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두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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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초대 총서기
본명
천첸셩(陳乾生)
정체
陳獨秀
간체
陈独秀
한국식 독음
진독수
영문
Chen Duxiu

실암(實庵)

중부(仲甫)
출생
1879년 10월 8일 청나라 안휘성 화녕현
사망
1942년 5월 27일 중화민국 충칭시 장진현
국적
청나라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민국 [image]

학력
와세다대학
직업
정치가
종교
무종교(무신론)
총서기
재임기간

1대 1921년 8월 1일 ~ 1927년 8월 7일
1. 개요
2. 생애
3. 관련문서
3.1. 인물
3.2. 사건


1. 개요


근대 중국의 언론인, 철학가, 혁명가. 중국 공산당의 창립자이자 초대 지도자였으나, 1차 국공합작 실패의 책임을 지고 우경 기회주의자로 비판받아 실각되고 이후 제명되었으며, 사상적으로도 전향하였다.

2. 생애


1879년 안후이성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일본,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왔다. 이후 1915년 상하이에서 '신청년'을 발간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마르크스주의에 크게 경도되었다. 이후 리다쟈오와 의논하여 중국에서 공산주의 정당의 창당을 논의해 소련의 지원으로 1921년 7월 중국 공산당을 창당하고 총서기로 취임하였다.
1920~1922년에는 천중밍과 협력하여 광동의 교육개혁 운동을 지도했으며, 광동에서 임조함, 담평산, 천궁보와 함께 공산주의 소조를 결성했다. 쑨원2차 호법운동에 대해서는 이를 시기상조라 여겨 반대했다. 1921년 쑨원과 코민테른 대표 마링의 만남을 주선했고, 천중밍이 1922년 영풍함 사건을 일으키자, 천중밍과 단절하고 쑨원 지지 선언을 발표했다. 1923년 3차 광동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선전주임을 맡아 쑨원을 원조했다.
1922년 홍콩 선원 파업을 지원했으며, 1922년 코민테른이 국민당과의 당내 합작을 지시하자 반대를 표명했다. 그러나 결국 국민당의 개조, 쑨원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폐하는 조건으로 합작에 동의하여 중국 국민당 당적을 획득하였다.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일어난 이후 국민혁명에 종사했다. 이후 1927년 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로 1차 국공합작이 사실상 붕괴되고 마일사변 등 반공폭동이 계속 일어나는 와중에도 국민당에 대한 양보 정책을 취하며 국공합작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27년 7월 우한 정부마저 분공을 결정, 국공결렬이 확정되자, 결국 코민테른으로부터 "혁명에 기회주의적인 노선으로 일관했다"는 이유로 비판당했다. 이후 7월 12일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지시에 따라 공산당 지도부가 개조되자, 7월 14일 잠적하였고 7월 15일 총서기 사퇴 의사를 밝혔다. 난창 폭동 직후에 일어난 8.7 긴급회의에서는 기존 노선의 오류에 대한 책임을 추궁 당했고, 취임한지 6년만에 총서기직을 박탈 당했다. 이후 1929년 11월 중국 공산당의 세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책임을 지고 당적까지 제명 당했다.
이후에는 트로츠키주의에 관심을 가져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합작했고 중국좌익반대파의 총서기로 취임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1932년 국민당에게 체포됨으로써 조직이 붕괴되었다. 1937년 출옥한 이후에는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고 민주주의자로 다시 전향하였다. 그러나 장개석과 국민당 지지는 거부했으며 무당파적 입장을 취했다. 만년에는 충칭 인근에서 저술에 힘쓰다가 1942년 병사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충칭에 공산당 대표로 머무르던 저우언라이가 중병에 걸린 입원한 천두슈를 문병오기도 했다. 저우언라이는 치료비에 쓰라고 거액을 건넸지만 천두슈는 거절했다고 한다.
공산당에서 제명되고 공산주의 사상도 버렸지만[1] 현재 중국에서는 그래도 당 시조로서 어느 정도는 평가받고 있다. 고향에 동상과 기념관까지 세워졌다. 다만 그와 별개로 중공 공식 역사상에서는 여전히 제명된 당적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2001년 편찬된 역사서에 '우경기회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다만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짤막하게 서술된 것이 현재까지 중국 공산당의 유일한 재평가이다.
본처와는 4남1녀의 자녀를 두었다. 맏아들 천옌녠(1898-1927)과 둘째 아들 첸자오녠(1902-1928)은 공산당원으로서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국민당에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현재 공산당에서는 열사로 기념하고 있다. [2] 셋째아들 천광메이(1907-1999)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일반인으로 살아갔으며, 넷째아들 첸쑹녠 (1910-1990) 은 안후이성의 관리를 지냈다. 애인이 낳은 자식은 둘이 있는데 모두 중국을 떠나 망명, 미국 홍콩에 살았다. 이렇게 자녀 둘이 공산당을 위해 활동하다 처형되었기 때문에, 중공정권에서 본인의 평가가 그다지 박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

3. 관련문서



3.1. 인물



3.2. 사건



[1] 전향이지만 국민당으로의 전향은 아니다. 그는 중경 시절 지인 및 친구들과의 서신 교환에서 공산당을 매섭게 비판하면서도 장개석과 국민당 또한 마찬가지로 강하게 비판했다.[2] 이 둘을 체포 처형한 국민당군 지휘관은 양후(楊虎:1889-1966)인데, 이사람은 대단한 변신을 자랑한다. 처음에 안휘군벌로서 위안스카이의 부하였다가, 위안스카이가 칭제하자 그를 배신하고 반원운동을 벌여 북양정권의 한자리를 했고, 장제스의 북벌때 다시 북양군벌을 배신하여 국민당으로 전향했고, 국공내전 말기에는 전황이 기울어지자 공산당에 투항했다가, 본인이 요구한 관직이 안 주어지자 불만을 품고 다시 대만의 장제스와 내통했다가 1958년 체포되어 사형 집행유예 2년을 받는다. 저우언라이가 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해 주었고, 복역중 베이징 병원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