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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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명칭
3. 상세
4. 역사
4.1. 기원
4.2. 금 건국
4.3. 원의 지배
4.4. 조선과 명의 지배
4.5. 대청 건국
5. 한국사와의 관계
5.1. 고대
5.2. 중세
5.3. 근세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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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진'''(女眞)은 퉁구스계 종족 집단 가운데서도 만주 일부 지방에 거주했던 숙신-말갈계의 후손을 이른다. 명나라 대에 건주위지휘사의 통제를 받는 '''건주여진'''(建州女眞)과 후룬 강 유역에 거주하던 '''해서여진'''(海西女眞), 그리고 최북방의 '''야인여진'''(野人女眞)으로 세분화되었으며, 서로 간에도 잦은 전쟁과 약탈이 이루어졌다.
고려 시대에는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도 여진족이 거주했으며, 조선 세종 때 4군 6진을 개척하면서 한반도에서 축출되거나 한민족과 동화되었다. 지금도 북한의 구 육진 지역에는 여진의 풍습에서 영향을 받은 방언과 문화가 다소 남아 있다.

2. 명칭


영어로는 Jurchen이라고 하는데 이는 몽골에서 여진을 가리키던 말인 주르첸(Jürchen)이 전해진 것이다. 하지만 만주 개칭 이전의 여진족도 그냥 간단하게 Manchurian(맨추리안; 만주족)으로 묶어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한문으로 제신(諸申)·주신(珠申)·주선(朱先), 주리진(朱里眞)·주리진(朱理眞)·주이진(朱爾眞), 주리차특(朱里扯特)·주아차척(主兒扯惕)·졸아찰대(拙兒擦歹)·주리흠(朱里欽), 여직(女直)·여정(女貞)·여질(女質)[1] 등을 썼는데 줄친(zulchin)-주션(jušen)을 음차한 여러 별칭들이다. 일부 학자들은 해당 명칭이 '순록을 가진 사람들'을 뜻하는 오르촌족의 이름과 동계어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2]
만주어로는 '''주션(jušen)'''이라고 한다. 상고한어 '조선'의 발음은 *t<r>aw[s][a]r(뜨라우살) 정도로 추정되고 있어 '주션'과 많이 다르다. 참고로 여진의 기원으로 불리는 숙신의 경우, 肅愼은 *siwk[d]i[n](슉딘), 稷眞은 *tsəkti[n](쯕띤)으로 추정된다.

3. 상세


문명의 혜택을 보지 못한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주변의 국가들은 여진을 미개한 집단으로 무시했다. 중국의 신당서 흑수말갈전 이나 삼국지 읍루전 같은 곳에 표현된 여진의 전신인 말갈족 에 대한 기술들을 보면 그들은 항상 하체 부분만 가리고 옷을 모두 벗고 다녔으며 겨울에는 돼지 기름을 수cm 에 달할 정도로 엄청나게 두껍게 발라 추위를 피했다. 거처 또한 일정하지 않고 주로 굴 속 혹은 나무 위에서 살았으며 집 한가운데를 깊게 파서 가운데에 변소를 만들고 그 주변에서 생활했다. 한술 더 떠서 소변으로 세수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거의 원시인 수준의 생활에 위생이나 용모도 지저분하기 그지 없어서 중국을 비롯한 주변 문명국들에서는 오랑캐들 중에서 그들을 가장 미개하게 보고 경멸했다. 또한 통합되지 않았던 기간 만큼이나 피지배 민족이었던 역사들을 많이 남겼다. 하지만 전투력에 관한 기록으로는 한국과 중국 같은 정주문명 뿐만 아니라, 유목민족인 몽골거란마저도 여진족의 잠재력을 두려워 했으며[3], 간간히 통합이 가능할만큼의 외부 자극을 받았을 때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이미 충분한 교역품과 문화를 제공하는 거대한 제국 혹은 세력이 형성되고, 그들이 주변에 별다른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 거대한 문명의 외곽 지역에서는 민족주의, 통합의식을 보여줄 수 있는 집단이 잘 생기지 않는다. 여진족은 그러한 인류집단이 답보하는 사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로서, 거란족이나 중국인들이 존속에 위협을 주기 이전에는 단 한번도 만주 혹은 여진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뭉친 사례가 없다. 여진족과 가장 가까운 문명 집단은 고려와 조선 등이었는데, 이들은 가끔 적대하는 여진족 일파들만 대충 불태우고 신경끄는 등 비교적 순둥순둥했기 때문에, 여진족이 절박함을 느낄만큼의 민족적인 위기 혹은 기회를 제공하지 않아서 조직력을 키우지 못했다는 관점이 있다.
여진족이란 하나의 집단으로 보기도 애매한 지역적인 분류이다. 크게 중국 대륙과 한반도와 교류하며 상대적으로 고도의 문명 수준을 보여준 여진, 철저히 문명의 외곽지대에서 살면서 청동기 수준까지의 기록까지도 보여준 원시적인 여진, 이 둘의 중간으로 구분되는 광범위한 다수의 위성집단으로서 만주지역에 퍼져 살았다. 그중에서도 문명여진의 일파들은 한국인들과도 가장 밀접한 관계를 주고 받았다.
사실상 자신들이란 '범주'를 만들어 뭉칠 이유가 없었을 정도로 광범위한 집단으로서, '''기마민족의 편제를 사용할 뿐이고 농경민족'''이라는 점에서도 엄청난 특이성 및 한반도와의 연관점을 보여주는 종족 집단이다. 아주 가끔 이웃지방에서 여진족을 자극하여 뭉칠만한 구실을 만들어주거나, 중국계나 한국계 문명인들이 여진족에 흘러들어가서 조직을 세우면 만만찮은 세력이 되었다. 이럴 때는 일본까지도 해적질을 하는 해양집단을 만들거나, 과자마 전술같은 충격 전술을 개발하여 주변의 강대국들을 몰락시키거나, 거의 모든 시대마다 보병+궁병+기병처럼 매우 균형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매 시대의 핵심적인 전략병기를 빠르게 도입하는 등, 야만족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외부에서 적극적인 적대세력을 만들어주거나 혹은 조직체계를 구성하면 변화무쌍한 진화를 보여주었던 집단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청나라'''라는 최후의 중국왕조까지 세운다.
여진족에 대하여 흔히 잘못 알려진 사실은, 이들을 유목민족으로 보는 것인데 실제 여진족은 유목과 수렵만 한게 아니라 농업과 어업이랑 어렵(물고기사냥)을 겸업하였고 심지어 해적질로도 악명을 떨쳤다. 이들의 거주지가 초원이 아닌 삼림지대였기에 순수한 의미로서의 유목민족과는 꽤나 다르다. 따라서 반유목생활도 일부 있었으나 실제론 정착민이라 할수 있어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후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유목 제국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진족의 군사시스템이 균형적이고 전투력이 강했던 것도 이러한 생활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수렵 등의 생활 덕분에 유목민족의 특기인 투창, 기마술과 궁술에 능했고, 만주의 산지와 숲에서 생활하다보니 보행 능력이 좋아서 보병 전력도 강했으며, 어업에도 종사한 덕에 유목민족처럼 수상전에도 약하지 않았다. 즉 유목민족+바이킹 등의 해적+남만족+서융족의 장점이 조합된 집단이었다. 그래서 여진족은 유일하게 2번이나 중원을 장악한 소수민족이기도 하다.

4. 역사



4.1. 기원


여진의 전신이 말갈이고, 좀 더 고대로 거슬러올라가면 숙신이 조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렇다고 고대의 숙신과 훗날 나오게 될 말갈이 완전히 동일한 족속을 가리키는 게 아니기도 하다.
그래서 여진족의 기원에 대해선 말이 많은데, '여진'이란 이름이 문헌상으로 첫 등장하는 것은 《요사》의 902년자 기술이다. 그 전에 살던 이들의 조상에 대해선 중국 사료에는 시대에 따라 종족 이름이 모두 다르게 나타나는데, 읍루, 숙신말갈, 물길 → 여진, 야인[4] → 만주 순으로 오래되었다. 여진(女眞: Jušen)이란 이름은 1635년 이후 금지되어 '''만주족'''으로 바뀌었다.
전신은 말갈이고 후신은 만주지만, 엄밀히 말해서 말갈, 만주와 여진이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이들이 살던 만주 지역은 사방이 트인 개방적인 지형이었고 수백년의 역사를 거치며 끊임없이 편입과 이탈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만주족이 1635년 이전에 여진이라 불렸고, 계승의식을 가지기는 했지만, 1635년 만주족 개명에는 소수의 야인 여진과 몽골의 코르친부와 호르친부 그리고 시버족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나나이족[5]이 만주 팔기에 소속되지 않은 야인여진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금나라 건국이전에는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으로 분류하기도 했는데 숙여진은 사실상 거란에 복속된 여진이었고, 생여진은 거란에 조공을 바치기는 했지만 독립적이었으며 흑수말갈이 이에 해당되었다, 금나라를 세우는 완안부가 생여진에 속했다.
말갈이라고 불렸을 당시, 당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추운 겨울날에 굴에서 온몸에 돼지기름을 발라서 추위를 극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다만 이는 몇몇 사람들의 풍습이나 민간요법 등이 확대해석하여 나타난 오해 및 비하적 의도로 왜곡된 정보인 듯 하다. 주변 국가들에게도 이러한 비하적 이야기들이 나올 만큼 문명과 동떨어진 사회로 보는 것에 더 가깝다.

4.2. 금 건국


11세기 후반부터 영가, 우야소 등의 지도 하에 요나라의 통제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생여진(동부의 여진 세력)이 힘을 키웠으며, 1115년 완안아골타가 최초의 통일국가인 을 건국하자 급속도로 상승세를 타서 과 동맹을 맺고 요를 박살냈고 그 다음에는 동맹국이었던 북송반박살을 내서 북중국 + 만주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금나라는 과거 거란이 그들을 핍박했듯이 그들도 그들 아래에 있던 유목민족을 핍박하고 분열시키던 중에 자신들이 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칭기즈 칸몽골 제국과 송의 후신인 남송에 의해 비참하게 멸망당한다(1234년).

4.3. 원의 지배


금나라가 처참히 멸망했을 때, 중원에 살던 여진족 대부분은 학살을 당하거나 나중에 중원을 통일한 원나라 치하에서 중하계급으로 흡수되었다. 이래저래 고려로도 많이 귀화했고, 원나라의 정동군에 별개의 여진군으로 편성되어 일본 원정에까지 참여하기도 했다. 후일까지 한족에 동화되거나 몽골인의 일부가 되지 않고 여진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남은 자들은 만주(요동)에 남아있던 소수에 불과했다. 거란과 융화되기도 했으며, 해서여진 예허부의 시조인 싱언 다르한은 본래 몽골 투메드부 사람이다.

4.4. 조선과 명의 지배


조선의 여진 정벌(建州女眞征伐)
여진정벌
조선의 편집증적인 여진 기록의 일례.
조선의 대여진정책과 그로인한 번호(藩胡)의 증가.
이 망하고 한족의 이 들어서자, 여진족들은 명과 조선의 강력한 영향력에 놓여 건주 여진, 해서 여진, 야인 여진의 3부류로 분류되었다.
  • 건주여진 - 후술하듯이 훗날 만주족의 주력이 되었다.
  • 해서여진 - 훗날 건주여진과 합동해 만주족에 편입되었다.
  • 야인여진 - 만주족에 포함되지 못한채 변방에 잔류해 연해주, 사할린에 거주하는 윌타족, 나나이족 등의 조상이 되었다.
그렇게 여진족은 분열된 씨족사회 상태로 치하에서 근근이 살아갔다. 명과 조선에 눌려 기도 못펴고 있었는데, 명나라도 이성량이 요동의 실력자로 군림하던 무렵까진 여진을 꽉 휘어잡고 있었고,[6], 여진족이 계속 노략질을 하자 변경을 접하고 있던 조선에서는 때때로 여진족 부락을 토벌하러 나섰다. 하지만 무자비하게 짓밟았다는 기존의 서술은 어폐가 심각한데, '''여진족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서 명이나 조선이나 쉽게 싸우러 들어간 적이 결코 없다'''. 어쨌든 조선에 칩입한 니탕개처럼 함부로 도발하던 인물은 신립에게 목을 베이는 등 제압을 당했다. 이순신 장군 역시 임란 전에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한 경험이 있다. 이렇게 토벌된 이후에도 여진의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조선도 가만있지 않고 토벌에 나섰는데 조선 측의 토벌기록을 보면 조선군 기병대가 마을에 들어가서 미적거리던 민간인은 학살 or 포로, 저항하는 자는 살해했으며, 집은 불태우고 숨겨둔 식량까지 꺼내서 뒤엎어버렸으며, 산으로 도망간 여진족들이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걸 보면서 통곡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명나라 역시 여진족이 변경을 침략하고 약탈한 터라 조선과 협력하여 토벌에 나섰다. 어쨌든 이런 토벌은 거의 누르하치의 건국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여진족이 사는 땅은 척박했지만[7] 여진족이 힘을 기르면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약간만 세력이 큰 부족이 나타나면 충돌을 핑계로 기병대가 가서 짓밟아 놓는 식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은 군사적 대응 외에도 거의 편집증적일 정도로 여진에 대한 정보수집에 집착한 편이다. 종성, 회령 일대 여진 부족들의 마을 인구, 가구별 인원수와 유력 가문의 족보, 아들이 몇명인지 같은 사소한 정보를 보고서에 있는대로 휘갈겨쓰며 달달 외우다시피 한 것이 대표적 사례. 링크를 보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조선이 거의 마을 촌장에 빙의한 수준으로 평범한 동네 주민 하나하나까지 파악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담으로 여진족의 생활양식은 유목민족보다는 반농 반수렵에 가까웠다. 유목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주력 산업은 농업과 수렵. 땅이 척박해서 그런지 밭을 일굴 수 있는 곳은 모조리 개간해놔도 남쪽의 중국이나 한반도보다는 농업 생산력이 딸렸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농사를 지었다. 또 수렵으로 얻은 모피나 기타 부산물들을 팔고 식량을 확보하는 등의 교역도 중요한 부분. 누르하치 시절에는 명의 무역봉쇄 한방에 크게 궁지에 몰렸고, 그간 쌓여온 것들까지 합쳐져 전쟁까지 터졌었다.
조선과 가까이 있다보니, 개중에는 조선에 귀화하여 조선 땅 안으로 들어와 사는 자들도 있었다. 이런 자들을 조선에서는 향화호인(向化胡人) 혹은 향화인(向化人)이라고 불렀다. 다만 거칠고 황량한 북방에서 살아가며 약탈을 일삼던 습성을 버리지 못했던지, 조선에 귀화한 여진족들이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행패를 부리는 일이 잦았다. 1609년 8월 25일자 <광해군일기>의 기사를 보면 경기도 용인(龍仁)에 사는 박길상(朴吉祥)이 이끄는 80여 명의 남자와 여자가 포함된 향화인들이 용인 고을 5리 안에 있는 장터의 큰 길가에 7~8년 동안 살고 있으면서, 박길상이 부하 16~18명을 거느리고 말을 타거나 혹은 걸으면서 활과 화살 및 긴 칼과 몽둥이를 무기로 삼아서 집단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쫓아가 물건을 빼앗는 도적질을 저질렀다고 한다. 또한 향화인들은 읍내의 땅을 원래 주인들한테 빼앗아서 농사를 짓거나 곡식을 마구 베어가는가 하면, 자신들이 키우는 수많은 소와 말들을 멋대로 풀어서 키우고 그 가축들이 남의 땅에 들어가 곡식들을 먹어치우도록 내버려 두는 식의 행패를 저질렀다. 이런 행패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관청에 알려 고발을 하면, 관청에서 향화인들에게 사람을 보내 관아로 나오라고 하는데, 문제는 관청의 명을 알리려고 온 사람한테까지 향화인들이 마구 때리며 행패를 부린다는 것이었다. 이토록 향화인들이 깽판을 치다 보니, 마을 주민들이 그들을 두려워하여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꺼려할 정도였다.

4.5. 대청 건국


여진을 지속적으로 간섭하고 통제하던 명나라가 점점 위태해 지자 1618년 1월 1일, 여진국의 쿤둘언 한 누르하치가 수러 겅기연 한이 되어 천조제만력제를 동일시하면서 대금국을 건국해 1619년, 훌룬 4부 중 예허부를 복속함으로써 표면적인 여진 통일을 완수하였다, 1635년 10월 13일, 압카이 수러 한 홍타이지가 조서를 내려 족칭을 만주로 개칭하고, 1636년 4월 11일에 국호를 대청국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반란으로 대순국을 세운 이자성을 제압하고 후에 명조의 영토를 완전히 지배한다. 그 후의 역사와 현대 만주족의 근황은 청나라, 만주, 만주족 문서 참조.
중국 간쑤성(감숙성) 경천현[8] 완안마을이라는 곳에는 완안성씨를 가진 여진족(정확히는 그들의 후예)들이 동족촌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감숙성으로 도망간 사연은 대략 금황실 내부 정쟁에 휘말려 완안올출의 아들이 살해당하자 몇몇 황족들이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의 여진족 후예들은 사당도 지었고 족보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뿌리는 같은 여진족이지만 만주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간쑤성의 여진족을 그냥 만주족으로 취급한다고 한다.[9]

5. 한국사와의 관계


한민족계 국가와 관계가 깊다.

5.1. 고대


부여에서 읍루를 복속시키고 있었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니 한국사의 서장부터 떼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셈. 고구려, 발해시대에는 말갈이란 이름으로 피지배층으로 복속해 있기도 하였으며 신라에 내려가 9서당에 소속되어 살거나 신라에 살았고 말갈의 한 갈래인 흑수말갈이 이들과 대립하기도 했었다. 이들이 침략자의 이미지지만 꽤 오랜 시간 한민족의 피지배 민족이었던 셈이다.[10][11] 이 당시 언어적으로도 한국어계 화자들과 상당한 교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기초 어휘나 생활용품 등을 지칭하는 어휘 가운데 중세 한국어고대 한국어와 유사한 어휘가 상당수 발견되기 때문이다.
송막기문에서[12] 거란인과 발해인(고구려인)의 관계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거란은 발해인에게[13] '논밭을 주고 그 부입을 덜어주었으며 무역이 오고 가고 시장을 모두 탈취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나[14], 즉 '전쟁이 있으면 곧 앞서 말을 몰게 하기 위하여 부렸다'라고 하여 전시(戰時)를 위한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송사 송기에는 '발해의 병마와 토지는 해장에 비해 풍성하다. 비록 거란에 힘써 일하지만 주인을 죽이고 나라를 무너뜨린 원한을 품고 있다[15]'라는 언급이 나와 발해 유민들이 거란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음을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란은 고려나 여진족과의 전쟁에도 발해인을 강제 동원하여 선봉에 세웠다. 특히 여진족과 싸움을 붙인 이유는 후술하겠지만 여진족과 발해인이 사이가 나빠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거란국지 1116년에서 '대저 요동에는 일찍이 여진과 발해가 원수여서 전호가 곧 양민들로 하여금 여러 번 명하여 전쟁하게 했다.[16]'라고 기록하였고, 금사 호사보 열전에서 여진족 호사보가 거란에게 사신인 척 파견되어 정탐하다 발해군과 마주치자 발해군은 오랑캐를 향해 한편으로 비웃고 한편으로 말하기를 '들으니 여진이 난을 일으키고자 한다는데 너희들은 참으로 나쁘도다.[17]' 즉 '야 너네 여진족 XX들 임마 거란놈들 상대로 반란 일으키려다가 이제 와서 사신보내고 꼬리내리냐? 이런 졸렬하고 간사한 새퀴들 같으니'라고 욕한것이다. 발해인들이 얼마나 여진족에 대해서 안 좋게 보았는지 알수있는 대목.
아골타의 경우도 금사 1114년에 '발해인 양복과 알답자로 하여금 거짓으로 도망치게 하여 그 고향 사람들을 불러놓고 '여진과 발해는 같은 집 식구이니 우리가 군대를 일으켜야 (거란의) 죄를 벌할 수 있으니 함부로 망동하지 말고 우리를 따라서 죄가 없게 해야 한다.[18]'고 하여 여진과 발해를 한 집안이라고 언급을 하지만 곧 '딴 생각 말고 우리 따라와라?'라고 말하게 하여 사실 세력 흡수 목적임을 천명했다. 금사 1116년 기사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잘 드러나는데,[19] 고영창이 동경을 근거지로 삼아 발해를 다시 일으키려고 하고, 금나라에 달불야를 사신으로 보내 동맹을 제안하자, 금사 알로(斡魯) 열전에[20] 오래지 않아 달불야가 영창과 탁자를 잡아 바치니, 이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하여 요나라 남로의 계적여진(요나라, 즉 거란 국적의 여진)과 동경의 주현이 모두 항복하였으니, 알로를 남로도통과 질발극렬에 임명하여, 오준에 남아 동경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요나라의 법을 폐하고 세금을 덜어주었으며 맹안모극을 설치하여 본조(금나라)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즉 얼마 후 고영창을 배신하고 정복 후 죽여버린 다음 그 세력을 모조리 흡수한 것이다.
여진족도 발해인을 상당히 안 좋게 보거나 매우 경계한 듯한데, 송막기문의 내용을 살피면 대요, 대송 전쟁의 선봉으로 발해인을 사용하는데, 무려 발해군 3만을 동원하고 북송 전쟁이 끝난 후 산동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다.[21] 거란국지에서도 해당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이에 발해인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22] 금사 병지의 기록에도 한족과 발해인을 맹안모극에서 강제로 탈퇴시켜 차별대우했으며, 그 혜택을 국인/내족, 즉 자신들에게 몰아주게 된다.[23] 금사 희종(熙宗) 본기에서는 거란인과는 달리 그냥 한족 취급을 해서 한족의 글자를 강제한다[24]. 금사 병지에서는 여진, 거란, 한인의 통혼을 허락하면서도 발해인은 아예 기록을 하지 않아 대놓고 없는 취급 내지는 배제를 하며[25] 금사 세종(世宗) 본기에서도[26] 발해인들은 여진, 거란과는 다르게 형사취수를 금지당하고, 양자를 들이는 것 또한 차단당하며 한족의 풍습을 강제당하는 등 한족과 똑같은 취급을 당했다.[27] 이를 보면 북방에서 꽤 많은 숫자를 유지하며 살고 있던 한민족을 사라지게 만든 것은 바로 거란과 여진족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고려 말에 원나라에서 요동지역을 관리하는 심양왕 자리에 고려 왕족을 임명했다는 기록이나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요동정벌을 계획했던 것을 보면 많은 수가 한족에게 동화되었음에도 적어도 15세기 무렵까지는 요동으로 이주해서 동화되지 않은 고려인들이 적지 않게 살았던 듯[28] 물론 그렇다고 요동지역에 발해인들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강제이주는 송나라 공격에 동원된 발해인 병력 3만여명에 해당한 것이었고 나머지 다수는 요동이나 요서의 거란내지에서 거주하고 있었다.[29] 하지만 이들도 오랜세월이 흐르며 결국 한족이나 만주족에게 동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고려로 갔거나.

5.2. 중세




5.3. 근세




6. 관련 문서


[1] 이 3개의 별칭은 여진(女眞)에서 파생된 것이다. 여직의 경우에는 거란 흥종을 피휘하기 위해서 진을 직으로 바꾼 것이라고 하는데, 만주어학자 아이신교로 울히춘은 이것이 민간어원이며 실제로는 방언 차이라고 주장한다.[2] 실제로 여진족은 수렵생활을 하긴 했다.[3] 요나라 때에는 '여진족이 만 명을 넘으면 대적할 수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4] 야인시대의 그 야인과 한자 철자가 같다. 다만 의미는 좀 다르다. 여기선 들판에 사는 사람들, 문명(중원)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이라는 의미.[5] 중국명은 허저족 혹은 혁철족.[6] 특히 조선이 국경을 건너 여진 토벌에 나서는 것을 명에서는 일부러 묵인하고 방관했다.[7] 물론 만주라고 해서 무조건 척박한 것은 아니고 송화강 유역의 흑토지역도 있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같은 강력한 나라가 나왔지만 금나라 시기에 대대적인 인구유출에다가 몽골군이 금나라를 정복하면서 만주지역의 인구가 대규모로 감소되었고, 또한 조선이 존속했던 시기가 소빙하기가 겹쳐서 만주일대의 농업생산성이 떨어졌던 시기였다. 물론 송화강이나 연길 지역, 요녕 일대에서 여전히 농사를 대규모로 지었던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전보다 생산성이 떨어지는것은 어쩔수가 없었고 또한 약탈이나 살해 위협 등 치안도 열악했기 때문에 아무리 혜택을 준다해도 굳이 정착하려는 조선인들이 적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조선 후기에 연변 일대에 조선인들이 상당수 이주해서 정착해왔지만 이때는 만주족들이 중국대륙을 장악했던지라 굳이 조선까지 가서 약탈해야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8] 경안 현이라고도 알려져있지만 잘못 알려진 것이다. 중국어 발음으로는 '징촨'으로 불린다.[9] 실제로 금나라 황족계 후손들 중 또다른 일부는 팔기군에 편입되어 진짜로 만주족이 되기도 했다.[10] 단, 유목민 특성상 진짜 피지배를 당하고 있는것인지 아닌지 미묘하기는 했다. 동아시아만이 아니라 이집트, 페르시아 등 역시 자기 영토 혹은 영향권 안에 있는 유목민들을 피지배층으로 여기기도 했으나 거기 살던 유목민들 중에는 딱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반란(?) 혹은 침략을 벌여서 그러한 나라들을 멸망시킨 유목민들도 많았다.[11] 일본에서는 정반대로 해석해서 나온 것이 만선사관이다. 이쪽에서는 고구려를 여진계열의 만주족이라고 주장하며, 만주족이 한민족을 지배했다고 주장하며 더 막가는 일본의 사이비 역사학 부류는 아예 고대 한민족과 지금의 한민족은 만주의 민족에 의하여 교체된 민족이었다는 개드립을 친다.[12] 당고종대인 648년에 이 거란 지역에 설치한 기미주의 이름이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로, 이후 거란의 추장들은 당 조정으로부터 현지 기미주 수령 자격으로 송막도독(松漠都督)에 임명되었다. 발해의 개창으로 이어진 유명한 이진충 역시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송막도독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13] 給以田疇, 捐其賦入, 往來貿易, 關市皆不征[14] 有戰則用為前驅[15] 渤海兵馬土地, 盛於奚帳, 雖勉事契丹, 俱懷殺主破國之怨[16] 蓋遼東夙與女真, 渤海有讎, 轉戶則使從良, 庶幾效命敢戰[17] 遇渤海軍, 渤海軍向胡沙補且笑且言曰: 聞女直欲為亂, 汝輩是邪[18] 召渤海梁福, 斡答剌使之偽亡去, 招諭其鄉人曰: 女直, 渤海本同一家, 我興師伐罪, 不濫及無辜也[19] 閏月, 高永昌據東京, 使撻不野來求援[20] 未幾, 撻不野執永昌及鐸刺以獻, 皆殺之. 於是, 遼之南路系籍女直及東京州縣盡降. 以斡魯為南路都統, 迭勃極烈, 留烏蠢知東京事. 詔除遼法, 省賦稅, 置猛安謀克一如本朝之制.[21] 金人慮其難制, 頻年轉戍山東, 每徙不過數百家, 至辛酉歲盡驅以行。[22] 至辛酉歲, 盡驅以從, 其人大怨[23] 迨夫國勢浸盛, 則歸土地, 削位號, 罷遼東渤海, 漢人之襲猛安謀克者, 漸以兵柄歸其內族, 熙宗皇統五年, 又罷遼東漢人, 渤海猛安謀克承襲之制, 浸移兵柄於其國人, 凡漢人, 渤海人不得充猛安謀克戶。猛安謀克之奴婢免為良者, 止隸本部為正戶.[24] 天眷元年 六月 乙未, 詔百官誥命, 女直, 契丹, 漢人各用本字, 渤海同漢人[25] 迨夫國勢浸盛, 則歸土地, 削位號, 罷遼東渤海, 漢人之襲猛安謀克者, 漸以兵柄歸其內族, 熙宗皇統五年, 又罷遼東漢人, 渤海猛安謀克承襲之制, 浸移兵柄於其國人, 凡漢人, 渤海人不得充猛安謀克戶。猛安謀克之奴婢免為良者, 止隸本部為正戶.[26] 丙戌, 制漢人, 渤海兄弟之妻, 服闋歸宗, 以禮續婚者, 聽[27] 다만 같은 고구려 유민에 의해 세워졌고 발해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던 고려에서조차 한족의 글자인 한자를 썼던 데다 형사취수 같은 풍속은 애초에 사라져 있었고(서옥제 즉 데릴사위 풍습은 조선 중기까지도 남아 있었다) 송나라나 몽골 사람들이 고려인들을 두고 "글도 알고 불교 믿고 하는 것이 꼭 한족들 같아 다름이 없다"고 한 것을 감안하면 이를 달리 생각해볼 여지도 있다. 여기서 '한족들의 풍습을 강제당했다'는 말을 꼭 1930년대 민족말살통치와 동치시켜 볼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28] 발해인들이 산둥 지역으로 강제이주된 뒤에도 고려 방면에서 북쪽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다. 요동 지역에 살게 된 고려인들의 경우 몽골과의 전쟁으로 포로가 되거나 몽골군에 항복한 사람들이었고, 그들 가운데는 훗날 조선 왕조를 세우게 되는 이성계의 고조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몽전쟁 및 대몽항쟁을 지속한 삼별초 역시 기존의 좌우 야별초에 '''몽골에 잡혀갔다가 도망쳐 돌아온 포로 출신들만 모아서 구성한 부대'''인 신의군이 더해져서 삼별초를 이루었다.[29]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에서도 요양발해인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