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토쿠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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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동생 에구리 황자, 쇼토쿠 태자,
아들 야마시로 황자이다.
8세기 목판본을 복제한 그림이다.
'''시호'''
쇼토쿠 태자(聖徳太子/성덕태자) [1]
''''''
우마야도(厩戸)
'''부황'''
요메이 덴노
'''생몰년도'''
574년 2월 7일 ~ 622년 4월 8일
1. 개요
2. 역사적 일화
3. 전설
4. 저주
5. 역사적 과장과 허구설 논쟁
6. 대중문화에서
6.1. 일본 사극
6.2.1. 대인 관계
6.2.2. 입체화
6.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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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스이코 덴노 시절에 활약한 일본섭정이자 정치가. 고대 일본의 정치체제를 확립한 인물이나, 현대 역사학계는 업적이 불확실하다고 여긴다.
요메이 덴노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황후 아나호베노히사히토(穴穂部間人)이다. 두 사람은 이복남매로 어머니가 소가씨 이나베의 딸이다.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우마야도(厩戸)라는 이름을 썼고 장성하고 나서부터는 도요사토미미 미코(豊聡耳 皇子)라고 불렸다. 쇼토쿠 태자라는 이름은 사후에 추증된 시호이다.
백제의 혜총과 고구려의 혜자를 스승으로 받아들이고 많은 것을 배웠으며,[2] 19세에는 고모인 스이코 덴노의 섭정으로 등극한다. 당시 상황은 소가씨의 대표이자 조정의 대신이었던 소가노 우마코가 외척으로써 강대한 권력을 휘둘렀었고, 그런 우마코가 자신의 조카딸인 스이코의 섭정으로 역시 자신의 조카 손자인 쇼토쿠를 임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기야 원래 그의 아버지 역시 우마코의 조카고 어머니 역시 우마코의 조카에 아내도 우마코의 딸이니 이만하면 사실 그도 소가씨의 인물이나 마찬가지다.
아무튼 그는 이후 많은 업적을 세우며, 외국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여 왜국의 문화와 정치를 급속도로 성장시켜 아스카 시대를 열었다. 소가씨의 뜻대로 불교를 부흥시켰다. 그리하여 호류지(法隆寺, 법륭사)[3], 고류지, 시텐노지 등을 비롯한 많은 절을 지었다.[4]
그 외에도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17조 헌법과 관위 12계[5] 등을 만들었고, 전통적인 귀족 가문의 수장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가 일으킨 '정미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는가 하면 불교를 공인했다. 그가 만든 정치 시스템은 이후의 다이카 개신 등을 거치며 약간씩 바뀌었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쳤다. 가령 관위 12계는 후에 다이카 개신[6] 이후 관위가 늘어나 최종적으로 26등급으로 나뉘었다. 후대 정치 시스템의 토대를 놓은 셈이다.[7] 요컨대 중국으로 치자면 구품제와 같은 영향을 미친 것.
말년에는 소가가문의 권력이 강해지고 자신의 권한이 축소되자 속세에 허망함을 느끼고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죽기 직전에 아내에게 '나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난다.' 했는데 그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정말로 죽은 뒤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쇼토쿠 태자가 자살했다는 설도 떠돌 정도. 한편으로는 그 당시 수도에 전염병이 돌아서 전염병으로 사망했다고도 한다. 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아내도 하루 만에 사망했다.
위에 나온대로 이렇듯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겨 유력한 차기 천황으로 꼽혔지만 스이코 천황보다 먼저 죽었고, 그의 아들 야마시로 황손은 다무라 황자 지지파에게 밀려서 천황이 되지 못했으며, 이후 소가노 우마코의 손자인 소가노 이루카의 음모로 일족이 자살하여 혈통이 단절되었다.
과거 일본 지폐 고액 3종세트(1만 엔, 5천 엔, 1천 엔)에는 모두 쇼토쿠의 초상화가 있었다.

2. 역사적 일화


일화로는 607년 수양제에게 보낸 '해 뜨는 곳의 천자(日出處天子)가 해 지는 곳의 천자(日沒處天子)에게 글을 보내노라'[8]란 사건이 유명하다. 이에 수양제는 기분이 안 좋아 내쫓으려 했으나 신하의 만류로 겨우 참았는데[9] 당시 사절이었던 오노노 이모코는 쇼토쿠 태자에게 양제가 허가하였다고 거짓말을 했다. 여기에 기분이 좋아진 쇼토쿠 태자는 다음 사절에도 오노노 이모코를 보내며 윗 내용을 천자만 천황이란 표현으로 바꿔 서신의 서문에 집어 넣는데, 오노노 이모코는 양제에게 죽는 게 두려워 도망쳤다(…).[10]
그런데 일본서기 스이코 덴노 16년(608) 6월 조에는 조금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수나라에 갔던 왜의 사절 오노노 이모코(小野臣妹子)가 수양제가 왜왕에게 보내는 국서(返書)를 소지하고 귀국하던 도중 '''백제에게 이를 강탈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11] 소야신매자가 당에서 보낸 국서를 백제인에게 탈취당함
[image] 이로 유추해 보면 이유가 무엇이었든 백제는 당시 의 대중국 독자 외교를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했었고, 그 때문에 국서를 강탈했고, 오노노 이모코는 국서를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처벌이 두려워 도망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쇼토쿠 태자 시절 왜와 백제의 관계는 생각 외로 굉장히 좋지 않았을지도 모른다.[12] 다만, 이것은 수나라 황제의 모욕적인 글이 씌여져 있는 국서를 그대로 전달 했다간, 이모노 자신이 죽을수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둘러 댄것 일수도 있다.
일단 수서(隋書)에는 이때 쇼토쿠 태자가 보낸 왜국의 사신에 대해 이듬해인 608년에 수가 답사로써 문림랑 배세청을 파견했다고 한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 무령왕 9년의 기록으로도 교차검증 되며, 고대 한중일 세 사료에서 년도 까지 교차검증 할수 있는 몇 안되는 기사이다.

열흘 후에[13]

다시 대례(大禮) 가다비(哥多毗)[14]를 보내어 200여 기병을 거느리고 교외에 나아가 위로하였다. 드디어 그 도읍에 이르렀는데, 그 왕은 배청[淸]과 만나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바다 서쪽에 대수(大隋)라는 예의를 갖춘 나라가 있다고 들은 까닭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나는 오랑캐로서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살고 있어서 예의를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내 땅 안에 머물러 있어서 쉽게 서로 만나지 못했다. 이제 새로이 길을 청소하고 숙소를 꾸며 대사(大使)를 기다렸다. 바라건대 대국이 새롭게 된[惟新] 가르침을 듣고자 한다."

고 하였다. 청이 대답하기를,

"황제는 그 덕이 하늘과 땅[二儀]에 버금가며, 은택은 온 세상에 미친다. 왕이 교화를 사모하는 까닭에, 사신[行人]을 이곳에 오게 하여 가르침을 베풀도록[宣諭] 한 것이다."

그런 뒤에 [배]청을 이끌어 숙소에 머물게 하였다. 그 후 [배]청은 사람을 보내어 그 왕에게 말하기를,

"조정의 명령(朝命)이 이미 도달하였다. 청컨대 곧 길을 경계할 것을 부탁한다."

고 하였다. 그래서 연향을 베풀고 청을 보내었고, 또한 사자로 하여금 청을 따라 와서 방물을 바쳤다. 그 후 마침내 [관계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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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 권81 열전 제46 동이 왜국(倭國) 대업 연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고 다음 해에 황제가 문림랑 배청(裴淸)을 사신으로 보냄

일본서기에는 600년과 602년 신라를 치려고 했다는, 사실로는 믿기 어려운 기록이 나온다. 600년에는 신라를 치려고 했다가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고 멈추었는데, 다시 602년에 신라를 치려고 츠쿠시에서 2만 5천의 병력을 모으고 동복형제인 쿠메 황자[15]를 장군으로 임명했지만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배다른 형제인 토모 황자를 후임으로 임명했지만 그마저 아내의 죽음을 이유로 도성으로 귀환해 결국 원정 자체가 백지화되었다고 한다. 만약 사실이었다면 쇼토쿠 태자의 사망 이후인 762년에 있었던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보다도 훨씬 앞선 시점에서 있었던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역사적 사실로 믿기는 힘든 기록이다.
일본인의 정신으로 유명한 이이토코토리(良いとこ取り)와 ()의 창시자로도 유명하며, 소위 말하는 야마토 정신의 정신적 원류라고도 한다. 신불습합으로도 유명하지만 이러한 경향이 일어난 것은 9세기부터이니 쇼토쿠 태자와는 큰 관련이 없다.

3. 전설


쇼토쿠 태자의 아명 우마야도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출생담에서 연유한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예수 설화의 영향이라는 설이 있으나 우마야도노미코라는 표기는 일본서기에서만 등장하며 후대의 책에는 대부분 쇼토쿠 태자라고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그다지 설득력은 없다.
쇼토쿠 태자의 능력에 관한 일화 중에서 유명한 것은 '10명의 청원자가 동시에 꺼낸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적절한 답변을 했다' 는 일화로, 이를 계기로 귀가 좋다는 뜻의 '토요사토미미(豊聡耳)' 라는 별명을 얻었다. 때문에 일본의 드라마나 만화, 영화 같은 매체에서 여러 명이 시끄럽게 떠들면 '내가 쇼토쿠 태자냐!?' 라며 불평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독특한 일화가 하나 기록되어 있는데, 그가 우연히 지방을 순행하던 중 초라한 행색으로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을 보자 가엾게 여겨 음식을 주었는데, 며칠 뒤 그의 행방을 찾아보게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굶어 죽어 있었고, 이에 쇼토쿠 태자는 그를 잘 묻어주게 했다. 다시 며칠 뒤 쇼토쿠는 그 사람이 보통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무덤을 파내 보게 했는데, 시신은 간 곳이 없고 옷 한 벌만 남아 있었다. 이에 태자는 그가 진인(眞人:도교에서 일정한 수준에 오른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옷을 장 공양하게 했고,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성인은 성인을 알아본다 하여 태자를 더욱 더 숭상했다고 한다.

4. 저주


진짜 의외일 수도 있는데, 이 사람도 저주 논란이 있는 사람이다.
6세기 야마토 조정의 제도적인 한계로 인해 7세기 율령제의 도입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쇼토쿠 태자와 소가씨가 적극적으로 율령제를 도입했고 정치권력 분쟁으로 인해 을사의 변이 일어나 소가씨가 몰락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쇼토쿠 태자는 이상할 정도로 찬양되고 소가씨는 이상할 정도로 매도된다는 점이다. 당시 이들이 주도한 율령제를 보면 중앙집권이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기존 호족들과 기득권 귀족들의 입장에서 쇼토쿠 태자가 좋게 비춰졌을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대 소가노 이루카는 재앙을 내리는 귀신으로 두려움을 샀다. 사이메이 덴노가 죽기 직전에 나타난 귀신이 소가노 이루카의 귀신이라고 여겼고,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죽기 직전 그의 사저에 내리친 낙뢰가 그가 내린 신벌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고대 일본에서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과 저주와 재앙을 내리는 귀신은 표리일체의 존재였다. 그가 신성화되었다는 것은, 역으로 그가 두려운 귀신으로도 볼 수 있다.
쇼토쿠 태자의 저주 설은 이렇다. 호류 사와 간교 사라는 유서 깊은 절들에게서 이상한 형식의 제사를 받고 있는데, 쇼토쿠 태자는 동자의 모습으로 제사를 받는 경우가 많다. 동자는 귀신 퇴치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거친 기질이 있는 귀신의 속성도 같이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일본서기에 쇼토쿠 태자가 귀신을 연상시키게 하는 구절도 있다.
소가노 우마코와 모노노베노 모리야가 불교 도입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일 적 578년 7월 소가노 우마코는 쇼토쿠 태자 일행과 함께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자택을 공격했다. 격렬한 저항으로 좀처럼 쳐부술 수 없었는데, 이 때 쇼토쿠 태자가 승리를 기원하자 무너졌다고 한다. 이 때 일본서기는 그의 머리 형태가 히사고바나라고 특기하고 있는데, 이는 동자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어른들이 무리로 덤벼도 이길 수 없던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동자=귀신의 저주로 무찔렀다는 것이다.
거기다 일본 황실에서 저주와 연관된 자들은 많다. 진무 덴노는 야마토로 동진하다 좀처럼 못 이기자 꿈에서 신들에게 들은 조언으로 이겼다고 하는데, 이 방법이 영락없는 저주다(...) 고대 일본의 원령숭배사상을 보면 알겠지만, 신은 귀신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스진 덴노도 저주로 인해 나라가 초토화되어 신들의 신주를 옮겼다고 하며, 오진 덴노도 자기가 태어났을 때 진구 황후가 야마토로 가지 못하자 모종의 주술적인 행위로 야마토로 돌아갔다고 나온다.
후대의 이야기지만 후지와라 4형제에게 억울하게 주살당했다고 정사에조차 명시된 나가야 왕도 사후 저주를 내려 4형제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며 간무 덴노 치세 나카오카쿄 시절 후지와라 씨족에게 주살당한 사와라 친왕 사후 재앙이 발생하자 사와라 친왕 저주 소문이 돌자 간무 덴노가 사와라 친왕을 스도 덴노로 추존하기도 했다. 스토쿠 덴노로 가면 원령신의 정점을 보여준다. 중세 시절 일본 왕의 깃발이 전장에 나타나자 적들이 두려워서 도망쳤다는 일화도 있다.
일본 황실이 신의 자손으로 여겨졌다는 시점에서 저주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흔히들 생각하는 신격화도 있지만, 일본의 원령 사상을 보면 알다시피 저주를 내리는 귀신이 곧 신이었다. 역으로 일본 왕실이 저주, 재앙과 관련이 깊었기에 신=재앙을 내리는 무서운 귀신으로서 여겨져 저주받기 싫어서(...) 아무도 안 건드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도인가란유메도노의 본존인 구세관음은 호류사가 가진 의문 중 하나다. 이 비불이 긴 잠에서 눈을 뜬 것은 1884년 정부의 허락을 받은 페놀로사와 오카쿠라 가쿠조가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두 사람은 비불을 개장하면 천변지이가 벌어진다며 두려움에 떠는 승려들이 도망가는 걸 본 뒤에 문을 열었다. 그러자 미라와도 같이 500야드의 천으로 둘둘 만 두루마리의 구세관음이 나타났다. 우메하라는 쇼토쿠 태자의 등신불이라는 구세관음의 후두부에 주목했는데, 광배가 두드려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길이 15센티미터의 대형 못으로, 주로 저주에 사용한다. 이는 성자라는 쇼토쿠 태자에게 저주의 대못이 박혀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호류 사의 경우에는 역대 후지와라 씨족들로 인해 억울하게 죽어나가 그들을 저주하는 원령들을 가두어 두고 자신들이 어려울 때 성대히 제사를 지내서 진정시키는 쪽의 의미가 더 컸다.
쇼토쿠 태자의 신격화는 역으로 쇼토쿠 태자의 저주가 두려웠기에 신격화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쇼토쿠 태자의 행보를 보면 야마토의 기득권층들과 마찰을 안 빚을래야 빚을 수 없는데, 쇼토쿠 태자의 죽음에서 미심쩍은 것이 있었고 생전에 저주, 주술과도 관련이 깊던 그가 사후 모종의 일로 인해 동자의 모습으로 저주를 내리는 귀신으로 두려움을 사서 신격화를 시켰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5. 역사적 과장과 허구설 논쟁


결론부터 말하자면 '''쇼토쿠 태자[16]의 행적이 역사적으로 과장되었다는 주장은 널리 인정받으나, 허구설은 정설 내지 주류설이 아닌 극단적인 일설이다.'''
쇼토쿠 태자에 대해 논란이 되는 것은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쇼토쿠 태자의 행적 상당수가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쇼토쿠 태자가 반포했다고 하는 '헌법 17조'는 일찍이 츠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17] 당시 일본 열도가 중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점 및 여러 문장상의 특징 등으로 보아 덴무 덴노 시대 이후의 것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찬반 양론이 치열하게 제시되었으나, 이후 모리 히로미치(森博達)는 언어학적인 입장에서 헌법 17조의 한문체는 7세기 초에는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역사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부정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18]
또 쇼토쿠 태자의 저작으로 알려진 <삼경의소(三經義疎)>(<법화경의소(法華經義疏)>, <승만경의소(勝鬘經義疏)>, <유마경의소(維摩經義疎)>의 3종류 문서)는 마찬가지로 츠다 소키치 등의 학자에 의해 이후 시대에 성립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그러다가 중국의 돈황 문서에서 발견된 <법화의기(法華義記)>, <승만경의소본의(勝鬘經義疏本義)>, <유마경의기(維摩經義記)>라는 문헌과 <삼경의소>의 내용이 70% 가까이 동일하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적어도 쇼토쿠 태자가 전체 내용을 직접 썼다는 서술은 틀린 것이 되었다. 현재로서는 이를 8세기의 위작으로 보는 설과, 수 대 중국과 교류하며 수입한 경전 주석서를 쇼토쿠 태자의 저작으로 조작했을 가능성 등이 제시되었다. 물론 후자의 설의 경우, 돈황 문서의 서술 연대를 입증해야 하는 꽤 큰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그 밖에 호류지 약사여래상(法隆寺 藥師如来像), 호류지 석가삼존상(法隆寺 釋迦三尊像)의 명문에서 쇼토쿠 태자의 행적과 관련된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데, 1930년대 후쿠야마 도시오(福山敏男)가 문제를 제기한 이후로 이 명문에 등장하는 '치천하천황(治天下天皇)', '원흥(元興)', '법황(法皇)' 등의 용어에 대해서 8세기 후반 이후에만 성립 가능하다는 설이 제시되어 반론 측과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다. 또 마찬가지로 쇼토쿠 태자의 행적과 관련된 천수국 수장(天壽國繡帳)이라는 자료가 있는데, 이 천수국 수장에 나타난 일본어의 한자 음차 표기가 7세기까지의 한자음보다는 8세기까지의 한자음에 어울린다는 지적, 천수국 수장의 날짜 표기(일간지와 일자)가 지토 천황(재위 690~697) 시기까지 쓰인 역법인 원가력(元嘉曆)이 아니라 지토 천황 이후 쓰인 의봉력(儀鳳曆)과 맞아떨어진다(정확히는 1일 차이)는 지적이 나오기도 하였다.
사실 9세기 이후에 쇼토쿠 태자의 행적이 과장되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앞서 언급하였듯 9세기 이후 일본에서는 이른바 '신불습합'의 사상적 경향으로 인해 불교와 관련된 신격화와 기원 설화의 조작이 성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열도에서 불교를 퍼뜨리는 데 큰 공적을 세웠다는 왕가의 인물 쇼토쿠 태자는 그 자체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이전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던 행적이 후대 문헌에서 널리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전반의 연구에서는 8세기 전반까지의 자료까지 신뢰성을 의심하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쇼토쿠 태자 당대의 유물이라는 7세기의 자료까지도 전면 재검토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애초에 이러한 문제 제기가 근대 역사학의 성립 이전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고,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 등 근대 초기의 인물부터 쇼토쿠 태자가 허구적인 인물이라거나 그 행적이 과장되었다는 지적을 내놓은 적이 있다. 근래에 이러한 설을 가장 종합적으로 다룬 인물로는 오야마 세이이치(大山誠一)가 있는데, 1999년의 저작에서 그는 이상의 쇼토쿠 태자 관련 자료들이 8세기 중엽에 조작된 유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쇼토쿠 태자는 없었다'''는 주장을 학문적으로 종합하였다.[19]
'''문제는 이 '쇼토쿠 태자는 없었다'는 말이 7세기의 일본 역사는 모두 거짓이라는 식으로, 필요 이상으로 과잉 해석된다는 것이다'''. 일단 당시 일본 열도에 유력한 국가가 있었음은 <수서> 왜국전을 통해 확인되며,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관위 12계' 등의 국가 체제는 <수서> 왜국전에서도 확인되거나 대응시킬 수 있다. 여러 논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일본 열도에 일정한 수준을 갖춘 국가가 있었다는 것은 제대로 된 역사학자라면 부정하지 않는다. 또 고고학적 발굴이 진전되면서, <일본서기>의 기술과 같이 당시에 아스카(飛鳥)를 중심으로 하는 체계화된 국가가 있었다는 점, 6세기 후반부터 불교 건축이 이 지역에 도입되기 시작하였으며 상당한 규모로 이루어졌다는 점, 쇼토쿠 태자의 근거지라고 한 이카루가 궁(斑鳩宮)이 실제로 7세기 무렵에 만들어졌다는 점, 서쪽 해안 방면으로의 도로의 건축 등 중국과의 교류를 염두에 둔 대규모의 국가 사업이 진행되었다는 점 등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과장된 서술과 부분적인 오류 등은 인정할 수 있지만, <일본서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이 무렵의 국가 형성 과정은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된 것이다.[20]
이러한 점 때문에 '쇼토쿠 태자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오야마 세이이치조차도 '''쇼토쿠 태자의 원형이 되는 인물인 우마야도 왕의 존재를 분명히 인정'''한다. 다시 말해 당시 왕가의 일원으로서 이카루가 궁을 중심으로 활동한 유력한 정치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오야마 세이이치는 이 두 논지를 별 문제 의식 없이 섞어쓰고 있지만, '쇼토쿠 태자는 없었다'는 문장과 '쇼토쿠 태자의 원형이 되는 인물은 있었지만 행적이 상당히 과장되었다'는 주장의 온도차는 상당할 수밖에 없다.
오야마 세이이치의 주장은 또 다른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그의 주장은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소가노 에미시(蘇我蝦夷) 부자가 당시의 왜국 왕가였다는 주장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 구조는 ① 쇼토쿠 태자(우마야도 왕)의 행적은 후대에 많이 조작되었다 ② <수서> 왜국전에 등장하는 왕은 남성이다(= 스이코 덴노가 아니다) ③ 당시 일본 열도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인은 소가 씨 일가였으므로, 소가 씨 일가가 군주였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하는데,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논리 구조가 딱 들어맞는다고 보기는 힘들다. 가령 수의 사신을 만난 남성 왕이 일종의 섭정 개념으로 통치하던 우마야도 왕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스이코 덴노가 군주가 아니었다'고 치고 넘어가더라도 소가 씨가 군주였다는 주장의 입증에는 더 많은 근거가 필요함에도 현재로서는 당대 자료가 없다시피 하고 정황 증거만 있을 뿐이다. 이후 일본사에 보이는 여러 바지사장의 형태(천황-상황/법황/섭정/관백, 천황-쇼군, 쇼군-싯켄, 쇼군-오고쇼 등)를 보아도, 소가 씨가 왕가가 아닌 채로 국정을 장악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문제도 있다.
덧붙여 앞서 언급한 호류지 석가삼존상에서는 1989년 재조사 결과 대좌(불상 받침대) 안에서 묵서명이 발견되었다. 이 묵서명은 석가삼존상 대좌를 보수하면서 묵서명이 쓰여 있던 목재를 채워넣으면서 남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묵서명은 "신사년(辛巳年) 8월 9일 만들었다(辛巳年八月九月作)"고 되어 있다. 신사년이라는 연도는 621년 또는 681년인데, 오야마 세이이치는 681년설을 주장하고 있지만, 7~8세기 목간을 연구해 온 학자인 이치 히로키(市大樹)에 따르면 이 묵서명에 나오는 '고관(尻官)'은 '고(尻)'가 '시리(しり)' 또는 '시로(しろ)'로 읽혀 다이카 개신(646) 이전의 왕실 직할령을 말하는 '나시로(名代)' 또는 '코시로(子代)'의 관청(官)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묵서명이 쓰인 대좌의 '신사년' 묵서명은 다이카 개신 이전인 621년에 쓰인 것이 되며 석가삼존상 자체가 621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점칠 수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절충설이나 재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느 해석도 현재로서는 결코 상대의 주장을 찍어누를 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것.
때문에 쇼토쿠 태자의 행적이 과장되었고, 7세기 대의 자료라는 것도 검토를 거쳐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은 일본 고대사학계에서 상식이 되어 있다. 그 반면 이른바 '쇼토쿠 태자 허구설'은 파격적이기는 하나 그대로 따르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장이다. 물론 '이런 설도 있다'고 할 만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정설 내지 주류설은 되지 못하는 주장이라는 것. 일본어가 가능하다면 일본어 위키백과'쇼토쿠 태자' 항목의 허구설 단락도 읽어보자. 일본어 위키백과의 신뢰성이 낮다고 하나 이 항목은 전공자의 손이 갔는지 나름대로 충실하게, 최소한 한국에서 찌라시처럼 언급되는 단편적 자료들보다는 훨씬 성실하게 연구 역사가 정리되어 있다.
어쨌든 쇼토쿠 태자의 행적이 과장되었다는 설 자체는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고, 그 영향 때문인지 문부과학성에서 2017년 2월에 공표한 초, 중학교의 차기 학습지도 요령에서는 기존의 '쇼토쿠 태자'이라는 표기를 '쇼토쿠 태자(우마야도 왕)' 또는 '우마야도 왕(쇼토쿠 태자)'으로 교체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쇼토쿠 태자라는 인물에 후대의 인식과 과장이 더해졌을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고대사학계의 동향을 일정 부분 수용한 것이지만, 새역모와 같은 단체는 이에 대해 '일본 율령 국가 역사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하여 반대하기도 하였다(출처). 물론 새역모는 역사 연구 단체가 아닌 정치 단체인 데다가 극우 단체이므로 주의해 읽을 것. 딱 맞는 비유는 아니겠으나 '고조선 건국 연대가 기원전 2333년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학계의 상식에 따라 해당 서술을 제외하면 환단고기 사랑 모임 같은 곳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해 보면 되겠다.

6. 대중문화에서



6.1. 일본 사극


2001년에 쇼토쿠 태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2부작 분량의 사극이 편성되어 방영되었던 전적이 있다. 제목은 같은 이름의 <쇼토쿠 태자> 명색이 지폐에 실린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쇼토쿠 태자를 다룬 거의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한 작품으로 보기 드물게 고증에 신경쓴 티를 내는 작품이라는 특징 덕에 역사 덕후들에게 관심을 받는 작품이다. 당시 백제 문화와 불교를 적극 수용한 소가노 우마코를 비롯한 인사들이 백제 복식을 갖추고 등장하거나, 군사들이 가야, 백제식 갑옷을 입고 나오는 것이 그 예. 일본에서 지금까지 나온 사극들 중 가장 오래 전의 시대를 다룬 사극이기도 하다. 참고로 '''어지간한 한국 사극들보다도 삼국시대 갑옷과 의상들 고증이 압도적으로 훌륭하다.'''
설경구가 신라인 역으로 출연했다. 신라의 무사로 일본의 정세를 염탐하고 일본의 유력 인사들과 접촉해서 일본의 정국을 신라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리는 임무를 맡은 인물이다. 또한 쿠니무라 준이 쇼토쿠 태자의 측근인 하타노 카와카츠로 나오는데, 여기에선 일본서기의 기록을 따라서 백제계 도래인 출신으로 나오며 설경구와 한국어로 대화하는 장면도 나온다.

6.2.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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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는 마에다 타케시, 국내방영판 성우는 이규석.
메인 캐릭터 중 한 명으로, 실제 역사 인물에서 모티브를 땄기 때문에 여기서도 일단은 나라를 이끌어 가는 섭정이라는 지위를 맡고 있다. 오노노 이모코와 함께 에피소드를 이루며, 이 콤비는 팬들 사이에서 '견수사조' 혹은 '아스카조' 로 불린다. 주로 쇼토쿠 태자는 보케 역, 오노노 이모코츳코미 역이다.
파란색 추리닝을 입고 흑발에 관모[21]를 쓴, 다소 어정쩡하게 생긴 남성. 주 기믹은 아저씨에 노팬티. 생각이나 사고가 4차원적이며, 어쩐지 모자란 듯하기도 한 대사를 툭툭 내뱉는다. 본인도 왜국의 장래를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주 드물어서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작은 것 하나에도 울고 웃는 상당히 아이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기도 하며, 이 때문에 이모코를 자주 난처하게 만들며, 종종 '꼰대', '바보', '아저씨' 라고 불린다.
분명히 관위 12계와 헌법 17조 등을 만든 걸물인데 작중에서 보이는 모습은 그저 놀 궁리만 하는 추리닝 꼰대일 뿐. 마츠오 바쇼는 정말 가끔이나마 제대로 된 하이쿠를 짓기도 하는데, 태자는 작중 제대로 된 일을 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딱 한번 수양제를 접견하기 직전 이모코가 '태자는 도대체 왜 우리가 중국에 온지 아십니까?' 라고 질문하니 '왜긴 왜야. 우리가 백제고구려신라보다 앞서기 위해 독립국임을 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지.' 라고 말하긴 했는데, 아무리 봐도 진지한 답변은 아니다.
좋아하는 것은 카레[22], , 주먹밥, 네잎 클로버 정도가 있다. 특히 카레를 너무 좋아해서 몸에서 항상 카레 냄새나 다른 이상한 냄새가 나며, 코믹스 1권에서는 조정 내 설문조사에서 '냄새 쩐다' 라는 충격적 결과를 보고 좌절한다.
필살기는 아스카문화어택을 필두로 한 30가지 보디(body) 어택. 어째서인지 전 공격이 비슷한 위치로 날아오기 때문에 손만 내밀고 있어도 막을 수 있다.
말에서 떨어지고 거꾸로 땅에 발목까지 박히거나 가마 한쪽을 들어올리자 들어올린 쪽으로 떨어지는 등 물리법칙은 가볍게 무시하고 귀로 숨을 쉬거나 눈의 검은 자위만으로 웃을수 있는 괴물.
옷을 3미터쯤 늘인 것을 입었더니 자기 몸도 그만큼 늘어나거나 얼굴이 찌그러질 것 같다고 하자 정말로 두들겨 맞은 양철냄비처럼 찌그러지는 등 허약한 주제에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있다. 그걸 보고 이모코는 '이 꼰대, 익숙해지면 재미있을지도...'라고 생각했다.
노래를 상당히 좋아하며, 본인이 즉흥적으로 지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취미이다. 기타도 배울 생각이었으나 그놈의 변덕이 죽 끓듯 하여 때려 치운다고 했다가 다시 배우는 등 제멋대로다.
현재 애니메이션 OST에서의 수록곡은 '허브의 향기', '이모코와 참치는 사이좋게 tonight', '아스카시대니까' 세 곡 정도가 있다.
이래봬도 일본에서는 인기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캐릭터. 한국에서는 문화적 차이[23] 때문에 우사미쿠마키치에게 밀리지만 현지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다.

6.2.1. 대인 관계


  • 소가노 우마코: 정치적 라이벌. 하지만 실제로는 태자의 담임선생님이나 아버지 같은 역할로, 태자도 이 사람에게만은 존댓말을 쓰고 있다.
  • 피쉬 타케나카: 머리가 인어인 훈남. 태자의 오래된 친구...라고 하지만 보모인 듯 하다. 성우는 우에다 유우지.
  • 골렘 요시다: 온 몸이 바위처럼 단단한 태자의 친구. 그러나 피쉬 타케나카보다 비중이 적다.
  • 오노노 이모코: 부하이자 츳코미.
  • 초시마루[24]: 코믹스 8권에 등장하는, 병약한 마부. 하지만 성격은 드센 편으로,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지만 별로 죄송하지 않은 듯.

6.2.2. 입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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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마 브랜드로 피규어가 출시되었다.
제품에 들어있는 『태자와 불상』 이라는 그림책에 의하면 상당한 불상 오타쿠로 앞니가 두 개 빠진 사람의 이빨 개수보다 많은 정도라고 한다.

6.3. 동방 프로젝트



6.4. 기타


간혹 게이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24년조' 멤버인 순정만화가 야마기시 료코와 이케다 리요코가 1980, 1991년에 각각 지은 <해뜨는 나라의 황제>와 <쇼토쿠 태자>가 대표적인 예이다.
뇌단련의 한 트레이닝은 여러명이 동시에 말하는 단어를 하나씩 적어내는 트레이닝이 있는데, 일본판에선 이 트레이닝의 이름이 "쇼토쿠 태자"이다.
춤춰라 메이드 인 와리오의 조작법 중 하나인 관리인[25]의 일본판 이름이 바로 "쇼토쿠 태자"다.
[1] 일본에서 태자라는 말은 차기 황위계승자라는 말로 직계 후손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사용된다.[2] 백제의 아좌태자는 쇼토쿠 태자의 초상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3]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목조건축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4]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지금도 조금 오래된 절은 대부분 '쇼토쿠 태자가 처음 창건했다.'는 창건담이 있다. 다만 거의 대부분은 사실이 아니고 그저 유명세를 빌리기 위한 꼼수다. 한국 사찰 대부분이 창건자를 원효대사나 의상대사, 자장율사로 설정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5] 쇼토쿠 태자가 제정한 관위제. 유교의 덕목인 '덕, 인, 의, 신, 예, 지'에 대소를 붙여 12관위를 만들고, 보라, 파랑, 빨강, 노랑, 흰색, 검정으로 위계를 표시했다. 제정된 이후 주로 귀족이나 관리신분과 위계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조정에 출사하는 귀족이나 관리의 관복의 색상에 반영되었다. 한국의 제도와 비교하자면 신라의 17관등제와 유사하다.[6] 大化改新. 646년에 시작된 정치개혁인데, 다이카(大化)는 효덕천황(孝徳天皇)의 연호로 646년은 다이카 2년이다.[7] 다른 예를 들자면, 현재 일본재무성(財務省)의 전신인 대장성(大蔵省)은 2001년까지 무려 약 1300년 동안 같은 이름을 유지했다. 이름을 바꿀 때에도 많은 공무원들이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8] 일본서기: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 수서: '開皇二十年,倭王姓阿每,字多利思北孤,號阿輩雞彌,遣使詣闕。上令所司訪其風俗。使者言倭王以天為兄,以日為弟,天未明時出聽政,跏趺坐,日出便停理務,雲委我弟。高祖曰:『此太無義理。』於是訓令改之。'[9] 대신 홍려경에게 "만이 놈들 국서는 싸가지가 없다. 앞으로 다시는 내 앞으로 가져오지 마라(蠻夷書有無禮者, 勿復以聞)"라고 엄명했다. 이에 대해서는 마침 당시 수와 대치중이던 고구려의 승려였던 혜자가 쇼토쿠 태자에게 국서 쓰는 방향을 지시해준 결과라고도 하고, 왜국으로써는 평소 대중국 교류 경험이 없다보니 자기들이 주변국에 하던 대로 자국중심주의를 내비친 것이고 수 양제는 "웃긴 놈들 다 보겠네" 정도로 넘어갔다는 해석도 있는데, 수양제가 국서를 받은 이듬해에 왜국에 답사로 보낸 배세청(배청)의 관직이 문림랑(文林郞)이라는 꽤나 하급 관리였다는 게 그 근거로 거론된다. 수양제가 왜국을 대단하게 봤다면 하급 관리 정도를 답사로 보내지는 않았을 테니까.[10]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을 한 것이 발각되어 잠시 동안 귀양을 갔다.[11] 강탈이 아니라 약취(掠取)(약탈 + 탈취) 당했다고 적혀 있다. 똑같은 뜻이긴 하다.[12] 노중국 교수도 백제가 국서를 강탈한 사건을 왜의 독자적인 대중국 외교정책에 당시 백제가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593년부터 603년까지 왜와 백제는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나. 603년 이후 614년 사이에(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에 약 12년 동안 백제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변화가 나타났고, 때마침 쇼토쿠 태자는 법을 제정하고 조례(朝禮)를 개정하는 등의 정책을 폈다. 또한 607년 수에 전해진 천황의 국서에는 ‘日出處天子’ 라고 하며 독자성이 강조되어 있다. 요컨대 국서 탈취 사건은 왜가 선진 문물을 직접 받아들이기 위해 수에 대한 접근을 적극적으로 시도했고 이에 수도 사신을 파견하는 등 호응하는 상황에서,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 백제가 양국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의도에서 계획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13] 일본서기에는 8월에 왔다고 적고 있다.[14] 일본서기에 나오는 누카타베노무라치 히라후(額田部連比羅夫)의 ‘카타베’를 음사한 것으로 보인다.[15] 來目皇子くめのみこ[16] 당시 용어로는 우마야도 왕(廐戶王) 내지 우마야도 왕자로 추정. 이후 서술하듯 현재는 쇼토쿠 태자 대신 우마야도 왕이라고 쓰는 경향도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일단 항목명이 쇼토쿠 태자이므로 해당 어휘를 그대로 사용한다.[17] 한국에서는 식민사학자로 유명한 그 인물이 맞다. 츠다 소키치는 1940년 만세일계를 부정하고 스진 덴노 이전의 왕가를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놓았다가(결사팔대 참조) 형을 살기도 하는 등, 일본 사학계 내에서는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일본서기>의 철저한 비판을 이끌어낸 선구적 학자 중의 한 명으로 언급된다. 문제는 그 자료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 삼국사기 등에는 더욱 강하게 나타나 결과적으로 한국의 고대사 문헌에 회의적인 입장을 도출했다는 것이다. 어떠한 측면에서는 근대 실증주의라는 관점이 가져올 수 있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18] 국내에서는 황소자리 출판사에서 심경호에 의해 번역된 『일본서기의 비밀』(2006)에 실리기도 하였다.[19] 이러한 내용은 국내에도 이미 소개된 적이 있다. 2012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번역한 오야마 세이이치, <일본서기와 천황제의 창출>을 참조할 것.[20] 이에 대해서는 국내에 번역된 서적이 많지는 않으나, 앞의 오야마 세이이치의 번역서에서도 일정 부분 인정하는 것이 있으니 찾아볼 수 있고, 2011년 나온 『일본사의 변혁기를 본다』(지식산업사)에 실린 이근우의 글(「고대 일본의 율령제律令制 도입과 국가권력의 시각화視覺化」 )라는 글과 2014년 번역된 이치 히로키, 『아스카의 목간』(주류성)에서 소개하고 있다.[21] 사실 관모가 아니라 머리카락이다.[22] 그런데 담당 성우인 마에다 타케시는 라디오에서 카레가 죽을 정도로 싫다고 발언했다.[23] 한국에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위인에게 운동복을 입히거나 개그 캐릭터로 만드는 일이 거의 없으며, 개그 소재로 삼는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키는 편이다.[24] 調子[25] Wii 리모컨을 세로로 세운 뒤 양손으로 잡는 파지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