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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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조의 추존 국왕으로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조선 개국 직후에는 시호 목왕(穆王)만 올렸다가 5대손 태종이 1411년에 묘호 '''목조(穆祖)'''를 올리고 시호를 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으로 바꿨다.#
2. 내력
전주 이씨 시조 견성(甄城) 이한(李翰)의 17대손으로, 고려 중~후기 사람이다. 이한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문성왕 대에 사공을 지냈고, 그와 태종 무열왕의 10세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 부인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자연은 시중, 손자 이천상은 좌복야를 지냈다. 이천상은 아간을 지낸 이광희를 낳았고 이광희는 사도 삼중대광 이입전을 낳았고, 이입전 후로 이긍휴, 이염순, 이승삭, 이충경, 이경영, 이충민, 이화, 이진유, 이궁진, 대장군 이용부를 거쳐 고려시대 내시집주 이린에 이르렀다. 이린은 무신정변의 첫 집권자였던 이의방의 동생이다. 이린은 대장군 이양무를 낳았고, 이양무는 상장군 이강제의 딸 이씨와의 사이에서 이안사를 낳았다.
3. 생애
태조 실록에 따르면 원래 이안사는 20대 초반까지 본관인 전라북도 전주에서 살았다. 이 지역의 한 기생을 좋아했는데 하루는 그 고을 별감이 그 기생을 취했다. 그래서 화가 난 이안사는 별감에게 따졌고 싸움까지 일어났는데[3] 문제는 이 별감이 고을 현감까지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현감은 이 문제를 도지사급이었던 안렴사에게 알리는 바람에 이안사는 투옥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는 몽골과의 전란기라 호족들은 스스로 집안과 재산, 인명을 지키기 위해 가병을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안렴사는 이 가병 때문에 직접 체포하지 못하고 조정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를 알게 된 이안사는 조정에서 미적거리는 사이에 집을 정리하고 가솔과 가병, 재산을 가지고 강원도 삼척으로 떠났다.穆祖聞之, 遂徙居江陵道 三陟縣, 民願從而徙者, 百七十餘家
(中略), 適前日山城別監, 新除按廉使, 又將至。
穆祖恐禍及, 挈家浮海, 至東北面宜州 止焉。
民一百七十餘戶亦從之, 東北之民, 多歸心焉。
於是, 高麗以穆祖爲宜州兵馬使, 鎭高原以禦元兵。
時雙城以北, 屬于開元路。
元 散吉大王來屯雙城, 謀取鐵嶺以北, 再遣人請穆祖降元, 穆祖不得已率金甫奴等一千餘戶降。
散吉聞于元帝, 元爲立斡東千戶所, 給降金牌, 爲南京等處五千戶所, 首千戶、兼達魯花赤。_太祖實錄, 1 總書
①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이 소식을 듣고는, 드디어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서 거주하니, 백성들이 자원하여 따라서 이사한 사람이 1백 70여 가(家)나 되었다.
전일의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새로 안렴사(按廉使)에 임명되어 또 장차 이르려고 하니, 목조는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바다로 배를 타고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 곧 덕원(德源)[2]
에 이르러 살았는데, 백성 1백 70여 호가 따라갔고, 동북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이에, 고려에서는 목조(穆祖)를 의주병마사로 삼아, 고원을 지켜 원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이때 쌍성(쌍성은 곧 영흥이다) 이북 지방이 개원로에 소속되었고, 원나라 산지대왕이 와서, 쌍성에 둔 치고 있으면서, 철령 이북 지방을 취하려고 하여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목조에게 원나라에게 항복하기를 권하니, 목조는 마지못하여 김보노 등 1천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② 산지가 이 사실을 원나라 황제에게 알리니, 원나라에서 목조를 위해 오동천호소를 세우고 금패를 내려 주어 남경 등처 오천호소의 수천호로 삼고, 다루가치를 겸하게 하였다. _태조실록, 권 1 총서
삼척에 정착한 지 한 해 만에 아버지 이양무가 죽고 묏자리를 써야할 때 지나가던 한 도승이 "소 백 마리 제사 지내고 금으로 관을 쓰면 5대에 제왕이 날 자리네."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가난했던 이안사는 백(百) 마리 대신 흰(白) 소를, 황금 대신에 금빛 귀리 짚으로 관을 써서 장사지냈다고 한다.[4]
여기까지 끝났으면 좋으련만, 전에 싸웠던 그 별감이 여기 안렴사로 임명되어 온다는 소식에 이안사를 따른 170여 호를 데리고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번에 정착한 곳은 지금의 함경남도 원산에 해당되는 동북면 의주였다. 이안사는 여기서 원나라 군사와 싸워 공을 세웠고 조정에서는 그를 의주병마사에 임명했다.
하지만 막상 병마사가 된 이안사는 고려를 배신했다. 이안사가 있는 의주에서 가까이 있는 화주[5] 에 원나라 대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원나라 옷치긴 왕가의 산지 대왕(散吉大王)은 2번에 걸쳐 회유했고 이안사는 백성 천여 호를 이끌고 원나라에 투항했다.[6] 이때가 고려 고종 41년, 1252년이었다. (참고로 이 일대는 고려 정부에 대한 여론이 원래부터 안 좋았는지 곧이어 1258년에 조휘와 탁청의 반란에 의해 쌍성총관부가 설치된다.)
어쨌든 이렇게 귀순한 이안사는 두만강변의 개원로 남경 오동(斡東, 알동이라고도 읽는다.)으로 이주하였고 그렇게 두만강 유역인 오동(斡東) 지역에 자리잡은 뒤인 1255년 5000호 천호장(千戶長: 밍간)과 다루가치(원나라의 지방관리)의 지위를 원나라 황제로부터 하사 받았다. 천호장은 몽골족이 아닌 사람이 임명되는 일이 매우 드문 고위 관리직으로, 이는 사실상 옷치긴가로부터 승인 받은 군벌 세력이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이렇게 부여받은 천호장과 다루가치 직위는 이후 1290년 옷치긴가의 내분으로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익조)가 오동의 기반을 상실하고 함흥 평야로 이주한 이후에도 천호장과 다루가치의 직위는 이행리의 증손자 이성계 때까지 5대에 걸쳐 계속 세습되었고 이러한 천호장과 다루가치라는 높은 직위는 이후 이성계 가문이 주변 지역들을 자신들의 영향력내로 흡수하고 계속 군벌로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된다.)
이렇게 오동 일대를 다스리는 관직인 오동천호 겸 다루가치에 임명된 이안사는 22년 동안 그 지위를 누리다 원종 15년인 1274년에 죽었다. 나중에 현손 이성계가 왕이 된 후 그를 목왕(穆王)으로 추존했는데 이안사의 무덤은 경흥부에 마련되었다. 하지만 조선 태종 10년인 1410년에 함흥 북서쪽에 있는 달단동 가평사로 이장되었고 능호는 덕릉(德陵)으로 정해졌다. 1년 뒤에 '목조'로 재추존한다.
4. 가계
효공왕후 이씨 사이에서 6남을 보았다.
- 안천대군(安川大君)[7] 이어선(李於仙)
- 안원대군(安原大君) 이진(李珍)[8]
- 안풍대군(安豊大君) 이정(李精)
-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
- 안창대군(安昌大君) 이매불(李梅拂)
- 안흥대군(安興大君) 이구수(李球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