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탈린 시위
1. 개요
2007년 탈린시에 있던 소련군 동상을 군사묘지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시위. 에스토니아에서는 이 사건을 4월 폭동(Aprillirahutused) 또는 청동의 밤(Pronksiööd)이라고 부르고 있다.
2. 진행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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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위치에 있던 해당 동상)
2차대전 전몰자 동상(Teises maailmasõjas langenutele, 소련 시절 이름은 탈린 해방자 동상(Монумент освободителям Таллина))은 1945년 소련군이 2차대전에서 탈린을 '해방'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47년 9월 22일 세워졌다.
원래는 1945년 2차대전이 끝난 뒤 승전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지만, 1946년 5월 8월에 에스토니아 학생들에 의해 '''폭파'''되면서 이를 대신해 세워진 것이 오늘날의 동상이다.
소련 시절에 이 동상은 소련 전역에 세워진 수많은 2차대전 승전 기념비 중 하나였지만, 문제는 1991년 에스토니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였다. 소련 시절에야 소련군은 수많은 자국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잔혹한 나치에 맞서싸운 '''영웅'''이었겠지만, 독립을 되찾은 에스토니아 입장에서 소련군은 독일과 밀약을 맺어 자국을 강제로 점령하고 주권을 뺏은 '''점령군'''이었다.
특히 1940년 자국이 소련에 강제로 합병당한 에스토니아인들은 2차대전 중 소련과 싸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악명높은 친위대에 자원해 싸울 정도로 소련에 대해 뿌리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소련군의 승리와 에스토니아의 재점령을 상징하는 이 동상에 대한 에스토니아인들의 감정은 좋을 리가 없었다.
1991년 에스토니아가 독립한 이후 에스토니아 정부와 탈린 시가 여러 차례 동상 처리를 두고 논의하기 시작하자, 동상 근처에서는 동상을 유지하려는 러시아인들과 동상을 철거시키려는 에스토니아인들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시위가 발생했다. 특히 2006년 에스토니아 조국연합[1] 에서는 철거 청원을 제출했고, 2007년 2월에는 에스토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에스토니아인들의 학살자'라는 화환으로 장식하려 했던 시도도 있었다. 이러한 분쟁을 방치할 수 없었던 에스토니아 정부와 탈린 시는 2007년 4월 해당 동상을 에스토니아군 묘지에 이장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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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아침에 에스토니아 경찰이 동상을 이전하기 위해 공원 주위를 둘러싸고 전사자 유해 발굴 및 동상 이전 준비를 시작하자, 이를 동상의 '''철거'''로 오인한 탈린 시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정부가 동상을 철거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몇 시간 후 수 천명 가량의 탈린 시 거주 러시아 시민들이 공원 주위에 모여 철거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시위는 점차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9시 무렵 시위는 절정에 달해, 탈린 시내의 수많은 상점들이 파손되고 약탈당했다. 이튿날 새벽이 될 무렵 57명이 부상당하고 300명 이상이 검거되었다.
하지만 4월 27일 새벽, 동상 주변 전사자 유해가 수습되고 동상이 에스토니아 국방군 묘지[2] 로 옮겨지자 시위는 다시 절정에 달해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최루탄, 물대포 등을 동원하자 시위대는 화염병으로 진압 경찰을 공격하는 등 과격해졌다. 이 과정에서 156명이 부상당하고 1000여명 이상이 연행되었다.
당시 시위를 보도한 에스토니아 뉴스 영상. 4월 27일(현재 비공개 처리됨),다른 영상
당시 시위를 보도한 러시아 뉴스 영상. 4월 28일
이후 사태는 진정되기 시작해 4월 28일 탈린 시내는 대부분 치안을 회복했다. 5월 1일 러시아 정부에서 파견한 대표단이 새로 이전된 동상을 방문하고, 5월 8일[3] 이전된 동상을 일반 시민 앞에 정식 개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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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위치로 이전된 동상)
한편 러시아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 에스토니아제 식품에 대한 보이콧 운동이 일어났으며, 에스토니아 주요 정부기관 사이트가 해킹당해 몇 주동안 마비되기도 했다. 또한 5월 1일에는 러시아 친정부 단체인 나쉬(Наши)가 러시아 주재 에스토니아 대사관에 진입해 농성하기도 했다.
당시 시위를 다룬 AP통신 영상
3.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
사건에 대해 정리한 기사 (오마이뉴스)
3.1. 러시아계 주민
이 사건은 단순히 2차대전 시절의 역사를 둘러싼 논쟁이 아니라 에스토니아에 거주하는 러시아계들의 불안감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에스토니아는 1991년 독립 후 소련 시절을 청산하고자 했다. 이 때 에스토니아에 있던 수많은 러시아계들이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따라 1992년 에스토니아 정부가 시민권 부여 자격을 '에스토니아어를 할 줄 아는 자'로 제한했고 에스토니아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은 시민권 취득 자격이 제한되었다. 물론 소련시절에도 에스토니아어를 학교에서 교육시키기는 했지만 에스토니아어가 우랄어족에 속했기 때문에 러시아어 화자 입장에서 매우 어려웠기도 했고 러시아어만 할 줄알아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까지만 해도 에스토니아어에 능숙한 러시아인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비시민(Maaratlemata kodakondsusega isik, Неграждане)이라고 불리는 시민권 미취득자로 분류되며 참정권이나 개인사업 소유 등 여러 면에서 외국인으로써 제한되었고, 그 결과 에스토니아 거주 러시아인의 수는 대폭 감소해 1989년 전체인구 30.3%에서 2016년 25.1%로 감소했다. 이는 자동으로 국적을 부여한 대부분의 옛소련 국가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엄격한 편에 속했다.
그리고 에스토니아에서 이들이 러시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남아있는 것 역시 마냥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에스토니아 정부에서는 러시아어 학교에서 에스토니아어 학습을 권장하면서 어느 정도 사회 일원으로써 통합시키려 노력했고, 실제로 오늘날에는 과거에 비하면 에스토니아어 구사인구가 많이 증가했다.
이렇게 에스토니아의 러시아계 주민(중 비시민)들은 에스토니아 안에서 이런저런 권리가 제약되고 정체성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불만이 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 자체가 구소련(=러시아)의 강제 합병 이후 러시아에서 이주하고 소련해체 이후 버티는 존재들이라 딱히 불만을 내세울 자격은 없다. 이들의 존재가 러시아가 분리 독립이란 형태로 나치 독일과 같은 행패를 부릴수 있게 (또는 압박하는) 하는 수단이다.
3.2. 에스토니아계 주민 및 에스토니아 정부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은 다른 소련 내 구성국에 비해서도 반소/반러 감정이 대단히 강하다. 그래도 다른 소련 내 구성국은 비교적 러시아나 소련에 우호적인 세력도 컸지만, 발트 3국은 이들과 달리 강제로 합병을 당했기 때문이다. 독립도 소련 해체로 이룬 것이 아니라 그보다 1년 전에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해 나갔을 정도있다. 그래서 소련 독립 후 독립국가로써 정체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옛 소련 국가들에 러시아가 미치던 영향력을 최소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2000년대 러시아가 블라디미르 푸틴 집권 이후 서서히 경제력을 회복하면서 이들 옛 소련 국가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러시아인들을 이용해 옛 소련 국가들을 압박했고, 이는 소련 시절의 역사를 청산하려는 에스토니아 정부, 나아가 에스토니아계 에스토니아인과 충돌을 일으켰다. 실제로 1991년 트란스니스트리아, 1993년부터 2008년까지 조지아 정부와 마찰을 빚던 남오세티아와 압하지아와 같이 러시아계 또는 친러 성향 주민들이 새로 독립한 공화국에 반발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무력으로''' 독립한 사례가 여러 번 있다.
이와 같이 옛 소련 국가에서 현지인들과 러시아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은 오늘날에도 이들 국가에서 여전히 유효한 주제 중 하나인데, 2014년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위기를 통해 이 문제가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