '흡수'된 것은 아니지만,[19] '거대여당'인 신한국당과 '소수야당'인 통합민주당이라는 위상의 큰 차이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흡수된 것으로 본다. 그를 방증하듯 통합민주당의 투탑이었던 조순 시장과 이기택 총재(대표)는 2000년 16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해 신한국당(이회창)에게 당을 고스란히 바치고도 토사구팽당한 셈이 되었다.
노무현, 김원기, 김정길 등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소속 대부분은 이에 반발해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여 김대중과 재회하였다. 단, '통추' 가운데 이철[20], 제정구 등의 소수파는 한나라당 창당에 참여했다.[21] 민주당 소장파였던 권오을(안동시 갑), 이주영(창원시 을), 장광근(동대문구 갑) 의원 등도 합당에 동참했다.[22] 골수친노였던 조경태의 경우 합당 당시에는 한나라당으로 들어갔지만 공천 탈락 뒤 탈당하여 새천년민주당에 들어갔다가 이후 2016년 새누리당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고, 현재 국민의힘 최다선 의원이다.

4. 의의


이 정당의 의의는 최후의 비(非)DJ계, 즉 비호남계 민주당이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정치적 좌표가 보혁보다는 DJ(+JP 등 반 YS계)와 반DJ, 혹은 호남(+충청)과 비호남으로 나뉘었다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결국 선명 야당을 내세우던 이들의 노선은 실패하였다.[23]
새천년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 민주통합당, 더불어민주당도 영남쪽 인사들을 많이 포괄했다는 의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비호남 민주당계 정당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24]

5. 후일담


이로서 지역구도는 격화 되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보혁 대결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부터 본격화 되었다.[25]
이부영 등은 한나라당 부총재를 지내고 최고위원에 선출되기도 했으나, DJ vs 반 DJ 구도가 깨지고 대북정책 중심으로 재정렬 되면서 다수가 민주당계로 돌아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이부영, 김부겸, 김영춘 등의 "독수리 5형제". 한나라당이 패배하고 노무현의 탈지역 개혁신당이 구체화 되면서 이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다. 이들이 새천년민주당에 참여하는 건 명분상 어려웠기 때문에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여당 분당이 불가피했단 시각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통합민주당계의 합류로 김대중 정권기의 한나라당은 무조건 보수적인 정당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한나라당은 이회창계 + 반 DJ계의 계파 정당, 영남 지역정당에 더 가까웠다. 도리어 민주당의 의원들이 더 보수적일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민주당의 보수화는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후 시도한 "한나라당 의원 빼오기"나 새천년민주당 창당 과정에서의 "몸집 불리기"로 더욱 심화되었다. 이 시기 한나라당엔 통합민주당 출신으로 국가보안법 폐지에 찬성하는 인사도 많았다! 2001년에는 국가보안법 문제로 같은 한나라당인 김원웅 의원과 김용갑 의원 사이에 고성이 오갔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신한국당과 통합 과정에서 이미경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은 의원직 상실을 원치 않았는지[26] 새정치국민회의 등으로 당적을 옮기지 않고 당적을 한나라당으로 옮기긴 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한나라당에 반감을 가져서 이후 정계 활동 때 당의 노선에 전혀 따르지 않아 '내부의 적'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1999년 동티모르 평화유지군 파병 동의안에 한나라당이 당 차원에서 반대해 표결 자체를 거부하고 회의장에서 모든 소속 의원들이 퇴장할 때도, 혼자 본회의장에 남아 반대표도 아닌 찬성표를 던졌을 정도. 결국 당에서 출당(제명) 조치되어 무소속 의원으로 남았다가 2000년에 새천년민주당에 도로 입당했다. 의원직에 대한 욕구와 개인의 정치적 소신이 절묘하게 결합해 일어난 일화이다. 참고로 이미경 의원은 민주당에서도 비례대표에 당선되어 16대 의원을 지냈으며 17대부터는 3번 연속으로 서울 은평구갑에서 당선되어 현재 5선까지 성공했다. 특히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에서 민주당이 전멸하다시피 했음에도 당선되었다! 그만큼 지역구 관리를 잘하고 있었지만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컷오프를 당했다. 그 후 컷오프에 승복하고, 해당 지역구에 긴급히 전략공천 된 박주민 의원에게 은평의 모든 지역 조직을 고스란히 인수인계하고, 막후에서 적극적으로 선거 지원하여 정치 신인 박주민을 당선시키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27] 이런 미담과 19대 대선 때의 문재인 캠프에서의 공로를 인정 받아 문재인 대통령 당선 후 코이카 이사장으로 영전했다.[28]
개혁성향을 가진 통합민주당의 전국구 의원 6명 중 절반인 3명[29]이 이런 행보를 보였다. 이수인, 이미경 의원은 1999년 10월 제명되었는데 이미경 의원이 이듬해 새천년민주당 창당에 합류했고 이수인 의원은 무소속으로 임기를 마쳤다.[30] 김홍신 의원의 경우는 다소 행보가 복잡했는데, 1998년 3월 "거짓말을 하면 염라대왕이 입을 꿰맨다고 했듯이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공업용 미싱이 필요하다."는 망언을 하는 등의 반DJ 행보로 16대 때도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주요 관심사인 보건복지 분야에 대해서는 정부 정책에 비판적 지지를 보내면서 한나라당 지도부와 차츰 사이가 나빠졌고 참여정부 출범 후에는 노골적으로 친노 정치인들과 가깝게 지내는 바람에 결국 열린우리당이 창당된지 2개월만인 2003년 12월 의원직 사퇴 및 탈당을 선언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한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구에 출마했으나 박진 한나라당 의원에게 밀려 낙선하면서 정계를 은퇴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정말 마이너해서 대부분이 모르는데 노회찬이 1996년 15대 총선을 전후한 시점에 민주당에서 당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민중당(1990년)의 실패 이후에도 진보세력들은 계속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주장하면서 각개약진했지만, 정작 대중적 기반은 만들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조직통합을 둘러싼 키배만 뜨는 상황이었다.[31] 시간은 흘러 15대 총선은 다가오고, 선거출마는 해야겠는데 독자 정당 창당은 힘들고 그렇다고 무소속으로 나가자니 그냥 듣보잡 군소후보 취급 당할꺼 같고, 그래서 노회찬을 중심으로한 일부 진보인사들이 선택한게 통합민주당에 단체로 입당해서 후보로 출마하는 방법이었다. 통합민주당의 개혁적인 이미지와 인지도, 지구당 조직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당무위원 직함을 받고 입당한 노회찬은 통합민주당 서울 강서(을) 지역구 후보 경선에서 고진화[32]를 꺾고 승리했지만, 정작 사면복권이 되지 않아서 선거 출마는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노회찬은 다른 진보인사들한테 꼼수 부리면서 이상한 짓거리한다고 욕만 먹고, 별 성과없이 선거후에 다시 탈당했다. 함께 입당했던 다른 인사들도 조직력에서 밀리거나, 여러가지 사정이 꼬이면서 정작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건 달랑 1명뿐이었다. 관련기사

법률적으로 말하자면 1987년 평화민주당부터 내려오는 민주당계 야당의 연속성은 이 통합민주당에서 끝난다. 평화민주당(1987년) → 신민주연합당(1991년) → 민주당(1991년) → 통합민주당(1995년)으로 쭈욱 내려오다가 1997년 한나라당(1997년)으로 합당(!!)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연속성 때문에 민주당은 당세가 약한데도 불구하고 자기 소유의 당사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전전전신인 평화민주당 시절 은행대출과 열성적인 김대중 지지자들의 모금으로 구입해서 평화민주당 김대중 이름으로 등기까지 했던 서울특별시 마포구 용강동의 5층짜리 당사 건물[33]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34] 이 때문에 김대중이 탈당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때, 민주당에서 등기는 김대중으로 되어 있지만, 자연인 김대중이 아니라 평화민주당 김대중이기 때문에 평민당의 후후후신인 자신들의 자산이라는 법률적 해석을 내놨고, 김대중과 동교동계도 별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교동계의 대변인이었던 박지원은 "오죽하면 우리 돈으로 사들인 50억짜리 건물까지 포기하면서 뛰쳐나가겠냐"[35]면서 이기택을 공격하는 소재로 활용하였다. 그동안 당명변경, 합당 등으로 계속 이름을 바꾸면서도 등기는 바꾸지 않아서 이런 코메디가 벌어진 것이다.
하여튼 돈이 없어서 사무실 임대로 전전하는 대부분의 야당들에 비해선 대단히 큰 장점이었다.[36] 이 건물은 1995년에 시가 50억을 상회하였는데, 1997년 신한국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으로 넘어갔다. 열성 야권지지자들의 돈으로 사들여서 김대중 이름으로 등기가 된 건물이 스리슬쩍 보수정당의 자산이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37] 이합집산과 철새가 난무하는 파행적인 한국정치가 낳은 해프닝.[38]
다만 단순히 철새질과 이합집산이 난무하는 파행적인 정치상이라고 일축하기에는 1990년대 당시 한국 정치에서 정파간의 이동과 이합집산이 어느 정도 필연적이었음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6월 항쟁6.29 선언으로 제6공화국이 시작되면서 제도적인 민주주의와 정당정치가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그 이전 30년에 이르는 오랜 군사독재로 제대로 된 민주적 정당의 기반은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예를 들어 김영삼김대중은 한국의 양대 정치세력인 보수계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사실상 시조에 해당하는 인물이지만,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중반 당시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 자체가 보수계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당시의 정당들은 정치적 성향 및 이념을 기반으로 한 정당이라기보다는 명망가를 중심으로 인맥과 연고를 기반으로 한 모임에 가까웠던 것이다. 예를 들어 영남 출신에 부모의 친구가 김영삼과 아는 사이인 정치 지망생은 이념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도 통민당에 갔다가 민자당에 들어가고, 호남 출신에 친척이 김대중과 아는 사이인 정치 지망생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어도 평민당으로 가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
결국 1990년대의 한국 정치판에서는 이런 인맥 중심의 집단들이 정치적 지향과 정체성을 가진 정당으로 재편성되는 현상이 치열하게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소속 정당의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들이 그 정당을 떠나 다른 정당에 합류하는 사건도 빈번하게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범민주당계 정당에서 범민자당계 정당으로 넘어간 정치인들이 적지 않은 것 이상으로 그 반대방향으로 이동한 정치인들도 적지 않았고, 이런 과정을 통해 양대 정당의 정치적 통일성이 형성되어 오늘날의 빅 텐트 이념정당인 거대 양당이 탄생한 것이다. 다만 범 민주당계(평민당의 후신) 정당에서 대규모 해체-재구성이 일어난 한 시점에 하필 당권이 (결국 반대쪽 -범 민자당계-로 넘어간) 비주류쪽에 있었기에 정당의 법인과 재산 역시 비주류를 따라가버리는 우스운 해프닝이 벌어진 것 뿐이다.

6. 연혁


  • 1995년 12월 21일: 민주당(1991년)과 개혁신당이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이 창당됨.
  • 1997년 11월: 조순의 지지율이 점점 떨어짐에 따라,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과 합당 추진. 국민통합추진회의 계열인 노무현, 김원기, 김정길 등은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함.

7. 역대 총재




8. 역대 선거결과


  •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15/299 11.3%[39]

9. 관련 문서


  • 친노 - 새천년민주당으로 옮겨간 상당수 의원들이 이 계파에 포함된다. 물론 조경태는 제외.




[1] 우선은 민주당계 정당으로 분류되지만 후에 한나라당으로 합당되어 직계 후신은 국민의힘이기 때문에 보수정당으로 종종 분류되기도 한다.[2] 합당 이전의 민주당(1991년)과 로고가 동일하다. 당명은 통합민주당이었지만,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선거 공보물, 벽보 등지에서 당명 표기를 '통합'이 빠진 '민주당'으로 했었다. 총선이 끝난 후에 정식으로 민주당으로 변경하였다.[3] 중도~중도우파로 평가받는 우익 자유주의 성향도 존재했다.[4]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을 거쳐 민주자유당에서도 활동했다. 그러나 1992년 김영삼이 당권과 대권을 모두 잡자 탈당해 새한국당을 결성했다가 뜬금없이 김대중의 편에 선 인물이다. 이후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전 의원의 사촌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5] 구한말 최고의 명문가이던 경주 이씨 백사공파 이회영의 직계손이기도 하다. 이회영, 이시영(정치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가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직후까지 무수히 많은 독립운동가, 군인, 외교관, 정치인들을 배출하였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꼽힌다.[6] 이 사람도 이종찬과 함께 새한국당을 결성한 민정계 출신.[7] 흥미로운 것은 이 때부터 이인제의 존재감이 커졌으며 불과 2년 뒤 김대중대통령 당선에 절묘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8] 민주자유당이 경기/인천/부산/경남/경북, 민주당이 서울/광주/전남/전북, 자유민주연합강원/대전/충남/충북, 무소속이 대구/제주를 차지했다.[9] 특히 서울에서는 그야말로 압승을 거뒀는데, 구청장은 강남구서초구를 제외한 23개 구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고 시의회는 총 133석 중 123석을 민주당이 가져갔다. 이는 원래 서울에 호남 출신 유권자가 꽤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상당히 큰 격차로, 그만큼 김영삼 정권에 대한 서울시민의 반감이 심각하다는 근거였다.[10] 하지만 민주당의 정통 계통은 자신들에게 있다며 언론에게 통합이라는 말을 빼고 그냥 '민주당'으로 불러달라고 했다.[11] 참고로 5개 지역구 가운데 하나는 정몽준의 지역구(동구, 민주당 비출마 지역)였으니 결국 4개 가운데 2곳이 성공한 셈이다. 울주군(당시는 울산시 울주구)에서는 과반 득표(53.8%)를 기록했으며, 낙선한 지역구에서도 26.7%(남구 갑), 35.7%(중구, 신한국당 당선자와 2.5% 격차)의 혁혁한 득표를 올렸다. (구) 창원시 갑/을에서도 15%를 넘기는 득표율을 올렸다.[12] 안동은 지금까지도 지역정치에서 안동 권씨 문중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지역이다.[13] 예외적으로 서울 성북구 갑에서는 민주당 이철 의원이 오히려 2위를 거뒀고, 당선된 새정치국민회의 유재건과의 격차는 불과 4604표차(4.2%P차)였을 정도로 만만치 않았다.[14] 배우 출신인 홍성우 전 국회의원과 동명이인인 인권변호사이다. 한자 표기는 洪性宇로 같다.[15] 특히 이회창은 신한국당으로 들어가서 선대위원장과 전국구 1번을 받고 금뱃지를 달았다.[16] 장태완 역시 이후 2000년 새천년민주당에 들어가서 전국구 국회의원이 된다.[17] 여담으로 강창성의 경우 보수적인 군 출신이라는 영향이 있었는지, 최고 득표율을 올린 곳은 당시 보수 강세지역인 동부이촌동과 군인 밀집지역인 서빙고동이었으며 홍성우는 부촌인 신사동과 압구정동에서, 서경석 역시 다른 지역보다 목동아파트 지역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올렸다.[18] 특히 종로구에서 이종찬과 노무현이 표를 나눠먹어서 이명박이 당선된다거나 하던 상황이 대표적.[19] 나무위키는 다 따로 있지만, 이 점을 반영하여 위키백과에서는 한글, 영어 모두 한나라당(Grand National Party), 새누리당(Saenuri Party) 문서는 따로 있지 않고 자유한국당(Liberty Korea Party)로 리다이렉트된다. 반면 신한국당(New Korea Party)은 그렇지 않고 따로 있다.[20]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바 있으며, 2000년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정계를 은퇴했다가, 2002년에 다시 정몽준국민통합21에 합류하면서 정계에 복귀했으나 막판 단일화를 깬 정몽준을 비판하며 결별. 2004년 열린우리당 공천으로 부산 북구 + 강서구갑에 출마했으나 낙선한다. 그 이후 정치권에서 물러나 2005년 6월 30일 ~ 2008년 1월 21일까지 한국철도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 위백 항목 참조[21] 굳이 드립을 치자면 경남의 경우 낙동강을 기점으로 서쪽은 반DJ, 동쪽은 친DJ가 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제정구는 고성, 이철은 진주 출신.) 정확히 말하면 당시 부산 출신 정치인들의 야성이 좀더 강했다는 평가.[22] 현재 장광근은 새누리당의 탈당과 바른정당으로의 입당을 거쳐 새누리당의 후신인 자유한국당에 다시 복당하였고, 권오을도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바른정당에 입당하였지만, 그는 계속 잔류해 바른미래당의 창당에 참여했다.[23] 이런 분위기는 1996년 총선1998년 지방선거의 결과가 잘 보여준다. 96년 총선은 새정치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지역정당임을 분명히 했으며, 98년 지방선거 결과는 영남과 강원은 한나라당이, 수도권, 충청, 호남은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정확히 동서로 나눠가졌던 것이다. [24] 이기택, 조순 등의 비호남(혹은 비DJ)계 민주당 인사들은 16대 총선 때 민주국민당에서 정계 마지막 도전을 했지만, 민주자유당 출신 허주 김윤환이나 신군부허화평(이쪽은 같은 시기에 창당되었던 희망의한국신당에서 넘어옴) 등을 끼고 있는 당의 정체성상 민주당계 정당이라고 보긴 힘들다.[25] 그나마도 노무현 후보가 경선에서 패배했다면 인물, 계파, 지역 대결이 계속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6] 비례대표직은 타 정당과 합당하거나 출당 조치의 경우에만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으며, 해당 정당에서 자의로 탈당하거나 합당하는 정당이 아닌 다른 정당으로 당적을 옮길 경우 의원직을 상실한다.[27] 그래서 박주민 의원이 이미경 전 의원을 깍듯하게 모신다고 한다.[28] 21대 총선 당시의 나이가 만 70세의 고령인지라 사실상 정계은퇴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29] 이미경, 이수인, 김홍신[30] 임기 만료 후 불과 열흘 만에 지병으로 별세. 아마도 자신의 병세가 심각하다고 판단해 사실상 정계은퇴를 결심했던 듯.[31] PD(정파)NL(정파)한테 맨날 밀리는 이유가 이것이다. 막말로 NL은 하다못해 동네 물청소라도 열심히 하면서 지역에서 인심을 얻고 있는데, PD는 맨날 자기들끼리 골방에서 강령토론, 조직노선 토론하느라 시간 보냈다.[32] 이 사람은 2004년에 와서야 한나라당 후보로 영등포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지만 워낙 정체성이 안 맞아서 4년 후에는 낙천된 것도 모자라 제명당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제명된 건 아니고 당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를 지원했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33] 과거 신민당 별관으로도 사용된 적이 있다.[34] 창당 당시에는 김영도 의원이 제공한 대하빌딩을 당사로 사용했었다.[35] 실제 김대중의 탈당을 끝까지 반대하던 몇몇 측근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먹히지 않자, 가장 마지막에 꺼낸게 "당사가 아깝지 않습니까"라는 이야기였다고 한다. 김대중이 지지자들의 모금으로 구입한 당사에 대한 애착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호소한 것인데, 다들 알다시피 김대중은 이 건물을 포기하면서까지 탈당을 결행했다. [36]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자기 건물을 가지고 있는 야당은 극히 드물다. 지금도 대부분의 정당들은 여의도 아니면 마포/영등포 지역의 빌딩 몇층을 임대하는 식으로 당사를 운영한다. 최근에 더불어민주당이 여의도에 지상 10층, 지하 4층짜리 장덕빌딩을 200억에 매입해서 입주하였다. 매입대금의 80%는 10년분할 상환 조건으로은행대출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37] 이후 한나라당은 자금 확보를 위해 이 건물을 매각하였고, 현재는 리모델링되어 평범한 빌딩이 되었다. 다음 로드뷰[38] 이러한 연유로, 명목상 1987년 대선 당시 존재하던 주요 4당의 역사는 모두 국민의힘이 승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은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서 1개의 당이 되었고, 1997년에 평화민주당의 후신인 통합민주당과 신설합당을 하면서 이렇게 된 것이다.[39]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의 지지율은 34.5%, 새정치국민회의는 약진을 예상했음에도 25.3%였다. 민주당계 두 정당의 지지율의 합이 신한국당 지지율을 미세하게 넘기는 상황이었다. 만약 두 당이 통합했으면 과반을 넘겼을 거라는 예측도 있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고.. (참고로 민주한국당신한민주당이 모두 나왔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도 비슷한 상황. 2004년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때도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 동시 출마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