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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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은 통일신라 초에 제작된 높이 43cm, 폭 26.7m, 두께 17cm의 크기의 육면체로 된 납석제 비석형 불상이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이라는 이름을 풀이하자면, 계유년에 전씨 일가의 발원에 의해 만들어진 아미타불을 모신 비석형 불상이라는 뜻이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은 본래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1] 의 운주산에 위치한 비암사에서 전해지던 불상이다. 비암사에서는 본 불상 이외에도 두 개의 비상형 불상을 더 소장하고 있었는데 총 3위의 불상은 1960년 9월에 발견 및 조사되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2]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을 모시고 있던 비암사는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본 비상은 비암사에 있는 삼층석탑[3] 의 꼭대기에서 발견된 것이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은 1962년에 국보 제106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2. 내용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은 비석형 불상으로, 육면체의 윗면과 아랫면을 제외한 나머지 4면에 불상과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한반도에서 발견된 불상 가운데서는 보기 드문 비석형 양식을 보인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비석형 불상은 본 비상까지 합하면 총 7점이 전해지고 있는데[4] 이 7점 모두 한 지역의 권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비석형 불상은 일련의 불상들이 조성될 무렵 이 지역의 독자적인 불상 조형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상의 전면은 여러 단의 음각으로 돌을 파내려가서 일종의 감실과 같은 효과를 주고 있으며, 여러 불상과 문양들은 양각과 음각이 혼합되어 새겨졌다. 연꽃무늬 대좌 위에는 삼존불과 다른 존상들이 모셔져 있는데, 본존불을 비롯한 여러 불상들의 얼굴은 훼손 정도가 심하여 정확한 표정을 파악하기 힘들다. 이러한 훼손은 본 비상이 발견된 삼층석탑 꼭대기에 모셔지기 전에 생긴 것인지,[5] 아니면 삼층석탑에 모셔진 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저절로 마멸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훼손된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는 아주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 수준을 드러내고 있다.
본존불인 아미타불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설법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으며 그 양 옆으로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협시보살[6] 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서 있다. 삼존불 사이사이로는 상반신이 묘사된 나한들이 위치해 있으며, 협시보살의 옆에는 인왕이 서 있다.
아미타불의 머리 뒤로는 광배가 조각되어 있으며 그 뒤로도 거대한 광배가 더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중의 형태로 되어 있어서 총 3중의 광배가 새겨진 형태이다. 이 3중의 광배 중 가운데 광배에는 5구의 불상이 있고, 가장 겉의 광배에는 비천상이 묘사되어 있다. 광배의 밖에는 천인이 있는데, 전면에 음각으로 새긴 여러 존상들 가운데 가장 깊은 단에 새긴 것이며 전면부 좌우 상단에 위치한다. 또한 앞면의 가장 하단에서는 명문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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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의 양 측면은 동일한 형태로 조각되어 있는데, 각 면의 위, 아래로는 나무가지 끝에 핀 연꽃 위에 앉아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들이 묘사되어 있다. 측면의 가장 하단에는 용의 머리가 새겨졌고 그 주변의 바탕에는 명문을 새겨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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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의 뒷면에는 총 20구의 좌불이 배치되어 있는데, 뒷면을 상하 4단으로 나누어서 각 단마다 5구씩 좌불을 새겨넣었다. 각 좌불들은 모두 같은 형태로 연꽃 대좌 위에 앉아 있다. 그리고 좌불들의 사이에도 명문이 새겨져 있다.
사실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불상들이 전반적으로 훼손되어 있어서 육안 상 불상만 보고서는 쉽게 정보를 파악하기가 힘든데, 다행히도 비상의 여기저기에 명문이 있고 판독이 가능한 정도로 보존된 글자가 약 166자 정도 남아 있어서 본 비상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비상에 적힌 명문 가운데에
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 비상에 모셔진 본존불이 아미타불이며 협시보살은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임이 확인된다. 또한 명문을 통해서 본 비상의 조성 시기도 확정할 수 있다. 명문에서 비상을 발원한 사람의 이름들과 관직명 등이 언급되는데 여기서 백제의 관등명이 발견된다는 점, 명문에서 밝히는 연도는 계유년이라는 점과 불상의 양식을 고려해보면, 본 비상에서 말하는 계유년은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통일신라가 성립된 초기 시기인 신라 문무왕 13년(673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본 비상이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임에도 명문에서 백제의 관등명이 언급된다는 점은, 본 비상을 발원한 전씨 일가가 패망한 백제의 유민일 것임을 시사해준다. 다시 말하자면, 본 비상은 백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최후의 불상 가운데 하나라고도 볼 수 있다.[8]전씨들이 마음을 합쳐 아미타불과 관세음, 대세지보살상을 삼가 석불로 새긴다. 계유년 4월 15일…중략…목(木) 아무개 대사 등 50여 선지식이 함께 국왕·대신·7세(七世) 부모의 영혼을 위해 절을 짓고 이 석상을 만들었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명문 중[7]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은 비록 불상들은 훼손되어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나머지 조각들의 보존상태가 대체적으로 좋고 그 수준 자체도 대단히 뛰어나 미적인 가치가 높으며, 비석형 불상이라는 형태 상의 특이점과 명문이 남아 있어 정확한 조성 시기를 확정할 수 있고 조성 이유도 명문에서 명확히 드러난다는 점, 통일신라 초기의 백제 계열 불상이라는 점 등 귀중한 가치를 다수 지니고 있는 유물이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은 이러한 가치들을 높게 인정 받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3. 계유명삼존천불비상과의 비교
본 불상은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서광암(瑞光庵)에서 발견된 국보 제108호 계유명삼존천불비상과 비슷한 점이 많다.
계유년에 만들어졌기에 두 불상의 제작 연대가 같은 것으로 보이며, 제작 양식도 비석형으로 역시 동일한데다, 발견된 위치가 모두 연기군이고, 쓰인 글귀 또한 매우 비슷해서[9] 이 불상들이 함께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본 불상과는 달리 계유명삼존천불비상은 발원자가 진모씨(眞牟氏)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현재는 멸성된 백제 대성팔족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백제 멸망 후에도 대성팔족이 당장 사라지지 않았고 한반도에 여전히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유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진모씨(眞牟氏)는 현재 멸성된 상태로 후손이 남아 있지도 않고 이들의 후손을 자처하는 가문도 존재하지 않지만, 진모씨(眞牟氏)와 함께 불상을 제작한 전씨(全氏)는 현재까지도 후손이 잘 남아 있기 때문에 진모씨들의 행방에 대한 의문점은 여전한 상태이다.
4. 바깥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
-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 조각 : 계유명전씨 아미타삼존불비상
- 네이버캐스트 문화유산 알아보기 :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 서울신문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64)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석상
- 서울신문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 신라왕 극락왕생 빈 백제 유민…불비상에 아로새긴 망국의 한
- 두산백과 :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5. 국보 제106호
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에서 발견된 이 삼존석상은 4각의 긴 돌 각 면에 불상과 글씨를 조각한 비상(碑像) 형태이다.
정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테두리를 새기고, 그 안쪽을 한 단 낮게하여 아미타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커다란 연꽃 위의 사각형 대좌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얼굴 부분이 갸름한 모습이며, 신체는 건장하면서 안정된 자세를 이루고 있다. 부처가 설법할 때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손은 비교적 크게 표현되어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사각형의 대좌(臺座)를 거의 덮고 있으며, 대좌 밑의 좌우에는 사자상을 배치하였다. 둥근 머리광배는 3줄의 동심원 안에 연꽃을 장식하고 있다.
사자 등위의 연꽃무늬 대좌 위에 서 있는 협시보살상은 본존불 쪽으로 몸을 약간 튼 자세로, 얼굴은 훼손이 심하여 알아볼 수 없으나 연꽃이 새겨진 둥근 머리광배가 남아 있다. 본존불과 협시보살의 어깨 사이에는 나한상이 얼굴만 내밀고 있으며, 협시보살상의 양 옆에는 인왕상이 서 있다. 불상 위로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광배가 이중으로 있으며, 안쪽의 광배에는 5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광배 밖의 좌우 공간은 한층 더 낮추어 비천상을 새겼다.
양 측면의 하단에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용머리를 조각하고, 그 위로는 연꽃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표현하였다. 뒷면은 4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5구씩의 작은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불상 사이사이에 사람의 이름과 관직을 새겨 넣었다.
조각이 정교하면서도 장엄하고, 세부 양식에 있어서도 옛 형식을 남기고 있는 점이 계유명삼존천불비상(국보 제108호)과 비슷하며, 만든 연대는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13년(673)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