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격투기
1. 개요
Hybrid Martial Arts
종합격투기와는 다른 개념으로, 어느 한가지 무술끼리의 타류시합을 이종격투기라고 한다면 종합격투기는 여러 무술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도를 가진 선수들끼리 대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무하마드 알리 vs 안토니오 이노키'는 '복서 vs 프로레슬러'의 이종격투기라고 볼 수 있지만 '에밀리아넨코 효도르 vs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의 대결은 삼비스트 vs 주짓떼로의 이종격투가 아닌 '종합격투가 vs 종합격투가의 종합격투기'다. 적어도 21세기에 오픈핑거 글러브를 끼고 하는 격투기 시합은 99% 종합격투기다.
다만 최근 입식격투기에서도 오픈핑거 글러브를 착용하고 시합을 하는 일부 대회사가 있다.
종합격투기가 보급된 현재는 역사에만 남은 사어가 되어 더이상 쓰여지지 않아야할 듯하지만 아직도 이종격투기란 이름의 인터넷 커뮤니티와 체육관들이 남아 있어 혼란을 주고 있다. 네이버에서도 선수 이름들을 검색하면 종합격투기 선수가 아니라 이종격투기 선수로 뜬다.[1][2]
2. 역사
2.1. 고대
이종격투의 역사는 맨손격투기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어느 문명권에건 고유의 격투기는 존재했고 서로간의 교류가 있을 때마다 문화의 일환으로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술이 발달했던 중국, 일본 등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타류시합, 도장 깨기 등의 형태로 발견된다.
하지만 격투기가 발전하여 체계화되고 하나의 규범, 사상의 영역으로 변화함에 따라 각 유파는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3] 이러한 현상은 무술이 가장 융성했던 아시아권에서 두드러진다. 중국에서는 많은 무술이 도교사상과 융합하였고, 일본의 검술과 유술은 불교의 선종사상을 받아들여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다. 철학과의 융합은 격투기의 사상적 기반을 튼튼히 하였고 양적 팽창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형식에 치중한 나머지 커뮤니티가 점차 연공서열화되었고, 과도한 정신적 가치의 추구로 인해 '기'의 존재 등 무술에 대한 환상이 생겨났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배타적이 되었기 때문에 타류무술과의 교류가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실제로 20세기 이전의 중국과 일본의 대부분의 무술은 타류시합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4]
서양의 경우 그리스, 로마의 격투기를 주목할 만하다. 가장 고대의 형태라 할 수 있는 판크라티온, 그 이후의 베어너클 형식의 복싱, 서브미션을 포함한 레슬링(오늘날의 캐치 레슬링과 비슷한 듯), 그리고 종합격투기 개념의 스타일을 모두 포함한다. 무술 영화의 영향으로 서양애들은 무식해서 그냥 힘으로 막 주먹질이나 해대고, 힘으로 붙어서 넘기려고나 하고 이럴 것이다 하는 선입견같은게 있는데, 오해다. 고대 서양의 종합격투기(이건 정말 현대의 MMA와 비슷한 스타일을 갖는다.) 의 역사는 꽤 되는데, 이때 이미 오늘날 사용되는 많은 서브미션 기술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거의 다 정립되었다. 물론 이것은 고대그리스로마 문명의 쇠락과 더불어 그림 등으로만 전해진다. 사실상 명맥이 끊긴 것이다.
연구 자료에 의하면 당시 종합격투기의 모습은 오늘날 MMA와 거의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족보행 동물이 맨손으로 가장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는 스타일은 결국 MMA 식 스타일이라고 생각된다.
2.2. 현대의 움직임
이렇듯 경직화 되어가는 격투계에 반발하는 움직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0 ~ 60년대 미국에서는 쿵후, 가라데, 태권도 등 동양의 전통무술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본국의 전통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이들 사이에는 접촉의 빈도가 좀더 높았다.
1947년 아드리아노 엠페라도와 추영일에 의해 창설된 카쥬켄보(KaJuKenBo[5] )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현대 하이브리드 격투 중 하나이다. U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척 리델의 트레이너인 존 해클먼이 이 카쥬켄보를 수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 전세계적인 쿵후 붐을 일으킨 영화배우 이소룡은 그 실전지향적인 무술 철학으로도 유명하다. 전통과 형식을 배제하고 실전에서의 효용성을 강조했으며, 복잡하고 아름다운 투로보다는 직선적이고 빠른 공격을 중시했다.
세계 각지를 떠돌며 타류시합을 했던 무인들도 있었다. 전설적인 유도가인 '콘데코마' 마에다 미츠요, 극진공수도의 최영의 등은 전세계의 무술가들을 상대한 수백회의 실전에서 승리하며 자신의 이름을 날렸다. 이종격투, MMA의 개념이 희박했던 시절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이들의 선구자적인 발자취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켰고, 그 드라마틱함으로 인해 대중들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다소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들은 '실전지향'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후세대의 이종격투기와 종합격투기의 근간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타이쇼 시대에 유권(柔拳)이라는 이름으로 유도와 권투의 대결을 다루는 흥행 경기가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유도계와 권투계의 발전 방향성이 달랐고, 흥행 자체도 일시적인 것이라 이 시기의 유권 흥행은 별다른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일본의 유권 흥행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잠시동안 다시 시도 되었는데, 이름만 남았지 전쟁 전 시기의 유권 노하우조차도 거의 체계적으로 계승되지 않았는지 복서의 주먹에 맥을 못추던 유도가들이 우연히 만난 과거의 유권 선수에게 복싱 대처법을 충고받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프로레슬링에 밀려서 유권 흥행은 곧 사라지게 된다.
2.3. 이노키 vs 알리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미 복서와 레슬러의 대결이 수 차례 이루어졌다. 유럽 등지에서 있었던 대결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대개 레슬러의 승리로 끝이 났다.[6]
초창기 일본 프로레슬링은 어느 정도 이종격투기 전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쇼와의 간류지마 대결을 사람들은 '스모 대 유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했다. 이러한 흥행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이 안토니오 이노키이다.
현대적인 의미의 이종격투전은 미국의 복서인 무하마드 알리와 일본 프로레슬링의 안토니오 이노키의 대결이다. 1976년 6월 26일 도쿄 무도관에서 열린 대결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았지만, 결과는 최악의 졸전으로 끝났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슬라이딩킥을 날린 이노키가 그대로 드러누워버린 것이다. 복서의 펀치 테크닉을 당해낼 수 없었던 레슬러가 땅에 누워버리자, 그라운드의 상대를 공격할 수단이 없는 복서 역시 별다른 수가 없었고[7] , '''그렇게 15라운드가 지나갔다'''. 격투기 사상 최악을 다툴만한 졸전은 그렇게 끝이 났다.
훗날 안토니오 이노키는 실전 지향적인 프로레슬링을 추구하며, 무하마드 알리 정도의 거물을 데려오지는 못했지만, 이종격투기 전을 지속적으로 시도하며 일본 종합격투기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이 시합 이후로 복싱계는 이종격투기, 종합격투기로의 진출에 매우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두 선수가 시합에서 보여준 대치상황이 후대의 MMA에서도 제법 출현빈도가 높았다는 것이다. 이는 원조들의 이름을 따서 이노키 알리 포지션이라고 부르게 된다.
2.4. 브라질리안 주짓수와 그레이시 가문의 UFC
한편 브라질로 건너갔던 마에다 미츠요는 이민사업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현지의 유지였던 그레이시 가문에 자신의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카를로스, 엘리오를 거쳐가며 브라질에서 번창한 브라질리언 주짓수는 호리온의 대에 이르러서는 미국을 정복하게 되었다.
이후 90년대에 브라질에서는 발리 투도라는 이름으로 지하격투장(…)에 가까운 무규칙 격투 대회가 번성하고 있었다. 그레이시 가문은 주짓수를 미국으로 진출시키면서, 자신들의 홍보를 위해서 발리 투도의 형식을 빌려서 격투 대회를 열기로 했다. UFC의 탄생이다
1993년의 UFC 1 토너먼트에서 거구의 복서, 가라데카, 레슬러를 상대로 호이스 그레이시가 우승을 차지하자 주짓수는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브라질러언 주짓수는 UFC와 더불어 성장을 거듭했고, 호이스는 이 전례가 없었던 대규모의 이종격투기 대회에서 3회 우승을 차지하며 전 세계의 이종격투전을 종결지어 버렸다.
브라질 발리투도의 비공식 기록과 길거리 싸움으로 얻은 명성에 미국 UFC에서의 공식 전적이 더해지면서 20세기의 이종격투전은 그레이시의 이름 아래 평정되었다. 하지만 UFC는 정상적인 스포츠로 보기에는 경기가 너무나 막장이고 폭력성이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오랬동안 어둠의 게임 취급을 벗어나지 못했다.
2.5. 종합격투기의 등장
그레이시가 떠난 UFC 7 토너먼트를 석권한 마르코 후아스는 종합격투기의 지평을 연 파이터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루차리브레를 수련한 후아스는 이후 주짓수, 무에타이, 레슬링, 복싱 등을 두루 섭렵해 이를 자신에게 맞는 형태인 후아스 발리투도로 개량했다. '입식타격과 그래플링 양쪽에 모두 능한 선수'라는 개념을 링 위에서 효율적으로 재현해 낸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
UFC 라이트헤비급 초대 챔피언으로 5회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 바 있는 '프로토타입' 프랭크 샴락은 말 그대로 MMA의 프로토타입과 같은 인물이었다. 라이언스덴 출신의 판크라스트인 샴락은 타격과 그래플링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이며 최초의 컴플릿 파이터가 되었다.
PRIDE 초대 헤비급 챔피언인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는 출중한 복싱 스킬과 신기에 가까운 주짓수 스킬로 당대 격투기의 수준을 10년은 끌어올렸다는 평을 들었다. 동시대의 강자인 에밀리아넨코 효도르, BJ 펜, 조르쥬 생 피에르는 웰라운드 종합격투가의 완성형으로 일컬어진다.
2.6. 일본의 흐름
일본에서는 안토니오 이노키가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결 이후에도 몇년간 정기적으로 이종격투기 대결을 열면서 이종격투기 개념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무사도를 자국의 전통으로 보는 일본인들에게는 이종격투기라는 개념이 잘 들어맞아 상당한 흥행을 기록하였는데, '이노키즘'은 본질적으로는 프로레슬링 단체의 홍보를 위해서 다른 격투기와의 대결을 언론의 관심을 모으는 흥행 거리로 삼는 것이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이노키의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한계 때문에 나타난 마케팅 전략이었다. 일본의 프로레슬링은 '외국의 강적 vs 일본인 선수'라는 전형적인 대립 구도를 주요 흥행 포인트로 잡았는데, 당시 전일본에 비해서 인맥이 딸렸던 신일본은 상대적으로 강력한 상품성을 가진 외국인 선수를 끌어오기 힘들었고 그 때문에 프로레슬링 선수 대신 복싱 등 다른 격투기 선수를 끌어들여서 '이종격투기'를 하는 마케팅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보다 실전에 가까운 대결을 추구하는 '실전파 프로레슬링'이 나타나게 되었고, 외국의 선수들을 많이 불러모으면서 일본에도 종합격투기 형태가 나타나게 된다.
이후 '실전파 프로레슬링'은 본격적인 종합격투기로 변화한다. 한 때 일본의 종합격투기 단체 프라이드는 세계적인 단체로 올라섯으나, 근본적으로 자금력이 열악하였고 야쿠자가 관련되었다는 의혹 등이 퍼지면서 프라이드가 망한다. 그 후신인 종합 단체들도 흥행에 실패하고 경영난으로 몰락하면서 일본계 종합격투기는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현재로서 일본의 종합은 시장 가치를 잃어버리면서 망했다고 보면 된다. 일본 이종/종합 격투기에서 필수적인 기반이었던 프로레슬링에게 이종/종합의 마케팅 가치가 매우 낮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프로레슬러가 종합을 뛰어봤자 프로레슬링 측만 손해를 본다는 것이 확실하게 증명되었으므로 더 이상 프로레슬링이 종합과 협력할 이유가 없다. 이런 상황이라 사실상 헤비급 일본인 파이터를 구하는 것이 어렵게 되고, 일본인 파이터가 없는 이상 일본 국내에서는 이종/종합 격투기가 흥행으로서 성립되지 않게 된다.
2010년대 중반 정상적인 시장에서는 흥행 가치를 잃어버린 종합격투기 시장을 침범한 것은 반 그레이라고 불리는 양아치 집단이다. 이들은 겉으로는 대충 종합격투기 스러운 회사를 차려놓고, 제대로 훈련되지 않고 검증도 안된 양아치들을 파이트머니도 주지 않고 '선수'랍시고 내보내고, 티켓 강매를 통하여 흥행을 유지하면서 사실상 변질된 삥뜯기와 저질 흥행을 돈을 버는 '지하격투기'를 만들어냈다. 일단 이런 지하격투기가 각지에 널리 퍼지기는 했으나, 이런 불법적인 집단과 연계가 강한 흥행은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고 종합격투기의 이미지를 극도로 악화시켰기 때문에 오히려 격투기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3. 의의
가장 큰 의의는 종합격투기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이다. PRIDE 25에서 효도르 vs 노게이라전의 해설을 맡았던 바스 루튼은 이종격투기의 시대가 지나고 종합격투기로의 진화가 완성단계에 돌입한 것을 선언했다.
각자의 틀 안에서 안주하고 있던 격투기가 그 틀을 깨고 나와 부딪히고 교류했으며, 그 결과 어떤 무술과도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완전체가 탄생한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고 상업성을 인정받으면서 MMA가 프로 스포츠로 정착할 수 있는 토양이 형성되었다.
현대 MMA는 단일종목 간의 대결이였던 이종격투기가 타, 투,극, 교를 다 수련하는 종합격투기로 수렴하였다가 기본적인 수준의 타, 투, 극, 교를 다 갖추고 그 안에서 자기가 잘하는 부분을 더 특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종합격투기는 발전의 역사가 아직은 짧고 계속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MMA선수들은 종합격투기를 바탕으로 선수가 되는 경우도 있고 각자의 베이스가 되는 격투기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종목을 수련하면서 종합격투가로서 거듭나는 경우도 있다. 양쪽 중 어느 쪽이든 자신의 강점이 되는 점을 바탕으로 그것을 살리는 경기를 하며 그렇기 때문에 강렬한 테이크다운 후의 묵직한 파운딩, 얽혀들어가서 상대를 강력하게 억누르며 관절기로 제압, 근본적인 펀치와 킥을 위주로 한 호쾌한 타격 등 자신의 신체적인 강점, 선수의 성향, 장점, 추구하는 스타일 및 지도자의 지도철학, 성향에 따라 선수의 시합 방식들이 다양하게 갈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타, 투, 극, 교를 다양하게 수련하게 되면서 선수들의 실력이 상향평준화 되었고 자신들의 강점을 살린 경기를 하면서 타격가와 그래플러, 그래플러와 그래플러, 타격가와 타격가 같은 경기들이 나오고 있다.
즉, 현대 MMA 선수들은 전반적으로 제너럴리스트를 지향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만의 강점을 특화시키는 방향으로 수련한다. 물론 자기기반의 베이스 운동을 계속 강점화 시키면서 부족한 점을 채우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각자의 단일 무술만을 수련해서 시합하던 이종격투기에서 시작된 종합격투기는 타, 투, 극, 교를 다 수련하고 시합에 나오기 때문에 파생되는 시합 스타일이 다양하며 여전히 기술적으로 높은 발전 가능성을 가진 무도이자 격투 스포츠이다.
이를 뒷바침 하듯 최근 국내외 지도자들의 발언들을 보면 종합격투기 자체가 많이 발전했기 때문에 단일 무술을 수련하고 종합격투기를 배워도 좋지만 종합격투기를 배우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타, 투, 극, 교 중 하나 혹은 1+@처럼 일부만 배우고 시합에 나오던 이종격투기 선수들의 수련체계는 종합격투기로 넘어가면서 타, 투, 극, 교를 평균레벨까지 갖추기 위해 고루 수련하는 형태로 변화했으며 이것은 이종격투기가 종합격투기의 모태이면서도 서로가 구분되는 지점이다.
또한 단일무술들이 종합격투기에 수렴되면서 MMA룰에 맞게 변화되어 녹아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MMA식 복싱, 킥복싱, 무에타이, 주짓수, 레슬링이란 표현들이 등장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점들을 바탕으로 볼 때 이종격투기나 종합격투기는 서로 분화되었기 때문에 이종격투기 및 종합격투기 용어의 혼용은 지양되어야하며 서로 간의 확실한 구분이 필요하다.
그리고 종합격투기 시합과 다르게 각자의 단일 무술을 바탕으로 시합을 하는 이종격투기 대회들은 마이너한 형태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4. 사고
과거 가수 이상민이 김미파이브를 차렸는데 이 곳에서는 트렌스젠더쇼와 이종격투기 시합 등 풍성한 볼거리 소재를 제공해서 많은 인기를 끌었었다. 그러나 '''바다이야기''' 설치 및 이종격투기 시합중 선수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김미파이브는 이 여파로 파산하고 말았다.
[1] 포털관계자들이 이종격투기와 종합격투기를 구분지어야 되는 시급히 개선되어야할 부분이다. 방송가에서도 이런 점 때문에 용어가 계속 혼용되고 있다. 방송에 나오는 김동현, 정찬성 같은 선수들이 지속적으로 종합격투기라고 표현하면서 해당 선수들이 나오는 방송프로그램에서는 종합격투기로 올바르게 표현되지만 아닌 곳에선 여전히 이종격투기로 표현되기도 하며, 아예 종합, 이종이란 말을 빼고 격투기로 표현하는 곳도 있다.[2] 예를 들어 과거 K-1은 실제 K-1룰은 킥복싱과 대동소이하지만 표면적으로 가라데, 태권도, 킥복싱, 무에타이, 산타, 복싱 등 모든 서로 다른 입식격투기가 대결하는 것을 표방했기에 이종격투기 선수라고 부를 여지가 있었고 실제 그렇게 불렸던 입식격투기 선수들도 있었다. 그러나 MMA는 초창기에는 A 무술 vs B 무술과 같은 대결이 있었고, 시합홍보를 위해 프로모션의 수단으로도 이를 활용하기도 했지만 점차 다양한 격투기 종목을 다 수련하는 선수들끼리의 시합이 되었기 때문에 이종격투기라고 부를 수가 없게됐고, 현재의 명칭인 종합격투기가 이종격투기를 대신하여 자리잡게 됐다.[3] 이러한 현상은 격투기 자체가 보수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기의 발달로 전쟁에서 체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술이 살아남기 위해 기술이 아닌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해석이다.[4] 물론 안전에 관한 문제라든지 다른 이유도 있었다.[5] Karate-Judo-Kenpo-Boxing의 이니셜.[6] 1887년과 1890년 2차례의 대결에서 그레코로만 레슬러가 복서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1936년에도 프로레슬러와 복서의 대결이 있었으나 프로레슬러가 승리했다.[7] 당시 이노키는 대부분의 프로레슬링 기술을 봉인당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썼다. 이에 대한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