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연합
1. 개요
NL계열 정파그룹중 하나로 1991년 출범한 NL계열 운동단체 '전국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의 각 지역 연합 중 광주전남지부를 기원으로 한다.
NL계열 3대 계파로 자주 언급되는 경기동부연합, 울산연합, 인천연합과 다르게 현재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데, 독자 조직과 노선을 유지하지 않고 더불어민주당[1] , 정의당, 진보당 등으로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보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광주전남연합은 초기에는 NL계열 최대 정파였던 인천연합 간부들의 지도를 받았고, 이후 경기동부연합이 급성장함에 따라 경기동부연합의 지도를 받았다. 이로인해 잔존하는 광주전남연합 활동가들은 인천연합-정의당 혹은 경기동부연합-진보당으로 완전히 양분된 상태다.
민주노총 광주전남지부는 경기동부연합계열 광주전남연합이 쭉 장악하고 있는 상태다.
같은 호남이지만 원칙적으로 전북은 관할하지 않는다. 이쪽 NL 정파는 90년대 말 NLPDR에서 이탈하여 푸른공동체21에서 활동하다 뉴라이트(대한민국)와 민주당으로 흩어졌다[2]
2. 역사
광주전남지역은 광주민주화운동의 본고장 답게 8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이 활발하였다. 광주지역 NL운동은 남총련의 분위기처럼 친북적이고 전투적인 성향이 강해, NL중에서도 강경파(NL단결, 주사로 불림)로 불리웠다. 이들에 의해 자행된 이종권 구타치사 사건 등은 여전히 유명한 이야기다. NL혁신계열로 분류되는 경기동부, 울산연합이 민주노동당 창당에 앞장설때도 광주전남연합은 김대중계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고수하였다.
다른 지역연합들에 비해 늦게 민주노동당에 합류하였고, 통합진보당에서는 장원섭 사무총장을 배출하는 등 경기동부연합과 함께 당권파로 자리잡고,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권연대를 통해 광주서구을 오병윤, 순천곡성 김선동 의원이 당선되었다.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 때 본격적으로 노선이 갈라지게 되는데 오병윤, 김선동, 윤민호 등 주류 세력은 당 잔류를 선택했고[3] , 강은미, 윤소하 등을 비롯한 일부 온건 세력은 인천연합과 함께 탈당하여 진보정의당[4] 창당에 참여하였다.
3. 정파의 특징
수도권[5] 이나, 울산/경남지역[6] NL조직들은 지역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성장하였으나, 대규모 공업지대가 없고 농촌이 위주인 지역 특성상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전농은 자유무역협정 등 농업개방에 반대하는 활동을 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민족주의, 반미 성향이 강하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사 (1997~2019)를 참고해보면, 소위 말하는 '광주전남연합' 산하 NL 활동가들에 대한 자세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여담이지만 전남대는 NL 학생운동의 총본산으로 '반미구국의 철옹성'으로 불렸던 곳이다.