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민당

 




'''중국 국민당'''
'''中國國民黨'''
'''Kuomintang | Chinese Nationalist Party'''

[image]
[image]
'''당기'''
'''문장'''
'''약칭'''
國民黨, KMT, CNP
'''창당일'''
1919년 10월 10일 (104주년)
'''주석'''
장지천 (江啟臣)
'''중앙 당사'''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중산구
No. 232-234號, Section 2, Bade Road #
'''이념[1]'''
중화사상
삼민주의
보수주의
자유보수주의
중화민국 내셔널리즘
양안통일주의[2]
'''스펙트럼'''
중도우파[3] ~ 우익[4]
'''국제조직'''


'''청년조직'''
중국국민당 청년단
(Kuomintang Youth League, Young KMT)
'''정책연구소'''
국가정책 연구재단
(國家政策研究基金會)

'''당원'''
345,971명 (2020년 기준)
'''입법원'''
'''38석 / 113석 (33.6%) '''
'''지방의회'''
'''393석 / 912석 (43.2%)'''
'''당 색'''
파란색[5] (#000094)
'''링크'''

1. 개요
2. 성향
3. 상징
5. 조직
5.1. 중앙위원회
6. 역대 선거결과
6.1. 총통 선거
6.1.1. 국민대회 간선제 시기
6.1.2. 국민 직선제 시기
6.2. 입법위원-국민대회 선거
7.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
8. 중국 본토의 중국 국민당
9. 기타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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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대만)의 정당. 중화민국에서 범람연맹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현 제1야당이기도 하다. 1919년 설립된, 아시아에서 현존하는 정당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정당'''이다. 두 번째로 오래된 정당은 1920년 6월에 창설된 몽골 인민당.
유의할 점은 이 당의 정식 당명이 '''중국 국민당'''이지 '대만 국민당'이 아니라는 것. 한국 언론에서도 '대만 국민당'이라고 적는 경우가 많이 있긴 하지만 이건 대만의 (중국) 국민당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이름이 이런 건 중화민국을 정통 중국으로 간주하며 본래 중국 대륙(본토)에서 창립된 정당이라 그렇기 때문. 다만 현실적으론 현재의 국민당은 (중화인민공화국과 구분되는) 중화민국의 정당으로 활동하고 있기에 젊은 당원들을 중심으로 의미가 없어진 '중국'을 떼버리고 그냥 '국민당'으로만 지칭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간혹 '중화 국민당'이나 '중화민국 국민당'으로 고치자는 주장도 당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더 '과격'하게 '대만 국민당'으로 바꿔서 중국 정체성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말도 있으나 국민당이 이를 따를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이다. 특히 화독 성향의 장지천 입법위원이 국민당의 주석으로 선출되며 이러한 탈중국화에 힘이 더더욱 실리고 있다. 한편 신당에서는 중국 국민당이 당명을 바꾸면 자신들의 당명을 중국 국민당으로 개명할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2. 성향


삼민주의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국제민주연합(國際民主聯合, International Democrat Union)의 멤버다.
구 대륙 출신(외성인)이 이 정당을 많이 지지하며, 비록 그 방식은 공산당과 다르지만 대만 독립파들이 지지하는 경우가 많은 민주진보당과 달리[6] 궁극적으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점진적인 통일에 호의적인 면모를 보인다. 덕분에 21세기 들어선 상대적으로 친중공적인 면모도 보이고 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위주의 통일은 당연히 반대하고 전국 통일의 주체는 "정통 중국"인 중화민국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즉, 중국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부분에서 공산당과 접점이 생기는 것. 다만 외신에서도 pro-China나 pro-PRC라고 보도하는 경우가 있으며, 한궈위 문서를 보듯 국민당의 친-중국공산당 스탠스는 홍콩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비판받기도 한다. 물론 색깔론적인 측면은 있는 게, 국민당은 중화민국 정통성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홍콩의 보수 우파인 친설립파 수준의 막가파 친중공은 아니기 때문. 국민당의 상황은 한국에서 민주당계 정당이 자주 친북으로 공격 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상대적으로 공산권에 대해 더 유화적이긴 하고, 이미 그것으로도 굉장히 민감한 주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중화민국의 범람연맹이든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이든. 실제로 홍콩 민주파 중에도 범람연맹에 호의적인 이들은 꽤 있다.
현재 국민당은 다른 정당에 비해 지지층 비율상 외성인본성인이 나름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대만 원주민객가인들 역시 외성인 못지않게 국민당 지지세가 강한 편이다. 대만에서 지지층이 가장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정당이란 소리. 2012년 총통 선거 지도를 보면 객가인과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주변 지역에 비해 시퍼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면 친민당이나 신당은 외성인이 압도적이며, 앞서 언급한 민진당은 본성인이 압도적이고 대만 제1 민족당은 원주민 위주의 정당이다. 다만 객가인이나 원주민은 인구 비율이 낮다보니 선거에서 큰 영향은 못 주는 편.

3.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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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깃발은 '''청천백일기''', 즉 중화민국 국기 청천백일만지홍기에서 빨간 부분이 삭제된 형태이다. 정확히는 국민당의 역사가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역사보다 먼저이기 때문에 당의 깃발에 빨간 부분을 넣어서 국기를 만든 것이다. 중화민국 해군기와 동일하다.
당의 휘장(당휘)은 이 문서 제일 처음 보이는 표에 제시돼 있는 이미지와 같다. 중화민국의 국장(국휘)과 비슷해 보이지만 형태가 미묘하게 다르다. 중국 국민당 당휘는 흰 태양의 햇살 문양의 크기에 정확히 맞춰서 원형으로 잘라낸 형태라면, 중화민국 국장은 햇살에서 바깥 쪽으로 여유를 두어 원형으로 잘라낸 형태이다.
태생적으로 중화민국은 중국 국민당의, 중국 국민당에 의한, 중국 국민당을 위한 나라였고, 그로 인해 국민당의 상징과 겹친다.
중화민국 국가 역시 중국 국민당의 당가(黨歌)로, 국가와 당의 상징물이 겹치는 부분이다. 그래서 중국 국민당을 지지하지 않거나 대만 독립파들은 첫 소절 "삼민주의는 우리 당의 근본(三民主義 吾黨所宗)"을 부르지 않고 다음 소절부터 부르거나 아예 부르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중국 국민당의 정치인들은 "민진당 정치인들이 당선되면 중화민국이 망한다"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공격하곤 한다. 예를 들면 궈타이밍 폭스콘 회장이 중국 국민당에서 경선 후보로 있던 시절에는 항상 국기 모자를 쓰고 나라 사랑을 과시하며 차이잉원에게 분홍 국기 모자를 선물해주고 싶다고 했다.

2000년 총통 선거에서 롄잔이 민진당 천수이볜과 대결할 때의 선거 광고로, 중화민국 국기가가 불리다가 중간에 "얼마나 많은 국기가 대만 독립파들에 의해 태워지고 있는지 아십니까?"라고 마타도어를 시전했으나 결과는 낙선.


2012년 총통 선거에서 마잉주가 연임에 도전하여 민진당 차이잉원과 대결할 때의 선거 광고로, 역시 중화민국 국기가와 국기를 활용하여 애국심 마케팅을 시전하여 연임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마잉주는 재임 당시 대만에서의 청천백일만지홍기의 사용을 금지하고 경찰을 동원하여 국기를 철거하거나 압수한 적이 많았다. 특히 마잉주가 타이베이 시장 재임 시절, 2001년 아시아 여자 축구 경기가 있었을 때 경찰을 동원하여 관중들이 들고 있던 국기를 압수한 적이 있었다. 선거 광고와 국기 몰수 사건을 다룬 뉴스를 합성하여 패러디한 영상.
그밖에도 2020년 총선에서 타이난의 입법위원 후보로 출마한 셰룽제(謝龍介)의 유세 현장에서 선거 운동원들이 국기를 흔들지 말고 숨기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한국의 태극기 부대가 자국을 사랑하는 걸 대표하는 게 아니듯이 중국 국민당에서 청천백일만지홍기로 민진당을 시험할 수 있는지 잣대가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그들이 말하는 차이잉원도 공식 석상이었을망정 국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다만 반대편인 대만 독립파들도 색깔론을 사용한다. 중화민국 정통론자들이 사용하는 '중국'을 일부러 '중공'으로 해석하는 거다. 대만인들마저도 중공을 중국이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일각에선 먹히며, 국민당이 정권을 잡으면 나라가 중국(중공)에 넘어간다는 식으로 선동을 하기도 한다. 물론 색깔론이란 게 으레 그렇듯 정치적 목적성이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쉽게 사라지는 형태의 문제는 아니다.

4. 역사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형식적인 연립 여당이자 실질적인 독재 정당이었다.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은 3당 훈정의 여당.
그러나 1980년대 장징궈 총통 시절부터 점차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1988년 장징궈가 사망하자, 대만 출신의 리덩후이(이등휘/李登輝)가 2000년까지 총통을 재임했다. 장징궈는 비록 중국 대륙인 저장 출신인 자신이 통치를 하지만 언젠가는 대만 출신들이 통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대만 출신인 리덩후이를 후계자로 생각했던 듯. 그리고 죽기 몇 달 전 '내가 대만에서 40년을 살았으니 나도 이제 대만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요지의 발언도 했다고 한다.
리덩후이는 총통에 취임한 직후 언론 통제 폐지를 단행하였고, 보수파의 반발을 제압하면서 국민대회와 입법위원의 총선거도 시행하였으며, 1996년에 총통 직선제도 시행해 대만에 민주주의 정착과 본인과 같은 본성인 대거 공직 기용 등의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허나 이러다보니 원래 국민당 성향과 엇나가던 그는 결국 국민당을 출당하게 되었고, 퇴임 이후엔 친일본적인 성향도 드러내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거나 망언도 뱉는 등 오점도 남긴다.[7] 국민당이지만 대만 출신이기 때문에 "타이완은 중국과 별개의 국가"라면서 중국과 대립각을 많이 세웠고, 그래서 1993년 국민당 내의 외성인 출신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여 신당으로 분당되는 사태를 겪었지만 어쨌거나 지속적으로 의회 과반수를 확보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중국이 96년 선거에서는 무력 시위까지 하면서 리덩후이의 3선을 막으려고 했지만 되려 대만 독립파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당선에 도움이 되었다'''. 당시 국민대회 선거결과를 보면 국민당이 49.7%, 민진당이 29.9%의 득표를 보였는데 총통 선거에서 리덩후이가 54.0%, 펑밍민 후보가 21.1%의 득표율을 얻었다. 결국 신당이나 무소속을 지지한 후보가 총통선거에서 25%, 국민대회 선거에서 5%의 득표를 얻었으니 갭이 좀 있다 하더라도 약 8%의 민진당 지지표가 리덩후이로 날아간 셈이 된다.
이전부터 대륙 출신들에게 비판을 많이 샀지만, 끝내 2000년 선거에서는 독립주의자란 이유로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을 실질적으로 지원하여 당에서 쫓겨났고, 이후 대만단결연맹을 만들어 범록연맹에 합류하였다. 거기에다가 국민당에서 탈당한 쑹추위가 천수이볜과 선두자리를 다투면서 렌잔 후보는 3위에 머물렀고 그렇게 총통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국민당은 정권을 민진당에게 넘겨준다. 이후 2001년 총선에서도 국민당은 개헌 저지선 확보에 실패하며 참패를 당하고 만다.
그러나 천수이볜 정부가 난맥상을 보이고 대립각을 세웠던 렌잔과 쑹추위가 서로 화해를 하며 단일화를 결의하여 2004년 총통선거에서 우세를 보일 듯했으나 전날 일어난 석연찮은 천수이볜 암살미수 사건으로 정권 탈환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듬해 총선에서 개헌저지선을 확보했고 뒤를 이어 지방선거에서도 기여코 압승을 거두며 천수이볜을 궁지에 몰아놓았다. 그리고 2008년 총선에서도 압승을 거두고 그 뒤를 이은 총통선거에서도 마잉주 후보가 당선되어 기어이 정권 탈환에 성공한다. 주요 이유는 천수이볜의 부패 의혹 때문으로, 2009년에 기어이 천수이볜을 구치소에 보내버린다. 이후 중국 대륙에 경제 협력에 한해 우호적인 성향[8]을 보이고 있었는데, 09년 12월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이전보다 부진하면서 다시 흔들리는 형국.[9]
이어서 벌어진 2010년 1월의 입법위원(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도 3:0으로 전패, 민진당이 30석을 차지하면서 개헌안과 총통 파면안 제출에 필요한 총의석(113석)의 1/4(29석)을 넘어섰다. 이어진 2월 말의 보궐에서도 4석 가운데 3석을 내주었다. 이를 돌파하고자 했는지, 아니면 무릅쓰고 했는지 마잉주 정권은 같은 해 7월 중국과의 ECFA(경제협력기본협정)까지 체결시키면서 대외적으로는 "차이완(Chiwan) 시대"를 열었다고 홍보했으나 국내 반응은 냉담... 의회에선 난투극이 벌어졌고, 수만명의 시위가 빗발쳤다(리덩후이도 함께 참여했다). 11월로 예정된 5대 시장선거에서도 참패 전망이 우세했으나 의외로 선거 결과는 국민당의 승리. 선거 막판에 국민당 중앙위원이 총에 맞아 다치는 사고로 국민당 표가 집결하면서 다섯 곳 중에 세 곳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전체 득표에서는 민진당이 49.9%(377만2000여표)를 차지해 국민당의 44.5%(337만9000여표)를 5.4%포인트 앞섰다.
이러한 위기감 속에 실시된 2012년 총통선거와 입법위원선거에서 국민당은 선거 레이스 내내 근소한 차이의 우세를 보여왔으나, 언제든지 역전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표출되었다. 하지만 독립 노선을 지향하는 민진당의 집권을 원치 않았던 중국의 지지와 대만해협에서의 대립관계를 원치 않는 미국의 암묵적 동의 등이 겹쳐져 예상보다 손쉽게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허나 이후 마잉주 정권 지지율은 20~30%대에 머무는 등 난맥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난맥상이 이어지면서 지지율이 계속해서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2014년 홍콩 민주화 시위가 좌절되면서 자칫했다가 중국에게 흡수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도 겹쳐 결국 지방선거에세 대패하고 말았다. 타이베이 시장을 친 민진당 성향의 무소속 후보에게 내줬고, 거기에다가 당초 국민당 후보가 승리할 걸로 보였던 타오위안 시장도 민진당이 가져간데다가 역시 국민당이 여유있게 승리할 것으로 보였던 신베이 시장도 접전 끝에 겨우 승리할 정도였다. 게다가 한국으로 치면 옹진군에 해당하는 텃밭 진먼을 아예 무소속에게 내주었으며 펑후도 민진당이 가져갔다. 전체적인 판세를 본다면 국민당은 6개 시장 선거 가운데 딱 한 곳만 건졌고, 현장과 현급 시장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고는 하지만 5곳만 건졌다.
2014년 12월 3일 마잉주 총통이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국민당 주석직을 사퇴했다. 2015년 1월 18일에 주리룬 신베이 시장이 당 주석에 당선됐다.
2015년 7월 19일 총통선거 후보로 훙슈주(洪秀柱) 중화민국 입법원 부원장(국회부의장)[10]을 지명하여 선거 태세에 돌입했다.# 이 사람이 여성이고 야당인 민주진보당도 여성인 차이잉원 주석을 총통 후보로 지명했기에 차기 대만 총통은 여성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다만 훙슈주가 차이잉원에 비해 여론조사 등에서 조사한 지지율이 10~20% 정도 밀리고 있어 이를 어떻게 극복할지가 관건이다. 심지어 훙 후보는 지지율이 쑹추위에게도 밀리는 3위일 때도 있었다.
결국 2015년 10월 17일 초유의 후보 교체가 이루어졌다.(...) 현 주리룬 주석을 후보로 교체한 것이다. 국민당이 최후의 수를 두었다는 평가가 많다. 현 홍슈주 후보가 워낙 인기가 떨어지는 것으로 인해 2위 자리까지 위태롭게 되자 내린 선택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리룬 주석의 출마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쑹추위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도 급물살을 살 것으로 보였지만 결국 쑹추위는 단일화를 거부했다.

중국 국민당 홍보 광고.
결국 2016년, 제9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제14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대패하였다.
이에 과반수를 넘긴 민주진보당은 9천억 원에 달하는 중국 국민당 재산의 국유화를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민진당 주석이자 차기 총통인 차이잉원까지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상황. 이에 국민당측은 모든 재산은 합법적으로 취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사1 기사2
중화민국은 상당기간 중국 국민당이 좌지우지하는 독재국가였고, 중국 국민당이 타이완 언론계의 큰 손으로 군림하기도 해서 장제스 독재정권 시절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지상파 방송사인 CTV와 관영지인 중앙일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CTV는 2000년대 초 이후에 케이블 방송에게 발리면서 재정이 급속히 악화되었고, 중앙일보는 1966년 복간[11] 이후에 1980년대까지 대만 제1신문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역시 1990년대 민주화 바람으로 여타 신문사에게 밀리면서 재정이 악화되었다. 그래서 2000년대 중반에 죄다 처분한 상태다.
사실 중국 국민당은 일개 정당이라고 하기에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식 발표만 해도 역대 최고액이 918억 위안(2016년 기준으로 계산해도 '''3조 3400억''' 하물며 1990년대 기준이었다면;;;)이고 2015년 기준 7억6천만 달러('''약 9천169억 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범록연맹에서는 국민당의 보유 자산이 실제로는 3~4조원대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6년 초 중화민국 내정부(내무부)는 국민당 재산이 2조 8천억 원 정도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것은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 국민당이 분리된 것이 1991년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혁파 때이기 때문이다. 2016년 기준 중국 국민당이 보유한 자산은 대만일치시기가 끝나면서 1945년대만총독부에서 중국 국민당이 넘겨받은 자산[12]을 기초로 하고 있다. 1946년중화민국 헌법을 입법하면서 중화민국 정부와 국민당이 잠시 분리되나 얼마 안 가 국공내전의 패색이 짙어지자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입법하면서 헌정을 변칙으로 유지하다가 전황이 나빠지면서 중단하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 국부천대가 일어나면서 중국 대륙의 재벌이나 상류층들이 보유한 자산을 국민당에 넘겼고[13] 이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체제에서는 당정군의 일체화(중화민국 정부+중화민국 국군+중국 국민당)가 더욱 심해져서 국민당의 자산을 중앙정부에 넘기지 않게 되었다. 1991년 동원체제 혁파 당시 총통은 '''국민당 소속'''의 리덩후이였고 결국 국민당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정부에 넘기는 것은 아예 밀려버리고 만다. 국민당 정권이 민주화를 추진하면서 이 부분은 은근슬쩍 넘어간 것이다. 2016년 들어서 차이잉원 차기 총통과 민주진보당 측에서 국민당 자산의 국고 환수를 주장하는 것은 이런 배경이 있다.
2000년대 천수이볜 민주진보당 정권에서 한 차례 환수 논의가 있었으나 민진당이 입법원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해 법안 성립은 불발됐고 대신 국민당이 CTV와 중앙일보, 몇몇 호텔들을 처분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지고, 2008년 마잉주 정부에서도 일정 부분 국민당 재산이 처분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국민당 재산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국민당이 소유한 부동산에서 나오는 임대수익만 해도 민주진보당, 친민당, 대만단결연맹, 시대역량 등 다른 정당들의 총 수입을 합친 것을 가볍게 능가할 정도니 말 다 했다. 이후 차이잉원이 총통에 당선되면서 자산 상당수를 몰수당할 위기에 처했다. 더군다나 의회도 민진당이 압도적으로 과반을 차지하고 있기에 실현 가능성도 큰 편. 기사 국민당 내부에서도 자산을 정리하자는 개혁 목소리가 있긴 하다. 결국 3월 14일부터 입법원에서 국민당 자산에 대한 조사에 들어간다.
당연히 국민당 내부에선 이건 정치 보복이라면서 결사반대하고 있지만, 몇몇 원로들은 이 기회에 당 자산을 깔끔하게 국가에 헌납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국민당의 차세대 주자였던 주리룬 신베이 시장(2016년 총통 후보) 역시 대선 유세전 당시 국민당 자산의 처분과 국민당의 회계감사를 통한 투명한 재정구조 확보, 문제 자산은 국고 환수 또는 원주인 반환을 공약한 바 있다. 이 와중에 리덩후이 총통 시절 당 자산의 일부가 헐값에 매각되면서 거액이 사라졌다는 폭로까지 나왔다. 관련기사
3월 26일, 훙슈주가 신임 주석에 취임했다. 이는 국민당 역사상 최초로 여성 당수가 취임한 것이다.


2016년 7월 26일 중화민국 입법원에서 기어이 민주진보당시대역량의 전원 찬성으로 국민당의 당 재산을 중화민국 국고로 강제 귀속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사 국민당은 강력히 반발하고 원내 시위까지 했으나 법안 통과를 저지하지는 못했다. 민진당과 시대역량을 합쳐서 74명이고 여기서 쑤자취안 입법원장 한명 뺀 73명 전원이 찬성표를 던졌으니... 친민당은 기권했다.
2016년 8월 27일 화롄 시장 보궐선거에서 국민당 후보가 승리했다. 2010년 이후로 지방선거에 승리한 것은 오랜만의 일이라 국민당 내부에서는 2018년 지방 총선도 노릴 만하다는 분위기가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관련기사
2017년 5월 20일. 주석 대표 선거에서 홍슈주를 꺾고 우둔이 전 부총통이 당선되었다. 관련기사
2018년 중화민국 지방공직인원 선거에서 기어코 전국 22개 지역 단체장 가운데 과반인 15개, 특히 직할시급의 6개 주요 단체장 가운데 절반인 3곳(타이중, 가오슝, 신베이)에서 당선자를 내는 승리를 거두었다. 오래간만의 대승에 당이 고무되었고, 2020년 차기 총통선거도 기대를 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2019년, 뜻밖의 재보선 패배[14]에 이어 다시 한번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가 대규모로 일어나면서, 유력해보였던 정권 탈환의 분위기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양안관계에서 현재 여당인 민진당에 비해 친중 이미지가 강한 상황에서 중국의 일국양제 무력화 시도와 시민들의 저항, 뒤이은 홍콩 행정부의 추태를 대만인들이 직접 보게 되면서 보다 반중 정서가 강해졌기 때문. 실제 이때문인지 지난 지방선거의 주역으로 평가받은 유력 대권주자 한궈위 가오슝 시장도 직접 일국양제 수용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장제스의 '''증손자'''이자 제9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에서 타이베이 선거구에서 당선된 국회의원 장완안(蔣萬安, 장만안)이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위해 뛰쳐나온 홍콩 시위대를 지지하며 일국양제를 거부하는 논평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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香港的學生及年輕人,無懼港警強力鎮壓,為了捍衛自由與民主,向全世界發聲及吶喊,對於這樣的勇敢,我必須要給予最高的敬意

홍콩의 학생 및 청년들 여러분, 홍콩 경찰의 강경 진압에 두려워 말고, 자유와 민주를 지켜내기 위해, 전 세계에 목소리와 외침을 내십시오. 이러한 용감함에, 저는 반드시 최고의 경의를 표합니다.

在臺灣,一國兩制沒有存在的空間,民主自由憲政體制也不容任何破壞及妥協。政府除了要密切注意並維護在香港就讀的臺生、在港工作的臺灣民眾人身安全,必要時也該提供香港民眾人道救援。

대만에서도 일국양제는 존재할 여지가 없고, 민주자유 헌정체제도 파괴 및 타협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홍콩에 재학 중인 대만 학생, 항구에서 일하는 대만 민중의 신변 안전을 주의하고 지키는 것 외에, 필요하다면 홍콩 민중의 인도적인 구원을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 장완안(蔣萬安, 장만안) 중화민국 입법원 국회의원(중국 국민당) 출처

장개석의 자손이라는 점 때문에 양쪽에서 나름 시끌벅적했는데, 중국에서 몰려온 우마오당들은 해당 글의 댓글에 '''"장개석 얼굴에 먹칠할 거면 민주진보당으로 꺼져라"''' 등 각종 패드립을 치고 있고, 범록연맹 지지자들도 '''"진정성이 전혀 없다"'''며 까고 있다.[15] 시진핑을 지지하는 우마오당과 타이완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범록연맹이 하나되는 희한한 장면이 연출된 셈. 링크.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12월 14일에 국민당 사무실 폭파 기도가 나왔다. 링크.
2020년 1월 11일, 제15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출마한 한궈위 후보가 38.6%의 득표율로 '''낙선'''하였다.[16] 동시에 진행된 제10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도 38석에 그치는 패배를 당하며 다시 4년간 소수 야당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홍콩 경찰을 지지한다고 한 예위란(葉毓蘭)과 중국에 건너가 시진핑의 훈화를 듣고 온 퇴역 장성 출신 우쓰화이(吳斯懷)를 기어이 비례대표 1번과 4번에 부여해서 당선시켰다. 이로써 친중 정당이라는 이미지가 선명하게 박혔다.
다만 한편으론 이런 연이은 대선, 총선 참패 때문인지 92공식, 하나의 중국을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당내에서도 커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당이 소멸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나왔다.# 실제로 대만은 젊은 층일수록 자신이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져 가고 있는데[17] 현재 국민당의 주 지지층은 50세 이상의 고령층이고 이들은 장제스·장징궈 시절을 그리워하는 경우가 많다. 허나 현재 40대 이하의 대만인들은 이런 기억이 없기 때문에 이들이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국민당을 지지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즉, 중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전략은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당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이러다보니 중국 국민당의 "중국"을 당명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법 나오는 판국. 더군다나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패권주의로 인해 반중정서가 매우 커진 상황이라 이번 선거 참패를 계기로 대륙에 대한 관계를 어떻게 재설정하느냐가 향후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이러한 여론이 국민당 내에서도 반영되었는지 2020년 3월 취임한 장지천 주석은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이 홍콩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지지표명을 재차 하자, "차이 총통은 말로만 홍콩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지 말고 행동으로도 지지하라"며 더 급진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다. 또 국민당 당내 개혁위원회는 지난 몇 달 간의 논의를 거쳐 마련한 건의안에 92공식 거리두기를 언급하기도 했다.# 다만 당내엔 여전히 중공과의 설정 문제에 이견들이 많아 통일된 담론이 나올 수 있을지는 의문스러운 상황. 2020년 9월 6일 열린 전국대표자회의에서는 일단 92공식 당론 유지가 결정됐다.
8월 15일에 열린 가오슝 시장 재보궐선거에서 25%만 득표하는 참패를 겪었다. 결국 가오슝은 다시 민진당의 텃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9윌 20일에 중국 푸젠성 샤먼에서 열릴 제12회 해협논단에 왕진핑 전 입법원장(국회의장)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 파견을 취소한다.#
2021년 2월에 들어 인터넷 상의 정치적 영향력이 민진당을 추월하여 대만 전체 정당 중 1위를 기록하였다. # 이러한 경향에 대해선 가오슝 시장 파면 이후 정치적 생명이 끝난 줄로만 알았던 한궈위 전 시장의 정치 재개를 예고하는 각종 활동들과 더불어 장지천 현 주석의 주석 연임 선언, 정계 은퇴 후 각종 방송에서 정치 평론을 하던 유명 방송인 자오샤오캉(趙少康)의 국민당 차기 주석 선거 출마 선언과 이후의 정치적 행보 등 여러 요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한궈위 같은 경우는 이미 대선 후보를 한 경험이 있고, 그의 행보를 통해 그의 강력 지지층들인 한분(韓紛)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어 사실상 고사 직전의 국민당 내 분위기를 올리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자오샤오캉 역시도 그가 진행하는 정치 프로그램을 다루는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가 100만 명이 넘고, 차기 유력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만큼 국민당 내의 성량을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국민당 내에선 이러한 경향이 차기 대선까지 이어지길 바라지만, 실제 선거와 SNS 내의 경향이 꼭 일치한다고 볼 수 없고, 올해는 대규모의 선거가 예정돠어 있지 않은 만큼 국민당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러한 기조를 오래 끌어와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5. 조직



5.1. 중앙위원회


  • 주석
    • 부주석
    • 서기장
      • 부서기장
  • 조직발전위원회
  • 문화전파위원회
  • 행정관리위원회
  • 정책위원회
  • 심사기율위원회
  • 혁명실천연구원
  • 중앙당무위원회 (위원 34명)

6. 역대 선거결과



6.1. 총통 선거



6.1.1. 국민대회 간선제 시기


1948년 총통 선거 장제스 90.03% 당선
1954년 총통 선거 장제스 96.91% 당선
1960년 총통 선거 장제스 93.97% 당선
1966년 총통 선거 장제스 98.60% 당선
1972년 총통 선거 장제스 99.39% 당선
1978년 총통 선거 장징궈 98.34% 당선[18]
1984년 총통 선거 장징궈 95.11% 당선[19]
1990년 총통 선거 리덩후이 85.24% 당선[20]

6.1.2. 국민 직선제 시기


1996년 총통 선거 리덩후이-롄잔 54.0% '''당선'''[21]
2000년 총통 선거 롄잔-샤오완창 23.1% 낙선[22]
2004년 총통 선거 롄잔-쑹추위 49.89% 낙선
2008년 총통 선거 마잉주-샤오완창 58.45% '''당선'''
2012년 총통 선거 마잉주-우둔이 51.60% '''당선'''
2016년 총통 선거 → 주리룬-왕루쉬안 31.04% 낙선
2020년 총통선거 한궈위-장선정 38.6% 낙선

6.2. 입법위원-국민대회 선거


1969년 입법원 선거 15/15[23]
1972년 입법원 선거 41/51
1975년 입법원 선거 42/52
1980년 입법원 선거 79/97
1983년 입법원 선거 83/98
1986년 입법원 선거 59/73[24]
1989년 입법원 선거 72/101 60.1%
1991년 국민대회 선거 254/300 69.1%
1992년 입법위원 선거 102/161 53.02%[25]
1995년 입법위원 선거 85/164 46.1%
1996년 국민대회 선거 183/300 49.7%
1998년 입법위원 선거 123/225 46.43%
2001년 입법위원 선거 68/225 31.3%
2004년 입법위원 선거 79/225 34.9%
2005년 국민대회 선거 117/300 38.9%[26]
2008년 입법위원 선거 81/113 51.2%
2012년 입법위원 선거 64/113 44.5%
2016년 입법위원 선거 35/113 26.9%[27]
2020년 입법위원 선거 38/113 33.4%[28]

7.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


20세기 초중반만 해도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서로 전쟁까지 했을 정도로 매우 험악한 관계였고, 장제스 집권기에는 서로 물어뜯지 못해 안달난, 말 그대로 견원지간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대만 민주화 이후부턴 아예 대륙과 대만이 별개임을 주장하는 민주진보당이 등장하고 집권하기까지 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중국공산당은 대만의 국민당을 공식 정당으로 인정해주고 최대 정적이었던 장제스에 대해서도 '담대한 기질을 지닌 호걸'(...) 정도로 꽤 고평가해주고 있다.[29] 또 국민당도 2005년 롄잔 주석의 중국 방문을 즈음하여 친중국 노선을 타면서 현재의 국-공 관계는 1920년대 중반 제1차 국공합작 시절에 버금갈 만큼 가까워졌다. 이는 중국 국민당은 공산당과 비록 원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어쨌든 대륙과의 통일이 언젠가는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므로, 민진당에 비하면 최소한의 대화의 여지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0년 3월 열린 중국 국민당 전당대회에서 92공식에 대한 재검토를 주장한 장지천 입법위원이 주석에 당선되면서 공산당과 가까웠던 그간의 관계도 재정립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장지천이 하오룽빈을 누르고 주석에 선출되자 중국 공산당은 15년만에 축전을 보내지 않았다. 양안 통일을 이뤄낼 파트너로 대만민중당 커원저를 선택해서 그렇다는 분석도 있다.
2020년 9월 장지천 주석은 푸젠성 샤먼시에서 매년 개최되어온 해협포럼에 국민당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기로 결정하며 공산당과의 선을 한 번 더 그었다. 2020년 10월 6일 장지천 주석 주도 하에 민주진보당과 함께 대미 재수교 결의안 및 미국에 군사지원을 요청하는 초당적인 결의안을 입법원에서 통과시키자 중국 관영 매체인 글로벌타임즈는 장지천 주석과 국민당을 한 번 더 디스했다.#

8. 중국 본토의 중국 국민당


정식 명칭은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약칭 민혁)로 중국 공산당의 합법 구색정당(위성정당) 중 하나가 돼있다. 그러나 이쪽은 중국 국민당의 일원임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9. 기타


  • 중화민국이 정식 국명으로 활동하는 몇 안 되는 단체 중 하나이다.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에는 우파 정당이 없기 때문이다.
  • 창당 당시 초대 당대표 명칭은 총리였으나, 쑨원 사후로 이 명칭을 폐지하고 총재로 전환하였으나 다시 랴오중카이, 후한민 등을 거쳐 장제스 사후 다시 총재 명칭을 폐지하고 주석으로 전환하였다. 해당 인물들이 국민당에 끼친 영향을 기리는 것과 동시에 변화해가는 시대환경을 나름대로 반영한 결과라고 봐야 할 듯하다.
  • 처음엔 쑨원이나 장제스, 쑹메이링기독교인들이 핵심 인사로 활동한 정당이었고, 덕분인지 지금도 기독교인 지지세가 높은 편이다. 리덩후이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국민당에 들어왔다가 나중에 대만 독립 문제로 이적한 케이스.[30] 마잉주 전 총통도 가톨릭 신자이다. 물론 지금은 대만에서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낮다보니(5% 미만), 불교, 도교유교, 전통신앙 등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무신론자들 중에서도 국민당 지지자는 많은 편이다. 사족으로 홍콩의 범람연맹 지지자들도 기독교인이 많은 편인데, 사실 홍콩의 독립운동 혹은 민주, 자치 확대운동은 대개 개신교 및 가톨릭 신자가 주동해왔다. 조슈아 웡 등의 우산 혁명 지도부는 전부 기독교인들이고 여기에 가톨릭 주교인 조셉 찬 주교도 은근히 동의를 표명하기도 했다. 사족으로 홍콩 기독교는 중국 대륙에 많은 신자를 보유한 지하교회와 파룬궁과도 연합하고 서로 도와준다. 당연히 홍콩 기독교인 중에 내륙여행 허가가 안나는 사람들도 있는데 선교사로 의심받거나 중국 민주화 운동 내지는 파룬궁 지원 의혹이 있을 경우다. 물론 맨 처음 중국이 개방했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간 것도 홍콩 기독교인들이었다.
  • 한국의 보수 정당과 성향 등에서 유사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도 꽤 존재하는데, 일단 국민의힘의 경우 성소수자를 포함한 사회문화적 이슈에서 좀 더 전통적인 경향이 주를 이룬다면[31] 중국 국민당은 국민의힘보다 사회문화적으로 좀 더 중도적인 성향이다.[32] 실제로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미래통합당은 사회보수주의 카테고리로#, 중국 국민당은 자유보수주의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두 당의 대중국 외교 스탠스도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33]다만 두 당 모두 국민보수주의로 분류되긴 한다. 또 한국의 민주당계 정당과 대만의 민주진보당[34] 두이 교류가 거의 없듯이, 이쪽도 한국과의 교류는 별로 없어 보인다.
  • 정치인의 막말로 선거를 말아먹은 사례가 있다는 점에서도 한국의 보수 정당과 유사점이 있다. 일례로, 중국 국민당 당적의 전국 공무원 협회 이사장 리라이시(李來希)가 대만 여아 참수 사건 피해자의 두개골이 가오슝까지 굴러가라는 망언을 퍼부었다. 왜냐하면 단지 여아 참수 사건 피해자 어머니가 시대역량에 입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비상식적 막말에 분노한 가오슝 시민들은 안 그래도 친중 이미지가 있는 중국 국민당을 더 싫어하게 되었다. 한궈위는 파면되고, 리라이시는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2년의 당권 정지를 받았다.# 한궈위 역시 가오슝 시장 재임 시절 구설이 잦았다.
  • 리즈 시절에는 티베트 혁명당#과 베트남 국민당#의 형성에 모티브를 주었으나, 티베트중국 인민해방군이 진주하면서 티베트 혁명당은 해체되었고, 베트남 국민당은 베트남 공산화와 함께 망명정당 신세이다. 한국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일제시대 당시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최대 물주였다.[35] 단적인 예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준 인물이 쑨원장제스였고, 김구, 김원봉, 김규식, 이시영, 안창호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다만 쑨원때는 국민당이 중국 전역을 제대로 통치를 하지 못하고 군벌들이 난립하던 때라서 체계적인 지원은 힘들었고, 장제스가 중국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어느정도 확보한 뒤에나 체계적인 지원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장제스가 자선사업가는 아니라 임시정부를 무작정 밀어준 것은 아니었고 이런저런 생색과 함께 이런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무기삼아 해방 이후의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막상 그 영향력을 행사할때가 왔을 때에는 국공내전이 터져 장제스가 대륙에서 대만으로 쫓겨나버려 말 그대로 도움만 준 꼴이 되었다.

10. 관련 문서



[1] 반공주의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제는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옹호하는 댓글 부대를 꾸리며 국민당 후보에 자금을 대주고 있다는 논란도 있는 등 '''장제스 독재시대에''' '''국민당에게 빨갱이로 몰려 탄압당했던 민주진보당에게''' 중국 공산당 첩자라는 공격을 당하고 있으며, 이에 국민당측 인사가 민진당에게 빨갱이 몰이 하지 말라고 대응하는 지경까지 왔다.(...) (왕리창, 반침투법 문서 참조)[2] 당 내 주류는 양안통일주의를 지향한다. 그러나 현 국민당 주석인 장지천 등 소장파 중에는 화독 리버럴도 존재한다. 다만 양안통일주의 세력과 달리 아직 비주류에 가깝다.[3] 출처 : #, #[4] 출처 : #[5] 한국어에서와는 달리 현대 중국어에서는 남색이 파란색을 의미한다.[6] 물론 민주진보당도 당장 독립하겠다는 얘긴 안 한다. 또 독립파도 지지층의 한 부분일 뿐이라 한편에선 대륙중국과 통일해야 된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 등 민진당 내에서도 복잡한 문제긴 하다. 다만 현재 기류는 여기나 저기나 현상 유지. 결국 중국이 민주화된 이후에나 뭔가 진지하게 고민할 거리가 생기기에 주제 자체가 묻혀 있다.[7] 대만일치시기를 보낸 리덩후이는 이때 창씨개명까지 했다. 물론 당시엔 좌파 성향이 강했던 학생이라는 증언도 있고 공산당에 잠시 가담했던 적도 있던 만큼 창씨개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리덩후이가 범록연맹으로 진영을 갈아탄 이후 보이는 친일 행적은 범록연맹 내에서도 말이 나올 정도로 좀 심한 편이긴 하다. 다만 대만일치시기 대만인들은 일본의 노예였다고 비판도 하는 등 좀 오락가락하는 편.[8] 단, 정통 중국이 어디냐 하는 문제에서는 '중화민국 = 정통 중국'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주장하는 일국양제로 대만을 복속시켜 통일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 실제 마잉주 총통이 이끄는 국민당 정권은 이와 관련해 2014년 홍콩 시위에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9] 17개 선거구 가운데 국민:민진이 14:3이었던 것이 12:4가 되었다. (한 석은 무소속) 민진당의 득표율이 45.32%로 국민당(47.88%)이 우세지만 2005년의 선거(민진당 38.2%)에 비하면 대단한 약진이라서 패배로 받아들여진다고. 재밌는 것이 지지율 하락 원인이 부패와 경기 침체, 그리고 '''미국산 소고기 수입제한 완화'''였다고 한다.[10] 국회의장왕진핑이다.[11] 창간은 1928년이었으나 국부천대로 발행이 중단되었다.[12] 당시는 아직 훈정시기라서 중국 국민당이 중화민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헌법 제정 전이므로 국민당이 '''당 자격으로''' 대만총독부의 자산을 압류한 것.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 국민당은 사실 거의 비슷하기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별개의 채제다. 예를 들어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특무조직은 중국 국민당이 직접 다스리는 기관이라서 중화민국 정부가 개입할 수가 없었다.[13] 1949년 중순 난징이 함락당한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무력화되었고, 타이베이에 들어온 중앙정부가 기능하기 전까지 역시나 대만총독부 반환 직후처럼 중국 국민당이 중앙정부의 기능을 임시로 대행했다.[14] 타이페이 2선거구를 포함한 5석이 걸린 재보선에서 민진당에게 2대3으로 패배했다.[15] 사실 국민당의 친중공적 인상은 차치하고서라도, 장제스 자체가 장완안이 말하는 민주자유 헌정체제를 대만에서 억압한 주범인데 증손자라는 사람이 저런 소릴하니 안티 입장에선 비웃음이 나올 법도 하다.[16] 심지어 2020년 6월엔 현직이던 가오슝 시장 자리마저 아예 주민소환으로 파면당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 [17] 모 여론조사에서 고교생 중 자신이 오로지 대만인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79%에 달하고, 중국인과 대만인 양자 모두에 해당한다는 비율은 20%였다. 자신이 완전히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고교생은 1%도 되지 않았다.[18] 단일 후보로 출마했다. 부총통 셰둥민은 본성인이다.[19] 단일 후보로 출마했다. 부총통 리덩후이는 본성인이다.[20] 단일 후보로 출마했다. 리덩후이에 반발하는 외성인 당원들이 복수 후보로 출마를 고려했다.[21] 이 시기부터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전환되었다.[22] 당시 무소속으로 나왔던 쑹추위에게 팀킬당했다. 쑹추위에게 간 표를 합하면 59.93%.[23] 이 때부터 보궐선거였다. 중국 국민당/중국 청년당/중국 민주 사회당/무소속만 후보로 출마할 수가 있었다.[24] 이 때부터 민주진보당을 포함한 야당들의 참정을 허용했다.[25] 이 때부터 보궐선거에서 총선으로 변경했다. 1991년까지는 1940년대에 중국대륙에서 뽑은 국회의원들 가운데 타이완에 대피하여 종신직으로 재임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모자라게 된 인원을 충원하는 식이었다.[26] 이 때를 마지막으로 국민대회의 기능을 동결했다.[27] 국민당 입장에선 최악의 총선 중 하나라 할만한 총선으로, 민진당과 지지율 차이만 18%나 났다.[28] 지역구에서는 참패했지만 전국 득표율에서는 민진당과 0.6%차 초박빙을 이뤘다. 물론 진영 대결로 가면 격차가 더 벌어지긴 한다만.[29] 이는 그 동안 중국 공산당의 선전이나 많은 이들의 인식과는 달리 '''진짜로'''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이 중일전쟁에 성실하게 임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착각하는 것이 '중일전쟁 당시 공산군은 열심히 싸우고 있었는데 국민당은 공산당의 뒤치기만 일삼았다.' 라는 것인데 실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위치를 바꿔야 맞는 말이다.[30] 물론 기존의 대만 독립론하고는 다른 '중화민국' 이라는 기존의 체제로 중화인민공화국과 더 이상 통일을 지향하지 말고 주권국가로 인정 받자는 화독론을 주장하였다.[31] 다만 한국 사회 자체가 젠더나 다양성 등의 부분에서 대체로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더불어민주당 역시 이러한 부분에선 국민의힘과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32] 동성결혼과 관련된 부분만 보아도 대만의 동성결혼 법안에 해당하는 748 법안에 대해 적지않은 국민당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또한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국민당 관련 정치인들도 동성 커플의 법적 보호와 혜택 자체(예:시민결합제도 등)에는 대다수가 동의를 하고 있다.[33] 한국의 보수정당이 주로 반공을 내세우고 있다고 하나 이건 정확하게는 반북에 가깝지, 반중은 반북에 비해서는 비중이 다소 낮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대통령이 직접 열병식에 참석하는 등 친중 행보 역시 보였다(다만,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 역시 열병식 참석을 공식적으로 지지하였으므로 대만과 달리 친중이 보수만의 두드러지는 특성이라고 보기만은 어렵다). 사드 배치 이후 반중정서가 많이 퍼진 이후에도 당 차원에서 홍콩 민주화 운동 지지나 시진핑 비판을 두드러지게 한 적은 없다. 사실 한국의 정당 자체가 외국의 정치 상황에 논평하는 것을 좌우 다 자제하는 편이긴 하다만.[34] 한국의 민주당계 정당과는 달리 친미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사회적 이슈에서 좀 더 진보적인 관점을 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35] 중국 공산당도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해준 물주였기는 했지만, 2차 국공내전 이전까지는 공산당이 야당이었기 때문에 그 입지가 제한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