쑹쯔원
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가, 외교관, 기업인. 장제스의 손윗처남이자 쑹아이링, 쑹칭링, 쑹메이링 자매의 형제이다. 국민혁명기부터 국공내전기까지 중화민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나 국부천대 과정에서 합류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원적은 광동성 문창현이나 쑹자수가 어릴 적에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상해로 귀국하여 정착했기 때문에 1894년, 상하이에서 기독교도 사업가인 쑹자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 쑹아이링, 쑹칭링이 있었으며 태어난 후 바로 세례를 받고 바울이라는 세례명을 가지게 되었다. 후에 여동생 쑹메이링과 남동생 송자량, 송자안이 차례로 태어났다. 이후 상하이 성 요한 대학교에 들어갔으며 미국 유학을 떠나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교 졸업 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따기 전까지 씨티은행에서 견습으로 은행업을 보았다. 아버지 쑹자수가 이미 쑨원과 각별한 사이었기 때문에 귀국 후 바로 중국 국민당의 혁명사업에 투신하였고 1923년 쑨원의 영문비서가 되었다. 뉴욕 타임스 기자 핼릿 어밴드는 이 시기의 쑹쯔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1925년 7월 1일, 국민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함에 따라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에 의해 중앙은행 은행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25년 7월 3일, 광동성 중부위원에 임명되었다. 1926년 재정부장 겸 국민정부 위원으로 충원되었다. 재정부장 임명 후 세수 체계를 개혁하여 정부의 수입을 극대화하였고 토지세 인하, 중과세 인상, 도박게임 합법화, 사치품세, 유류세, 호텔세, 아편세, 매춘세를 신설하여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정부 수입을 2배로 늘렸다. 또한 국채를 발행하여 의무적으로 구입하게 했고 이로 인하여 중앙은행의 저축고는 6배로 증가했다. 또한 많은 은괴를 마련하여 국민정부가 발행하는 지폐의 신뢰성을 확보했다. 중산함 사건 발생 이후 장제스의 지시를 받고 국민정부 주석에서 사퇴한 왕징웨이에게 귀국할 것을 청했다."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눈 한번 깜빡하지 않을 정도로 몰입하여 은행의 모든 고객들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다. 무척 예의가 바르면서도 늘 아득히 멀고 깊은 명상에 빠져 있는 듯했다. 무척 예의가 바르면서도 늘 아득히 멀고 깊은 명상에 빠져 있는 듯했다. 그는 직접 질문을 받을 때면 잠시 침묵했는데, 분명히 그러는 동안 그의 두뇌는 매우 빠르게 회전했을 것이다. 침묵이 끝난 뒤에는 두드러지게 짧은 몇마디로 심사숙고한 최종 의견이나 결정을 말했다."
2.2. 국민혁명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군비의 배분 등의 중책을 맡았으며 1926년 11월 16일, 강서성 난창에서 장제스와 함께 정부의 천도에 대해 논하는 등 천도논쟁에 개입했다. 군비 지급 문제로 장제스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장제스는 군비 150만원을 지급하지 않으면 "우리 관계의 마지막 불화"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쑹쯔원은 1927년 1월 장제스와의 관계단절을 선언했다. 이후 장제스가 상하이, 난징 등을 점령하자 강소, 절강성의 재정담당자로 임명되어 정부의 재정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상하이에 파견되었으나 장제스의 방해로 실패했다. 1927년 4월 10일, 왕징웨이가 상하이로 귀국하자 우징헝과 함께 그를 맞이하였다. 왕징웨이는 쑹쯔원에게 중앙의 지시가 있었는지를 물었으니 특별한 답을 얻지 못하자 상하이에 며칠 머물며 천두슈와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우한으로 이동하였다.
위에서 보았듯이 장제스와는 험악한 사이었으나 누나 쑹아이링과 매형 쿵샹시가 쑹쯔원에게 장제스와 화해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였고 먼저 행동하지 않으면 공산당원들에게 제거당할 것이라 경고하자 결국 다시 장제스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 1927년, 쑹메이링과 장제스의 결혼설이 대두되자 적극적으로 찬성한 쑹아이링, 쿵샹시 부부와 달리 별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쑹메이링과 장제스의 결혼식이 열리자 쑹자수를 대신하여 신부를 데리고 입장하였다. 1927년 말, 두웨성이 주도한 쑹메이링 납치 사건이 일어나자 쑹메이링을 구출하였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시작되자 군자금 1500만원을 마련하여 제공하였다.
국민혁명이 정리된 후 재정 문제로 장제스와 불화를 밎었기 때문에 구멍위, 천궁보 등의 반장 언론활동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외교계와 함께 관세자주권 회복에 노력하며 관세 인상을 통한 국내 사업 보호에 힘썼다. 1929년, 행정원 부원장 펑위샹이 1차 장계전쟁을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자 후임 행정원 부원장으로 지명되었다. 중국 경제 발전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양력설 채택, 자작농 육성, 도량형 통일, 세수 표준화, 예산안, 중앙은행 설립 계획을 발표했고 교육비 마련, 동부 해안가의 5개 성에서의 농지세와 상품운송비를 폐지했으며 전족, 흡연, 부패 척결운동을 지시했다. 이후 장런제와 함께 국가재건위원회를 통해 현대 발전소, 도로, 철도, 라디오 방송국 등을 건설했다. 반장전쟁 중인 1929년 6월 1일, 쑨커, 장제스, 쿵샹시, 쑹칭링, 쑹아이링, 쑹메이링과 함께 쑨원의 능묘를 참배했다.
2.3. 항일외교의 선봉장
1930년 5월,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단장으로 게오르크 베첼 중장이 부임하자 그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였는데 이 때문에 장제스는 1934년, 베첼을 한스 폰 젝트로 교체하게 된다. 1930년 12월 4일, 행정원이 개조됨에 따라 재정부장에 취임하였다. 1931년 6월 1일, 훈정시기 약법이 반포 시행됨에 따라 6월 15일, 국민정부 조직법이 수정되었는데 이에 따라 쑹쯔원은 국민당 제3기 5중전회에서 행정원 부원장으로 재선출되었다. 1차 양광사변이 발생한 후 그의 목숨을 노린 저격 사건이 발생하여 옆에 있던 비서가 총에 맞아 숨졌는데 공식적으로는 광동파의 소행으로 발표되었으나 두웨성이 배후에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사건 이후 불과 4시간 후 어머니 예계진이 사망했다.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9월 19일,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츠 마모루와 교섭하여 중일 양국이 참여한 위원회 조직을 제의했다.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은 이에 대해 찬성의 뜻을 보였으나 쑹쯔원이 9월 22일, 일본군의 철병 전에는 위원회를 조직할 수 없다고 위원회 설치 제안을 철회하면서 무산되었다. 1차 양광사변으로 장제스가 사퇴하면서 쑹쯔원도 천밍수에게 행정원 부원장직을 내주고 물러났으나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하면서 쑨커 내각이 붕괴되고 장왕합작이 결성되어 장제스가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복직하게 되면서 동반복직하여 재정부장으로써 중국의 재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상하이 사변이 격렬해지자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에게 훈련받은 제5군을 파견하자고 주장했으며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1932년 4월의 만주 해관의 송금 중단 사태를 놓고 미국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 주중 영국공사 존슨 등과 함께 공동 대응을 추구했으며 국제연맹에 이를 제기하였다. 미국은 쑹쯔원에게 만주국과 실제적 협정을 체결할 것을 권유했으나 쑹쯔원은 만주국을 인정하는 어떤 행동도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영미로부터 선견지명이 없고 비합리적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이후 일본과의 협상에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렇듯 이후 쑹쯔원은 대일 강경외교를 주장하면서 외교부장 뤄원간과 함께 일본산 제품에 대한 배척, 관세 부과를 주장하였고 대일 유화론자인 행정원장 왕징웨이와 격렬히 충돌하였다. 결국 왕징웨이는 1932년 8월, 당뇨병 치료를 이유로 쑹쯔원, 장제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사직서를 제출하고 독일 함부르크로 떠나버렸고 쑹쯔원은 행정원장 직을 잠시 대리하게 되었다. 1933년 4월 18일, 런던세계경제회의가 개최되면서 중국의 전권대표로 임명되어 영국으로 출국하였다. 영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미국에서 5월 29일, 부흥금융공사와 5천만 달러의 면맥차관을 체결하였고 영국에서도 차관을 얻으려 했으나 이는 실패했다. 쑹쯔원은 영국의 대일태도에 대한 중국인들의 분노에 대한 의견을 전달하고 대일제재를 요구하였으나 영국은 여전히 미온적 입장을 보였다. 이후 국제연맹의 수고에 대해 감사를 표한 후 귀국하여 장제스 및 전 외교부장 황푸 등과 회담을 벌였다.
이후 왕징웨이가 1933년 3월, 유럽 외유에서 돌아와 행정원장직에 복귀하면서 행정원장 대행에서 물러났다. 이후 장제스가 열하사변 이후 선안내후양외 정책으로 선회하면서 1933년 10월 28일, 초공작전을 위해 군비를 요구하는 장제스와의 갈등 끝에 행정원 부원장과 재정부장에서 사퇴했다. 이에 일본은 쑹쯔원을 아예 중국에서 추방시키라고 압력을 넣는 한편 쑹쯔원이 체결한 면맥차관을 엎어버리기 위해 공작을 벌였다. 쑹쯔원은 사퇴 후 유럽 외유를 떠났으며 12월, 주중 영국공사 램슨과의 회견에서 일본에 대한 증오와 장제스에 대한 불신을 격렬하게 토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4. 경제 전문가
1932년부터 상하이의 자본가들과의 회의를 통해 은본위제도의 폐지 의사를 밝혔으나 경제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과 재정력이 여의치 않아 정부에서 발행하는 은화로 통일하는 폐량개원을 실시했다. 1933년 10월 국민정부 직속기관으로 전국경제위원회가 정식으로 조직되면서 왕징웨이, 쿵샹시, 쑨커, 장제스와 함께 경제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취임하여 중국의 경제건설을 총지휘하였다. 1935년 4월, 중국은행이 정부 은행으로 개조되면서 은행 대표로 취임하였고 쿵샹시와 함께 12월에 법폐개혁을 전격적으로 단행하였다. 전체적으로 민간 기업 위주의 수출용 경공업의 육성과 합작사를 비롯한 농촌 생산성의 증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6년 초에 중국 공산당과의 대화 채널을 확보하기 위해 누나 쑹칭링과 상의하여 중국 공산당의 비밀 당원인 목사 둥젠우를 섬북으로 파견하였다. 12월, 서안 사건이 발생하자 쑹메이링, 천리푸와 함께 내전의 즉각적 중지와 장제스 구출을 주장했고 직접 특사로 파견되어 장쉐량과 협상하였다. 12월 25일, 장제스, 쑹메이링, 장쉐량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난징으로 돌아오는데 성공한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전국경제위원회 위원장으로써 통제경제를 실시하였다. 1940년, 가명을 쓰고 워싱턴을 방문해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점심을 먹은 후 2500만 달러의 차관 제공을 요구했다. 루스벨트는 5000만 달러 어치의 통화 안정 협정과 차관, 중국의 원자재를 구입하는 신용대부를 제공하는 데 동의했다.
2.5. 중일전쟁
1941년 시점에서는 워싱턴에 체류하며 대미 외교에 힘썼다. 1941년 11월, 주미 중국대사 후스가 미국이 중국을 희생하여 일본과 화해하려한다고 보고하자 격분한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 해군장관 필란데어 녹스 등에게 친서를 보내 격렬히 항의하였다. 12월,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중국이 정식으로 연합국에 가입하게 되자 중국이 버마 전투에 개입하였는데 이때 영국군이 중국군의 물자를 공공연하게 탈취하고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미국으로 파견되어 이에 대해 항의하였다. 또한 조지프 스틸웰이 중국으로 파견되었을 때 그가 중국이 혼란하던 시절에 군사무관으로 재직하던 사실을 들어 중국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이 우려는 정확히 맞아버렸다.(...)
1942년의 연합국 공동성명에 미국, 영국, 소련에 이어 중국 대표로 서명하였으며 5억달러 어치의 차관을 추가적으로 도입했다. 1943년 1월, 쑹메이링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여 중국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호소하였으며 1943년 5월의 트라이던트 회의 결과에 대해 장제스가 불만족스러워하자 미국을 방문, 루스벨트에게 랑군에 대한 영미의 작전이 실시되지 않고 버마 공격이 궁극적으로 중국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 없다면 중국군은 버마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전달하였다. 이 시기 쑹쯔원은 미국인들에게 쿠바 춤의 일종인 '룸바'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그가 대미 외교와 재정분야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정부의 제일 유력한 인물로 손꼽혔다. 쑹쯔원도 자신이 싫어했던 스틸웰과 허잉친을 제거하기 위해 천청가 결탁하여 정부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였다.
1943년 9월 8일, 국민당 5기 11중전회에서 전후 1년 안에 국민대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구성된 헌정실시 협진회에서 국방최고위원회 위원장 장제스의 지시로 협진회 위원으로 지명되었다. 1943년 12월 카이로 회담에 참여하여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등과 회담하였다. 이때 장제스에게 모든 중국의 경제기관은 자신이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열받은 장제스가 쑹쯔원에게 찻잔을 집어던진 일이 있었다고 한다.
1945년 6월 27일,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6월 30일, 이오시프 스탈린과 교섭을 실시하였으나 7월 14일, 스탈린이 포츠담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면서 회담이 중지되었다. 이에 주소 미국대사 해리먼과 긴밀히 회견하며 전후 질서에서 중국의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일시 귀국했다가 8월 7일, 외교부장 욍세걸과 함께 다시 소련을 방문하여 8월 14일, 중소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하였다. 1945년, 미국 대사 패트릭 헐리의 국공 화해 노력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였으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충칭을 방문하자 왕세걸, 헐리와 함께 저우언라이와 회담하였다. 또한 두위밍의 주도로 운남성장 룽윈이 무력으로 해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가 정부에 백기투항할 것을 권하여 룽윈을 군사참의원장으로 충칭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2.6. 행정원장으로서 전후 수습
1945년 5월, 쿵샹시가 맏딸 로저먼드의 결혼식을 뉴욕에서 성대하게 치른 일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었다. 특히 결혼 예복을 전쟁터에 나갈 군인들의 군복들을 제작하기 위한 부녀공작부에서 만들었다는 사실과 부당이익을 잔뜩 취한 사실이 들통나면서 쿵샹시와 쑹아이링 부부는 정부와 민간 양측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쿵샹시, 허잉친 파벌은 정부에서 완전히 힘을 잃고 장제스는 쑹쯔원과 천청에게 힘을 실어주어 쑹쯔원을 행정원장에 전격적으로 임명했다. 중일전쟁 종전 후 쑹쯔원은 정부 지출 감축을 위해 후방의 공장과 도급관계를 규정한 군수서 계약을 일괄적으로 취소하였다. 또한 연일 관계장관회의를 개최하여 물가 상승 억제, 실업 해소, 노동운동 방지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리고 11월 3일, 적산사창 보유 면사와 면포를 투매할 것을 지시하는 등 물가억제 정책을 구체적으로 행했다.
1945년 10월 31일, 충칭의 자본가들은 전쟁 수행에 협력한 공을 이유로 상하이의 적산 자본에 대한 접수권한을 요구하였으며 1946년 1월 3일, 쑹쯔원을 직접 찾아가 노동자들의 귀향 비용을 청구하였다. 이에 쑹쯔원은 자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경제부장 웡원하오와 상의하라고 이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행정원이 충칭의 공장과 기계를 구입해서 경영해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이런 낡은 골동품과 같은 기계를 구입하여 상하이로 가져가 무엇에 쓰겠는가?"라고 거부했다. 쑹쯔원은 비록 적과 협력한 죄는 있으나 신식 설비와 자본력을 갖추고 있는 상하이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전후 중국의 경제를 수습할 계획이었는데 이는 충칭의 중소자본가들의 원성을 샀다. 쑹쯔원은 10월 13일, 적산기업이라고 마구 폐쇄하는 것은 실업문제를 양산할 뿐이라며 상하이의 기업들의 신속한 생산력 회복을 지시, 상하이의 방직공업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정부가 베이핑, 상하이 등의 공장에 대한 제대로 된 접수 계획을 수립하기도 전에 각 지방기관들이 무단으로 약탈을 자행하면서 상하이와 베이핑의 자본가들도 정부에 원망을 품게 되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쑹쯔원이 개인 재산을 불리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마구 비난을 퍼부으며 민심 혼란을 야기하였다. 공산당의 선전에 쑹쯔원을 초기에는 쿵샹시에 대비되는 진보적 인물로 보던 혁신그룹도 쑹쯔원을 부패한 자본가로 몰아 많은 비판을 가했다.
1945년 11월 26일, 쑹쯔원은 최고경제위원회에서 "인민의 경제활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업에는 그 발전을 위해 정부가 적극 간여할 뜻임"이라고 발표하였으며 11월 27일 행정원 722차 회의에서 중국사직건설공회를 설립할 것을 선언했다. 쑹쯔원은 이어 대공보 기자와의 회견에서 정부는 국민의 의식주행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며 이를 위해 방직 설비를 장악하여 면사포 가격을 통제할 것이라고 밝히는 등 강력한 통제경제 정책을 이어나갔다. 1946년 9월 19일, 쑹쯔원은 정부 차원의 적산 접수에 착수하였고 1947년 3월 1일, 입법원에 계획을 보고하며 일탈행위가 발생하였음을 인정하였으나 행정원의 개입으로 질서가 회복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포로가 된 일본군에 대하여 육군 총사령관 허잉친과 논의한 후 경제회복에 유용한 기술자들은 송환화지 않고 잔류시켜 경제발전에 투입하였다. 그리고 1946년부터 심화된 물가상승 억제를 위해 왕윈우 등과 함께 연합판매 정책을 정력적으로 추진하였다. 하지만 자본가들의 저항에 부딪혔으며 환율의 급등으로 수입 원료 가격이 상승하여 물가 억제는 실패하였다. 결국 쑹쯔원은 1947년 2월, 국영산업에 대한 매각 절차에 들어갔으며 천리푸와 천궈푸 형제로부터 '황금안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정치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쑹쯔원은 같은해 3월 1일, 재정 경제 상황의 악화가 정국에 심각한 문제로 부상하였다는 사실을 표명, 국영사업의 민영화를 진행할 것을 충고하고 사직하였다.
2.7. 광동성장 시절
사직이 비준된 후 쑹쯔원은 4월 상순, 미국 대사 존 레이튼 스튜어트와 면담하여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곳은 광동 밖에 없다. 혁명은 항상 그곳에서 시작되었다."라고 발언하며 광동성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드러냈다.[1] 또한 악화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중국건설은공회에서 보유한 주식을 모두 국가에 기증하였다. 이에 국민정부는 1947년 9월 20일, 쑹쯔원을 광동성 정부주석 겸 정부위원에 전격적으로 임명하였다. 10월 3일 취임한 쑹쯔원은 1948년 1월 27일,자원위원회 위원장 웡원하오와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광동성의 전력건설, 남령매광 개발, 광동당업 건설, 강철창 건설 등 광동성경제건설에 대해 발표했다. 1948년 5월, 웡원하오가 행정원장으로 지명되면서 광동성 개발은 더욱 급진전되었다. 쑹쯔원은 만주와 대만에서 기술 인력 및 자본설비를 유치하고 수력발전소, 제당공장, 강철기계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그리고 영국과 독일에서 유학한 전문가들을 대거 초빙하여 광동성 정부에서 일하던 cc계 인사들을 제거하고 광동성에서의 권력을 확실히 하였다.
쑹쯔원은 긴급히 돈을 빌려 각 공장들을 가동시키기 위한 반년분의 원료를 구입하였고 이를 통해 발전소 가동을 재개하여 광저우의 전력 소비량은 크게 증가하였다. 1948년 7월, 쑹쯔원은 공장을 신설하는 한편 생산량 감독을 위한 제도를 도입하여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이에 1948년 8월까지 광동성의 대표적인 기업이었던 광주사직창은 전쟁 이전의 생산력을 회복하였다. 톈진과 상하이의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거나 가동률을 전혀 회복하지 못한 것에 비하면 괄목할 성과였다. 또한 제당공업에 대해서도 구조조정을 통해 인력을 줄이고도 오히려 생산력을 크게 높였으며 무역법을 입법하여 원료구매 문제도 해결하였다. 이는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농민들이 사탕수수를 공장에 제공하면 공장들이 이를 설탕으로 가공하여 설탕으로 갚을 수 있게하는 법이었는데 이 법의 인기가 대단하여 농민들이 앞을 다투어 신청하여 사탕수수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사탕수수가 남아도는 상황으로 변할 정도였다. 또한 시멘트 공장, 맥주공장, 제지공장 등의 영업도 모두 정상화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중일전쟁 중 약탈해간 설비를 반환받는데도 성공하였다.
하지만 국공내전의 재개로 정국은 매우 불안하게 변하고 있었다. 쑹쯔원은 금원권 개혁안에 대해서 처음부터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며 1948년 12월, 기어이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이 내려지자 광저우의 독찰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상하이 자본가들을 강경히 두들겨 팬 장징궈와는 달리 이 정책이 비현실적이라 여겼기 때문에 별로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1948년 말부터 광동의 공업을 대만으로 보내라는 압력이 가해졌지만 쑹쯔원은 공장 보호운동을 벌여 이를 대부분 광동에 남겼다. 내전이 악화되자 쑹쯔원은 광동성 주석직에 대한 사직서를 제출하였으며 1949년 1월 20일, 장제스가 쑹쯔원의 사임을 비준하였다. 1949년 1월 23일, 쑹쯔원은 광저우에서 고별 연설을 행하며 자신의 정치 생애는 끝났으나 광동성에 자신의 건설의 실적이 많다고 자부하는 연설을 남기고 미국을 떠났다. 이후 정부는 난징을 버리고 광저우로 천도하였으나 공산군의 위협으로 충칭으로 다시 천도했고 10월 14일, 광저우는 공산군에게 점령된다. 쑹쯔원이 남긴 공업 유산은 모두 중공이 접수하여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빠르게 재건되어 중공의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2.8. 말년
국부천대 과정에서 쑹쯔원은 대만 이주를 거부하고 병을 이유로 영국령 홍콩을 거쳐 파리로 떠났다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쑹쯔원을 4대가족의 일원이자 추악한 매판, 봉건, 관료자본가로 매도하였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마오쩌둥의 대필 작가이자 중국 공산당의 이론가인 천보다였다.
뉴욕에서 거주하던 쑹쯔원은 197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품 등은 후버 연구소에 기증되어 사료화되었다. 후버 연구소는 쑹쯔원 관련 자료들을 공개하여 중국 현대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도 쑹쯔원에 대한 평가를 높여 1985년 충칭에서 열린 항전시기 대후방 경제학술회의에서 마오쩌둥과 천보다가 제시한 '관료자본'이라는 용어와 개념이 부적절한 통속명칭임을 인정하고 쑹쯔원을 항전에 기여한 민족자본가이며 후방의 경제건설과 항전의 물질적 기초를 조성한 공이 있다고 평가했다.
3. 매체에서
호이4에서 중화민국 장관진으로 등장한다. 경제개발 국가집중을 밟은 후에 기용할 수 있는데 소비재 공장 5%를 줄여주는 버프를 준다. 인플레이션과 공업력 부족으로 허덕이는 중화민국 입장에서는 단비와 같은 인물. Eight Years' War of Resistance에서는 그런 거 없이 시작과 동시에 기용하는 것이 가능한데 법폐개혁과 독일과의 외교에 필요한 쿵샹시에 밀려서 중요도가 좀 떨어진다.
4. 주요경력
5. 참고문헌
5.1. 저서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사변기 중일 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중국의 자본주의논쟁사, 허척신 등 공저, 고려원.
- 중국근대농촌사회연구, 박정현, 고려대학교출판부.
- 전후중국경제사, 김지환, 구려대학교출판부.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일외교사연구, 구정승미, 선인.
-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티스트, 정두음, 선인.
- 중국초기혁명운동의 연구, 민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 근현대 중국의 국가건설과 제3의 길, 강명희, 서울대학교출판부.
-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리처드 번스타인, 책과함께.
- 다큐멘터레 중국 현대사 2~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기세찬, 경인문화사.
- 송미령 평전, 한울.
5.2. 논문
- 蔣介石과 4·12 政變, 배경한, 동양사학연구 38권, 동양사학회.
- 蔣介石의 '第1次 下野'와 復職, 김영신, 중국학보 44권, 한국중국학회.
- 中央特別委員會의 役割과 活動, 김영신, 동국사학 36권, 동국역사문화연구소.
- 唐生智와 武漢國民政府, 나현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南京政府 시기 국가주도하 국민경제 건설 : 民生主義 및 <實業計劃>과 관련하여, 강명희, 중국근현대사연구 31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1930년대 중국의 金融統一過程에서 본 중앙과 지방 : 廣東省의 지방화폐 정리과정(1936-1938)을 중심으로, 강진아, 중국학보 46권, 한국중국학회.
- 國民政府의 幣制改革과 中美銀協定의 의미, 김정현, 동아시아역사연구 5권, 동아시아역사연구회.
- 廢兩改元에 관한 一考察, 임지환, 전북사학 11,12권, 전북사학회.
- 만주사변 이후 남경국민정부 직업 외교관의 역할 연구 : 1931-1936, 석미자,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 다만 스튜어트의 보고에 따르면, 쑹쯔원은 광동성 정부주석직을 맡고 싶지 않아 했으나 장제스의 제안으로 가게 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