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페이푸
1. 소개
중화민국의 군벌. 장쭤린과 중국 천하의 지배자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루었으며 한때 장쭤린을 꺾고 1인자의 자리에 오를 뻔 했으나 라이벌인 장쭤린과 사이좋게 남방에서 올라온 장제스의 북벌에 밀려 초라하게 몰락했다. 별명은 '유장(儒將, 유학자 장군이라는 뜻. 과거급제한 수재 출신이기 때문이다)'이었다.
2. 생애
2.1. 실패한 청운의 꿈
1874년 산동성 봉래에서 자작농 겸 잡화상을 운영하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군사교육 외엔 변변한 교육을 받지 못한 다른 군벌들과 달리, 우페이푸는 유교를 비롯한 전통적인 교육이긴 해도 6세에서 14세까지 상당한 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중 가세가 기울자 공부를 그만두고 음식점을 경영하는 한편 서찰 대필을 하며 생계비를 벌었다.
그러다가 등주 수사부대 학병영의 병사로부터 월 2냥 2전의 용돈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겨 해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신체가 왜소하다는 이유로 입대가 거부되었다. 이에 1896년, 과거에 응시하여 37등으로 합격해 22세의 나이로 생원이 되었다. 이후 사숙을 열어 생계를 유지했으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원 자격을 박탈당하고 다시 점원 일을 하게 되었다. 이런 경력이 있어 군벌 중에서 머리는 제일 좋은 인물 중 하나라는 평가가 있었다.
2.2. 군문에 들다
그러다가 1898년에 톈진에서 회군에 입대하였고 개봉무비학당 보병과 2기에 입학하였으나 의화단 사건으로 개봉무비학당이 정지되자 무위우군 포대 대관으로 복무하였다. 하지만 1901년 2월, 군축으로 해고되었다. 그러던 중 1902년 9월, 직예총독 위안스카이의 눈에 띠어 보정무비학당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도 체격이 문제가 되어 측량학과로 옮겨졌으나 1903년, 측량학당이 북양무비속성학당에 합병되어 북양무비속성학당에 다니게 되었다. 이후 1904년 1월, 우등으로 졸업했다. 배운 사람이어서 그랬는지 그는 젊어서 두각을 드러냈고 상관들의 눈에 들어 빠른 승진을 거쳤다. 1904년에 러일전쟁 와중 3진 통제 차오쿤과 인연을 맺게 되고 1906년에 그의 휘하에 들게 되어 북양육군 3진의 포병 3연대 1대대장이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고 1912년의 청나라 멸망을 거쳐 우페이푸의 상관인 위안스카이가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면서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내각책임제를 실시하려는 위협적인 정적인 쑹자오런을 암살하고 매국적인 선후대차관 사건을 일으켜 반대파를 진압할 준비를 갖추었다. 국민당은 반발하여 1913년 계축전쟁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했다. 1914년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하고 신약법을 발표, 초급 총통제라 불리는 황제적 총통제를 실시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아예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홍헌제제를 단행,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칭제하였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를 몰아내기 위해 량치차오, 차이어, 탕지야오 등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를 호국전쟁이라 한다. 우페이푸는 호국전쟁에서 봉기군을 차례로 진압하여 6연대장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1916년 하야했고 머지 않아 사망했는데 그의 휘하의 북양군벌은 돤치루이의 안휘군벌과 펑궈장의 직예군벌로 분열되었다. 우페이푸는 직계에 속해 있었고 1917년 장훈복벽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진압했다.
2.3. 안직전쟁
위안스카이 사후 대리총통 리위안훙이 국회와 임시 약법의 부활을 선언하면서 남북분열은 봉합되고 외형적 민주주의가 복구되었지만 국무총리 돤치루이의 전횡으로 중화민국은 혼란에 휩싸였다. 1917년 장훈복벽 이후 펑궈장이 대총통직을 계임했고 복벽을 진압하면서 다시 총리가 된 돤치루이가 국회와 약법 부활을 거부하고 안하무인으로 독재를 일삼자 쑨원이 서남군벌 탕지야오, 루룽팅과 연합하여 광저우에서 1차 호법운동을 일으켰고 돤치루이와 쉬수정이 이를 진압하려고 나서면서 1917년 호법전쟁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우페이푸는 3사단을 이끌고 1918년 3월의 호남공세에 참가, 큰 군공을 세웠으나 돤치루이가 7사단장 장징야오를 낼름 호남독군에 임명하면서 아무런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자 크게 분노하여 정전령을 발표하고 더 이상 호법군과 싸우지 않았다.
결국 호법전쟁 자체는 직계와 환계의 내분, 남방 군벌들의 비협조로 흐지부지하게 끝났으나 돤치루이는 1918년 쉬스창을 대총통으로 추대하고 여전히 떵떵거렸다. 돤치루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남정 문제로 펑궈장과 크게 충돌했지만 막무가내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했고 봉계의 장쭤린까지 끌어들였으나 장쭤린과 돤치루이는 돈 문제로 금방 틀어졌다. 그동안 우페이푸는 휘하의 3사단과 1사단 혼성여단 등의 정예부대를 호남에 주둔시키고 북방의 상황을 엿보고 있었다.
1919년 12월 펑궈장이 사망하면서 직예독군 차오쿤이 직계의 수장이 되었는데 그 시점에 가면 우페이푸가 직계 최고 실세가 되어 있었다. 1920년 3월, 우페이푸는 호남에 주둔하던 자신의 병력을 쉬수정의 변방군을 견제하기 위해 북상시켰다. 돤치루이는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직계와 환계의 갈등이 최고조에 도달했다. 대총통 쉬스창의 요청에 따라 장쭤린이 중재에 나섰지만 협상은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결렬되었고 쉬수정의 장쭤린 암살 시도 이후 결국 전쟁이 폭발하여 직계, 봉계의 연합과 환계의 싸움이 벌어졌다. 우페이푸는 환군 서로군 총사령관 취퉁펑 등을 사로잡아 순식간에 환계군을 붕괴시켰고 취퉁펑 등은 차오쿤에게 투항했다. 쉬수정의 변방군도 장쭤린에게 격파당하면서 7월 19일 돤치루이가 하야하고 7월 23일 직계와 봉계가 베이징에 임성하여 천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이 직환전쟁, 환직전쟁이라고도 하는 안직전쟁이다.
2.4. 1차 직봉전쟁
돤치루이가 물러난 이후 천하는 직계와 봉계가 나누어 가졌지만 이 시기가 다 그렇듯이 당연히 둘은 서로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장쭤린의 야심은 끝이 없었고 정통 엘리트 출신인 차오쿤과 우페이푸는 마적단 출신의 장쭤린을 하찮게 보았으며 그들의 약탈 행위에 그들을 더욱 경멸했다. 봉계의 수장 장쭤린은 우페이푸를 차오쿤의 졸개 정도로 여겨 신경쓰지 않았고 직환전쟁이 끝난 후 벌어진 회의에서 장쭤린이 우페이푸에게 일개 사단장이 어디서 입을 여느냐고 호통을 친 적도 있었지만 우페이푸가 즈리, 허난, 후베이, 후난을 점령하고 양호순열사가 되어 위세를 부리자 뒤늦게 그가 직계의 실세임을 깨닫고 크게 경계하게 되었다. 우페이푸 또한 직환전쟁 후 회의에서 있었던 일로 인해 장쭤린을 싫어했고 차오쿤이 또 다시 장쭤린과 싸울 수도 없지 않느냐고 달랬음에도 뤄양에서 병사들을 조련하며 장쭤린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이에 자극받은 장쭤린은 러허를 점령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고 다시 천하를 두고 일본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직계와 대립했다. 반면 우페이푸는 영미의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늘렸고 산시 성과 허난, 후베이로 세력을 확장했다. 장쭤린은 반직예파 동맹을 결성하여 직예파를 섬멸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런 수면 밑의 충돌 외에서도 수면 위에서도 갈등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는데 당시 열악한 중국의 재정 문제 때문에 봉천과 직예가 강력히 충돌한 것이다. 거기다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외몽골을 점령한 일 등도 겹쳤지만 북양정부는 속수무책이었고 무능한 정부 사이에서 양자는 정부가 편향적이라고 비판을 해댔다. 1921년 12월 14일 장쭤린은 북양정부의 진윈펑 내각을 량스이 내각으로 갈아치웠고 환계를 끌어들이기 위해 돤치루이 계 인물들을 대거 사면해주었는데 이 때문에 직계는 배신이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거기에 량스이가 위안스카이 시절 친일행위로 대중의 분노를 산 바가 있는 각료들을 등용하자 이에 우페이푸는 량스이를 이완용 같은 자라고 맹렬하게 비난, 량스이 내각 토벌을 통전하여 량스이 내각을 한달만에 붕괴시켰다.
봉계가 수립한 량스이 내각이 붕괴되자 결국 봉천군벌과 직예군벌은 1922년 4월 28일에 충돌하는 데 이것이 바로 1차 직봉전쟁이다.(봉직전쟁이라고도 한다.) 기량이 형편없던 봉천군벌은 장쉐량과 궈쑹링이 지휘하던 2개 부대만 제외하곤 모조리 참패를 면치 못했고 장쭤린은 자신의 부하들에 대한 실망을 금치 못하면서 만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페이푸는 산해관까지 장쭤린 군대를 밀어붙였으나 일본의 눈치를 봐서 더 이상 진군하진 않았다. 이로써 우페이푸가 중국 천하의 1인자로 등극한 것이다. 이때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던 쑨원 북벌을 외치며 우페이푸의 후방을 찔러보려 했으나 북벌이 비현실적인 몽상이라 여긴 천중밍이 우페이푸와 결탁하여 영풍함 사건을 일으켜 쑨원을 광저우에서 오히려 축출했다. 천중밍은 대가로 우페이푸에게 광둥 성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때 사천군벌 양썬 등도 우페이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고 담조전쟁을 지원한 대가로 자오헝티도 우페이푸에게 굴복하면서 우페이푸의 세력권은 전국 각지로 뻗어나갔으며 지위도 높아져 육군총장에 올랐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이후 총통 옹립 문제인 '최고문제'에 대해 중국을 통일시킨 후에 총통을 민의에 따라 추대해야 할 것이라면서 차오쿤과 조예의 천보파의 즉각적인 총통 옹립에 대해 반대를 표명했고 왕충후이 내각을 지지하여 뤄원간 사건 때도 리위안훙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차오쿤이 반발하자 불간섭을 선언했다.
우페이푸는 교통계와 봉천군벌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의 합작을 매우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보이틴스키를 비롯한 소련인들이 우페이푸를 고평가함에 따라 베이징에 주재한 주중국전권대표 아돌프 요페가 우페이푸와 접촉했는데 우페이푸는 중동로와 외몽골 문제에 있어서 매우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이 때문에 소련과 우페이푸의 합작은 결렬되었다. 1923년 우페이푸가 2.7 사건을 일으켜 노동운동을 강경히 탄압함에 따라 우페이푸와 철도 문제로 협력하고 있던 중국 공산당은 우페이푸를 맹비난하며 그와 단절하고 반우페이푸 운동을 전개했다.
2.5. 2차 직봉전쟁
우페이푸는 휘하에 무려 50만 대군을 거느렸고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우페이푸는 구국회를 복구하여 쉬스창에게 정통성이 없다는 구실로 쉬스창을 축출하고 리위안훙을 잠시 세웠다가 그도 곧 축출하고 자신의 보스인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옹립하였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군벌들에겐 푸대접과 응징을, 자신의 계열 인사들에겐 불합리한 지원과 옹호를 일삼았다. 그의 막무가내적인 행동에 직계 내부에선 차차 우페이푸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게다가 우페이푸는 직계의 리더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실세로 다른 직계 인물들의 눈에는 그는 그저 차오쿤을 믿고 설치는 놈 정도로 보였던 것이다. 직계 내부에서 우페이푸와 적대하던 인물로 대표적인 것이 훗날 북경정변을 일으켜 장쭤린과 손을 잡아버리는 펑위샹이다. 한편 만주에 쫓겨났던 장쭤린은 펑톈에 거대한 무기공장을 세우는 등 만주를 매우 근대화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군사력을 크게 강화시켜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1924년 9월 3일, 줄곧 직예군벌을 반대해온 절강독군 루융샹을 토벌하기 위한 강절전쟁이 일어나자 장쭤린은 돤치루이의 잔여 세력과 쑨원에까지 손을 내밀어 우페이푸를 고립시켰고 이러한 힘과 정세를 바탕으로 1924년 9월 13일 1차 직봉전쟁의 설욕을 하기 위해 우페이푸를 쳤고 펑위샹이 내통하여 북경정변을 일으켜 차오쿤 정권을 전복시키고 내친 김에 핍궁사건을 일으켜 청나라 황족들을 자금성에서 축출했다. 우페이푸는 토역군총사령관의 자리에 올라 자신의 세력을 전부 동원하여 장쭤린에 맞섰지만 결국 우페이푸는 내분과 훨씬 강력해진 봉천 군대의 힘에 밀려서 참패할 수밖에 없었고 후베이와 후난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잃고 겨우 수천명의 병사만 거느린채 패주했다. 우페이푸의 몰락을 지켜보던 쑨촨팡 등은 제노전쟁 과정에서 돤치루이와 협상하여 절강독판에 임명되어 기반을 유지했다. 이때 우페이푸가 하도 고생을 했는지 그의 머리가 모두 새어버렸다고 한다. 우페이푸는 우한으로 가서 반봉 운동을 전개했으나 호응이 없자 우한을 떠나 정저우에서 반봉 운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장쭤린이 과욕을 부려 장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하려 하면서 곧 장쭤린에 대항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신임 강소독판에 임명된 양위팅은 학생운동을 탄압하고 병사들의 대민범죄를 방관하며 전횡을 일삼았는데 그의 안하무인의 태도에 분노한 강소의 장령들이 반기를 품었으며 절강독판 쑨촨팡이 5개 성의 대표들을 모아 봉천군벌을 타격하기 위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1925년 10월 10일 쑨촨팡은 훈련을 핑계로 총동원령을 내려 손봉전쟁을 일으켰고 상하이, 난징 등을 잇달아 점령하였다. 10월 20일 쑨촨팡은 우페이푸에게 그를 여전히 상관으로 섬기고 있다면서 공동으로 장쭤린을 토벌할 것을 청했다.
이에 우페이푸는 10월 21일 14성 토벌연군 총사령관에 취임, 장쭤린에 대항하여 하남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장쭤린의 부하 궈쑹링이 장쭤린에게 불만을 품고 펑위샹, 리징린과 연합하여 반봉사건을 일으키며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우페이푸는 일단 장쭤린과 적대하는 사이었지만 북경정변으로 자신을 배신한 펑위샹을 더욱 싫어했다. 이 때문에 우페이푸는 즉각 장쭤린을 옹호하는 통전을 보냈고 마침 펑위샹에게 분노하고 있던 장쭤린은 우페이푸에게 공동으로 펑위샹을 토벌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1926년 옌시산까지 가담하여 직봉풍전쟁이 일어났고 우페이푸는 쑤이위안 등을 점령하는 등 다시 기반을 잡아 재기하는가 했지만... 그가 한창 펑위샹을 두들기는 와중에 남방에서 생각지도 못한 역습이 들어오게 된다.
2.6. 몰락과 말년
1926년 7월 1일 국민당의 장제스가 광저우에서 북벌을 선포, 7월 9일에 북벌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10만의 병사들을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의 1차 북벌이었다. 이들은 숫자는 적어도 혁명정신과 소련 교관들의 훈련으로 인해 전투력이 군벌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엄정한 규율 때문에 가는 곳마다 민심을 얻었다. 펑위샹을 밀어붙이던 쑨촨팡과 우페이푸는 결국 장제스의 역습에 잇달아 패했고 자신의 중심지인 우한을 장제스에게 내주고 맥없이 패퇴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한을 사수할 것이라고 외신기자들에게 외쳤지만 그의 부하들은 앞다퉈 탈영하고 장제스의 매수에 넘어가고 있었다. 결국 우한이 함락되고 우페이푸는 하남성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쭤린이 뒤통수를 치고 하남성으로 진군하여 8월에 하남성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에 차오쿤을 비롯하여 직예파의 요인들이 줄줄이 봉천군벌에게 항복함에 따라 결국 그는 완전히 낭인 신세로 전락하여 쓰촨 군벌 양썬에게 "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라며 몸을 의탁했고 4년을 쓰촨에서 지내게 된다. 이 시기 일본 제1함대 총사령관 아라키 지로 소장과 특무기관장 후지 슈 대좌 등이 우페이푸에게 군비 100만원, 소총 10만자루, 야포 500문, 기관총 2000정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이전에는 나 역시 10만 자루가 넘는 총과 100만원에 달하는 거금이 있었소.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승패는 돈이나 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오. 내가 외국 돈이나 외국의 원조를 받고자 했다면 왜 오늘까지 기다렸겠소? 중국의 일은 중국인 자신이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러하니 귀국의 성의를 받아들일 수 없소."라고 거절했다. 1930년 중원대전이 발생하자 그는 재기를 노리고 옌시산에게 합류했으나 장제스가 제때에 쓰촨 군벌들을 매수함으로 처참하게 실패했고 간쑤에서도 실패했다. 1931년, 반장전쟁을 진압하고 중국의 지배자 자리를 공고히 한 장제스는 옛 적인 우페이푸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가 쓰촨 밖으로 나오는 것을 허용했고 그는 장쉐량의 초청을 받아 베이핑으로 이주하여 그와 숙질 관계를 맺고 장쉐량에게 사부 대접을 받게 된다. 그는 이제 완전히 실권한 상태였으므로 장제스의 눈에도 그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그는 베이핑에서 장쉐량이 주는 용돈을 받으며 살았고 공산당을 토벌하던 장제스와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그는 사실상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서부터였는데 일본은 1935년부터 화북분리공작이란 것을 함으로 만주에 이어 화북을 식민지화하려 했고 우페이푸를 구슬리며 그를 꼭두각시로 내세우려 했지만 젊어서부터 반일성향이 강했던 우페이푸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생하자 우페이푸가 거주하던 베이핑도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우페이푸는 피난을 거부하고 자신의 집에 관우와 악비의 초상화를 걸고 일본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관동군은 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를 통해 우페이푸를 포섭하여 괴뢰정부의 수장으로 삼으려고 한간들을 보내 그를 유혹했으나 우페이푸는 한간들을 어찌 일본인의 주구가 되려 하냐며 크게 욕하며 그들과 절교를 선언했다. 일본은 협조한다면 산포 200문, 소총 10만정, 기관총 2천정, 100만위안의 군자금을 제공하겠다고 러브콜을 보냈고 일본에 붙은 왕징웨이도 그를 회유했으나 우페이푸는 단호했다. 그러던 중 1939년 12월 1일 양고기와 만두를 먹던 우페이푸의 치통이 갑자기 심해져 고열에 시달렸고 치료를 위해 일본인이 운영하는 치과병원을 찾았는데 12월 4일 거기서 급사하고 만다. 이에 대해 일본의 암살설이 떠돌고 있다.[2]
3. 여담
그의 반일정신을 높이 평가한 장제스는 1940년 그에게 일급상장 자리를 추서했으며 장제스와 쑹메이링 부부가 각각 유가족에게 조전을 보내고 20만 위안을 하사했다. 중일전쟁 종결 이후 국가에서 주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군벌임에도 개인적 축재를 하지 않고 매우 검소한 삶을 살았다 한다. 그의 옷이라곤 군복 몇벌 외엔 없었다고. 첩을 수두룩하게 거느리고 아편과 부귀영화에 허우적거리던 다른 군벌들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또한 허구한날 홍콩이다 상하이 조계지다 안전한 곳에 달아나던 다른 군벌들과 달리 중국 밖을 나가려 하지 않았으며 일본군의 침략에도 베이핑에 꿋꿋하게 남은 모습은 확실히 돋보이는 모습이다. 결혼은 살면서 총 3번 했는데 자식은 단 하나 뿐이었다 한다.
유교 교육을 받아서인지 편지를 쓸 때 간결하면서도 무게 있는 한자 4자만을 적어서 회신하곤 했는데 이것이 정곡을 찌르는 명문들이었다 한다. 어떤 평판 좋지 않은 자가 허난 성에 자리를 달라 하자 우페이푸는 '허난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어 자네와 같은 나쁜 관리를 맞아야 한단 말인가?'라는 뜻의 '예민하고(豫民何辜)'란 뜻의 글만 돌려보냈으며 여단장 청탁 요구에는 '차선종수(且先種樹)'라는 글을 보내며 뜻만 있고 능력은 없는 당신은 나무라도 심어서 백성들에게 도움이나 되라고 거절했다. 그런가 하면 주중 독일공사의 딸이 우페이푸에게 반해 구혼을 한 일이 있었는데 웬 독일어 편지에 의아한 우페이푸는 이를 비서를 시켜 번역하게 하여 그 뜻을 알곤 자신은 기혼자라는 뜻의 '노처상재(老妻尙在)'라는 글을 보내어 거절했다 한다. 그 외에도 정곡을 찌르는 문장을 잘 쓰곤 했는데 그의 동창이 그의 부대내의 군수부분에서 소장 자리 하나를 요구하자 이렇게 글을 써서 보냈다고 한다.
이 편지를 받은 동창은 포기하고 말았다 한다.
4. 매체에서
[image]
영화 건당위업에서 홍콩배우 여량위가 분했다.
카이저라이히에서의 초상화
Hearts of Iron 시리즈의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엄청난 수혜를 입었다. 2차 직봉전쟁에서 대패해 우한으로 후퇴했다가 직봉풍전쟁으로 세력을 다지며 재기를 노리던 차에 1926년에 국민당의 1차 북벌의 목표가 된 것까지는 실 역사와 동일하나, 사회주의 국가인 프랑스 코뮌의 후원을 받는 국민당을 우려한 독일 제국이 중국에 개입하며 국민혁명은 완전히 실패한다. 일본과도 경쟁관계에 있었던 독일은 친일적인 장쭤린이 중국을 지배하는 것도 원치 않아 우페이푸를 지원했고 3차 직봉전쟁에서는 우페이푸가 다시 승리해 장쭤린을 산해관 너머로 몰아낸다. 그러나 독일은 지원의 대가로 푸이를 복위시키고 청 제국을 재건할 것을 요구했고 우페이푸는 이를 수락한다. 1927년 장쭤린은 산시의 옌시산, 윈난의 탕지야오와 비밀리에 반직예 동맹을 맺고 불시에 직예를 공격할 준비를 했고 우페이푸는 역으로 산둥의 장쭝창을 회유해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4차 직봉전쟁은 기습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우페이푸는 독일 정보부 요원들 덕에 공격시점을 예측할 수 있었고 전쟁은 교착상태에 들어간다. 일본과 독일은 각각 봉천과 직예를 지원했고 전쟁이 길어지며 점차 수위가 높아지다가 일본군이 윗선의 명령없이 독자적으로 상하이를 침공하며 전면전 직전에 이르게 된다. 갑작스러운 미국의 중재로 상하이 회담이 열려 독일과 일본간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청과 봉천 양 측은 영토의 변화없이 휴전에 들어갔다. 4차 직봉전쟁에서는 영토의 변화는 없었지만 사실상 우페이푸의 판정승이었고 팔성연합의 쑨촨팡, 윈난의 탕지야오, 산둥의 장쭝창, 쓰촨의 양썬, 산시의 옌시산, 서북의 마씨들, 신장의 양쩡신까지 청을 공식적인 정부로 인정하게 된다. 게임 시작인 1936년 시점에서는 중국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해있다. 청은 공식적으로는 입헌군주제 국가로 황제인 푸이, 총리인 차오쿤이 있지만 실제 대부분의 권력은 우페이푸가 잡고 있다.
5. 참고문헌
- 군벌, 이건일, 도서출판삼화.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국근현대사 2: 근대국가의 모색 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오사시기 군벌체제의 재편, 박준수, 춘천교육대학
- 다음 블로그 포스팅
- 욱이님 포스팅
6. 관련문서
6.1. 인물
6.1.1. 군벌
6.1.2. 국민당
6.2. 사건
- 신해혁명
- 계축전쟁
- 홍헌제제
- 호국전쟁
- 장훈복벽
- 1차 호법운동
- 호법전쟁
- 하남독군 교체 파동
- 안직전쟁
- 2차 호법운동
- 1차 직봉전쟁
- 영풍함 사건
- 2.7 사건
- 임성 사건
- 회선 사건
- 강절전쟁
- 2차 직봉전쟁
- 북경정변
- 핍궁사건
- 제노전쟁
- 선후회의
- 국민당의 1차 동정
- 1925년 객군 반란
- 국민당의 2차 동정
- 서산회의
- 손봉전쟁
- 반봉사건
- 직봉풍전쟁
- 국민당의 1차 북벌
- 국민당의 2차 북벌
- 반장전쟁
- 초공작전
- 중일전쟁
[1] 그는 중국인 중에서 타임지에 실린 첫 인물이었으며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소개되었다. 공교롭게도 타임지 모델로 실린지 1주일이 못되어 2차 직봉전쟁이 터지면서 그는 몰락한다.[2] 물론 반론도 있다. 고대 이집트의 왕비인 네페르타리의 사인이 치주염이 패혈증으로 번진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을 만큼, 옛날에는 치과 질환도 사람잡기는 딱 좋은 질병이었다. 물론 이때는 위생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오늘날에 비하면 아직 위생 수준이 심하게 낮았기 때문에, 치과 치료 중이나 혹은 그 이전에 이미 치통이 패혈증으로 번졌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는 지적이 있다. 사실 아예 당시 일본군부와 정계의 염원이었던 장제스를 포섭한다면 모를까 이미 세력 다 날아간 우페이푸 정도 되는 인물을 포섭하지 못한다고 해서 큰 손실도 아니었고 거꾸로 말해서 굳이 죽여 일본이 얻을 것이 딱히 없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