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이코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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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풍 시호[1]'''
스이코 덴노(推古 天皇, 추고 천황)
'''화풍 시호'''[2]
토요미케카시키야히메노미코토(豊御食炊屋姫尊)
''''''
누카타베(額田部)
'''능호'''
시나가노야마다능(磯長山田陵)
'''생몰'''
554년~628년 4월 15일
'''재위'''
592년~628년 4월 15일
'''황거'''
토유라노미야(豊浦宮), 오하리다노미야(小墾田宮)
1. 개요
2. 행적
3.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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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제33대 천황. 휘는 누카타베(額田部).
26대 케이타이 덴노로부터 이어지는 일본 왕조 최초의 여왕(女王)이자 후세에 여제(女帝)로 추존되는 인물이며, 기록상 동아시아 최초의 여성 군주다.[3][4]

2. 행적


이복오빠 비다츠 덴노(30대)와 혼인해서 2남 3녀를 낳았으며, 비다츠 덴노의 첫 번째 아내가 죽은 뒤 576년에 황후가 되어, '오오키사키(王后)'라고 불리었다. 32세가 된 585년에 스이코 덴노는 남편 비다츠 덴노와 사별했다.
요메이 덴노의 사후, 황위 계승 분쟁 즉 '''정미의 난'''이 발발하여 스슌 덴노가 즉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가노 우마코가 그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모두가 소가씨를 두려워하여 누구도 황위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가씨는 즉위에 적당한 남성이 없으면 황후가 정치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이용해서 누카타베 태후를 즉위시키기로 하였다.[5] 그렇게 소가씨는 아스카의 도유라 궁에서 누카타베 태후를 대왕(오오키미)으로 즉위시켰다.
일본서기의 기록본에 의하면, 스이코 덴노는 즉위하고 다음 해에 요메이 덴노의 장남인 쇼토쿠 태자섭정으로 내세워 정치를 모두 다 맡겼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정치의 주도권은 소가노 우마코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이코 덴노의 시대가 소가 가문의 전성기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대체로 쇼토쿠 태자와 스이코 덴노의 외삼촌인 소가노 우마코의 협력정치라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603년에 처음으로 관위 12계 제도가 시행되었고, 604년에는 관인들의 복무규정 성격이 강한 '''헌법 17조'''를 반포했다. 또한 607년 중국 수나라와 통교하여 5세기 말 이래 단절되어 있던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하지만 일본서기 스이코 덴노 16년(608) 6월 조에 따르면 수(수나라)에 갔던 왜의 사절 오노노 이모코수양제가 왜왕(倭王)에게 보내는 국서(返書)를 소지하고 귀국하던 도중에 '''백제에게 이를 강탈당했다'''고 한다(...) (강탈이 아니라 약취(掠取) 즉 약탈 + 탈취당했다고 적혀 있다.. 뭐 똑같은 뜻이긴 하지만). 소야신매자가 당에서 보낸 국서를 백제인에게 탈취당함 그러나 이것은 소야신매자가 국서를 일부러 분실했다고 치고 백제의 탓으로 둘러댔을 가능성도 있다. 수 황제가 보낸 편지에는 매우 고압적이고 명령조의 내용이 담겨있어 그대로 전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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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중국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593년부터 603년까지 왜와 백제는 긴밀한 관계였다. 하지만 603년 이후 614년까지의 11년 동안 두 나라의 외교관계에 대한 기록은 일체 없다. 양국의 교류가 뜸해진 이유로는 당시 쇼토쿠 태자의 관위 12계와 헌법 17조 시행 및 조례(朝禮) 개정 등의 일련의 정책, 607년 수나라에 전해진 왜왕의 국서에 ‘日出處天子’라고 했듯 왜가 독자성을 강조한 점 등을 지적한다. 왜가 선진문물을 직접 받아들이기 위해 대수외교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수나라도 왜에 사신을 파견하자 백제가 양국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벌인 사건으로 보인다.
이유야 어쨌든 백제의 외교문서 강탈 사건은 영락없는 갑질이자 외교적 횡포였기 때문에 614년까지 양국의 외교는 단절되었다가 재개된다.
이후 620년에는 천황기(천황의 기록), 국기(국가의 기록) 등의 국사 편찬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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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설명한 '백제의 국서 강탈 사건'과는 별개로 백제의 선진문물들은 계속 받아들였는데 ≪부상략기’(扶桑略記)≫[6]라는 일본 고대 왕조사(王朝史)에 '''"스이코 여왕과 만조백관들이 '백제옷'을 입었으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기뻐했다"'''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융성해지기 시작해서 호류지, 아스카 지, 이카루가지 등의 건축이 이루어지는 등 아스카 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그녀는 628년 3월,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먼저 죽은 아들 다케다 황자의 무덤에 합장되었다가 훗날 가와치의 시나가노야마다 능으로 옮겨졌다.

3. 가계


  • 아버지 : 긴메이 덴노
  • 어머니 : 기타시히메(堅塩媛) -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의 딸.
  • 남편 : 이복 오빠 비다츠 덴노(敏達天皇)
    • 1황녀: 토미치카이타코(菟道貝蛸)
    • 1황자: 타케타(竹田)
    • 2황녀: 쇼오콘덴(小墾田)
    • 2황자: 오와리(尾張)
    • 3황녀: 타간(田眼)
[1] 중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2] (이름)가 아닌 왕이 죽은 뒤 왜국식으로 올린 시호이다.[3] 외국 기록인 삼국지삼국사기에만 등장하는 고대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토요는 일본 국내 기록과 공식적 왕계에는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훗날의 일본 왕실과 혈통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 수 없고, 원시적 부족국가의 씨족장에 가깝다고 추정된다.[4] 스이코 덴노의 재위기간은 신라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과 겹친다. 그래서인지 왜국에서 여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진평왕이 안 그래도 적장자가 없는 상황에서 딸을 후계자로 삼는 데 참고했다는 설도 있다.(쟁점 한국사 전근대편 p.64) 물론 이 당시 진평왕은 어차피 낮은 진골신분인 사위 김용춘이나 딸 덕만 둘 중에서 후계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왜국을 마냥 따라했다기보다는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다 정도다.[5] 이는 누카타베 태후의 어머니인 소가노 기타시히메가 소가노 우마코의 이복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즉 누카타베 태후의 입장에서 소가노 우마코는 외삼촌이 된다)[6] 11세기 무렵에 편찬되었다고 보지만, 14세기에 편찬되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