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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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메이링(宋美齡)
장제스(蒋介石)
천궈푸(陳果夫)
천리푸(陳立夫)
쑹쯔원(宋子文)
쿵샹시(孔祥熙)
쑹아이링(宋靄齡)
1. 개요
2. 상세
2.1. 장가(蔣家)
2.2. 송가(宋家)
2.3. 공가(孔家)
2.4. 진가(陳家)
3. 몰락
4. 평가


1. 개요


四大家族 / Four Biggest Households
국민당 정부가 국공내전으로 본토에서 밀려나기 전까지 장제스의 주위에서 중국의 정치와 경제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네 가문을 가리킨다. 각각 장제스의 가문인 장가(蔣家), 장제스의 부인 가문 송가(宋家), 동서 가문 공가(孔家), 선배 가문 진가(陳家)이다.

2. 상세



2.1. 장가(蔣家)


장제스의 가문인 장씨는 본래 절강성 봉화현(奉化縣) 계구(溪口)의 소금 상인이었다. 장제스의 할아버지 장사천(蔣斯千)이 농사 대신 상업에 뛰어들어 옥태염포(玉泰鹽鋪)를 열고 소금, 쌀, 석탄 등을 거래하기 시작하면서 집안이 부유해졌고, 중간에 태평천국의 난으로 잠시 사업을 접기도 했지만 이내 난리가 수그러들자 그 아들 장조총(蔣肇聰)이 사업을 이어받아 세를 더욱 키웠다.
이 장조총은 전처 서씨(徐氏)에게서 아들 장서생(蔣瑞生)과 딸 장서춘(蔣瑞春)을 보았고, 서씨가 죽자 다시 과부로 있던 왕채옥(王采玉)을 맞아들여서 아들 장서원(蔣瑞元), 딸 장서련(蔣瑞蓮)과 장서국(蔣瑞菊), 그리고 막내아들 장서청(蔣瑞靑)을 보았다. 이 가운데 장남 장서생은 뒤에 제칭(介卿 개경)이라는 자를 받았고, 차남 장서원은 개석(介石)이라는 자를 받고 다시 중정(中正)이라 개명하는데 바로 우리가 아는 장제스다.
장사천
장조해
장조총
 
전처 서씨 소생
후처 왕씨 소생
 
장서생
장개경
장서춘
장서원
장개석
장서련
장서국
장서청
하지만 장제스가 고작 8살 되던 1894년에 장사천이, 다시 이듬해에는 장조총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이들 남매는 곧 갈라졌다. 이미 장성한 전처 소생의 장제칭은 큰아버지 장조해(蔣肇海)의 양자로 입적되어 옥태염포를 경영하기 시작했고, 후처 소생의 장제스 등은 풍호방(豊鎬房) 저택에서 살았다. 여기에 이윽고 막내 장서청이 요절하면서 강인한 성품의 왕씨는 장제스를 교육시키는 데 모든 힘을 쏟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장제스는 17세부터 봉록학당(鳳麓學堂)에서 신식 교육을 받다가 20세에는 하북의 보정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로 진학했고, 다시 이듬해에는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진무학교(振武學校)에서 5년 동안 유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일본 유학 기간에 장제스는 일본에서 쑨원이 세운 혁명조직인 동맹회에 들어가 그 간부이자 상해 암흑가의 거물인 천치메이(陳其美)와 의형제를 맺었고, 1910년에 천치메이와 함께 귀국해 신해혁명에 참여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자신의 이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장제스의 친족이라고는 어머니 왕채옥과 이복형 장제칭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장제칭은 일찍이 영파(寧波)에서 법학교육을 받고 법관으로 근무 중이었는데 슬하에 아들 장궈빙(蔣國柄)과 딸 장화쇼(蔣華秀)를 두고 있었고, 장제스도 이미 15세 되던 해에 같은 근처 동네의 마오푸메이(毛福美)와 결혼해 1910년에 아들 장징궈(蔣經國)를 낳았고 또 1916년에는 친구 대계도(戴季陶)의 아들이라는 비화가 있는 일본 기녀 소생의 장웨이궈(蔣緯國)를 양자로 들였다.
이후 1921년에 장제스는 마오푸메이와 이혼한 뒤 쑨원이 있는 광주로 건너가고 이를 따라 장제칭도 광동정부로 가서 지방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장제스가 우여곡절 끝에 천중밍(陳炯明)의 쿠데타에서 손문을 구해내고 광동정부에서 한 자리 차지하게 되자, 평소 집안에서 장제스와 응어리가 있던 장제칭은 고향으로 돌아가 전장(錢莊)을 경영했다. 전장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니고 그냥 규모 좀 있는 대금업, 전당포 수준이었다. 장제칭의 아들 장궈빙도 이렇다 할 권력이 없이 지방 경찰서장에 머물게 된 것은 덤.(...)
한편 장제스에게 이혼당한 마오푸메이는 계속 봉화현의 본가에 남아서 장징궈와 장웨이궈를 키우고 있었다.[1] 장징궈는 1925년에 소련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공산주의, 특히 그 중에서도 트로츠키주의를 추종하게 되어 중국공산당을 힘으로 찍어누르는 장제스에게 반대해서 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기까지 12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고, 경제학을 공부하던 장웨이궈는 1937년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 독일군에 복무하다가 1939년에 중일전쟁이 개시되자 비로소 돌아왔다.
그리고 장제스는 국민당 정부 내에서 완전히 집권한 뒤 다시 쑹메이링과 결혼했음에도 더 이상의 아들을 보지 못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 장씨 가문 내에서 이렇다 할 사람은 장제스밖에 없는 셈.[2] 장제스는 중앙은행(中央銀行)과 자원위원회(資源委員會)를 장악하고 있었고, 이후 귀국한 장징궈가 신감남국민경제건설공사(新贛南國民經濟建設公司)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아래의 다른 가문들과 비교해보면 이 정도로 4대 가문에 끼는 것은 부족한 감이.(...) 장웨이궈는 장징궈보다도 더 젊은데다 장징궈의 견제를 받아서 중일전쟁 발발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장제스의 양자라는 후광을 제외하면 별다른 실권도 없었다.

2.2. 송가(宋家)


장개석의 아내 집안인 송씨 가문은 본래 광동성 남쪽의 해남도 문창현(文昌縣)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빈농인 한씨(韓氏) 가문이었다. 이 가문의 일원이던 한홍익(韓鴻翼)은 한정준(韓政準), 한교준(韓敎準), 한치준(韓致準)이라는 세 아들을 두었지만 집안이 너무나도 가난해서 도저히 한교준을 부양하지 못하고 작은아버지 한금이(韓錦彝)에게 입적시켰는데, 한금이도 사정은 마찬가지라 다시 그를 부인 송씨의 동생이 있는 미국 보스턴(Boston)으로 보내서 차와 비단을 파는 가게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며 살아가게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상점을 뛰쳐나와 앨버트 갤러틴(Albert Gallatin) 호의 선원이 된 한교준은 그의 이름을 ‘차오순’이라고 발음하는 데 따라 자신의 이름을 ‘찰스 송’이라 고치고 감리교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빈농의 아들 한교준은 선교사 송가수(宋嘉樹)가 되어 떠난 지 십여 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국에 금의환향해 상해의 선교단체에 소속된 송가수는 일전에 미국에서 만났던 유학생 온병충(溫秉忠)과 우상주(牛尙周)의 도움으로 명문 예씨(倪氏) 가문의 신여성 예계진(倪桂珍)과 혼인을 맺었다. 이를 바탕으로 송가수는 성경을 비롯한 인쇄 사업을 성공시키고, 더 나아가 부풍(阜豊) 재벌의 지배인이 되어서 중국의 자본을 서구의 기술․자본과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또한 아직 20대인 손문의 추종자가 되어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예계진은 장녀 송애령(宋靄齡), 차녀 송경령(宋慶齡), 삼녀 송미령(宋美齡)과 장남 송자문(宋子文), 차남 송자량(宋子良), 삼남 송자안(宋子安)을 낳았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와 신식 대학 교육을 이수한 신지식인들이 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상해로 돌아온 송애령과 송경령은 모두 손문의 비서가 되어 신해혁명에 동참했지만, 이내 원세개의 배신으로 손문이 일본에 망명하게 되자 자매의 길은 갈라졌다. 송애령이 손문의 비서를 그만두고 산서의 부호인 공상희(孔祥熙)와 결혼한 데 반해, 송경령은 집안의 반대와 26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을 강행했다. 한편 언니들보다 뒤인 1917년에 귀국하고 바로 이듬해 아버지의 상을 당한 송미령은 한동안 유학 시절에 만난 유기문(劉紀文)과 연애를 계속하다가 4.12 쿠데타와 무한정부의 흡수로 오롯이 정권을 손에 쥔 장개석과 결혼했다. 사람들은 이 송씨 집안의 세 자매를 가리켜 “미령은 권력을 사랑했고, 애령은 돈을 사랑했으며, 경령은 조국을 사랑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숭고한 송경령을 용, 강단 있는 송미령을 범, 탐욕스러운 송애령을 개에 비유하기도 했다.
한편 송씨 가문의 장남이던 송자문도 손문의 휘하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17년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송씨 집안의 자본을 이어받은 송자문은 금융인으로 성공을 거둠과 동시에 1924년 광동에서 중앙은행이 설립되자 그 총재가 되었고, 그 이듬해 손문이 죽자 개편된 국민정부에서 갓 32세의 나이로 재정부장의 자리에 올라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이후 그는 1934년에 전국경제위원회 상임위원으로서 중국의 투자 자본을 결집시켜 중국건설은공사(中國建設銀公司)를 세우는 등 경제건설의 기치를 내세워 각종 산업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지만, 이는 거꾸로 말해 송씨 가문의 자본을 각종 산업으로 확장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송자문은 중국은행, 광동은행, 신화은행, 중국국화은행, 상해은행, 중국보험공사의 사장이나 주주가 되어 이들 금융자본을 한 손에 거머쥐고 나아가 당시 번창하던 중국면업공사, 화남미업공사, 남양형제연초공사로 재산을 불려나갔다. 이밖에도 철로, 방직, 제분, 제지, 출판, 광산 등 송씨 가문의 그림자는 실로 방대한 사업체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2.3. 공가(孔家)


이러한 송씨 가문을 통해 장개석과 동서지간으로 맺어진 공씨 가문은 춘추시대 공자(孔子)의 후손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집안이었다. 그 지파인 61대손 공굉문(孔宏問)이 현령이 되어서 임지인 산서(山西)에 정착했고, 다시 그 후손인 74대손 공번자(孔繁慈)는 청나라 말에 공생(貢生)이 되어 북경에서 선생과 서기로 일하다가 아편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의화단 운동을 피해서 산서성 태곡현(太谷縣)으로 돌아왔다. 일찍이 고향에서 그는 아내 남씨(南氏)에게서 아들 공상희(孔祥熙)와 딸 공상정(孔祥貞)을 보았는데, 이들은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올라가 신문물을 목도하고 공리회(公理會)가 세운 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이윽고 의화단이 진압되자 공리회를 도와 뒤처리를 맡았던 공상희는 공리회의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해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공상희는 1907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와서 명현학교(銘賢學校)를 세워 그 교장을 맡았으며, 이윽고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태곡현의 상단과 학생들을 조직하여 민단(民團)을 만들고 산서성 중부의 민군 총사령이 되었다. 이로부터 공상희는 교육과 동시에 상업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영국의 아시아각패화유공사(亞細亞殼牌火油公司)로부터 산서성의 등유 전매권을 따내어 돈을 벌었다.
다시 1913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공상희는 재일화교 기독교 청년회의 총간사가 되었는데, 이와 더불어 일본으로 망명해 온 손문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가 손문의 비서로 있던 송애령과 혼인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시점의 일이었다. 1915년에 산서성으로 돌아온 공상희와 송애령은 산서의 군벌이던 염석산(閻錫山)의 막하로 들어가 사업을 더욱 확장시켰다. 이후 1919년에는 5.4 운동과 함께 산서에 기근이 들자 이재민을 사업에 고용하는 방식으로 산서성 서부의 기민들을 구휼하여 더욱 명망이 높아졌다.
손문 사후 광동정부에서 재정청장을 맡게 된 그는 장개석의 남경정부에서도 실업부장(實業部長), 재정부장, 행정원장을 역임하고 장개석이 잠시 사퇴한 동안에는 그를 대리하여 주석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다시 그 이듬해인 1932년부터는 1년 동안 미국과 유럽의 독일, 이탈리아 등을 순방하고 돌아와 중앙은행 총재로 금융을 거머쥐었고, 위에서 말한 송자문의 뒤를 이어서 11년 동안 재정부장의 자리에 있었다. 바로 이 기간에 그는 송자문이 추진하던 국화운동(國貨運動)을 이어받아 1935년 11월에 화폐긴급령(貨幣緊急令)을 발효하여 은본위제도를 폐기하고 달러 외환보유고에 기반한 법폐(法幣)를 유통시키기는 법폐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남경정부 시절에 공씨 가문 내에서 공상희 이외에 딱히 눈에 띄는 인물이 보이지는 않는다. 공상희의 장남 공영간(孔令侃)이 양자회사(楊子會社)를 경영하고 있었으며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재정부 특무비서로 임명되었고, 차녀 공영위(孔令偉)는 가릉회사(嘉陵會社)의 운영자가 되어 막대한 재산을 가졌지만 모두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자본주의 속 귀공자와 귀공녀의 모습이지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 기득권의 중심축은 '송가황조(宋家皇朝)'였다.

2.4. 진가(陳家)


그러나 4대 가문 중에서도 진씨(陳氏) 가문은 유일하게 송씨 일가와 인척관계로 맺어져 있지 않았다. 진씨 가문은 절강성 오흥현(吳興縣)의 가난한 농민이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원래는 지방의 향신 혹은 부유한 상인이었지만 태평천국 운동으로 가세가 몰락하고 진기미의 아버지도 1890년에 사망하면서 빈농으로 전락했다고 한다. 이후 진기미는 학업을 그만두고 12년 동안 전당포를 운영하면서 그의 형 진기업(陳其業)과 동생 진기채(陳其采)의 학업 자금을 제공했다. 이에 힘입은 진기채가 국비유학생이 되어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고 돌아와 호남과 절강에서 신군의 창설을 이끌게 되자, 동생의 입신에 자극받은 진기미도 전당포를 그만두고 상해로 떠나 회계사로 일하면서 각 방면으로 사회적인 인맥을 만들어나갔다.
이후 3년 만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경감학교(東京警監學校)에 입학한 진기미는 동시에 손문이 일본에서 조직한 혁명조직 동맹회(同盟會)에 들어갔다. 그는 진기채에게 보은하고자 하던 상해 청방(靑幇)의 우두머리 범고두(范高頭)에 힘입어 상해 암흑가의 두목들을 휘하로 끌어들였고, 자신과 같은 절강성 사람인 장개석과 의형제를 맺은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마침내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진기미는 이를 기반으로 상해 혁명군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경쟁자인 도성장(陶成章)의 암살을 사주하고 도준보(陶駿保)를 총살시키며 는 등 암약하다가 정작 그 자신도 1916년에 황제가 되고자 꾀하는 원세개의 마지막 발악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렇듯 진기미는 허무하게 암살되었지만 그 형제 진기업과 진기채는 계속 혁명적인 행보를 이어나갔다. 일본에 유학을 다녀왔지만 국가에 등용되지 못한 진기업은 가업을 이어받아 비단 장사를 경영하는 한편 지방의 공익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서구의 면포 덤핑에 맞서 그 기술을 받아들여 비단 직조 기술을 개선하고, 자본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고리대로 농민들을 착취하지 않았으며, 현지의 수해를 줄이기 위한 수리사업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이는 지방의 향신이 근대적 실업가로 전환한 모습이었다. 반면 진기채는 북경정부에서 이탈해 진기미와 함께 원세개의 독재에 저항하다가 군부에서 퇴출되고 근대적 실업가로 전환해 중국은행과 대풍공사(大豊公司)에서 근무하고, 이후 장개석의 북벌 과정에서 절강성의 재정과 행정을 도맡아 1931년에는 국민정부의 주계청장(主計廳長)까지 올랐다.
하지만 진씨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이들은 단연 진기업의 아들인 진조도(陳祖燾)와 진조연(陳祖燕) 형제다. 그들의 자인 진과부(陳果夫)와 진립부(陳立夫)로 더욱 잘 알려진 이들은 장개석의 친위대로 악명을 떨쳤던 것이다. 신해혁명에서 무한봉기에 직접 참가했던 진과부는 이후 진기미를 따라 원세개에게 반기를 들면서 상해의 암흑가나 장개석과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진기미가 암살당하자 진과부는 상해에서 장개석을 주주로 투기사업을 전개하며 증권무역교역소를 경영했고, 이렇게 벌어들인 돈은 손문의 광동정부를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장개석과의 인연은 장개석이 교장이 된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군수물자를 공급하고 학생들을 모집하게 되면서 더욱 긴밀해졌다.
장개석이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정부를 장악하자 진과부는 국민당의 감찰위원과 조직부장의 자리에 올라서 국민정부 내에서 입지를 굳혀나갔다. 이 시기 국민당의 간부직에서 공산당원을 몰아낸다는 정리당무안(整理黨務案)이 바로 장개석의 지시 하에 그가 주도한 정치공작이었다. 더불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진립부도 중산함 사건 이전부터 장개석의 비서로 있다가 북벌이 완수된 뒤에는 조직부장을 역임하면서 국민당을 장악해 세간에는 “장가천하(蔣家天下) 진가당(陳家黨)”이라는 말이 나돌 지경이었다. 중일전쟁이 터지기 직전까지 진과부는 강소성 정부의 주석이자 회하 유역의 수리시설을 관장했고, 진립부는 토지위원회의 주임위원이 되었는데 두 자리에 모두 막대한 이권이 게재되어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중일전쟁 이후부터 차차 장제스의 장징궈 세습 시도에 반하여 미움을 사게 된 이들은 국부천대 이후로 천청에게 밀려 완전히 실각했다. 건강이 좋지 않던 천궈푸는 정치에서 물러났다 곧 죽었고 천리푸는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CC계는 곡정강 등 장제스에게 충성하던 일부 세력만이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국민당 독재를 옹호하는 나팔수로 전락했다.

3. 몰락


국공내전의 패배로 대륙에서 중화민국의 치세가 끝나면서 이들도 몰락하게 된다. 일부는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도피하거나 미국으로 이주하였으며, 대륙에 남은 자산은 공산당이 접수하게 된다.

4. 평가


중국 4대 가문과 그 구성원들의 인생은 근대 중국에 존재하고 있던 극적인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 시작으로 말하자면 장씨는 절강의 유복한 소금 상인이었고, 송씨는 해남의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이었고, 공씨는 산서의 빈한한 지식인이었고, 진씨는 절강의 몰락한 지방 유지였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사용되는 오성홍기(五星紅旗)의 작은 네 별이 각각 노동자, 농민, 지식인, 민족자본가를 상징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중국 4대 가문의 이러한 출신 성분은 중국을 지리적으로, 신분적으로 아우르는 자못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해외에서 자신들의 인생을 반전시킬 기회를 얻었다. 송가수와 공상희는 미국에서 중국과 서구를 잇는 신지식인이 되었고, 진기미와 장개석은 일본에서 암흑가에 몸담은 혁명가가 되었다. 더 나아가 진씨 가문의 진기업, 진기미, 진기채 삼형제와 송씨 가문의 세 자매는 각각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실업가, 혁명가, 권력자로서의 인생을 나누어 살았다. 특징적인 것은 미국에 유학한 송씨와 공씨가 주로 자본가적 성향을 띠게 된 데 반해, 일본에 유학한 진씨와 장씨는 주로 혁명가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들은 해외에 종속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고, 이는 국민정부의 운영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들이 철저히 국가 권력과 유착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송자문이 재정부장을 역임하고 그 지위를 이용하여 국내의 투자 자본을 결집한 뒤 금융자본의 지분을 차지한 사실이나 공상희가 염석산의 막하로 들어갔다가 국민정부에서 재정부장을 역임했던 사실은 이들의 정권 유착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화폐긴급령에서 보여지는 단순한 국가 재정의 사유화 외에도 전후에 금 시세를 조작하여 이득을 챙긴 황금안(黃金案)은 이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결과적으로 30년대 중반부터 경제 전반으로 확장된 4대 가문에 의한 독과점적 경제 지배는 기존의 중국 재벌사회를 구조적으로 변동시켰다. 4.12 쿠데타 이래로 장개석과 유착하고 있던 상해의 절강재벌과 암흑가 조직은 그로부터 나온 4대 가문이 전 중국의 금융을 장악하게 되면서 거꾸로 여기에 종속되거나 억압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일전쟁이 시작되어 이는 미처 노골화되지 못했지만, 전쟁이 끝나자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은 곧장 상해 암흑가의 거물이던 두월생(杜月笙)의 아들 두유병(杜維屛)을 체포하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기도 했다. 이는 곧 일단의 부패 정화 작업이었으나 여기에서 4대 가족이 무사했던 사실은 이들이 차지하고 있던 초월적인 위상을 방증하는 것임과 동시에 도리어 그들이 행사하는 금권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주었다.
1997년 만들어진 중국 영화 송가황조가 이들 4대가족들의 이야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다만 진가를 제외한 나머지 3개 가족의 이야기가 중심. 그 중에서도 쑹 자매 3명의 비중이 가장 크다. '황조'(皇朝)라는 표현은 이 4대가족 중에서도 송씨 가문의 영향력이 중국에서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1] 이혼당하긴 했지만 장제스의 고향의 풍습에 따라서 본가에 계속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때 장제스가 꼼수를 하나 썼는데 전처를 족보상으로 자신의 모친인 왕씨의 수양딸로 입적, 다시 말해서 '''전처를 자신의 누나(전처가 나이가 5살이나 많았다.)'''로 만들어 버린 셈. [2] 물론 천치메이가 죽고난 뒤 상해에서 장제스가 워낙 문란한 생활을 한 탓도 있을 것이지만, 송미령 평전에 따르면 쑹메이링이 미리 불임수술을 받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