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륵
觀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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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 때의 승려. 일본 최초의 승정(僧正)[1] 이기도 하다.
일본 스이코 덴노 10년(602년) 10월에 왜국에 건너가서 역법과 천문 · 지리 및 둔갑 · 방술[2] 서적들을 전했고, 왜국 조정은 야코노 타마후루(陽胡玉陳)에게 역법, 오토모노스구리 코소(大友村主高聰)에게 천문 · 둔갑, 야마시로노오미 히타테(山背臣日立)에게 방술을 각기 가르치도록 했다고 한다. 관륵 자신은 겐코지(元興寺)에 머물렀다.
관륵이 파견되었을 당시 백제에서는 무왕이 한창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는 상황이었고,[3] 왜국에서도 쇼토쿠 태자의 동생으로 알려진 구네메 황자(來目皇子)를 중심으로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에[4] 그가 왜국에 온 것도 백제의 왜에 대한 군사적 지원요청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5]
스이코 32년(624년)에 어떤 승려가 '''도끼로 자기 할아버지를 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스이코 여왕은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면서 범인 뿐 아니라 전국의 다른 승려들까지 모조리 조사해서 처벌을 내리라고 지시했는데, 관륵이 나서서 '''불교가 백제에서 왜국에 전해진 것이 이제 100년도 안 되어서 승려들이 법과 계율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 벌어진 사건'''이라며 범인을 제외한 승려들을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다고 하며, 왜국은 승려들의 계율을 정하고 관리할 체계적인 승단 조직이 필요하다는 관륵의 건의를 수용해 승려들을 감독하는 승정(僧正)과 승도(僧都) 직책을 두고 관륵을 승정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로써 일본의 승단 조직이 정비되었고 교단의 기율이 잡히게 되었다.
관륵이 가져온 역법, 천문, 지리, 둔갑, 방술 관련 서적, 승도들을 관리할 수 있는 중앙관부의 설치는 이후 일본의 사상계에 영향을 준다. 관륵이 오기 앞서 백제에서 위덕왕 24년(577)에 파견한 인물 가운데 주금사(呪禁師)[6] 가 있었고, 관륵이 가져온 역법이나 둔갑술, 방술 등의 서적은 도교 관련 서적으로써 상세(常世) 신앙[7] 이 왜국에 퍼지기도 했으나, 중앙 정부의 통제로[8] 교단화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다만 이후 견당사들에 의해 당에서 다시 도교가 전래되고 이것이 일본에 토착해 음양도가 퍼지면서 관륵은 음양도를 일본에 처음으로 전한 자로써 재조명된다.
한국에는 관륵에 관한 사적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금강산 정양사는 백제 무왕 1년(600년)[9] 에 관륵과 강운(降雲)이 창건한 절이라는 전승이 있다. 그런데 알다시피 금강산은 백제나 그가 주로 활동한 왜국과 거리가 먼 한반도 동북부, 적국인 고구려나 신라의 영역에 있었고 절의 역사를 더 오랜 과거로 뻥튀기하는 사례가 흔했기 때문에 이 전설이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입장도 있는 모양.##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도 부정적으로 보았다. 절 자체는 신라의 원효가 이어받아 중창하고 조선 시대까지 거듭 중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국전쟁 당시 큰 피해를 입어 반야전과 약사전만 남았고, 그나마도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일본측 기록에는 같은 백제인 승려 혜총, 도근 등과 함께 사가 현(滋賀縣) 아이치 군(愛知郡)의 석가산(釋迦山)에 백제사(百濟寺)를 지었다고 한다. 1998년 일본 아스카데라 인근 아스카이케 유적에서 관륵의 이름이 적힌 목간이 발견됨으로써 관륵이 실존인물임이 확인되었다.#
일본인 학자 후루카와 기이치로(古川麒一郎)와 고사이 히로키(香西洋樹)가 1977년 발견한 소행성 4963호에는 '관륵'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 승려들의 계율을 정하고 그 수행을 관리, 감독하는 최고위 직책.[2] 방술에는 단순히 불로장생 같은 도교적 수행법이나 점 치고 관상 보는 것뿐 아니라 의학, 천문학, 역법(달력 제작) 등 과학적인 연구를 필요로 하는 학문도 포함한다. 마찬가지로 둔갑도 고대에는 병법의 하나였다. [3] 관륵이 왜국에 온 해인 602년 가을 8월에 백제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아막산성을 공격했다.[4] 구네메 황자는 관륵이 온 이듬해(603년)에 사망했고, 이어 신라 공격을 지휘할 장군으로 임명된 다이마 황자(當麻皇子)는 하리마에서 아내가 죽자 장례를 치르고 되돌아왔으며, 이후 신라 공격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이때 신라를 공격하는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임나를 돕는다'''"는 것이었는데 임나(가야)가 신라에 멸망한 것은 40년 전인 562년의 일이다.[5] 백제에서 왜국이 필요로 하던 기술자 또는 지식인을 파견하고 대신 그 급부로 왜국의 군사 지원을 요구한다는 외교 교섭 구도는 이미 한일양국에서 백제와 왜 양국의 관계를 설명하는 거의 고전급의 해석이다.[6] 주문을 읽어서 질병을 물리치는 일을 하던 직책. 고대에는 이러한 종교적인 치유 기도 역시 엄연히 의료행위의 하나로 취급받았다.[7] 상세는 신선들이 사는 세계로 이곳에 사는 상세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가난이 해결되고 젊어진다는 믿음.[8] 그리고 일찌감치 도교는 중국에서 처음 전래된 이후 일본 재래의 신토나 슈겐도와 융합되어 버렸다.[9] 일본서기에 관륵이 왜국에 건너왔다는 시점에서 2년 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