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선(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항일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경선은 1891년 8월 15일 평안북도 정주군 대전면 운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7월 중국으로 망명했고 그해 12월에 상하이에서 여운형 등이 조직한 상해대한인거류민단 (上海大韓人居留民團) 간사로 선임되었다. 이후 1921년까지 1년간 상하이 일대 한인들의 자치 활동을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족운동을 후원했다.
1921년 11월 25일, 강경선은 대한적십자회에서 양헌(梁憲), 김구(金九) 등 12명과 함께 상의원(常議員)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사회주의 운동을 통한 민족해방을 모색한 공산주의자로, 국내의 화요파(火曜派)와 연계해 사회주의 운동을 꾀했으며, 고려공산당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자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했다.
1923년 2월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한 강경선은 임시정부의 조직 개편을 놓고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국민대표회의를 독립운동단체의 최고 기관으로 세우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존속시키되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개조하자는 개조파가 대립하자 태극단(太極團)의 대표로서 개조파를 지지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교민단(僑民團) 의원으로서 교민단과 인성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교민들로부터 부과금을 징수했다.
강경선은 1924년 8월에는 교민단 총무를 맡았으며, 1925년에는 의정원 평안도 대의사(代議士)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특히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한국을 위임통치해달라는 청원을 한 것에 반발해 최석순 등과 함께 대통령 탄핵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해 이승만이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1926년 3월 1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노북문 민국로 침예당에서 거행된 3.1 운동 기념식에 교민단장 대리로 참석해 식사(式辭)를 낭독했으며, 그해 10월에 인성학교 교감으로 동포 자제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이후 1927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한국유일당 조직 촉성회에 참석해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한인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난징에서 활동하다가 1930년 9월경 괴한에게 피살되었다. 일제 밀정에게 피살되었다는 설과 상해파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피살되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3. 기타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강경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