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건적

 

紅巾賊
1. 개요
2. 경과
3. 한국사에서
4. 관련 세력 / 인물


1. 개요


중국 원나라 말기 하북과 강남 일대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군 중 하나로 백련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하였다. 본래 홍건군이라고 하지만 홍건적, 홍두적, 홍적 등 도적으로 부른다. 홍건이란 것은 황건적처럼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르고 다닌 것에서 유래했다.
결국 원나라는 무너지고, 홍건적 출신의 주원장명교의 이름을 따서 명나라를 세웠으니 '''중국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성공한 반란'''이라고 할 수 있겠다.[1]
원나라 말기에 봉기한 세력은 장사성, 방국진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홍건적 계열이다.

2. 경과


14세기 전반에 몽골족의 원나라에 억압받던 한족[2] 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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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9년 ~ 1361년, 홍건적 세력 (지금의 푸젠성 해안가 지역)
이 중 한 세력인 홍건군은 크게 동계홍건군, 서계홍건군으로 둘로 나뉘었다.
동계홍건군은 수령이었던 한산동이, 당시 유행하던 백련교를 등에 업고, 미륵불과 송휘종의 8세손이라 자칭하며 송나라(한송, 명송, 홍송) 재건을 선언하였으나, 원나라의 공격으로 붙잡혀서 참수당하였다. 그러자 1351년, 유복통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내세워 소명왕으로 칭하며 세력을 이어갔다.
서계홍건군은 서수휘가 1351년에 황제를 자칭하면서 국호를 천완국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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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2년 ~ 1366년, 홍건적 세력 (지금의 푸젠성 해안가 지역)
동계홍건군이 북벌을 시행하여 원이 수도를 옮기게 하는데 성공한 직후, 내분이 일어나고 그 안에서 따로 독립하는 세력까지 나타나면서 대부분이 원의 반격을 받아 1366년에 동계홍건군의 대송국이 멸망하였고, 서계홍건군도 내분으로 서수휘가 살해당하면서 1360년에 서계홍건군의 천완국이 멸망했다.
이들이 멸망하자 대부분 홍건적에게서 독립한 세력들끼리 새 시대의 패권을 두고 싸웠는데 동계홍건군에서 독립한 세력 중에서는 곽자흥 휘하에 있다가 그가 죽자 세력을 흡수한 주원장, 서계홍건군에서는 서수휘를 죽이고 한(진한)을 건국한 진우량, 하(명하)를 세운 명옥진이 있으며 그 밖에 홍건적에 속하지 않은 방국진, 장사성, 진우정 등이 군웅할거를 벌였다.
그러나 결국 소명왕 한림아를 내세운 주원장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되었으며, 주원장의 꼭두각시가 된 한림아를 주원장이 끝내 익사 사고를 가장하여 죽여버렸기 때문에 그가 명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3. 한국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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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두건의 도적들, 고려로 밀려오다
홍건적의 1차 침입
홍건적의 2차 침입
홍건적의 고려 침공은 원나라에 쫓겨 요동으로 물러선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한 사건으로 1359년 12월에 1차 침공과 1361년 10월 2차 침공이 있었다. 또한, 1차 침공 이전에도 약 3천여 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식량과 물자를 약탈하기도 했었다.
1359년의 1차 침공은 모거경이 4만여 명의 병력으로 침공했다가 70여 일 만에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채 압록강을 건너 패주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2차 침공은 반성, 사류, 관선생, 주원수가 이끄는 20만[3]여 명의 홍건적 대군세가 고려를 재차 침공하였고 고려는 수비군을 보냈으나 참패하였고 홍건적에게 수도인 개경을 함락당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이탓에 공민왕안동까지 몽진해야만 했다. 하지만 공민왕은 20만의 군대로 반격하였고 고려군은 안우, 김득배, 이방실, 이성계 등의 활약으로 3개월 만에 개경을 탈환한다. 이때 홍건적은 10만여 명을 죽었으며, 나머지 10만여 명은 다시 압록강을 건너 중원으로 도주하는 것으로 끝났다.
공격 이유로는 주로 두가지 정도가 추측된다. 원의 반격을 피하기 위한 재기 공간이 필요한 상황에서 원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한반도의 고려가 좋은 타겟이었고, 그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므로 원•고려가 동맹이라 간주할만한 관계였다. 실제로 갈등이 심화되던 양국은 홍건적의 준동 이후 공동 대응에 나서야 했다.
홍건적의 침입 와중에 고려는 많은 사회적 혼란과 변화를 경험하였는데 우선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었으며 경기도 지방의 호적이 망실되는 등 국가의 지배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권세가에 의한 토지와 인구의 탈점이 널리 행해지면서 신분제의 혼란과 농장의 발달 등이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홍건적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이성계 등 신흥 무신세력들이 정치적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한편 공민왕의 개혁 정책도 이 때문에 상당 부분 실패하게 된다. 홍건적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원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이후 (북)원과 고려가 모두 망할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고려를 침입한 홍건적들은 5천 명의 중무장 기병인 철기(鐵騎) 부대를 거느렸다고 한다.#

4. 관련 세력 / 인물


  • 곽자흥, 손덕애 - 호주성의 홍건군.
    • 곽천서 - 곽자흥의 아들로 그의 세력을 계승했지만 진야선의 배신으로 원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
  • 맹해마 - 남계홍건군.
  • 명옥진 - 서수휘의 부장이었지만 서수휘 사후에는 사천에서 할거. 명하를 세운다.
  • 서수휘(서진일) - 기수에서 일어난 서계홍건군으로 팽형옥의 추대를 받아 예문준, 추보승, 항갑 (항노아) 등과 함께 세력을 일으켜 천완국을 건국하였으나 진우량에게 살해됨.
  • 유복통 - 한림아를 소명왕으로 옹립해 송나라를 세우고 세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였다가 몽골 차칸 테무르의 공격으로 패사함.
  • 조균용 - 서주에서 원군에게 패하자 호주의 홍건군에게 가담했다가 영의왕을 자칭함.
  • 주원장 - 곽천서의 세력을 흡수하고 원나라를 비롯한 여러 세력을 물리쳐 명나라를 건국.
  • 진우량 - 서수휘의 수하인 예문준의 부장이었지만 예문준을 죽이고 이어 서수휘까지 죽여 자립하여 한나라 (진한)를 세웠으나 파양호 대전에서 주원장에게 패사.
  • 팽대 - 서주에서 원군에게 패하자 호주의 홍건군에게 가담했다가 노회왕을 자칭함.
    • 팽조주 - 팽대 사후에 세력이 쇠퇴한 상태에서 노회왕을 자칭함.
  • 팽형옥 - 서계홍군의 창건자로 원주에서 주자왕과 함께 봉기.
  • 포왕삼 - 북계홍건군.
  • 한산동 - 동계홍군의 창건자로 영주에서 두준도, 유복통과 함께 봉기하려다가 붙잡혀 죽음.
    • 한림아 - 한산동의 아들로 후에 송의 소명왕으로 옹립됨. 그러나 후에 익사 사고로 사망하는데 주원장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추정됨.
  • 모귀 - 송의 중로군으로 북벌을 하여 익도를 공격하였다가 막혀 내부 분쟁으로 살해됨.
  • 대도오, 이희희, 백불신 - 송의 서로군으로 서정을 하였다가 패멸함
  • 모거경, 모귀양, 반성, 사유, 관선생, 주원수, 파두반 - 송의 동로군으로써 상도까지 함락시켰지만 원의 토벌로 밀린 후 2차례에 걸쳐 20만 대군을 끌고 고려를 침공하고 고려의 수도 개경까지 함락했으나 고려군의 반격으로 절반이 몰살당하고 원나라로 도망쳤다가 궤멸했다.

[1] 허나 처음 홍군에 들었던 주원장은 세력을 얻어나가면서 전통 봉건사회와 이질적인 백련교 출신 홍건적과 결별하고 탄압했다.[2] 4단계로 된 원의 사회 계급 중 아래층(3-북송 / 4-남송)에 속했다.[3] 일본의 연구에서는 최대 10만 명으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