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사건

 


'''二七惨案'''
2.7 Inc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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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2월 1일, 경한철로총공회 성립대회 기념사진
1. 개요
2. 배경
2.1. 중국 노동운동의 성장
2.2. 우페이푸와 공산당의 합작
3. 전개
3.1. 경한선 총공회 성립대회
3.2. 2월 4일 총파업
3.3. 참안의 발생
4. 결과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개요


1923년 2월 7일 직예군벌 우페이푸우한의 철도 노동자들의 경한철도 노동자 대파업에 대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경을 동원하여 무력진압한 사건을 말한다. 2.7 참안, 2.7 대참사라고도 한다.

2. 배경



2.1. 중국 노동운동의 성장


1919년 5.4운동 이후 중국 정치상황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역량에 각성하고 자발적인 노동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1921년 1월 장신점 노동자학교가 설립되고 1921년 8월 중국 공산당은 창당대회의 결의에 따라 노동조합 서기부를 설치하고 전국 각지에서 노동운동 조직화에 개입했다. 1921년 장신점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절 대회를 열고 철도 노동자 조합을 결성, 가을에 장신점 공인구락부를 조직했다. 이어 1922년 3월까지 전국에서 13개 구락부가 조직되었다. 1922년 1월 공산당원 쑤자오정의 주도 아래에 홍콩선원노조가 임금 인상, 직업소개권을 요구하며 파업을 실시하여 3월에 영국 당국으로부터 승리를 챙취하면서 중국의 노동운동은 '고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22년에 이르러 산해관공장파업, 당산공장파업 등의 노동자들의 실력발휘가 있었고 1922년 노동절 대회를 계기로 전국 12개 도시 100여개 노동조합과 27만명의 조합언을 대표하는 162명의 대의원이 광저우에 모여 제1회 전국노동대회를 개최하고 전국총노동조합 결성을 준비하였다. 가장 운동이 활발한 것은 경한선의 노동자들이었지만, 경봉선, 경수선, 정태선, 농해선, 주평선, 월한선 등에서도 노동자 조직이 조직되어 곳곳에서 총공회가 결성되었고 노동자보습학교, 공인구락부 등이 잇달아 건립되었다. 1922년 12월, 중국 공산당 중앙은 <현재 실제 문제에 대한 계획>을 제정하여 철도노동자, 선원, 광산노동자가 '세갈래 유력한 자원'이라고 지적하며 전국총공회를 설립하기 전에 세 산업의 연합조직을 설립하여 공회운동의 중추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2년 말까지 경한철도 각 역에는 16개 공회가 설립되었다.

2.2. 우페이푸와 공산당의 합작


한편 코민테른은 중국 내부에서 합작할 세력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 쑨원, 천중밍, 그리고 우페이푸였다. 1920년 10월 코민테른 대표 보이틴스키가 뤄양에서 우페이푸 휘하의 백견무와 회담하여 중국의 정세에 대해 토론하고 레닌을 대표해 경의를 표하며 그를 사회주의 실행자라고 칭찬했다. 보이틴스키는 소련의 정황을 소개하여 우페이푸에게 노조를 설립하여 노동자들을 통제하여 서남 지역의 각 성을 발전하기 위한 군사작전에 지원군으로 활용하라고 건의했고 우페이푸와 연합하여 민주운동을 일으키자는 합의를 보았다. 코민테른 2차 대표대회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와의 단결이 결정되자 코민테른 극동문제 전문가 빌렌스키는 1920년 10월 9일, 우페이푸를 부르우자 민주주의자로 소개했고, "소련은 중국에서 우페이푸 장군의 대 소련 정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라고 하였다. 우페이푸는 1921년 노동입법을 주장하면서 친노동자적인 행보를 밟아 공산주의자들의 기대를 모았다.
1922년 4월 1차 직봉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소련과 우페이푸의 본격적인 접촉이 시작되었는데 소련은 우페이푸를 단순한 군사실력자 이상으로 매우 높게 평가했다. 1922년 7월 빌렌스키는 외무인민위원 치체린과 레프 트로츠키에게 우페이푸에 대해 '중국에서 가장 훌륭한 군벌'이라고 보고했다.
현재 중국정치 중에 주요인물은 우페이푸 장군이며, 그는 군대, 재정, 교통 그리고 내정부를 장악하고 있고, 남방의 다수 성이 현재 우페이푸에게 의탁하였으며, 그 결과는 쑨원 정부가 거의 무너질 정도에 이르렀다. (...) 나는 우페이푸의 초청으로 그의 대본영을 방문했고, 아주 의의 있고 유익한 담화를 진행하였다.
우페이푸는 빌렌스키에게 트로츠키에게 보내는 서한을 전달하며 러시아와 중국이 극동에서 같은 임무를 가졌다고 매우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고 "소련과 협의를 체결하는 것은 자신이 최후의 승리를 얻는 필요조건"이라는 발언까지 하여 빌렌스키를 고무시켰다.
하지만 우페이푸와 소련은 외몽골 문제와 중동로 문제 때문에 계속 의견충돌을 빚었다. 1921년 12월 중국에 부임한 파이케스 사절단은 외몽골 문제에 있어서 끝내 합의를 보지 못했으며 그 후임인 아돌프 요페도 우페이푸가 외몽골에 대한 재출병을 감행할 수도 있다는 의견 표명에 우페이푸보다는 소련의 이익 보장에 대한 확실한 의사를 표명한 쑨원과 합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를 라데크를 비롯한 소련 내부의 실력자들이 우페이푸에 대해 여전히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우페이푸와의 합작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3. 전개



3.1. 경한선 총공회 성립대회


1922년 1차 직봉전쟁에서 우페이푸는 돤치루이안휘군벌장쭤린봉천군벌의 도전을 물리치고 천하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철도관리권을 장악하고 있던 량스이의 교통계 세력은 아직 건재하여 중국의 주요 철도를 장악하고 철도 운용에서 나오는 수익을 바탕으로 군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우페이푸는 교통계를 숙청하기 위해 교통계에 대한 노동투쟁을 전개하던 중국 공산당에게 손을 내밀었다. 혁명적 부르주아들과 제휴하라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중국 공산당은 우페이푸와 연계하여 교통계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리다자오는 우페이푸의 정책처장인 백견무의 중재를 받아 1922년 9월과 10월에 뤄양에서 우페이푸와 교통총장 고은홍과 회담했다. 우페이푸는 리다자오가 파견한 인물들이 교통부의 직책을 맡는 것에 동의했고 리다자오는 6개 철도에 포혜승, 등중하 등을 파견하여 주요철로에서 일하여 노동조합을 결성, 노동투쟁을 전개하게 하였다. 이는 상술한 바와 같이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하던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큰 보탬이 되었고 경수, 경봉, 농해, 정태, 진포 등 주요 5개 철도에서 모두 공회가 수립되었다.
경한철도의 노동운동은 계속 거세져 1923년 2월 1일, 정저우에서 경한선 전 구간의 노동자 대표들이 모여 경한선철도 총공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이를 위해 경한철도 각 공회 대표 65명, 경봉, 진포, 도청, 정태, 경수, 농해, 월한철도 등에서 파견한 대표 60여명, 한야평총공회 및 30여개 공회 대표 130여명, 베이징과 우한의 학생 대표 및 언론인 30여 명이 1월 말까지 정저우에 모여들었다. 중국 공산당도 총공회 성립대회의 중요성에 주목하여 집행위원 장궈타오를 중앙특파원으로 보내고, 우한시위 서기 진담추, 노동조합 서기부 주임 뤄자룽, 베이징지방위원회 위원 바외후이썽, 서기부 우한분부 주임 린위난 등을 파견했다.
노동운동의 급격한 성장세에 경계를 느낀 우페이푸는 총공회 성립대회를 저지하기 위해 '군사구역 회의금지'라는 구실로 총공회 성립대회를 저지하려 했으며 정저우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집회 금지 명령을 내리고 정저우의 회장을 군경을 동원해 포위했다. 정저우 시내에서는 상점이 철시하고 인적이 끊겼다. 하지만 대회 참가자들은 물러서지 않고 개회 시간이 되자 악대를 앞세워 대회장인 정저우보악원 극장으로 전진했다. 병력이 출동하여 노동자들의 행진을 저지하려 했지만 2시간 동안의 대치 끝에 노동자들이 군대의 제지를 돌파하여 대회장에 모여 경한선총공회의 성립을 선포했다. 군중들은 "경한철도 총공회 만세! 노동계급 승리 만세!"등을 외치며 환호했다. 군경이 회의장을 포위하고 대회를 강제 해산하려 했으나 노동자들은 이에 맞서 싸우며 오후 4시까지 회의를 계속했지만 결국 4시에 군경이 대회장을 점령하고 모든 기물과 설비들을 파괴했다.
군경의 포위를 뚫고 대표들이 여관에 돌아오자 군경이 여관을 포위하여 대표들을 여관에 감금시켰다. 또한 총공회와 정저우 분회의 사무실을 공겨하여 실내의 모든 물건을 압수하고 사무실을 때려부쉈으며 모든 대표들에게 정저우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다.

3.2. 2월 4일 총파업


군벌들의 노동운동 탄압에 분노한 각 분회 대표들은 2월 1일 심야, 경한철도 총공회 집행위원회 비밀회의를 열어 총파업을 결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2월 4일부터 경한선 전 구간에 걸쳐 총파업을 단행하고 편의상 총공회를 강안으로 이전한다"는 결정을 발표하고 총파업을 선포, 전국 노동단체에 공동투쟁을 호소했다. 노동자들은 2월 4일 총공회의 명의로 5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 1. 경한철도구장, 군 책임자, 정저우 경찰국장의 파면.
  • 2. 대회에 끼친 손해의 배상.
  • 3. 몰수해 간 모든 액자, 기증물 등을 정저우 지방장관이 총공회에 반환할 것, 정저우 분회 사무실을 점령한 군대를 철수시킬 것, 분회의 간판을 반환할 것, 정저우 지방장관은 사죄할 것.
  • 4. 일요일은 휴일로 하고 휴일임금을 지급할 것.
  • 5. 구정 때는 일주일 간의 휴가와 임금을 지급할 것.
2월 4일 오전 9시, 강안기계공장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3천명이 운집한 가운데 장신점에서 분회 주최로 3시간 동안 노동자 전체대회가 소집되었고 총공회는 파업명령을 전달했다. 군중이 열렬히 호응하여 파업 노동자들은 2만명으로 불어났으며 강안, 장신점, 정저우 등지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실시되어 철도가 마비되었다. 장궈타오, 샹잉, 뤄장룽, 린위난 등도 이 파업에 참여했다.
2월 5일, 직예군벌은 12시간 이내에 직장에 복귀할 것을 요구했지만 노동자들은 "총공회의 명령없이 단독으로 교섭할 수 없다."면서 복귀를 거부했다. 이에 차오쿤은 장신점에 군대를 파견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장신점에 군대를 배치해 노동자들과 대치했다. 강안에서는 호북독군 소요남(肖耀南)이 군대를 파견해 파업 주동자 색출을 시도하는 한편, 노동자들을 강제로 끌어내 열차를 다시 운행하려 했다. 이에 총공회는 규찰대를 모집해 군벌에게 저항했고 삽시간에 2천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군대와 싸웠다.
2월 6일, 우한의 여러 노동조합이 대표 수백명을 강안에 파견하여 위문대회를 거행했고 수십명의 조합지도자들이 연설을 했다. 마지막으로 경한총공회 비서장이 다음과 같이 답사했다.

"우리들의 이번 대파업은 전체 노동계급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대 관건이다. 우리는 단순히 임금인상이나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인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이날 경봉선, 진포선에서 군벌들이 노동자들을 모집하여 군인들의 감시하는 가운데 열차 운행을 재개했고 파업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정저우에서는 직장 복귀를 요구하는 군벌들에게 노동자들이 "총공회의 명령만이 열차를 운행할 수 있다."며 교섭을 거부하였다. 이에 베이징에 주재한 외국 공사관들은 노동자들이 각 도시 조계와 영사관에까지 진출하여 외국인들을 위협하는 점에 불안을 느끼고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북양정부에 엄중경고하며 무력으로 파업을 진압시킬 것을 종용했다. 한커우의 영국 영사관에서는 소요남이 강안공회대표들과 대표회의를 개최, 파업 분쇄에 대해 논의했다.

3.3. 참안의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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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겸의 죽음을 묘사한 그림
열강이 파업 진압을 요구하자 우페이푸는 2월 7일부터 특별 계엄령을 선포, 조합 간부들의 체포와 각 역에 2만명의 병력을 배치를 지시했다. 이날 강안에서 총공회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규찰대를 상대로 공회를 포위하고 있던 군경이 사격을 가해 2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군경은 노동자규찰단 부단장 증옥량 등 수십명을[1] 살해했다. 강안분회 위원장 임상겸은 한커우에서 체포되어 기차역의 전신주에 꽁꽁 묶인 채 노동자들에게 직장에 복귀하라는 지시를 내리라는 위협을 받았지만 "내 목은 자를 수 있지만 파업은 풀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군벌들은 역 광장에서 임상겸(林祥謙)을 칼로 난자하여 공개처형했다.
장신점에서도 군대가 노동자들의 기숙사를 습격하여 노동자들을 마구 구타하며 파업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규찰대 부대장인 기관차공장 노동자 갈수귀(葛樹貴) 등 6명이 살해되었다. 정저우역에서는 정저우철도공회 위원장 고빈(高斌)이 군경의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고 고빈을 포함해 4명의 노동자가 옥사했다.
2월 8일 3천 명의 노동자들의 군영 앞에 모여 "우리의 동지를 돌려달라!", "우리의 자유를 돌려달라!"고 외치며 시위를 했지만 군벌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로 발포하여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2월 9일, 경한철도총공회와 무한공단연합회는 군벌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노동자들에게 직장복귀 명령을 내렸다.
2월 15일에는 우창의 홍산 기슭에서 소요남이 경한철도초공회와 우한공단연합회의 법률고문인 이양(施洋)을 살해했다.

4. 결과


이 사건으로 40~50명의 노동자들이 사망하고[2] 100~300명이 부상당했으며 1000명이 체포, 수배, 1000~1500명이 해고당했고 임상겸을 비롯한 여러 노동 지도자들이 살해되었다. 북방철도공회와 우한철도공회가 폐쇄되었으며 과아주와 호남성을 제외한 모든 지역의 노동조직들이 대거 파괴되어 1921년 서기부 성립 이후로 고양되던 중국의 노동운동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1923년 2월 27일, 중국 공산당은 <2.7 대학살의 경과>를 발표, "노동자들에게 무기가 있었더라면 그들이 함부로 살육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었겠는가?"라고 지적했고 등중하는 총파업이 실패한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는 강대한 공산당 조직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경한선에는 당원이 10명에 불과했다. 또한 이 파업의 결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우한총공회의 파업준비부족과 총파업 명령 지연, 병사에 대한 설득 공작 부족, 즉 병사와 노동자가 서로 적대시하도록 방치했기 때문에 군벌은 이것은 이용하여 노동자를 살상할 수 있었다. 전신기관 장악 실패, 파업 개시 후 남북지방의 각 조합은 완전히 소식이 단절되어 총공회의 지휘는 사실상 강안 한 곳 이외에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당의 정치적 지도착오, 당은 우페이푸 군벌과 대립하고 있던 교통계 군벌을 이용하지 못했고 노동입법운동 과정에서 우페이푸가 주장했던 노동자 보호라는 기만정책의 본질을 사전에 폭로하지 못하고 단지 노동조합 조직에만 몰두했는데 이것은 기회주의적 약점이다."

이 사건으로 중국 공산당코민테른우페이푸와 완전히 결렬하게 되었으며 직예군벌에 대한 반대투쟁을 강화하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 중앙은 <우페이푸가 경한철도노동자를 학살한 데 대해 노동계급과 국민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 전국 인민과 노동계급이 단합하여 자유를 위해 투쟁하여 노동자를 압박하고 학살하는 군벌들을 타도할 것을 호소했다. 이어 코민테른과 국제적색공회도 선언을 발표하여 중국 노동계급의 투쟁을 옹호했다.
공산당의 군벌들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하게 되면서 코민테른이 요구하던 중국 국민당과의 합작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던 공산당원들도 자신들의 소위 '계급적 역량에 대한 한계'를 절감함에 따라 '민주적 동맹자'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 역사는 공식적으로 중국 공산당이 당시 얻은 교훈에 대해 이렇게 분석한다.
중국 혁명의 적은 매우 강대하다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노동계급은 군사작전에만 의존해서는 안되며 반드시 다른 민주세력과 연대해야만 한다. 그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인민대중과 함께 하여 가능한 모든 동맹자를 쟁취해야 한다. 그래야만 반제국주의, 반봉건군벌 혁명운동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중국 공산당 역사 1권 상, 188~189페이지
2.7 사건은 중국 공산당이 1923년 6월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국민운동과 국민당 문제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하고 1차 국공합작 지지로 입장을 대거 선회하는 한가지 계기가 되었고 통일전선의 형성으로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게 된다.
한편 살아남은 일부 노동자들은 토비가 되어 산동성까지 흘러들어가게 되는데 임성 사건에 관여하게 된다.

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 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중국공산당역사 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도서출판삼화.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 제1차 國共合作의 形成과 그 影響에 관한 硏究, 이준태, 아태연구 7권, 경희대학교아태지역연구원.
  • 政治勢力 간 통일전선 측면에서 본 제1차 國共合作의 고찰, 이준태, 아태연구 15권 1호, 경희대학교아태지역연구원.
  • 국공합작과 孫文·요페공동선언 : 몽골문제와 중동철도문제를 중심으로, 이승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제1차 국·공합작 : 성립배경과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김영숙, 호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6. 관련문서



[1] 중국 공산당의 주장으로는 36명.[2] 가와시마 신의 견해에 따르면, 32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