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 3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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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럽 중부와 동부와 북부 사이, 독일과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 반도 사이 동부 발트 지역에 위치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세 국가를 가리키는 단어. 다른 나라에서도 '발트 3국'에 해당하는 표현은 있지만 대체로 '발트(해) 국가'에 해당하는 표현(영어의 Baltic States 등)을 쓴다. 과거 이 지역 전체를 가리키던 명칭인 리보니아(Livonia)라고 부르기도 한다.
20세기 초반에는 핀란드도 발트 3국과 함께 묶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핀란드는 중립국이 된 반면 발트 3국은 소련에 복속되어 공산권 블록에 속하게 됨으로써 발트 3국과 핀란드는 더이상 같이 묶이지 않게 되었다.
발트 3국은 단순한 지리적 단어 그 이상의 국가간 협력체로, 국제무대에서 서로의 입장을 지지하고 대변해주는 외교 블록을 형성하고 있다. 아예 발트 의회를 설립하여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통일하여 국제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합동 군사훈련도 주기적으로 꾸준히 개최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끈끈한 동맹체를 설립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뭉치는 이유는 역사적인 이유보다는 바로 옆에 붙어있는 러시아 때문이다.
비슷한 것으로 베네룩스나, 노르딕 의회(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아이슬란드, 핀란드의 연합체)가 있다. 베네룩스도 자신들을 둘러싼 프랑스, 독일, 영국과 같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자기들끼리 반목해봤자 남 좋은 꼴만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난 공동체인 것이다.
여기에 더해 발트 의회와 노르딕 의회 또한 서로 협력 관계를 구축하여 더욱 큰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발트 3국은 노르딕 의회 산하 기관인 북유럽 개발 은행의 가입국이기도 하다.
2. 3국 비교
민족적으로는 에스토니아가 핀란드의 영향을 받은 핀-우그리아계 국가라면,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발트족 사람들이 건설한 국가이다. 이에 따라 위의 표에서 보면 언어 역시 에스토니아는 '국가'에 해당하는 단어로 핀란드어와 똑같은 'maa'를 쓰는 한편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valsts, valstybė'라고 한다. 에스토니아어는 우랄어족에 속하는 언어로 헝가리어, 핀란드어와 함께 교착어에 속하는 언어지만 라트비아어와 리투아니아어는 굴절어에 속한다.
종교적으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공산화 직전까지 루터교인이 많았던 반면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 교도가 많으며,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경우 러시아인들도 일부 거주하기 때문에 정교회를 믿는 사람도 많다. 에스토니아의 경우 루터교를 믿던 에스토니아인들의 무종교 비율이 높아지면서 전통적인 종교 분포가 역전되기도 하였다.
종교에 대한 태도도 국가마다 다른데 리투아니아는 폴란드 못지 않게 가톨릭 신앙이 열정적이고 아예 '십자가 언덕(Kryžių kalnas)'이라는 곳이 있을 정도로 종교성이 강하다. 이 나라 혼자 중앙유럽으로도 분류되는 데는 종교도 한몫 했다고 볼 수 있다. 라트비아는 무종교 비율이 높다지만 아직 종교인구가 의외로 많이 남아있는 편이며 루터교단이 상당히 보수적인 편이다. 에스토니아는 무신론자를 포함한 무종교 비율이 굉장히 높고 굉장히 비종교적인 국가이다.
3. 역사
3.1. 20세기 이전까지
한때 폴란드와 연합하여 강성한 세력을 자랑했던 리투아니아를 제외한 두 국가는 20세기 이전까지 개별적인 국가였던 적이 없었다. 고대에는 부족국가나 군장국가가 있었지만 본격적인 '국가' 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중세에는 리보니아라는 이름으로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일대에 연맹국가가 형성되는 적이 있긴 했었지만 근본적으로 독일계 기사단이 세운 국가였던지라 식민지배를 당하는 상황에 가까웠다. 이후 러시아와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이 지역을 놓고 다투지만 독일계 지주-현지인 농노 라는 사회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리투아니아의 경우 명민한 외교 정책으로 한 때는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닌 나라로 성장했으나, 인구 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결국 실권을 폴란드에 내줘야 했다.
대북방전쟁과 폴란드 분할의 결과에 따라 이 지역 거의 대부분은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3.2. 러시아 제국의 멸망과 독립
1917년 이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벗어난 발트 3국에는 여기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강대국들의 힘이 약해지면서 독립의 기회를 맞는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제국이 망하고, 폴란드는 방금 막 독립했고, 스웨덴은 이미 오래전 쇠락했고, 러시아 제국에서 교체된 소련도 전쟁 후의 후유증으로 무력 개입을 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 독립을 이루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지역에 대한 구 강대국들의 야망은 남아 있었고 이 중 리투아니아는 구 동맹이었던 폴란드가 침공해 수도인 빌뉴스를 점령하고 괴뢰국을 세우는 사건이 터졌다. 결국 리투아니아는 2차대전 전까지 빌뉴스를 법적 수도로 하고 실질 수도는 카우나스로 옮겨야 했다. 내부적으로도 1926년 리투아니아에서는 안타나스 스메토나, 1934년 같은 해에 에스토니아에서는 콘스탄틴 패츠, 라트비아에서는 카를리스 울마니스 등 독립운동가 출신 독재자들이 쿠데타로 집권해 강권정치를 펼쳤던 것도 똑같았다.
3.3. 소련 합병
소련은 1939년, 에스토니아를 시작으로 상호간의 군사기지를 건설과 상호 원조 조약을 허용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 폴란드 해군 잠수함이 에스토니아를 거쳐 영국으로 탈출한 것은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에스토니아는 9월 28일, 라트비아는 10월 5일, 리투아니아는 10월 10일 체결되었다. 결국 발트 3국에는 총합 75,000명의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1940년부터 소련은 본격적으로 발트 3국을 병합할 자세를 보였다. 몰로토프는 발트 3국이 소련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비난했다. 이와 동시에 소련 정부는 발트 3국에게 무제한으로 군대가 주둔할 수 있고, 정부를 교체할 수 있게 해달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발트 3국은 당연히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6월 15일 소련은 라트비아를 침략했고, 6월 16일에는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를 침략했다. 소련은 일주일만에 발트 3국을 점령했고 각국의 군대는 무장해제당한다. 이후 현지의 공산주의자들을 꼬드겨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우고, 7월 14일과 15일 사이에는 합병에 관한 짜고치는 투표가 이루어지고 소련은 이를 통해 자발적으로 3국이 소련에 합병되는 것을 선택했다고 선전했다. 7월 21일에는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설립된다.[6] 이후 반공, 반소적인 인사들은 추방되었다. 추방된 사람은 최소 12만 명 정도라고 한다. 소비에트 정부 수립 직후, 발트 3국은 소비에트 연방 가입 신청을 했다. 이는 받아들여졌고 리투아니아는 8월 3일, 라트비아는 8월 5일, 에스토니아는 8월 9일 소련에 병합되었다. 발트 3국 점령 참조.
3.4. 제2차 세계대전~냉전
1941년에 독소전쟁이 개전되고 나치 독일은 3국을 모두 점령해 동방 국가판무관부 관할 지역으로 두었다.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나치에 협력해 소련을 몰아내고자 했으며,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도 시행되었다. 그러나 독소전에서 독일은 패배하고 이 지역은 다시 소련의 땅이 되었다.
발트 3국은 소련에서 가장 산업이 발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경제 수준이 좋았지만 인접해있는 핀란드나 스웨덴에 비하면 소득 수준이 크게 낮았던 데다가 이주해온 러시아인들이 현지 문화를 적극적으로 익혔던 것도 아니었고 주요 공직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아 박탈감이 심했었다.
3.5. 소련 점령기 독립운동
소련이 발트 3국을 점령하자, 발트 3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제각기 망명정부나 그와 유사한 단체를 세웠다. 에스토니아는 본격적인 망명정부를 수립했고,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서방 국가에 파견된 외교관들이 점령 후에도 외교관으로써 각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그들은 연합국 외교관들에게 독립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본국의 민족주의자들은 반소 게릴라 활동을 벌여 다시 독립을 되찾고자 했다.
대부분의 서방 국가들은 소련의 발트 3국 합방을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소련은 독소전 승리로 입지가 미국과 맞먹을 정도로 급상승했기에 이들의 외교적 입장이 발트 3국의 상태를 바꾸지는 못했고, 본국의 독립 운동은 소련의 무력 앞에 좌절되었다.
그럼에도 서방 국가의 발트 3국 합병 불인정은 발트 3국의 독립운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미국은 소련의 미국 내 발트 3국 자산 양도 요구를 무시했고, 되려 그 자산들을 발트 3국 외교관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쓸 수 있도록 해줬다. 몇몇 서유럽 및 남미 국가들도 소련 점령기 발트 3국의 외교관들에 대해 외교관 지위를 인정해주는 식으로 발트 3국을 지원했다.
3.6. 재독립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1989년 8월 23일 독소 불가침조약 50주년 기념일에 세 나라의 수도인 탈린, 리가, 빌뉴스를 잇는 678km에 이르는 인간띠를 형성해 독립 시위를 벌였다.[7] 이 인간띠 시위에는 200여만 명이 참가했다.
1990년에는 이 지역의 소비에트에서는 독립파가 다수를 차지해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진행하여 절대 다수의 찬성을 얻은 이후 자체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소련은 초기에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실제로 리투아니아에서는 유혈 사태가 있기도 했지만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해 소련이 혼란에 빠져들어 개입하기도 어려웠고, 8월 쿠데타 이후 소련 정부는 완전히 힘을 잃었다. 결국 소련은 해체 직전에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했고, 후계 국가인 러시아 연방도 이들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다시 독립을 쟁취한 오늘날 발트 3국 정부는 모두 1차 대전 직후 성립된 독립국 정부를 계승하고 있다는 입장이며, 소련 구성국 체제는 말하자면 괴뢰 정권으로 보고 적법한 정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4. 북유럽? 동유럽?
오늘날에는 대체로 북유럽으로 분류된다. 유럽연합도 북유럽 블록으로 분류하고 있다. 구 소련 구성국이라 러시아와 중국에서는 해당 지역을 동유럽으로 분류하려고 하나, 발트3국 국민들은 자기 모국이 동유럽으로 분류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8] 특히 에스토니아는 핀란드와 문화가 흡사하며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대도시들과 위도가 비슷하고 북극에 가까워져 백야 현상도 나타난다.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경우는 역사적인 측면을 봐도 정교회권인 러시아나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기간보다는 그 전에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독일 등의 영향을 받은 기간이 더 길고, 문화, 종교도 더 비슷하고[9] 지리적으로도 가깝기 때문에 유엔에서도 이 나라들을 북유럽으로 주로 분류한다.[10] 다만 리투아니아의 경우 중세 때 영토 대부분이 벨라루스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우크라이나 일대를 정복하면서 키예프 공국의 계승국 정체성을 가졌던 적도 있기 때문에 동유럽 역사로 분류될 때가 많다. 간혹 독일과 관련된 역사적, 지리적 사정도 고려해서 학계 한정 '북동유럽(Northeastern Europe)'이란 단어가 쓰이기도 한다.
신문에 실리는 해외여행 상품 광고를 보면 발트 3국은 물론이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북유럽으로 놓고 북유럽 여행상품으로 광고하고 있다.
한 번은 외교부에서 라트비아를 '''발칸''' 국가로 잘못 표기해서 라트비아 대사가 이례적으로 크게 항의한 적도 있었다. # 사실 남동유럽 사람들도 발칸의 어원 문제 때문에 자기 나라가 발칸 반도 국가라고 칭해지는 것을 상당히 안 좋아한다. 트럼프가 비슷한 실수를 한적이 있다. 백악관에서 발트3국 지도자들을 맞이하여 이들에게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일으킨 잘못에 대해 비난한 것. 발트3국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무슨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이해 못해 한동안 벙쪄 있었다고 르몽드가 전했다.
5. 반러시아 및 친서방(친독) 성향
오랫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아왔다는 설움 때문인지 민족주의와 반러 성향이 매우 강한 것이 특징이며, 이 때문에 대부분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한 다른 구 소련 구성국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독립국가연합에는 참여하지도 않고 2004년에 3국이 함께 유럽연합과 NATO에 가입하고 유로화까지 도입하는 등 외교 노선에서 친미, 친서방 노선을 고수하고 있다.
반러 성향 때문에 이 국가들은 유럽 치고는 나치 독일에 우호적인 편이다. 추축국이나 그에 협력한 국가에서는 대놓고 파시즘을 찬양하기 어렵거나, 적어도 그런 여론이 대다수는 아니지만, 발트 3국에서는 나치 독일과 아돌프 히틀러를 해방자로 생각할 정도다. 사실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낀 나라와 민족들 중에서는 나치 독일이 독소전쟁을 일으킬 때만 해도 나치 독일을 해방자 혹은 우호 세력으로 생각한 나라 및 민족(우크라이나, 핀란드 등)들이 많았는데 아예 나치에 크게 뒤통수를 맞아서(우크라이나의 아인자츠그루펜, 핀란드의 라플란드 전쟁 등) 나치를 혐오하게 되었다. 그러나 발트 3국은 전쟁 이후로도 소련에 속하여 러시아와 소련에 시달린 게 너무 많아 우호적인 감정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한 다큐멘터리 방송에서는 발트 지역 노인들이 독일은 과거 나치 연간의 동방 국가판무관부 시절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6. 인구와 구성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저출산을 겪었고, 1990년대 초중반에 경제적인 혼돈기를 겪어서 이때부터 이어진 인구감소가 현재까지 진행중으로, 안그래도 인구가 적은 발트 3국은 앞으로 심각한 인구난에 시달릴 전망이다. 그나마 인구가 가장 많은 리투아니아는 1995년에 363만명이었던게 2023년에는 258만명으로 28년만에 인구가 30%나 줄고, 1992년에 268만명이었던 라트비아 인구는 2023년에 192만명으로 마찬가지로 30% 정도 감소, 그리고 1989년에 155만명이었던 에스토니아 인구는 2023년에 132만명으로 그나마 감소율이 15% 정도로 낮을것으로 예상된다.
세계대전 여파로 여자비율이 크게 올라갔고, 다른 지역에 비해 큰 남녀 기대수명의 차[11] , 위에서 언급한 저출산과 맞물려 발트 3국은 아직도 여초현상이 심하다. 여성비율이 높은 국가 top10안에 발트 3국이 모두 들어가며, 에스토니아가 그나마 여성 100명당 남성 87명으로 낫고,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는 여성 100명당 남성 수가 80명도 채 되지 않는 수준.[12]
6.1. 러시아인
러시아 제국 통치 시절과 소련 공화국 시절에 러시아인들이 많이 유입되었는데 특히 2차대전 이후 저출산과 인구 부족으로 노동력 보충을 위해 근처 러시아인들이 많이 이주해왔다. 1990년대의 혼란기에 러시아인들이 상당수가 빠져나갔음에도 인구비율이 여전히 상당하여, 특히 러시아와 인접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전국민 4명 중 1명이 러시아 민족일 정도이고 각국의 수도인 탈린, 리가와 각국 동부 지역에 많이 모여살고 있다.
이들 국가에 사는 러시아인이 러시아어를 아직도 곧잘 쓰고, 러시아가 옆나라다보니 러시아와의 경제적 교류가 많다. 러시아와 경제적인 교류가 많다보니 러시아 기업들이나 갑부들도 발트 3국에서 경제 업무를 맡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일단 이 지역에서는 러시아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그런데 세 나라 모두 반러 감정이 강해서 러시아어를 공식적인 공용어로 지정하는 데 강력히 반대하기 때문에 러시아계 주민들의 입장은 애매하며 일상생활에 상당한 불편을 감수하고 있기도 하다. 러시아 학교를 두고 라트비아 정부와 라트비아내 러시아인들간에 갈등도 있는 편이다.
그 외에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독립 직후에 러시아계에게 자동으로 국적조차 주지 않아 자국어 시험을 통과해야 국적을 취득하게 만들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2010년 기준 무국적 거주자가 10만 명, 라트비아에서는 2017년 기준 무국적 거주자가 23만 명이나 있는데 대부분이 소련 시절 이주해온 러시아인들이다. 러시아에서는 오늘날에도 발트 3국 합병이 합법/자발적이라 보고 있으며 '역사적 거스름돈'이라고까지 표현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 역시 러시아계 주민에 대한 처우 문제 때문이다.
푸틴의 탄압을 피해기 위해 일부 러시아인들중에는 발트 3국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있고 발트 3국으로 귀화하는 경우도 있다. 그외에도 러시아의 매체 '메두자'는 푸틴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리가에 본부를 세웠다.
7.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는 모두 외교관계가 성립되어 있고, 에스토니아의 경우는 대한민국 단독 수교국이다. 주 핀란드 대사관이 에스토니아를, 주 폴란드 대사관이 리투아니아를 겸임하고 있으며 주 스웨덴 대사관이 겸임하던 라트비아는 2013년 12월 2일에 개설된 주 리가 분관이 관할한다. 또한 라트비아는 서울에 대사관이 있지만, 에스토니아는 도쿄의 주일 대사관이, 리투아니아는 방콕의 주태국 대사관이 대한민국 업무를 겸임한다.
또한 이들은 한국과 함께 같은 날인 1991년 9월 17일에 UN에 가입했다. 당시 UN 가입국은 북한, 대한민국,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이다.
한국과의 교류는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활발해지고 있고 발트 3국을 여행하는 한국인들도 많이 있다. 2019년에는 문희상 국회의장이 발트 3국을 방문해 다양한 교류 및 협력 확대를 약속했다.#
북한과의 관계는 에스토니아만 북한과 미수교 상태이고[13]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북한과 수교 상태이다. 의외로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한국보다 먼저 북한과 수교를 맺은 반면[14] , 에스토니아는 북한과 처음부터 수교를 맺지도 않았다.
8. 스포츠
스포츠에서는 소련시절 대부분 소련에 부속되어있으나 소련 해체 후 각자 독립적인 팀이 되었다. 발트 3국도 축구를 하긴 하는데, 3국이 공히 유럽 변방에 속하는 국가들이라 라트비아만 유로 2004 본선에 한 번 진출해본 적이 있을 뿐 아직까지 어떠한 발트3국의 일원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적은 없다. 덧붙여 피파랭킹은 3국 사이에 서로 엇비슷한편. 심지어 UEFA 유로 2020 예선에서는 3국이 공히 한심한 플레이로 일관하며 동네북 신세로 전락하면서 다른 팀들에게 신나게 얻어터진 끝에 나란히 조 최하위로 탈락하는 수모까지 겪었다.[15]
다만 다른 스포츠에서는 리투아니아의 경우는 농구에서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메달권에 들었을 정도로 정상급 실력을 가지고 있고, 라트비아는 스켈레톤 등 동계스포츠에서 이따금 금메달을 따낼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9. 경제
독립 직후에 러시아로부터 연료를 더 이상 값싸게 보급받지 못하고 교역도 크게 줄어든 데다가 가격자유화로 물가가 폭등하여 경제력이 바닥으로 치달았으나 1990년대 중반에 바닥을 찍었고 이후로는 서방과의 무역 관계 증진을 통하여 2000년대 엄청난 성장을 했다. 아직까지는 소득수준이 노르딕 국가보다 밀려서 대한민국의 2000년대 중후반 소득수준과 유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옛 동구권 기준으론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2010년에 에스토니아가 OECD에 가입한 것을 시작으로 2016년에 라트비아, 2018년 5월에 리투아니아가 OECD에 가입해 현재는 발트 3국이 모두 OECD 회원국이다.
에스토니아의 경우 1인당 GDP가 90년대 중반 5,000$에서 2014년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23,100$까지 폭풍성장하는 등의 위엄을 보여 발트의 호랑이라 불린다. 라트비아의 경우 2008년 경제위기 이후 경제성장률 -17.7%를 기록했다가 이후 어찌어찌해서 회복중이다.
현재 중진국 함정을 성공적으로 돌파한 사례로서 OECD, IMF 등에서 3국 모두 선진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독립 직후에는 3국이 독자적인 화폐를 사용했지만, 2010년에 에스토니아가 유로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2014년에 라트비아, 2015년에 리투아니아가 유로화 전환을 끝마쳐 현재는 3국 모두에 유로화가 통용된다.
10. NATO 순회 공군 (Baltic Air Polic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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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 3국은 공군을 보유하지만 전투기는 보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 대신 NATO 가입국들이 돌아가면서 전투기를 발트 3국의 공군기지에 전개하여 영공을 방어하는 Baltic Air Policing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역대 주둔 국가 목록은 NATO Baltic Air Policing 문서 참조.
11. 관련 문서
[1] 다른 명칭과는 달리 '에스토니아'라는 이름과는 연관이 없다. Ugaunia라는 에스토니아의 옛 명칭에서 온 말이다.[2] 각 나라언어로 발트3국을 표현하는 말[3] 아직까지는 곳곳에서 혼용하여 쓰고있다.[4] 다른 두 나라보다 더 빠르게 유로화를 도입할 예정이었지만 금융위기로 인해 계획을 철회하고 가장 늦게 도입하게 되었다.[5] 유별나게 무교가 많다. 그외 무응답도 16.55%이며, 나머지 기타종교는 3.25%정도이다.[6] 소련에게 병합당하기 전에는 소련의 괴뢰 국가라고 봐도 무방하다.[7] 이 시위를 기념하여 Baltic Way 팀 수학 경시대회가 시작되었다고 한다.[8] 해당 성향은 체코와 폴란드, 헝가리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경우는 자신들이 중부 유럽이라고 적극 어필하는 중.[9] 폴란드의 입김이 강했던 리투아니아를 제외하면 루터파 개신교가 우세한 편이다.[10] 영어 위키백과의 북유럽 항목 참조.[11] 보통 10살 이상 난다. 참고로 OECD의 남녀 기대수명의 차이는 5.4세, 대한민국은 6.0세이다.[12] 한국은 98.8명.[13] 2006년에 북한의 1차 핵실험으로 인해 북한의 국가승인을 취소했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도 에스토니아가 북한을 미승인국으로 취급하는진 불명.[14] 북한은 1991년 9월, 한국은 10월.[15] 리투아니아는 룩셈부르크와, 에스토니아는 벨라루스와 각각 한 차례씩 비긴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경기에서 전패하며 달랑 승점 1점만 얻었다. 라트비아가 그나마 최종전에서 오스트리아를 1:0으로 꺾는 이변을 연출하긴 했지만 라트비아 역시 앞선 경기에서 전패해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와 크게 다를 게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