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다자오
1. 개요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가, 사상가, 교육가이며 천두슈와 함께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 사람이다.''' 마오쩌둥의 사상적 스승으로 평가된다.
이대소, 이대교, 이대쇠, 이대조 등 읽는 방식이 4가지나 된다... 이대조가 그나마 대중적인 표기로 보이는데 두산백과에서는 이대소로 표기하고 있고 위키백과는 아예 4가지 버전을 모조리 실었다.[2]
2. 생애
2.1. 유년시절
화북성 탕산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6세부터 지방의 명망있는 유학자들로부터 유교교육을 받으며 민본주의를 터득했으며 16세에 영평부 중학에 들어가 신식교육을 받으면서도 전통학문에 대한 공부도 병행했다. 18세에 톈진의 북양정법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서양의 정치사상을 배웠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기대를 걸었으나 위안스카이의 독재가 시작되면서 실망했다. 1912년 북양법정정문학교 내에 북양법정학회가 성립되자 학회 편집부장에 추대되어 월간학회지를 편찬했고 졸업하는 1913년까지 여러 정치평론을 게재했다. 이때 리다자오는 중국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또한 위안스카이의 독재와 지방군벌들의 전횡에 대해서도 통렬히 비판했다."농민은 땅을 잃고 노동자는 직업을 잃고 상인은 원천을 잃었으며 부모와 형제와 처자가 뿔뿔이 흩어져 시름겹기가 그지없다. 병화에다 수재와 화재같은 천재가 겹치고 그 위에 인화가 닥치니 안락한 거처가 없어 전전하다 굶어죽어서 시체와 해골이 구룽에 나뒹굴고 들판에 버려져 있다."
"민정이라는 것은 소수의 포악하고 교활한 자들의 전제정이지, 우리 국민 자주의 정치가 아니다. 민권이라는 것은 소수의 포악하고 교활한 자들이 훔쳐간 권리이지 우리 국민 각자에게 주어진 권리가 아니다. 행복이란 것은 소수의 포악하고 교활한 자들이 약탈한 행복이지, 우리 국민이 편안히 누리는 행복이 아니다."
리다자오는 쑨원과 쑹자오런의 중국 국민당도 만행을 저지르는 성급하고 망령된 폭도라고 깠고 민주당을 비롯한 온건파도 닭과 오리처럼 이익을 위해 다투는 자들로 폄하했다. 리다자오는 혁명 이후 중국의 혼란상을 기본적으로 중국의 민권이 쇠약하고 민력이 부족한 탓으로 여기고 민중 개개인의 덕이 부족하므로 사회의 군덕 또한 부조닥하다고 여겼다. 1913년 쑹자오런 암살 사건도 이런 연유로 여겼다."혁명 이전 우리 국민의 근심은 하나의 전제군주에 있었다. 혁명 이후 우리 국민의 근심은 수십의 전제도독에 있다. (...) 오늘날 한 전제도독의 세도는 이전 군부의 배에 달하고, 그 힘은 한 성에 입중되어 민이 받는 고통은 더욱 무겁다. 따라서 민권은 모두 이들 무리가 갈취하여 방자하게 구니, 우리 국민은 어쩌란 말인가?"
이 때문에 리다자오는 권력을 중앙으로 집권시켜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민교육을 통해 국민들의 민권 신장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2.2. 일본유학
1914년 1월 진보당 지도자 양화룡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3]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그해 9월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본과에 입학하여 2년간 유학했다. 와세다대학 청국 유학생 장정은 대학부로 진학하기 위해 영어와 일본어 실력을 요구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했다. 리다자오는 일본어는 보충학습이 필요없을 정도로 능통한 경지에 이르렀지만 영어실력은 부족한지라 YMCA 중국인 유학생 기숙사에서 살며 미국인 아더 로빈슨에게 영어를 배웠고 한학기 동안 준비한 끝에 1914년 9월 정식으로 와세다대학에 입학했다.
와세다대학은 도쿄제국대학과 달리 학풍이 자유스럽고 교단에서 민주주의, 자유주의 강습에 열심인지라 리다자오는 일본에서 불어오기 시작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을 받아 국가학원리, 제국헌법, 경제학원리, 근대정치사, 민법, 정치경제에 관한 고전연구, 영문학 등을 배웠으며 부전공으로 철학, 명치사, 제2외국어 등을 배웠다. 이 기간 동안 리다자오는 기존의 동양적 인본주의에서 서양적 민주주의로 사상의 기반을 교체하게 되었다.
하지만 1915년 하반기에 중화혁명당과 접촉하는 등 정치활동에 매진하면서 그의 학습은 1년 정도에 그쳤고 1916년 2월 2일 정식으로 자퇴하였다. 리다자오는 신주학회를 조직하고 위안스카이의 전제적 정권을 비판했다.
이 시기 리다자오는 중국 국민은 완전히 희망을 잃었고 권리를 누릴 능력이 없다고 보던 과거보다 민중,군중에 집중하여 군중의지만이 역사적 인물의 세력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914년 11월 리다자오는 위안스카이가 제정을 복고하려 하면서 중국인들에게 공화제나 대의정부가 부적당하다고 주장하자 중국인들에게 공화국을 운영할만한 정치적 의식과 능력이 있다고 반박했다."마음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은 없고 사회가 망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고통은 없다. 한 사회의 인화가 사라지면 그 사회는 반드시 망하게 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단지 망국의 화가 지극함만을 두려워하고 그 사회가 이미 망했음을 알지 못한다. 단지 망국의 화가 강렬함만을 알고 망군의 화가 망국의 화보다 더욱 강렬함을 알지 못한다."
1915년 1월 일본의 21개조 요구 이후, 적극적인 반대 운동에 나서며 <국민의 신담>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했고 1915년 6월 위안스카이 정부와 일본 제국주의를 동시에 비판했다.
1916년 5월 리다자오는 자신의 민중 중심 정치관을 집대성하여 집필한 후 중국으로 귀국했다."정부가 만일 망국의 정부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하루빨리 그 복고의 죄와 백성을 무시한 죄를 깨닫고 속히 천하와 더불어 다시 시작하여 근본대계를 정하고 진정한 민의관계를 회복하며 국민교육을 보급하고 징병제도를 실행하여 백성들을 가르치고 군사를 훈련시킴으로써 이와 같은 원수와 치욕을 갚고자 도모해야 할 것이다."
2.3. 공산주의 입문
리다자오가 중국에 돌아온 직후인 1917년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 교수 천두슈의 초빙으로 베이징대학의 도서관 주임을 맡으면서 그의 베이징대학 교직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리다자오는 이 시기를 암흑 속의 광명으로 표현한다. 리다자오는 부임 직후부터 <신청년> 등을 창간하여 개혁운동에 힘썼다.
그러던 중 1917년 2월, 러시아 제국에서 혁명이 발생하여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공화국이 수립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리다자오는 공화제는 파괴될 수 없고, 제정은 부흥할 수 없음을 천명하며 전제주의가 부활할 수 없고 민권을 억누를 수 없음을 중국의 낡은 관료들에게 확인시켜주는 사건이라고 크게 환영했다. 그리고 이어서 터진 10월 혁명의 경우,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리다자오가 이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는 데는 8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리다자오는 1918년 7월 10월 혁명에 결국 지지를 표하긴 했으나 계급투쟁이 아니라 자유와 인도주의적 세계질서의 재편성과 청년중국의 재건 가능성을 주목했다. 하지만 10월 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된 것은 그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10월 혁명 이후 리다자오는 러시아 혁명사와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인민주의의 영향을 받아 중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게 되었다. 1919년 2월 리다자오는 인민과 지식인의 결합을 외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리고 현대의 청년들에게도 음지의 힘든 노동을 추구할 것을 촉구했다."러시아의 상황이 현재 어느 곳이라도 분란하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들의 이번 혁명은 결국 철저한 개혁인 셈이며 신세기를 위한 신기원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새로운 기회의 조성이 하루아침에 이룩된 공적이 아니며, 또한 한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님을 알야 한다. 그들 수많은 문인지사가 자기 가정의 행복을 송두리째 내팽개치고 고난의 역정을 마다하지 않은 채, 농촌 속으로 들어가 인도주의와 사회주의의 이치를 선전하였다. (...) 오늘날 우리 중국의 상황이 비록 당시 러시아와 크게 비슷하지는 않지만, 우리 청년들이 농촌으로 가서 당시 러시아 청년이 농촌에서 운동하던 정신으로 농촌을 개발해야 함은 결코 미룰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에 앞서 농민 중심의 혁명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마오쩌둥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산림과 촌락에 몸을 맡기고 푸르른 들판에서 호미와 쟁기를 들고서 고되게 일하는 농민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담배피며 휴식하는 시간에는 밭 사이와 울타리 아래에서 그들을 개발하고 위로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근공정신이라는 말은 결코 노동하지 않는 사람과는 어룰릴 수 없는 말임을 알아야 한다. 일하지 않고서 살아가는 지식계급은 자본가들과 똑같이 배척되어야 한다."
1920년 7월 리다자오는 교수평의회에서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아 베이징대학 교수가 되어 역사, 정치, 경제를 강의했다."우리 중국은 농업국이고 대다수의 노동계급은 농민들이다. 그들이 해방되지 않은 것은 우리 국민 전체가 해방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고통은 우리 국민 전체의 고통이다. 그들의 우매함은 우리 국민 전체의 우매함이다. 그들 생활의 이해는 우리 정치 전체의 이해이다."
2.4. 5.4 운동
리다자오는 채원배, 후스 등과 함께 베이징대학 개편운동을 진행함으로 중국인을 물심양면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개혁운동을 펼쳤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방이 중국에 강요된 일본의 21개 조 요구를 비롯한 부당한 현실을 시정해줄 것으로 기대하며 연합국의 승리를 전제주의, 군국주의, 압제자의 패배, 민주주의, 노동자, 평민의 승리로 칭송했으나 베르사유 강화회의에서 중국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되었고 오히려 산동반도의 독일 권리를 일본이 차지한다는 내용이 5월 1일 보도되었다.
1919년 5월 4일, 이에 반발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5.4 운동이 발생하자 리다자오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다. 1919년 리다자오는 후스와의 '문제와 주의' 논쟁 끝에 경제구조의 근본적 변화 없이 중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면서 물질적 개조를 통한 근본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렇듯 완전한 유물론자가 된 리다자오는 마르크스주의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였고 기존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한 유교질서와 학술은 붕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1920년 3월 리다자오는 베이징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를 창설하였다."도덕은 때와 장소에 따라 항상 변동하니 도덕에도 신구의 문제가 발생한다. 종전의 생활과 사회에 적응하여 발생한 도덕은 그러한 생활과 사회에 변동이 생기면 자연히 그 운명과 가치를 잃고 구도덕이 된다. 이렇게 새로이 발생한 신생활, 신사회는 필연적으로 그에 적응하는 신도덕의 출현을 필요로 한다. (...) 신도덕은 생활의 상태와 사회의 요구에 따라 발생한 것이고, 물질의 변동에 따라 변동한다."
2.5. 중국 공산당 창당
1919년 3월 소련은 국제공산주의대표대회, 즉 코민테른을 창설하여 공산주의 확산을 기도하였다. 1920년 3월 코민테른 극동국은 중국에서의 공산당 창당을 위해 그리고리 보이틴스키를 중국으로 파견했다. 보이틴스키는 8월 베이징에서 리다자오를 만나 공산당 창당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고 그리고 리다자오의 소개로 상하이에서 천두슈를 만나 중국 공산당 창당에 대해 논의했다. 베이징은 군벌들의 지배 때문에 활동에 제약이 있었고 이에 따라 1920년 5월 상하이 공산주의소조가 결성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공산주의 소조가 결성되었다. 이한준이 우한에서 둥비우, 진담추를 끌어들여 우한 공산주의 소조가 결성되었고 10월에는 리다자오, 등중하, 장신부, 장궈타오가 베이징 공산주의소조를 결성했다. 리다자오와 천두슈는 '남진북이'로 불리며 공산당 창당의 배경을 위해 가장 활약한 것으로 평가된다.
1920년 7월 보이틴스키는 천두슈에게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를 공산당으로 개조할 것을 건의했지만 천두슈는 공산당은 중국인 스스로 창당해야 한다고 응하지 않았다. 허나 지난 6월 3일 중국에 들어와 있던 코민테른 중국 대표 마링과 보이틴스키의 후임 니콜스키는 이한준, 이달 등을 설득하여 중국공산당을 창당해야 한다고 독려했고 이에 따라 1920년 7월 23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망지로 106호에 소재한 이한준의 집에서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됨으로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었다. 현장에는 마오쩌둥, 이달, 이한준, 유인정, 장궈타오, 천궁보, 저우포하이, 천두슈가 파견한 포혜증 등 13명이 전국 각지의 50여 공산당원을 대표하였다. 여기서 중국공산당 강령이 통과되었고 천두슈, 장궈타오, 이달이 중앙국을 조직하여 천두슈가 서기장, 장궈타오가 조직 책임자, 이달이 선전 책임자가 되었다.
코민테른은 우페이푸와의 합작을 추진하여 공산당과 우페이푸의 합작을 종용했고 우페이푸도 정적인 교통계를 타도하기 위해 공산당원들을 중용하여 교통부에 침투한 공산당원들의 주도로 선원과 경한철도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진행되었으나 노동자 조직의 급성장을 두려워한 우페이푸가 입장을 선회하여 2.7 사건을 일으켜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이후 코민테른의 지시로 공산당은 중국 국민당과의 제휴가 필요하다고 판단, 1921년 12월 쑨원에게 공산당과의 제휴를 타진했으나 쑨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1922년 2월 리다자오는 국민당원 장계의 소개로 국민당에 가입했다. 리다자오는 가입하면서 쑨원에게 자신은 제3인터내셔널 당원으로 당을 떠날 수가 없는데도 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이 가능하냐고 묻자 쑨원은 전혀 문제가 없다면서 적극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이후 리다자오는 베이징에서 국민당 청년들을 모아 경진청년 국민구락부를 창설, 국민당 내부에 공산주의를 선전했다.
1922년 8월 리다자오는 후한민 등 53명의 국민당원과 만나 국민당 개편문제에 대해 토의했고 1923년 소련 대표 요페와 쑨원의 회담이 시작, 1923년 1월 26일 쑨원-요페 공동선언의 발표로 국공합작이 결의되었다. 1923년 후한민, 린썬, 왕징웨이, 셰츠와 함께 주석단에 합류하여 국공합작을 논했다. 1924년의 국민당 1기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한 리다자오는 광저우 특별구 대표 방서린이 국민당원은 다른 당에 가입할 수 없도록 규정하자고 주장하자 자신이 코민테른의 공산당원임을 밝히고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왕징웨이는 리다자오의 연설을 적극 지지했다."우리가 국민당에 가입한 것은 국민당에 공헌하고 국민혁명의 사업에 공헌하기 위함이지, 결코 사사로운 이익을 탐해서가 아니며, 국민당의 이름을 빌어 공산운동을 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 일부 동지들은 우리가 국민당에 가입함으로써 국민당이 공산당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완전한 오해이다. 우리가 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은 우리가 국민당의 정강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국민당에 공산당의 강령을 강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즉, 국민당이 새로 정한 정강에 공산주의는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우리들 일부분이 국민당에 가입했다고 해서 국민당이 어찌 공산당이 되겠는가. (...) 우리는 이미 국민당에 참여했고, 우리가 국민당에 머물러있는 이상, 하루인들 어찌 국민당의 정강을 저버리며 장정을 지키지 않는 일이 있겠는가."
이은 마오쩌둥의 강경 행동에 힘입어 국민당 1전대회에서 연소, 용공, 농공부조 3대 정책이 채택되면서 1차 국공합작이 발족되었고 리다자오도 국민혁명에 투신하여 베이징에서 활동을 전개했다."우리 국민당은 당장 속에 규율의 명문규정이 있으므로 우리는 다만 그 규율에 의해서 당원의 행동을 저울대에 올려놓고 보면 되지 않겠는가? 우리 당의 규율에 맞으면 당원으로서 인정할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제재하면 그만일테니까, 한 당에 소속되어 있건 두 당에 소속되어 있건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다."
2.6. 사망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진행되던 1927년 4월, 국민당 우파의 거두인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거행하여 공산당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비슷한 시기 북방을 지배하던 장쭤린도 1927년 4월 6일, 베이징 경찰총감 진흥아, 헌병사령관 왕기의 인솔 하에 3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베이징의 소련 대사관과 병영을 습격하여 16명의 소련 외교관과 대사관에 은거하던 리다자오를 비롯한 중국 공산당원 35명을 체포하였다. 4월 19일 소련 대사 치얼니크가 항의의 의미로 귀국하였다.'''"공산주의는 세계에서, 중국에서 기필코 영광스런 승리를 쟁취해 나가리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리다자오의 최후 진술.
리다자오가 체포되었다는 말에 지식인 사회는 구명을 요구했고 노동자 조직은 리다자오 구출을 도모하기도 했으나 리다자오는 혁명역량을 소모시키지 말라고 거부했다고 한다. 장쭤린은 휘하의 양위팅을 보내 리다자오에게 전향할 것을 요구했으나 리다자오는 거부했다. 장쭝창 등은 공산주의자를 빨리 죽여 없애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장쭤린에게 주장했고[4] 장쭤린은 사회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린 죄목으로 리다자오를 '중국 공산당 북방수령'으로 칭하고 총살형에 처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허펑린이 주재한 군사법정은 리다자오에 대해 총살형을 언도했다. 리다자오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4월 28일 리다자오는 등문휘, 장읍란 등 2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십자가에 묶인채 '''공산주의 만세'''를 세번 외치고 총살당했다. 그를 스승으로 여기던 마오쩌둥은 그의 죽음을 듣고 크게 상심했다고 한다. 그가 총살당한지 불과 수개월 후 우한 국민정부도 분공을 결정하면서 국공결렬이 일어났다. 장례식은 그가 사망한지 4년 후에 거행되었다. 1932년, 리다자오의 유가족들이 극심한 빈곤으로 리다자오가 남긴 장서를 팔려고 하자 이 소식을 들은 후스와 루쉰의 동생 주작인이 생활비를 대주었다."나는 평소 역사학을 연구해서 일생동안 수집해온 동서양의 서적이 아주 많다. 만일 이미 몰수했다면 아직은 보존시켜 문화에 이롭게 하기를 바란다."[5]
리다자오의 아내는 1933년 죽었으나 자식들은 중공이 대륙을 완전히 점령 한 뒤 중화인민공화국을 성립한 이 후 모두 출세했고, 문화 혁명 때도 이렇다 할 박해는 당하지 않았다.
이후 리다자오는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공산당 창건인, 사회주의 첫 순교자로 추앙되었다.
3. 평가
4. 참고문헌
- 청말민초 중국지식인의 일본유학과 동아시아 인식 -대계도와 이대쇠의 일본유학 경험을 중심이로, 김형열, 일본근현대사연구 제43집.
- 리다자오의 마르크스주의 수용의 특징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한미경, 통일전략 14(3).
- 중국 맑스주의 수용의 초기적 특징 -천뚜슈와 리따짜오를 중심으로, 조경란, 역사비평.
- 이대조의 사적 유물론 보급과 청말의 학술전통, 도종만, 역사와 담론 37.
- 이대조의 형이상학과 정치의식, 이규성, 철학연구 (25).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리다자오의 맑스주의 해석, 조경란, 중국지식네트워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