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천대

 


[1] / Retreat of the Republic of China to Taiwan
1. 개요
2. 과정
3. 결과
4. 가상 시나리오
4.1. 만약 국민당이 쓰촨 지역에 천도하여 버텼다면?
4.1.1. 국민당 정권이 생존에 성공했을 경우
4.1.2. 국민당 정권이 조기에 무너졌을 경우
4.2. 미국이 대만공화국을 세우거나 미국령으로 접수해버렸다면?
4.3. 만약 중화민국이 하이난 섬을 계속 차지했다면?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


'''국부천대'''는 1949년 12월 7일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중국 공산당에게 패배한 장제스중국 국민당이 본거지를 대만으로 옮긴 사건을 말한다.
오늘날 중국 대륙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고, 중화민국은 '대만' 혹은 '타이완'으로 불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 과정


'''중국 국민당의 이동 과정 (지도는 1947년 기준)'''
중국 국민당은 처음에 중일전쟁 때 정부를 이전한 적이 있던 쓰촨성 등의 중국 서남부로 다시 정부를 옮길 생각이었다. 실제로 중화민국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촉나라에 비유하여 제갈량후출사표에 나오는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 한나라(촉한)와 도적떼(역적, )는 양립할 수 없다)이라는 표현을 써오기도 했다. 물론 중화민국이 말하는 한적불양립의 '한'은 당연히 대만으로 옮겨간 중화민국 스스로를 가리키고, '적'은 중화인민공화국, 당시 중화민국의 표현으로는 공비.
이 때 중국 국민당타이완 섬 이전을 건의한 것은 지리학자 장치윈(장기윤, 張其昀)이었다.[2] 장치윈에 따르면, 대만은 오랫 동안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본이 남기고 간 산업자원이 있고, 공산당 세력이 미약한 데다 섬의 전략적 가치 등을 고려했다고 한다. 이에 더해서 대만은 일본이 장기간 점령한 상태라서 독자적인 군벌 세력이 없다는 점도 장제스의 흥미를 끌었다.
난징 함락은 4월 23일이었고, 그 후 국민당 정부는 타이베이에 정착하기까지 8개월간 광저우, 충칭, 청두 등을 전전했다. 난징 함락 후 국민당 정부는 일단 광저우로 퇴각했으나, 중공군이 화난(華南, 화남) 지방을 석권하면서 광저우가 위태로워지자, 10월 13일 광저우를 버리고 중일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충칭으로 이동한다. 그러다가 11월 30일 충칭마저 공산당 수중에 떨어지자, 국민당은 재차 청두로 퇴각하였고, 12월 7일 쓰촨성 시창(西昌)에 대본영(총사령부)을 남겨두고 타이베이로 철수하게 된다. 12월 27일 청두는 함락되었고, 시창에 잔류한 국부군은 이듬해 4월까지 저항을 이어가다 중국 공산당에 점령당한다.
엄밀히 말하면 타이베이는 정식 수도가 아니라 본토를 수복하기 전에 중화민국중국 국민당이 임시로 머물며 권토중래를 노리는 곳이었지만[3],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였다.. 오히려 타이완 섬 방어에 온 힘을 다 해도 모자랄 판이고, 그 결과 타이베이중화민국의 실질적인 수도로 기능하게 된다.

3.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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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국공내전이 압도적 판세로 흘러가며 당연하게도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석권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단 실제 건국 선언은 국부천대 이전인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 선언을 한 것은 내전이 끝난 후가 아니라 내전 도중이다. 난징 함락인 4월부터 10월까지는 과도기로 대륙의 주인이 중화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탈바꿈을 준비하는 기간이 되었다. 그리고 중화민국은 세계에서 4번째로 넓은 나라[4]에서 벨기에보다 조금 더 넓은 크기로 축소되었고, 인구도 인구 5억 6천만의 세계 최다 인구국에서 800만 남짓하게 축소되었다.[5]
그 후로도 내전이 끝나지 않았으니, 신생 국가 중화인민공화국과 기존 국가 중화민국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의 실효 지배 지역을 계속해서 점령하게 되었고, 중화민국의 실질적 영토가 현재와 같이 확정된 것은 1950년대 중반으로 이 전쟁은 이후 더 이상 뺏고 뺏기는 땅 없이 교착상태를 유지하다가[6] 1970년대 말에 사실상 끝났다. 사실상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양안이 휴전이나 정전 협정을 특별히 맺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덩샤오핑은 대만에 대해 현 체제를 유지하는 한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적은 있다. 이 역시 어떤 형태의 협정이나 합의가 아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이 지금은 이미 멸망했고 과거 중화민국의 권리'''만''' 자신들이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7]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지금 있는 중화민국은 말하자면 중화민국을 참칭하여 타이완을 점거하고 있는 국민당의 불법 정권인 셈이다. 중화민국 역시 공식적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만으로 이전한 이후 중국 국민당의 생존은 보장되었다. 중공군은 대만 침공을 준비했고, 이전부터 국민당 정권을 엄청나게 부정적으로 봤던 미국은 공산당 쓸어버리라고 국민당에 지원을 해주기는 했는데 국민당이 대책없이 중국 대륙에서 밀려나는 것을 보고 미련없이 끊었고, 트루먼 대통령이 공공연히 대만 섬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큰 관심이 없었다.자료 이 때 CIA도 얼마 못 가 대만 섬도 공산당에 점령되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공화당 내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의 무관심이 중국을 공산화했다며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 6.25 전쟁이 터지자 트루먼은 미군 파병을 결정함과 동시에 대만 해협에 항공모함을 띄워 공산 중국을 견제하기 시작했고, 대만 침공을 위한 중공군 부대는 6.25 전쟁에 투입되어 소모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중공군은 대만 침공을 포기했다.
또한 장제스의 독재 체제 자체는 오히려 국부천대를 통해 완성(?)되었다. 기존의 군벌 세력을 기반으로 하며 국민당 내외에서 장제스를 견제하였던 정치 세력들은 국부천대로 인해 중국 본토에 가지고 있었던 군사력, 경제력 등의 모든 기반을 상실하였고 이 때문에 장제스를 견제할 힘을 잃었으며 장제스는 확고한 1인 체제를 만들 수 있었다.
국부천대에 따라 사실상의 수도는 난징에서 타이베이로 옮겨졌다. 하지만 천도 이후에도 중화민국은 오랫동안 명목상 수도난징이라고 '''했으며''', 천수이볜, 마잉주 집권기를 전후해서 '법적인 수도'에 대한 인식이 약해졌다. 행정원이 발행하는 연감에선 아예 대륙지구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며, 정부 관료들도 당당히 "중화민국의 수도는 타이베이"라고 말한다.
이 때 중국 국민당과 함께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 성[8] 관할 지역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외성인이라 부르며,[9] 타이베이, 신베이, 지룽, 타오위안 등 대만 섬 북부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다. 아무튼 국공내전 덕에 타이베이는 중화민국의 '변방의 고만고만한 도시 중 조금 큰 도시'에서 '중심 도시'로 변모해버렸다. 1661년에 세워진 타이완 정씨 왕국의 수도가 자리잡았던 타이완 섬 남부에 있는 타이난 이래로 중국 역사에서 수도를 섬에 둔 첫 사례인 것.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이 1949년 10월 건국을 선언하자 기존 중화민국에 대한 승인을 전격 취소해 버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10] 그 뒤를 사회주의 국가들과 제3세계 국가들이 뒤따랐는데 영국이나 노르웨이 등 서방 국가들도 이를 뒤따라 중화민국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특히 영국은 자국령인 홍콩의 안보를 걱정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가장 빠르게 승인한 서방 국가가 되었다.[11] 노르웨이는 몰라도 영국만큼은 미국과 매우 밀접했기 때문에 홍콩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빨리 중국 공산정권을 승인할 일이 없었을 거라는 것이 중론이다. 물론 중화인민공화국의 대륙 지배를 돌이키기 어려워진 1960년대부터는 너도나도 중화민국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4. 가상 시나리오



4.1. 만약 국민당이 쓰촨 지역에 천도하여 버텼다면?



4.1.1. 국민당 정권이 생존에 성공했을 경우


만일 중국 국민당이 타이베이로 가지 않고 청두에 눌러 앉았다면, 즉 쓰촨 성을 중심지 삼아 윈난 성, 구이저우 성등을 기반으로 대륙에 잔류하면서 중원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치하였을 것이다. 이럴 경우 타이완 섬이 정권의 중심지가 되는 일 없이, 지금과 같이 중국 본토인과 구별되는 '대만인'이라는 정체성은 옅었을 것이다. 물론 섬 지역의 특성상 내륙인들과는 좀 다른 지역색이 강했을 테지만 적어도 '''"나는 중국인이 아닌 대만인이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었을 수도 있다.
대신 대륙의 분단이 지속되면, 중국 서남부 지역의 중국인들이 '사천인'이나 '서남인'으로서 지금의 대만인들과 비슷하게 중원의 중국인들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중국 국민당미국, 영국, 포르투갈, 티베트, 위구르 등의 지원을 얻어가며 중공과 맞서서 북쪽으로는 중원을 도모하고 동쪽으로는 중국 중남부 내륙을 엿보며 동남으로는 중국 동남부 연해지대를 노려 제2의 북벌과 반공 대륙을 시도했을 것이다. 이같은 중국 분단의 정세는 남북으로 이념대립 중이었던 한반도에서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적어도 중공의 지원이 불확실해진 상황에서 김일성이 남침을 주저할 것이고, 남침을 강행할 경우 중공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북한 정권 자체가 와해되었을 수도 있다.

4.1.2. 국민당 정권이 조기에 무너졌을 경우


그러나 쓰촨 성에 자리잡았을 경우 중화민국의 수명이 그리 오래 가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높다. 쓰촨 성이나 윈난 성은 군벌의 세력이 강한 곳이라 기존의 방식인 중앙정부 따로, 군벌 지배지역 따로의 현상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으며, 이렇게 되면 지금의 대만처럼 버티기는커녕 내부 분열로 인해 자멸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중화인민공화국은 별다른 피해도 입지 않고 아주 손쉽게 하나의 중국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윈난 성과 쓰촨 성에 국민당군이 상당수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죽지세로 밀린 끝에 버마와 태국 국경선을 넘어서 피난가게 되므로 이들 지역으로 수도를 옮겼다면 피난 과정에서 와해되거나 지배 영토가 하나도 없는 망명 정부 수립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내륙 깊숙이 있어서 유사시 미국이 항공모함 등으로 도와주러 오기 매우 어려운 지역이다.
쓰촨 지역으로의 피난이 위험요소가 많았던 걸 고려하면, 국민당의 대만 이전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1930년대 중국공산당이 장강 이남 지역에 건설했던 해방구 중화 소비에트 정권이 국민당군의 공격으로 무너지자, 홍군 주력부대가 서쪽으로 도피하는 와중에 중국공산당 내에서 최종목적지를 두고 마오쩌둥은 산시성, 장궈타오는 쓰촨성을 주장하면서 내분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이때 쓰촨성으로 들어간 장궈타오의 제1방면군은 불과 1년만에 국민당군한테 탈탈 털려서 극소수의 간부들만 거지꼴로 마오쩌둥이 자리잡은 옌안으로 도주한 사례가 있다. 물론 이 때는 군벌이 더 강한 시기긴 했지만 어쨌건 쓰촨성으로 도망간 장궈터오를 관광태운 건 '''중국 국민당'''이었다. 즉 자기네들이 이미 쓰촨으로 도망간 애들을 털어본 경험이 있던 것.
이 경우 대만 섬은 국민당군의 주력이 중국 서남부에 몰리므로 섬을 지킬 병력이 매우 부족해서 생각보다 일찍 중공군에게 접수될 가능성이 높다. 대만 독립파들은 국민당 정권이 옮겨오지 않았다면 인민해방군은 대만을 자국이라 생각하지 않아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티베트 등을 생각한다면 인민해방군이 대만에 안 들어올 리가 없다. 중화민국이 21세기까지 존재하는 이유는 당시 인민해방군이 안 들어온 게 아니라 못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만은커녕 더 가까운 진먼, 마쭈도 못 들어왔다. 실제로 하이난 섬의 경우 타이완 섬에 필적하는 크기를 가지고 20 킬로미터의 해협으로 중국 본토와 분리된 상태였으며,[12] 이미 본토를 거의 상실한 중화민국군이 상당수 주둔한 지역이었지만 1950년에 중화인민공화국에게 함락된 전례가 있고, 중공군은 국민당이 말만 자기네 땅이라고 해도 지배하지 못했던 티베트까지 1952년에 완전히 차지했다.

4.2. 미국이 대만공화국을 세우거나 미국령으로 접수해버렸다면?


국공내전 말기에 미국이 대만공화국 을 세우려고 했으나 국부천대로 없던 일이 되고 만 적이 있었다. 중화민국이 워낙 순식간에 무너져버리자 미국이 선수를 치려다가 역으로 장개석이 선수를 친 것. 그렇게 된다면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대만)의 대치 상황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대만공화국(혹은 미국령 대만)의 대치 상태가 된다.
미국의 주도 하에 대만공화국 수립에 성공했거나 아예 미국령이 되었을 경우에도 국민당이 망명하긴 하겠지만 이미 이때는 중화민국이 완전히 멸망하고 명실상부한 독자적인 대만의 국가가 성립되고 말았으니 타이완 민주국의 재래로써 신생 대만인이나 난민(...)으로 대우 받게 된다. 이에 따라 국민당 망명인 출신인 외성인보다 대만 현지인인 본성인이 더 빨리 득세하여 외성인 우위의 관계가 역전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건물 하나라도 얻어서 임시 정부를 수립하긴 하겠지만 대만공화국이 됨으로써 본토 수복이란 명분이 상실되고 또 괜히 대륙을 자극했다간 대만국 혹은 미국령 대만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별 행동을 못할 가능성이 크다.[13] 그리고 이때의 중국은 국민당 정부로서의 대만이 아닌 미국 보호하의 대만국, 특히 미국령 대만과 대치한다면 진먼 포격전 같은 무력도발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될것이다. 대신 중국 측에서 간첩 등을 파견해서 미국령 대만인들을 선동하는 게릴라 작전을 펼칠 수도 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만이 유일한 중국으로 남았기에 중화민국의 계승 국가로 인정받아 UN 상임이사국 자리를 손쉽게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생 대만국은 중화민국의 영향에서 더욱 완전히 벗어나 대만의 독자적 국가로써 대만, 대만인으로써의 정체성이 더 빨리 발양 확립되기에 여전히 남아있는 외성인(국민당)을 비롯해 대만의 정체성 문제로 인해 현재의 중국-대만과의 양안관계대만 독립운동이 미국까지 끼어들은 문제로 훨씬 복잡해질 것이다. 지금의 "대륙 VS 국민당/민진당"이였던 것이 "중공 VS 대만공화국 or 미국령 대만 VS 대만 독립운동세력 or 국민당 망명정부"으로 복잡해진다는 것이다.[14]
그렇다고 중국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것인데 대만이 미국의 괴뢰국이라거나 홍콩과 마카오처럼 식민지로 점령당했다는 주장을 했을 것이고 미국과 수교할 시기에 대만 반환 약속을 협상 조건으로 걸어 미국령 대만을 똑같이 특별행정구로 돌려받아 완전한 중국 통일을 이룰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어도 범록연맹 같은 독립파가 존재하겠지만 홍콩의 우산 혁명에서 보듯 큰 위세를 발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만공화국이거나 미국이 대만을 독립시킬 경우 중화민국이 아닌 대만국이 현재처럼 미승인국으로 대치했을 확률이 높다.
또한 홍콩이 영국물을, 마카오가 포르투갈물을 먹었듯 대만도 한국, 서독이나 하와이, 괌, 오키나와처럼 대만 고유문화와 미국 문화가 혼합된 곳이 되었을 수도 있다.

4.3. 만약 중화민국이 하이난 섬을 계속 차지했다면?


해남도가 중화민국 휘하에 계속 있을 수 있었다면 대만과 함께 중화민국의 양대 중추지로 남아있었을 것이고 중화민국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당장 중화민국의 실질 강역만 해도 배로 커진다. 한편 하이난 섬은 당시 광둥성에 속해 있다가 중공 치하에서 1988년 하이난성이라는 별개의 성으로 승격되었기 때문에 국부천대한 중화민국 치하의 하이난은 하이난성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중화민국 치하에서 하이난은 광둥에서 분리되어 특별행정구로 있었다. 또한 중공 역시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인데 중공의 화동, 화남 연해 해안가 및 남중국해가 대만-해남의 중화민국에 사실상 모두 봉쇄(!)되는 대곤란을 겪게 된다.[15] 당장 하이난과 타이완을 잇는 선의 바로 가운데에는 중국에서 상하이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대외 창구 역할을 하는 광둥성광저우, 주하이, 산터우, 선전 지역이 있다.
그리고 대만인이라는 의식도 훨씬 더 엷었을 것이며 중국인(중화민국), 즉 중화민국의 정체성이 더욱 강했을 것이다. 지금 대만 이외의 중화민국 실질 영토는 매우 작아서 그 지역들이 거꾸로 대만에 동화되고 있는데[16], 비대만 영역이 상당히 커진다는 의미이니. 한편 하이난과 타이완 사이의 지역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
독립운동의 양상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중화 정체성을 부정하는 강경파는 대만-하이난 연방 공화국으로의 '독립'을 주장하는 파와 개별적인 대만 공화국, 하이난 공화국으로 분할 독립을 주장하는 파로 세분화되었을 듯하다.

5. 기타


국공내전 당시에 장개석중국 국민당이 대만으로 패주하면서 베이징자금성 고궁박물관에 있던 유물 중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유물 29만 점을 위시로 전국 각지의 유물 60만 8천점출처을 선발해서 가져갔다. 이 유물들이 대륙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문화대혁명으로 박살났을 위험이 크니 대만으로 옮겨둬서 결과는 좋았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3년 11월 3일 방송분에서 이 일화가 소개되었다. 비슷하게 자금성에 있던 사고전서 문연각(文淵閣)본도 이 때 이송해서 국립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다.[17]
이외에도 유물은 아니지만, 중국 역대 왕조가 대대로 우대한 공자의 직계 적손(嫡孫)으로 제32대 연성공(衍聖公)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이었던 쿵더청도 장제스가 대만 섬으로 데리고 건너갔다. 북송금나라에 밀려 회수 이남으로 내려갈 때 송고종이 중화로서의 정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제3대 연성공 공단우를 함께 데리고 간 것에 비견할 만한 일로, 이 당시 연성공 작위를 이을 사람이 쿵더청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에 현재는 타이완에서 공자 가문의 종가(宗家)가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대륙에는 공자의 직계 남성 후손은 없으며, 공자의 방계 후손인 남종 가문[18]과 쿵더청의 누나 쿵더마오(孔德懋)의 후손만 남아 있다.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은 중화민국 정부의 유일한 세습 공직으로 지위는 특임관(장관급)에 준한다. 쿵더청은 국부천대 이후 고시원 원장, 총통부자정 등의 고위직을 역임했고 쿵더청 사후 제2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을 세습한 장손[19] 쿵추이창 또한 총통국책고문을 맡고 있다.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 유교의 성현인 맹자, 안회, 증자, 자사의 제사를 받들던 직계 후손에게 세습되었던 한림원 오경박사 직위를 각각 아성봉사관, 복성봉사관, 종성봉사관, 술성봉사관으로 개칭해 그 지위를 간임관(차관급)에 준하도록 했는데, 국부천대 때 대성지성선사봉사관 공덕성만이 아니라 2대 아성봉사관 맹번기(孟繁驥)와 2대 종성봉사관 증헌의(曾憲禕)도 함께 대만 섬으로 건너가 지성, 아성, 종성 세 봉사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면 2대 복성봉사관 안세용(顔世鏞)은 대륙에 남았고, 술성봉사관은 공덕성의 차남 공유녕(孔維寧)이 맡았다가 2010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복성, 술성 두 봉사관은 폐지되었다.
운남성에서 패배한 국민당군[20] 잔당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미얀마태국으로 이주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 하였다. 이들은 지역의 군벌화 하여 반공활동을 하며 아편을 재배하여 수입원으로 삼았는데 이는 골든 트라이앵글의 성립에 큰 영향을 주어 쿤사 같은 마약왕들이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미얀마와 태국 정부와 충돌하게 되고 지역 군벌들이나 소수민족들과도 충돌하게 되자 결국 철수하여 대만으로 이주하였다.관련 블로그 글, 다만 현지인과 결혼하거나 이주를 거부하고 끝까지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기사 이들은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전쟁의 혼란기속에 적극적으로 반공 항쟁을 했고 그 공적을 인정 받아 결국 태국에 귀화하여 태국 국적도 얻게 된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 대만이 인구감소를 겪어 징병제 유지가 어렵자[21] 이들의 후손들을 우대해 대만 귀화를 유도했다.

6. 관련 문서



[1] 한자 문화권에서 臺를 빨리 쓸 때 발음이 같은(한국어에서는 완전히 같진 않고 비슷한) 台로 쓰는 경우가 많아 관습적으로 國府遷台도 통용된다.(참고로 중국 대륙의 간체자나 일본의 신자체는 아예 공식적으로 臺를 폐지하고 台에 병합해 버렸다). 國府遷臺, 國府遷台 모두 한국 한자음으로 읽을 때는 '국부천대'로 읽어야 한다. 台의 원래 한국 한자음은 '태'(별 이름에 사용)와 '이'('기쁘다'라는 뜻. 이때는 怡와 동자)만 있지만 臺를 대신하는 글자로 썼을 때는 당연히 臺의 음을 따라 '대'라고 읽어야 한다.[2] 장치원은 국민당의 대만 천도 후 교육부장, 국민당 중앙상무위원 등을 역임하며 정계 및 관계에서 활약했고, 오늘날 대만의 유력 대학교들 가운데 하나인 중국문화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후 1985년에 타계하였다.[3] 명목상 수도는 여전히 난징이다.[4] 대영제국, 소련, 미국에 이은 4위[5] 1950년 당시 일본(8300만)의 10분의 1, 남한(2000만)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고, 북한(950만)보다 더 작은 규모였다. 물론 중앙군 50만을 비롯해 국민당원과 그 가족, 반공 성향의 피난민까지 합쳐 200만 명이 타이완으로 오긴 했지만 역부족이었다.[6] 사실 한국전쟁도 3년 1개월 동안 계속됐지만 밀고 올라가고 밀려가기를 반복한 것은 처음 1년이고, 나머지 2년여 동안은 뺏고 뺏기는 땅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1년이 지난 뒤부터 휴전 때까지는 남북이 대치하는 전선은 현재의 휴전선과는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었다.[7] 정확하게는 중화인민공화국은 '''단 한번도 자신들이 중화민국의 후신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실제로 중화민국의 국채라던가 기타 국가승계의 의무는 모조리 타이완에 있는 국민당에게 해결하라고 뻐기거나 아예 외국 자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8] 국부천대 기준. 중화민국의 현행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타이완 성 뿐만 아니라 타이완 성에서 분리된 직할시들도 포함.[9] 당연히 푸젠 성 관할인 진먼, 마쭈를 여기에 포함하지 않는다.[10] 스탈린은 그 전까지 같은 공산당인데도 마오쩌둥을 무식하다며 나쁘게 보았고, 차라리 장제스를 더 선호했다. 그러다가 마오쩌둥이 승리하자 태도를 180도 바꾸어 UN에서 중화민국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CHINA)으로 취급하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안보리를 장기간 보이콧했다. 덕분에 6•25 전쟁 때 유엔군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을 지원할 수 있었다(유엔의 국제 분쟁 최초 개입). 지금도 유엔군 사령부(실제로는 미 8군 사령부지만)가 있다.[11] 당시 홍콩은 어쨌거나 중국 본토로부터 수도 등을 공급받지 않고서는 자립하지 못할 처지였다. 또 중국은 계속해서 홍콩에 각종 물자를 저렴하게 공급했는데 중국 입장에서도 미국 등 서방 세계 국가와의 교류창구를 남겨두는 차원에서 전략적 이해가 있었다. 영국 입장에서 자국의 금융자본의 상당 부분이 투자된 홍콩은 이미 너무나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런 중국의 이해와 영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다.[12] 타이완 해협은 충저우 해협보다 6배 이상 폭이 넓다. 그 때문에 중화민국 정부도 힘든 피난길이 되었다.[13] 다만 대륙에서 가져온 유물들로 일종의 관광사업을 하여 꽁돈을 모으는걸로 버틸 가능성이 높다.[14] 단, 국민당의 경우 2.28 사건을 일으킨지라 대만에 정착할 경우 오히려 분노가 가시지 않은 대만인들의 테러 대상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영토 그런 거 없이 등지로 망명해서 건물 하나를 얻어 망명 정부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15] 따라서 중공이 해남 침공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재차 해남 침공을 감행해서 결국은 중화민국 세력을 몰아냈거나 최소 지속적으로 해남도 분쟁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16] 예를 들자면 대만인이나 진먼인들이 진먼을 대만의 일부로 인식한다거나, 물론 자신은 절대 대만인이 아니라는 진먼 사람도 있다.[17] 현대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는 통탄할 일이라 국공내전 이후부터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절도한(도둑질한) 유물들 내놔라"라고 하는데 범람연맹 쪽에서는 빨갱이 공산당 불법 정권의 억지 따위 알바 아니라는 입장이고, 범록연맹 쪽에서는 "늬들 문화재 문혁의 풍파에서 보호해준 것부터 감사해라"라는 입장이다... [18] 위에 언급한 공단우의 후손이다. 당시 금나라에서도 곡부에 남아 있던 공단우의 동생 공단조를 연성공으로 내세워서, 공자 가문이 북종과 남종으로 나뉘었다. 원나라 때 공자 가문의 정통성을 남종이 북종에게 양보하였기 때문에 공자 가문의 직계 정통성은 북종으로 인정받고 있다.[19] 쿵더청의 장남 쿵웨이이가 일찍 죽어서 한 대 건너서 세습했다.[20] 국부천대 이후에도 서창(西昌)에 남아 저항을 이어가던 대본영(국부군 총사령부) 휘하 부대[21] 대만은 2018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모병제로 전환했지만 2020년 현재 50퍼센트에 가까운 숫자로 징병제 부활+여성징병 찬성 이라는 여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