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colbgcolor=#000000><colcolor=#fff> '''출생'''
617년
금성 압량군 불지촌
(現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사망'''
686년 3월 30일
'''법명'''
원효(元曉)
'''자칭'''
소성거사(小性居士)
'''시호'''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
'''골품'''
6두품
'''성씨'''
설(薛)
'''본명'''
사례(思禮)/ 서당(誓幢)/ 신당(新幢)
'''아버지'''
담날(談捺)
'''배우자'''
요석공주(瑤石公主)
'''아들'''
설총
1. 소개
2. 생애
3. 후세에 준 영향
4. 해골물을 마신 일화
4.1. 실화인가?
4.2. 해골물 드립
5. 대중문화에서
6. 그의 이름을 딴 곳들
7. 기타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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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1]

머릴 깎아 민머리면 원효대사(元曉大師)고,

머릴 다듬어 관을 쓰면 소성거사(少性居士)다.

나타나는 모습이 천백가지라지만,

마치 손바닥 같은 모습 뿐이다.

이 두 모습은 그저,

한바탕의 놀이일 뿐이지.

- 동문선 제50권 소성거사찬. 이규보 작.

삼국시대 중기 신라승려. 같은 시기에 활동한 고승 의상과 쌍벽을 이루는 고대 한국 불교계의 고승으로 신라십성(新羅十聖).
해골물 일화로 유명하며 파계 행적에도 불구하고 한국 불교계는 물론이고 한국 고대사ㆍ철학사ㆍ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천재다. 또한 의상자장도선 등과 함께 웬만한 고찰(古刹)들의 창건자가 원효라는 이야기가 매우 흔하다.국내의 원효 관련 사찰분포. 척 봐도 뭔가 원효대사의 일대기하고는 십만 광년 떨어진 게 느껴질 것이다. 물론 거의 대부분은 역사적 신빙성이 없으며 원효의 유명세를 빌려서 의 권위를 높이려는 행위라고 보면 된다. 절들의 창건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저 스님들이 평생 절만 세우다가 입적하셔도 모자를 판이다.
삼국 통일기에 인생 대부분을 보냈고 통일 신라의 탄생을 봤다. 화쟁(和諍) 사상을 주창해 불교의 대중화는 물론 통합의 정신을 강조했다. 원래 중국 삼론학[2]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은 백제 삼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근거는 6세기 말 편찬된 백제의 대승사론현의기(大乘四論玄義記)로 백제 승려 혜균(慧均)의 생각과 많이 닿아 있다는 평가가 있다. 삼국 통일에는 사상적 통합이 선행됐으며 원효가 토대를 쌓았음을 보여준다.
분황사에 원효의 유골에 흙을 붙여 만든 원효회고상이 전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고려 중기에 몽골군경주시에 불을 지르면서 분황사도 타버렸는데 그때 소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원효 생전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남아 있었다고 해도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때 소실됐을 가능성도 높다. 대신 문서 최상단에 있는 초상화가 남아있다. 일본 교토의 고잔지(高山寺)에 원효와 의상의 초상화를 소장하고 있어 현대까지 보존이 되고 있다. 이것은 원효가 살던 시대에서 시간이 지난 무로마치 시대에 제작됐지만 당시 일본의 승려 묘에(明恵)가 불교계의 선각자인 원효대사를 존경해 신라 시대의 원본 초상화를 보고 이모한 것으로 지금은 원본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당대의 원효 진영에 가장 근접한 초상화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화풍에서 일본풍이 아닌 한국의 초상화 양식을 따르고 있어 원본을 충실하게 따라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족좌에 신발을 벗어놓은 것이 옛날 형식이고 더부룩한 수염과 검은 피부의 담대한 인상이 문헌 기록에 남은 원효의 파격적인 행적과 걸맞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고려와 조선 대부분의 국왕 어진이 현대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것은 극히 일부라는 것을 감안하면 한중일 불교계에 걸친 원효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속성은 경주 설씨(薛氏)[3], 이름은 사례(思禮), 아명은 서당(誓幢)[4] 또는 신당(新幢)이었다.
불립문자 주장으로도 유명하다. 본인은 역설과 비유를 활용한 많은 저작을 남겨 말로 표현 못할 진리를 전하려 노력했다.[5]

2. 생애


신라의 압량주(押梁州)(현 경상북도 경산시)[6]에서 내마(奈麻)였던 담날(談捺)[7]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8]으로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은 것으로 보아 뼈대 있는 집안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의상은 진골 출신임이 확실하지만 원효는 출신이 확실치 않으며 6두품 출신이라는 것이 학계의 다수 설이다.[9] 중국에서 성이 설씨인 신라인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묘지명에 '설씨는 신라의 김씨에서 나왔다.'는 문구가 있는 점, 아무리 왕의 뜻이었다고는 하나 공주와 결혼했다는 점을 들어 사실은 신라 방계 왕족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소수 설에 불과하다. 오히려 신라 왕족인 요석공주를 왕후로 맞이해 설씨 족단에 편입되었다는 설이 더 일리있는 추정일 듯.
부처님처럼 모친이 해산하러 가는 길에 산기를 느끼고 밤나무 사이에서 출산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밤나무에서 열리는 은 한 톨이 사발만 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에서 일하는 머슴이 "우리 절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한끼에 밤 두 톨밖에 안 준다."하고 관가에 고발했는데 관리가 고발을 받고 와서 막상 보니 밤 한 알이 큰 사발만 한지라 ''앞으로는 한끼에 밤 한 톨만 주라.''하고 판결을 내렸다고 하며 원효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는 사라사(娑羅寺)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사라사 터로 알려진 자리에는 제석사라는 절이 있는데 건물은 후대에 지었다고 한다.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舞)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

삼국유사, 원효불기 (元曉不羈 )

머리도 안 깎고 돌아다니면서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칭하고 술도 마시고 마치 파계승이나 땡중 같은 일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설법을 남겼다. 대중들에게 '구제'라는 목적으로 여러 가지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도끼 드립[10]으로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신라시대에 손꼽히는 유학자 설총을 탄생시킨 것도 유명하다. 그래서 원효는 태종 무열왕의 사위이자 김유신의 동서가 되는 셈.[* 1989년 심재열은 원효의 파계가 그의 자의는 아니었고 태종 무열왕의 뜻이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구승이 어떤 동기에서든 求女의 의사 표시를 그것도 시중에서 큰 노래로 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불교 교리상 특히 원효의 계율관에 비추어 보아도 위배되는 것이며 파계한 뒤에도 요석궁에 머무르지 않고 소성거사를 자처하면서 전보다 더한 난행과 고행을 한 원효의 행적을 보아서도 원효와 요석궁의 인연은 원효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고 태종 무열왕의 정치적 책략이 작용했다는 것.# ] 반면 파계를 통해 소성거사를 칭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재가자로 지내면서 활동하였으니 공식적으로 소성거사라고 불러야 맞다는 주장이 있다.[11] 이외에도 금역(禁域)을 출입하는 데에도 거침없었다고 한다.
의외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염불을 창시한 일화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12] 나무아미타불은 원효가 만들었지만, 관세음보살을 덧붙인 사람은 의상이다. 따로 사용할 경우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하며 저 2개를 붙여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아미타부처는 내생을 주관하고 관세음보살은 현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 부처께 귀의합니다."라는 의미로 내생을 보장받는다는 의미가 강하다. 의상이 덧붙인 관세음보살은 현세구복적인 의미가 강한 데다가 아미타불의 화신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둘을 묶어 염불한다고 해도 매우 자연스러우며 이렇게 묶음으로써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현실의 어려움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어 화엄종의 기본이 되었다. 화엄종을 제안한 사람은 원효고 완성시킨 사람은 또 의상인데 둘은 친구로 당나라 유학길에 같이 올랐었다.
당대 스님으로서는 확 깨는 인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절이나 암자에 앉아서 사람들이 올 때마다 불법을 전파하는 일반적인 스님들과 달리 그냥 길가에서 사람들에게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다만 그 깨는 행동 때문에 관련된 일화/야사도 많았다. 삼국유사에는 661년 김유신평양을 포위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군량을 전해주러 고구려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정방은 신라군이 전달해준 군량을 받고 김유신에게 송아지와 난새(鸞鳥)의 그림을 그려서 보냈는데 원효가 이 그림이 "속히 돌아가라."하는 암호문임을[13] 해석해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김유신은 돌아오면서 고구려군의 포위 공격에 걸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이런 식으로 온갖 파격적인 행보를 일삼고 돌아다니다 보니 당시 승려들 가운데는 원효를 고깝게 보고 심지어는 그를 몰래 죽이려 드는 사람도 있었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황룡사에서 인왕백고좌회[14]라는 법회를 열었는데 고향 상주에 머무르던 원효도 추천을 받아 참석하기로 하였으나 당시 승려들이 원효의 파계 행적을 문제삼아서 참석을 반대했다.
왕비가 병이 나자 약을 찾아 중국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사신은 바다 위에서 용궁으로 초대를 받아 용왕으로부터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라는 불경을 얻어 돌아왔다. 그런데 용왕이 준 불경은 처음부터 순서가 이리저리 뒤섞인 데다 내용도 어려워서 승려들 가운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대안(大安)이라는 승려가 왕명을 받고 순서를 맞추기는 했지만 대안 또한 "불경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승려는 원효 한 사람 뿐"이라며 풀이하기를 사양했다. 원효는 고향에 머무르다가 불경의 내용을 풀어 강의해달라는 왕명을 받고 소를 타고 서라벌로 갔는데 가는 동안 소의 뿔 사이에 경전을 놓고 4일만에 소(疏, 해설집) 5권을 썼다. 그런데 이번에는 법회를 하루 앞두고 원고를 누가 훔쳐가는 바람에 원효는 법회를 4일만 더 연기해달라고 요청하여 약소(略疏, 요약해설집) 3권을 써서 강의할 수 있었다. 강의를 마친 뒤 "지난 날 서까래 100개를 고를 때는 끼지 못했었는데 이제 용마루 하나를 고르는 자리에는 나 하나만이 있구나."라고 말하니 법회에 모인 승려들이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이때 원효가 지은 해설집이 바로 금강삼매경론이다.
이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경주 고선사(高仙寺) 터에서 원효의 행적을 기려 세운 서당화상비가 발견되었는데 비문에는 원효가 686년 3월 30일 일흔 나이로 혈사(穴寺)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5]

3. 후세에 준 영향


불교 사상을 깊게 접할 일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원효 하면 그냥 해골물을 마신 스님 정도의 이미지지만, 사실 불교계 전체 역사를 통틀어 손꼽을 만한 사상가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승려가 꽤 많았는데 저서 '''대승기신론소'''는 당대 최고의 대승불교 논문이었고, '''십문화쟁론'''은 당시 유행하던 불교 이론을 묶어 정리해놓은 책이었다.
일본 승려 장준이 쓴 인명대소초(因明大疏抄)에 따르면, 원효가 현장삼장 법사의 오류를 지적한 상위결정비량(相違決定比量) 논의가 중국에 전해지자, 중국의 학승들이 접하고는 원효가 있는 동방을 향해 세 번 절했다고 써져 있다. 불교에서 '''세 번 절하는 대상'''이 누군지 생각해보자.
고려를 통해 원효의 저서를 받아 본 요나라 황제 도종이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찬양한 적도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미미하다가 불교적 이해도가 높아진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되었다고 한다. 대승기신론소는 후에 중앙아시아까지 전해지는 위업을 달성하여 10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대승기신론소 돈황 판본이 발견된 적도 있다.@ [16]
십문화쟁론도 만만치 않다. 인도 유식학파의 고승으로 보살이라고까지 불린 진나(陳那)[17]의 문도가 당나라에 와서 십문화쟁론을 읽고 '''춤을 추며 찬탄하고는 인도로 역수입해갔다'''. 순고의 기신론본소집청기에 실린 다른 기록에서는, 진나의 문도가 십문화쟁론을 보더니 "이 원효란 사람, 우리 스승님(진나)의 후계인가?" 하며 인도로 가져갔다고 나온다. 불교에서 '아무개의 후계'라고 하면 특정 고승·대덕의 환생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즉 '''스승님이 여기서 다시 태어나셨나…스승님이 왜 여기서 보이는 거지?''' 했다는 얘기. 본토 학파에서 자기네 스승님과 동일시할 정도면 그 위엄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 하다.
또한 금강삼매경론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였는데, 오우미노 미후네(淡海三船)라는 관료가 779년 신라에서 온 사신 가운데 설씨 성 가진 판관 한나마(대나마) 설중업이 원효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고 감격하면서 그에게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승려로 출가한 사람들에게 수행할 것을 권하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이라는 글을 썼는데, 이 글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승려들이 출가해서 입문서로 처음 배우는 초발심자경문에 포함되었다.
원효가 불교의 가르침을 풀이해 부른 노래인 무애가(無碍歌)는 처용무와 마찬가지로 무애무라는 이름으로 고려 시대 궁중무용으로 편입되어 조선 초기까지 남아있었는데, 불교적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궁중무용에서 빼버렸다고 전한다.[18] 조선 후기에 효명세자가 창작한 악무 가운데 동명의 무악이 있기는 하지만 '''무애무가 사라진 지 2백 년이 지난 데다''' 한 명이 추던 것이 열두 명으로 늘어났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추는 춤으로 변했으며, 불교적 색채는 전혀 없는 등 둘은 서로 전혀 다른 춤이다. 삼국유사나 파한집 등의 기록에는 원효가 시중에서 광대들에게 얻은 호리병 하나를 얻어 저자에서 부르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후세에 그것을 본떠 무애무라는 춤을 제작할 때는 호리병 끝에 방울과 오색 비단을 매달아 장식했다고 한다. "양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두 가지 번뇌를 끊었기 때문이요/발을 세 번 드는 것은 삼계를 초월했기 때문이라", "배는 가을 매미같고 목은 여름 자라같은데/그 굽은 것은 뭇 중생이 따를만 하고 그 빈 것은 만물을 받아들일만 하네" 등 고려 시대 무애무를 본 사람들의 시에서 무애무의 춤사위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학술적 의미에서 설명하자면, '한국불교는 원효에 대한 주석'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국내에서 원효를 주제로 쓴 박사논문이 160여 편이 넘는다. '''말이 더 필요한지?''' 원효의 연구범위는 현세구복적 불교에서 논리학적 불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내용의 수준 역시 동아시아의 최첨단을 달리는 내용들. 그 이후에 중국 뺨치는 불교학자는 나오지 않았다.
중기 신라 불교문화가 현세구복적(현실의 복을 비는 것)이었던 것에 비해, 원효가 주로 설파한 정토종(아미타 신앙)은 말 그대로 '아미타불만 외우면 극락왕생'이기 때문에 내세구복적이다. 신라 시대에 현세구복적 불교로 가장 대중화된 종파는 의상의 화엄종이다.

4. 해골물을 마신 일화


젊을 적 원효는 촉망받는 유능한 스님으로, 의상과 함께 나라로 유학을 가려 했었다. 그런데 가던 도중 동굴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주변을 뒤척였는데, 웬 물이 담긴 바가지가 있어서 거기에 든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아, 그 물 참 달고 시원하다." 하고 좋아했다. 그런데 다음 날 일어나서 주변을 보니 동굴은 파묘된 무덤이었고, 그가 마셨던 건 '''해골 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
그걸 알게 된 원효는 구토를 했는데, 직후 썩은 물도 목이 마를 때 모르고 마시니 달았다는 것에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고는 유학을 포기했다고 하는 이야기. 이를 통해 돈오돈수가 뭔지 보여주었다. 이 때 옆에서 가던 의상 스님은 그대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서 화엄종을 연구한 뒤 신라로 돌아와 부석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참고로 중국과 일본의 불교 관련 기록들을 검토해 본 결과, 해골물을 마시고 신라로 돌아간 원효가 사실은 의적(혹은 의상)과 더불어 중국에 단기간이나마 유학하였고, 유학 기간 동안 삼장법사 현장의 밑에서 공부하는 한편 일본인 승려 가재를 제자로 두었다는 주장도 있다.(참조)

4.1. 실화인가?


으레 많은 이야기가 그렇듯이, 이 이야기도 역사 기록이 아니며 당시 고승들의 이야기를 담은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단순히 잠을 자고 났더니 무덤인 것을 알았더라, 정도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해골물 일화는 한참 뒤 임간록에서 발견된다.관련 이문영씨의 글
사실 원효가 진짜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셨더라도 그것이 시체 썩은 물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마음가짐이고 달관이고 이전에 아무리 어두워서 못 봤더라도 시체 썩은 물 맛과 냄새를 보통 물 맛과 구별 못 해 달게 마신다는 것도 그렇고, 시체 썩은 물에는 상상도 못할 만큼의 박테리아가 우글거려서 보통 마신 지 수 시간이 안 되어 피부에 발진이 생기고 심각한 중독 증상을 보인다. 원효 대사가 진짜로 그런 걸 마셨다면 깨달음을 얻고 돌아가고 말고는 커녕 그 자리에서 앓아 누웠어야 정상이다. 따라서 만약 사실이라 하더라도 오래 된 해골에 고인 빗물 같은 걸 마셨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물론 아무리 빗물이라도 오래된 해골에 고였으므로 깨끗한 물이라 할 수는 없으니 일화의 성격 자체가 변하진 않는다.
한편 일본 측 기록에서는 원효가 비를 피해 토굴로 들어갔는데 그때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니, 다음 날 그 토굴이 반쯤 무너진 무덤이라고 알게 되자 그날 밤엔 도깨비가 우글거려서 모든 것이 마음 먹기 달렸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 두 이야기가 합쳐진 버전, 그러니까 동굴인 줄 알았던 게 무너진 무덤이고 해골물도 마셨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사실 종교를 다룬 이야기에서 이 해골물 이야기는 배경과 표현이 다를 뿐 비슷하게 자주 등장하는 패턴이다.
  • 신라 시대에 선종을 일으켰던 무염도 당나라에 공부하러 가던 중에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려 했는데, 하필이면 옆에서 소가 물을 먹는데다 농부가 을 씻고 있었다. 이에 무염이 저만치 떨어져서 마시자 농부가 "도를 깨우치려면 한참 멀었구만. 왜, 소랑 내가 옆에 있으니까 더럽수? 어차피 흘러가는 물인데."라는 식으로 살짝 면박을 주자 귀담아들었다가, 당나라에 가서 교종을 버리고 선종을 받아들였다 한다. 이 역시 야사이다.
  •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 '두 노인'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두 노인이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하던 도중, 한 노인이 너무 목이 말라서, 다른 노인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고 근처에 있는 가정집에 들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은 기근과 질병으로 식구 전원이 죽어가고 있었다. 노인은 급히 자신이 가지고 있던 빵을 먹이고 우물을 찾아 물을 떠와서 식구들을 구한다. 다시 성지 순례를 떠나려 하지만 이들을 돕지 않으면 고생하며 주님을 찾아간다 해도 내 마음에서는 주님을 잃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여행비를 털어 그들이 자립할 때까지 도운 뒤 성지 순례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친구가 물을 마시러 돌아간 걸 기다리다 지쳐서 먼저 떠난 다른 노인은 혼자 성지순례를 하다 돌아간 친구의 환영을 성지에서 보게 된다.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은 바로 그 집에 우연히 들러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순례는 받아들이셨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친구의 순례는 분명 받아들이셨을 것이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종교적 여행에서 마음을 중시한 사람은 남고, 체험을 중시한 사람은 떠났다는 점에서 비슷한 이야기.

4.2. 해골물 드립


해골물 일화에서 파생된 드립으로 인터넷상에선 '~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아니었다.', '~인 줄 알았을 땐 만족했는데 나중에 알고 나니까 화난다.'는 내용을 줄여서 해골물이라고 한다. 미미쿠키가 대표적인 예. 원효대사와 관련된 많은 에피소드 중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잘 알려졌고, 이런 고사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층의 드립에서도 종종 쓰일 정도로 인지도가 있다. 네이버나 구글에 해골물을 검색하면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별 상관 없지만 어감 때문인지 고인물 드립에 응용하기도 한다. 예시

5. 대중문화에서


  •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소설가 이광수매일신보에 원효대사의 이야기를 다룬 <원효대사>라는 소설을 연재했는데, 이 소설은 원효사상에 대한 의도적 오독으로 원효를 일제의 전시동원과 식민교육을 설파하는 특별한 인물로 조립해낸, 전쟁주의와 군국주의를 추구하는 일본을 정당화하는 장치에 원효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소설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19]
  • 1962년에 장일호 감독작 영화 원효대사가 있다.
  • 1977년~1989년 방영된 KBS 전설의 고향(사실상 시즌 1)에서 원효대사역에 임혁, 요석공주역에 한혜숙이 출연하였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과 요석공주와 맺어지는 줄거리를 담았다.
  • 1979년 KBS-TV 주말드라마 《성사의 길 맥 - 원효대사》편이 방송되었다.
  • 1986년 KBS1에서 방영한 '원효대사' 라는 8부작짜리 미니시리즈 사극이 있는데, 극본은 김운경 작가, 연출은 최상식 PD였으며 전무송이 원효대사, 유지인이 요석공주 역을 맡았다. 마지막에 성인이 된 설총이 원효의 절로 찾아가니 원효가 마당을 쓸라고 시켰는데, 깨끗하게 쓸고 나니 원효가 그걸 보면서 "가을 마당에 낙엽 한두 잎은 있어야지." 하면서 몇 개 흩뿌리는 걸로 마무리한다.
  • 1992년 KBS 대하드라마 삼국기에서 서학이 원효대사를, 박주미가 요석공주역을 맡았다.
  • 2017년 10월 16일 채널A 《천일야史》43회에서 단편으로 원효대사의 몰래한 사랑이 방송되기도 했다.
  • 윤인완-양경일의 만화 신암행어사에선 이 인물의 이름을 딴 캐릭터가 나오지만, 이만화의 등장인물 대부분처럼 이 인물 또한 원효라는 이름만 땄다. 원효(슈퍼스트링) 참고.
  • 래퍼 래원 이 원효대사라는 제목으로 노래를 냈다.
  • 대화가 필요해(개그콘서트)에선 장동민이 역사 숙제로 자기 가족의 위인 조사를 위해 김대희에게 물어보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점점 원효 대사로 가는 듯 했는데, 알고보니 해골 바가지가 자기들 위인...

6. 그의 이름을 딴 곳들


서울특별시원효대교 및 원효로, 경산시의 원효로가 바로 이 원효에서 이름을 따왔다.
  • 서울 원효로는 원래 일제가 붙인 '모토마치(元町)'라는 이름이었는데, 이를 광복 후 개명하는 과정에서 같은 한자(元)를 쓰는 원효로로 바꿨다.[20]
  • 경산에 위치한 원효로는 진짜로 원효대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7. 기타


  • 고려왕조의 숙종, 의천, 김부식, 이규보, 일연 등 인물들이 언급했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다.
  • 2006년작 봉준호 감독 영화 괴물에서 해골물 처먹은 놈이라고 잠깐 언급된다.
  • 이분의 46대손이 석우 스님이다[21] 그러나 의외로 이 부분은 알려져 있지 않다.
  • 원효의 해골물 드립이 워낙 인상 깊었던 탓에 양산형 무협지나 기타 국산 창작물에 등장하는 자칭 깨달음을 얻었다는 승려나 도인들은 술이고 개고기고 뭐고 그냥 다 먹는다. 그리고 그게 현실화되었는데...

8. 관련 문서



[1] 고려 숙종이 원효에게 내린 시호. 자기 동생이자 해동 천태종을 연 대각국사 의천의 진언에 따른 것이다. 의천이 원효를 높인 이유는 본인이 추진하는 불교계 통합에 원효의 사상이 유용하다는 정략적 판단이기도 했다. 이때 경주 분황사에 원효의 업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지만 비석은 사라지고 비석을 세웠던 받침대만 남았다.[2] 이름은 중국 삼론학이라고 하나 중국 삼론학의 시작 역시 5세기 고구려의 승려 승랑(僧朗)이 시작한 것이다. 고구려 승려들이 삼론학을 중국에 퍼뜨렸다. 역시 고구려 승려인 길장(吉藏) 때 삼론종의 탄생을 본다.[3] 원효라는 글자 자체가 '으뜸 원(元)'자에 '새벽 효(曉)'자로 설날의 '설'을 한자로 쓴 것이다[4] 공교롭게도 신라에서는 군부대의 이름으로도 서당(誓幢)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원효가 오늘날의 군종 승려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보는 견해도 일부 있다.[5]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1', 지식산업사, 2005, p190[6] 공교롭게도 고려시대 승려이자 삼국유사의 저자로 유명한 일연고향이 같다. 일연이 태어난 당시 경산의 지명은 장산군. 그래서 경산시에는 원효와 일연의 이름을 딴 원효로와 일연로가 자리하고 있으며 원효ㆍ설총ㆍ일연을 묶어 '삼성현'으로 부르고 '삼성현로'라는 도로도 있다.[7] 소설 <원효대사>를 쓴 소설가 한승원에 따르면 '담날'이라는 이름은 우리말로 '다음 날'이라는 뜻이라고 한다.(출처: 한승원 <꽃과 바다>)[8] 삼국유사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9] 원효와 그 아들 설총을 중시조로 두는 경주 설씨(순창 설씨)는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신라 6부의 촌장 가운데 '호진'의 자식 '거백'이 설씨를 하사받아 '설거백'이 되었다 하여 가문의 시조로 보고 있다.[10]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내게 주려나(도끼자국 참조).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볼 텐데."(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11] 이렇게 본다면 파계승이 아니다. 거사는 말 그대로 재가자이지 스님이 아니니까. 그리고 재가자는 최소한의 5계만 지키면 된다.[12]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처음 설법에서 옴마니반메훔을 소개할 때 "일찍이 원효는 나무아미타불만 외워도 극락에 간다고 하였다."하고 언급한다.[13] '송아지 그림과 난새 그림'이라는 말은 한자로 적으면 화독화란(畵犢畵鸞)인데, 각 글자의 음을 반절(半切)씩 떼서 읽으면 '혹한(ㅎ/ㅗㄱ+ㅎ/ㅏㄴ)'으로 중고한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속환(速還)이라는 말과 음이 같다고 한다.[14] 태조 왕건에도 인왕백고좌회가 나온다. 나라의 이름 높은 스님들을 두루 모아 여는 법회이다. 여기서는 도 대사가 법력으로 날씨를 바꾸고 황룡사 목탑을 기울이는 허구가 가미되었다.[15] 고선사 터는 덕동댐이 만들어져 수몰되었고 절터에 있던 석탑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뒤뜰로 옮겨 보관 중이다.[16] 한때 이보다도 200년 앞선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도 나왔으나, 오보로 판명되었다.[17] 범어로는 Dignāga, 한자로 뜻을 풀이하여 (대)역룡(大)域龍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18] 고려사 악지에도 "가사에 범어(梵語)가 많아서 싣지 않는다." 하며 소개만 하고 가사를 빼버렸다.[19] 박균섭,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통해 본 전시동원체제와 식민교육의 성격> [20] 이 때문에 서울시청 도시설계 분야에서 오래 관료로 근무한 손정목 교수는 '일제 잔재 청산이 제대로 안 된 케이스'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원효대사가 서울과 딱히 관련이 있는 역사 인물도 아니고... 그래도 서울에 고승일 뿐만 아니라 한국철학과 사상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인 원효대사의 이름을 딴 이름의 거리가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보기도 한다.[21] http://www.donghwasa.net/?c=1/8/47&tabs=5&PHPSESSID=3c4aa5e8c71004dd7a4ba2312895e08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