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합무역
1. 개요
명나라 당시 조공국들과 명나라 사이에서 행해졌던 동아시아 지역의 가장 보편적인 공무역이자 조공무역[1] 을 의미한다. 조선·여진 등과도 행했지만(조선의 경우 이하에 후술) 보통 감합무역이라고 하면 명·일(무로마치 막부) 간의 무역을 의미한다.
실제로 위키피디아의 경우, 명일무역을 표제어로 삼고 감합무역 항목은 리다이렉트되며, 2017년 기준 수능 사회탐구 동아시아사와 세계사에서는 감합 무역을 명·일본에 한해 설명한다. 감합무역의 가장 큰 목적은 무역 그 자체에서의 이익 추구라기보다는, 중국 측에서 주변 민족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려는 외교적 목적이었다.
2. 상세
본래 감합(勘合)은 '합해서 조사한다'라는 말이다. 당시 조공국의 사신이 명나라에 입항할 때 관리가 나와 황제의 도장이 찍힌 문서를 확인했는데, 여기서 감합이라는 말이 나왔다. 감합은 상세 사항이 적힌 표찰로, 이를 반으로 쪼개 정해진 양만큼 조공국에 나누어 준 뒤 일일이 맞추어 확인함으로서 사용했다. 조공무역은 상당한 경제적 이권과 연결되어, 본래의 종속적 의미는 사실 뒷전이었고, 상인들은 물론 해적들까지 조공을 위장하여 몰려들게 되어 이런 확인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감합은 각 나라마다 배부량이 정해져 있었고, 감합을 미리 발급하여 확인된 상인들만 공식적인 사행에 지참시키고, 진위를 확인하여 상인이나 해적들의 조공 사칭을 방지할 수 있었다.
기록상 최초로 감합이 사용된 사례는 1383년 샴국(현 타이)에 발급한 것이다. 원래는 금속·상아·목재 등의 재료로 만든 표찰에 글씨를 새긴 뒤 양분하여 한쪽은 보관하고 한쪽은 상대방에 발급하는 형태였지만, 이후 문서화하여 원장에 등록하고 계인과 일련 번호를 매겨 발급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또, 연호가 바뀔 때마다 주변국에 새 감합을 보내고 옛 감합은 회수하였다. 감합은 조공 횟수와 국가, 선박의 수 등을 고려하여 발부되었는데, 여기에는 선박·인원·화물의 수와 내왕기간·입항지·조공로 등이 세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3. 명·일본 무역
가장 유명한 감합무역의 사례로, 1401년 일본 국왕으로 책봉되면서 명과의 교류를 시작한 아시카가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명에게 계속 청원하여 1404년, 감합 무역을 허가 받는다. 그러나 전성기였던 요시미츠 시대의 종결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닝보의 난(1523)이 터지고야 말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혼란한 센고쿠 시대를 바탕으로 아시카가 막부가 쇠퇴하고, 대신 오우치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이 감합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 두 세력이 닝보에 입항한 뒤 서로의 배에 불을 지르는 등 싸우다가 결국 대규모 난으로 발전한 사건인다. 그리고 이 사건 와중 애꿎은 명나라 백성들과 관리들까지 살해당하면서 감합 무역에 치명타를 안긴다. 여기에다 명나라 황제의 인장까지 위조해 가면서 가짜 서류가 남발되었고, 결국 감합무역은 쇠퇴하다 16세기 중반 폐지되었다. 하지만 한 번 무역의 맛을 본 일본인들은 가만있지 않았고, 이로서 이른바 '''북로남왜'''[2] 가 터진다. 일본 상인들과 해적들은 중국 해적들과 밀무역을 했고, 이 당시 유명했던 중국인 해적으로 쌍서도의 왕직이 있다.
만약 동아시아사나 세계사를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이 감합무역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한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자주 출제된다. '''15의 법칙'''을 외우는 게 좋다. 15의 약수인 1, 3, 5, 15세기에만 일본이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는 법칙.
4. 명·조선 무역
특이하게도, 조선의 경우는 사행이나 무역 과정에서 감합을 발급하지 않았다. 대신 일반 외교 문서만 서로 주고받았다. 조선에서도 통신부(通信符)라는 이름의 감합이 일시적으로 발급되기는 했으나, 보통은 도서(圖書)·서계(書契)·문인(文引) 등의 문서가 공식 사신의 확인서로 사용되었다.[3]
또한 조선이 일본이나 여진족에 대해 허용한 무역도 감합만 발행하지 않았다 뿐이지 감합무역으로 볼 수 있다.[4] 조선은 무역을 외교의 부수 행위로 간주하고, 기타 사무역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조선의 교역 상대는 일본의 막부는 물론, 거추(巨酋)라고 불리는 각 지방의 영주들과 대마도주 등의 일본인들과 여진족의 여러 부족들이었다.
[1] 전통적인 중화사상에 따라 주변국들이 황제에게 종속의 표시로 공물을 바치고 그 반대급부로 회사품(回賜品)을 받는 무역. 외교적 의례와 결합되었다.[2] 북에는 오랑캐(15세기에는 오이라트, 16세기에는 알탄 칸을 위시로 한 타타르. 참고로 알탄 칸의 경우 1550년 베이징을 포위하기까지 했다. 이른바 경술(庚戌)의 변.) 남에는 왜구[3] 다만 이름만 다를 뿐이지, 이런 문서들도 발급·확인 절차 및 효용의 면에서 감합과 같은 기능을 가졌기 때문에 감합무역이라고 할 수 있지만, 수능을 주관하는 평가원에서는 명·일본 무역만 감합무역으로 친다.[4] 다만 현 교육과정에서는 이런 무역을 감합무역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