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별초
1. 개요
家別抄
조선 태조 이성계가 거느리던 사병집단이다.
기병 위주로 구성되었으며, '''전투병력만 2,000명''' 규모인 한국사 역사상 최대·최강의 사병집단
2. 상세
일찍이 이성계의 가문이 운영하던 사병집단. 비전투 지원인원까지 합산한다면 대략 2~3천여 명 가량으로 추산되며 이안사를 따라 전주에서 삼척, 삼척에서 동북면 의주(원산)로 이주한 가호의 후손들과 동북면 토착민, 변방 여진족, 심지어 소수의 중국인과 몽골인까지 아우른 기병군단이다. 이성계를 따라서 개경 탈환전, 함흥평야 회전, 황산 대첩, 길주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면서 이성계가 고려 제일의 무장이 되고 나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공헌하였다.
조선 건국 후 왕실의 근위 및 왕실 친위대 역할을 수행하다 태종 이방원의 사병 혁파 때 해체된다.
3. 평가
전주의 토호였던 이안사가 삼척으로 이동할 때 거느렸던 가병들과 다시 동북면 의주로 북상할 때 동행한 170여 호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는 사병집단으로 이안사가 원에 투항한 1252년을 기준으로 잡아도 무려 백수십 년간 전주 이씨 가문을 섬겼다. 수천 규모의 사병이 한 집안에 그토록 오래 소속되어 있었기에 단결력과 충성심이 여느 사병집단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원의 정규군, 홍건적, 나하추, 호바투의 여진족, 왜구에 고려군까지 동아시아를 뒤흔들었던 여러 세력과 싸워 승리한, 가히 '''한국사상 최강의 사병집단'''으로 평가받는다.
고려의 무신정권도 이만한 규모의 사병은 동원하지 못하였는데, 경대승이 설치한 사병집단 '도방'의 인원도 100여 명이었으며 다른 무신들이 경대승을 '''두려워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경대승 외 무신들의 사병도 100명 안팎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진주에 기반을 쌓은 최충헌의 사병이 약 1천여 명이었으나, 가별초처럼 수천에 달하는 '''기병군단'''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정도전, 조준 등 급진파 신진사대부와 함께 이성계의 조선 건국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에 이성계의 생애 및 조선 건국 관련 역사를 다루는 대중매체에서 거의 항상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